[이영승의 붓을 따라] 맛과 멋이 넘치는 인생, 그분
[이영승의 붓을 따라] 맛과 멋이 넘치는 인생, 그분
  • 이영승 한국 수필문학가협회 이사
  • 승인 2022.03.16 16: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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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막불음식 선능지미(人莫不飮食 鮮能知味)라는 말이 있다. 중용(中庸) 4장에 나오는 말인데 ‘음식은 누구나 먹지만 그 진정한 맛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는 뜻이다. 맛은 음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도 있다. 그 여덟 가지 맛이 바로 인생팔미(人生八味)다.

인생의 맛을 아는 사람을 우리는 ‘멋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인생의 멋은 지위나 학식이 높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남들이 느끼는 것이다. 내가 27년 전 과장으로 근무할 때 모셨던 상사 중에 참으로 인생을 멋있게 사는 분이 있었다. 상사에 대한 기억은 부정적인 경우가 많으나 그분은 세월이 흐를수록 좋은 기억만 생생하다. 내가 부장으로 승진해 헤어진 후 마음속으로만 그리움을 간직한 채 연락도 자주 드리지 못했다. 다행히 근년에 다시 소통하고 있는데 변함없이 다정하게 대해주니 속죄를 받는 기분이다.

지금 생각하니 그분이야말로 인생의 여덟 가지 맛을 다 아는 분이었다. 지면상 모두 나열할 수는 없어 몇 가지만 간략히 기억을 되살려본다. 무엇보다 남다른 인간미(人間味)가 있었다. 국내 최대 공기업의 요직 부서인 감사실 조사차장으로 있으면서도 정말 권위의식이 없고 겸손했다. 부서원들의 승진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쓰시어 어려운 업무를 감당하는 부하들의 사기를 북돋우어 줬으며, 결과가 좋아도 공치사를 하는 법이 없었다. 여름휴가 때는 부서원들을 모두 본인의 고향인 부산으로 초청해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명승지를 샅샅이 구경시켜 줬으며, 당연히 각자가 분담해야 할 경비를 당신께서 전부 감당했다. 각박한 직장생활에서 절대 갑의 위치인 상사로부터 예상치 않은 과분한 대접을 받았으니 그 감동이 얼마나 컸겠는가. 함께 웃고 즐겼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설렌다.

다음은 음식미(飮食味)를 알고 즐겼다. 부서 내 회식을 해도 아무 식당이나 가는 법이 없었다. 비싼 고급 집에 간다는 뜻이 아니라 본인이 가보고 좋았던 집을 기억했다가 데리고 갔다. 항상 색다른 분위기에 음식 맛도 좋아 모두 반겼는데 계산도 본인이 할 때가 많았다. 중용에서 말한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맛을 알고 즐겼던 것이다. 당시는 고스톱이 성행하던 때라 직원들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가끔 고스톱 판까지 미리 계획하셨다. 본인은 참여하지 않고 뒤에서 지켜보기만 했는데 이긴 사람이 진 사람에게서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미리 준비한 봉투에서 빼내가게 했다. 이게 어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가?

학습미(學習味)는 더욱 철저하고 열정이 넘쳤다. 어느 하루도 적당히 보내지 않고 자신의 발전과 성취를 위해 늘 배움에 매진했다. 50세가 넘은 나이에 바쁜 직장생활과 병행하여 박사학위까지 받았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회사 강당에서 출판기념회를 성대하게 개최했는데 축하금을 일체 사절했을 뿐만 아니라 책도 무료로 배부했다. 모두들 축하 봉투를 준비해 갔다가 맛있는 음식만 대접받고 돌아왔으니 감동받지 않은 사람 누가 있었으랴. 결국 박사학위가 바탕이 되어 퇴직 후 대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부산과 서울을 오르내리며 수많은 유명 인사들과 교류하는 등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신다.

지난 세월 뒤돌아보니 당시만 해도 직장의 상사 역할하기가 쉽지 않은 시대였다. 부하로부터 존경과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리더십도 있어야하지만 업무적인 실력도 아랫사람보다 뒤지지 않아야 했다. 젊은 세대는 상사에 대한 불만이 있으면 거침없이 표출했으며, 대부분의 상사들은 부하 위에 군림하며 대접만 받으려고 했지 베풀 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런 시대에 솔선수범으로 모든 부하들의 머리를 스스로 숙여지게 했으니 실로 덕장 중 덕장이셨다. 세상에 태어날 때 부모를 잘 만나는 것은 큰 복이지만 직장생활을 하면서 훌륭한 상사를 만나는 것도 작은 복은 아니다. 40년 직장생활 중에서 그분과 함께했던 1년은 참으로 내 인생에 있어 잊을 수 없는 추억이요 그리움이다.

내 나이도 어언 칠순이 넘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분을 잊지 못하는 이유가 진정 무엇일까? 아마도 ‘세상을 자기 뜻대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모습’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맛과 멋이 넘치는 인생, 그분은 오늘도 내 인생의 지표가 되고 있다.

필자소개
월간 수필문학으로 등단(2014)
한국 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수필문학 추천작가회 이사
전 한국전력공사 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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