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승의 붓을 따라] 이름과 호
[이영승의 붓을 따라] 이름과 호
  • 이영승 한국 수필문학가협회 이사
  • 승인 2022.04.04 16: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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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이는 ‘이름을 남기는 것이 곧 사람이 사는 목적이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다. 사람에게 이름은 이토록 중요하다. 우리 조상들의 이름 체계를 볼 것 같으면 어릴 때 부르는 이름은 아명(兒名)이고, 성인이 되어 관례(冠禮)를 치르고 나서 부르는 이름은 자(字)이며, 사회에 진출한 후 허물없이 부르는 이름은 호(號)이다.

이순신 4형제의 이름은 희신(羲臣), 요신(堯臣), 순신(舜臣), 우신(禹臣)이다. 이들은 모두 고대 중국 전설상의 제왕과 관련이 있다. 희(羲)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삼황(三皇) 중 천황(天皇)인 복희씨(伏羲氏), 요(堯)는 오제(五帝) 중 네 번째인 요임금, 순(舜)은 마지막 순임금, 우(禹)는 하나라의 건국시조 우임금에서 인용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기대가 얼마나 컸으면 이토록 거대한 이름을 지었을까? 그러니 이순신 같은 영웅으로 키워내지 않았을까 싶다. 더구나 당시는 주자학을 하늘 같이 받들던 때라 잘못하면 비난을 넘어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이를 피하기 위해 그 임금들의 신하라는 의미로 신(臣)자를 넣어 교모하게 피했으니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조선 시대까지도 우리나라의 여자는 이름이 없었으며 성에 씨(氏)자를 붙여 호칭했다. 신사임당(申師任堂)은 이름이 아니라 호(號)인데 신(申)은 성이고 당(堂)은 여자의 호에 붙는 수식어이며 임(任)은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에서 인용했다. 사(師)는 태임을 스승으로 모신다(롤 모델로 삼는다)는 의미로 삽입했다. 태임 또한 조선시대에는 함부로 인용할 수 없는 이름이라 위험한 비판을 피하기 위해 붙인 글자다. 이 거창한 호를 본인이 직접 지었다고 하니 사임당이야말로 율곡을 키워낸 세기의 여걸이며, 우리나라 여자 중 유일하게 돈에 초상화가 새겨질 만도 하다.

한자문화권에 속한 우리 조상들은 글깨나 읽고 행세를 하면 누구나 호를 가졌으며, 여러 개 호를 가진 사람도 적지 않았다. 정약용은 다산(茶山), 여유당(與猶堂), 사암(俟菴) 등 많은 호를 가졌으며, 김정희는 현란(玄籣), 추사(秋史), 완당(阮堂) 등 200개나 되는 호가 있었다고 한다. 아무리 호는 본인이 선택할 수 있고 삶의 전환기마다 지었다고 하지만 하나의 이름도 알리기 쉽지 않은 지금 시대의 사고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내가 수필 작가로 등단하고 보니 선배 문인들은 거의 호가 있었다. 나도 호를 가질 것인가 문제로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무명작가가 호부터 갖는 다는 것이 건방진 것 같고 성향에도 맞지 않아 당분간 호를 갖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느 날 한문학을 전공한 선배 교수님이 “호가 있느냐?”고 물었다. 갑작스런 물음에 당황해 “저 같은 서생이 무슨 호라니요?” 하고 웃어 넘겼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하니 호가 없는 것을 알 텐데 묻는 이유가 무엇일까 싶었다. 호를 지어주겠다는 의미 같기도 하고 호를 지어달라고 부탁하라는 의미 같기도 했다. 그런 뜻이라면 당연히 “제 호를 좀 지어주세요.” 하고 부탁하는 것이 도리다. 하지만 스스로 호를 갖겠다는 결정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호의에 대한 예의는 아니지만 그 문제는 당분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첫 수필집 출간을 앞두고 다른 작가들의 수필집을 보니 대부분 호가 있었다. 다시 호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선배 작가들이나 옛 선비들도 호를 갖기까지는 나와 같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호를 갖지 않더라도 일단 호를 한번 지어보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한자를 이리저리 조합해 보고, 옛 유명 인사들의 호를 수집해 분석했다. 글자의 뜻보다 나와 조화가 되는지에 중점을 두고 여러 개를 지었는데 첫 작명이 ‘안동촌놈’이라는 의미인 안촌(安村)이었다. 소박하고 내 격에 어울리는 것 같으나 한편 호를 너무 희화화한 것 같아 일단 예비로 넘겼다. 두 번째 작명이 월곡(月谷)이다. 내가 어릴 때 성장한 ‘안동군 월곡면’의 지명에서 인용했는데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계곡’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니 온화한 내 성품과 조화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월곡면(月谷面)은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어 지금은 없어진 지명이다. 부르기 편하고 의미도 좋으나 없어진 지명이라 마음에 거슬렸다.

호가 있느냐고 물었던 선배님 생각이 불현듯 났다. 안촌(安村)이라는 호가 어떤지 검증받아보고 싶어 내 의견과 함께 메일을 보냈더니 전적으로 찬성한다면서 참고로 ‘안촌(晏村)’도 한번 고려해보라는 회신이 왔다. 안(晏)자는 日과 安을 합한 형성자(形聲字)인데 安자와 한글 발음은 같으면서도 安보다 좋은 뜻이 함축된 글자로 본뜻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나 부드럽다, 신선하다, 고요하다는 의미도 있다고 해설을 첨부하셨다.

호를 가질 것인지를 결론 내지 못해 결국 호 없이 수필집을 발간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잘한 것 같다. 남들이 이름을 대신해 상시적으로 부르지 않는 호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생각에는 아직도 변함이 없다. 현재의 내 이름은 부모님이 고심해 지었을 것이며, 70년 넘게 나와 애환을 함께했다. 앞으로 호를 갖게 될지는 모르지만 이름 석 자라도 욕되지 않게 관리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볍다.

필자소개
월간 수필문학으로 등단(2014)
한국 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수필문학 추천작가회 이사
전 한국전력공사 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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