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74] 키플링의 인디아
[유주열의 동북아談說-74] 키플링의 인디아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2.04.05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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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 근무 중 서남아과 소속이었던 적이 있다. 인도 파키스탄 등 인도아대륙의 나라들을 담당하는 지역과이다. 인도에서 방한하는 인사를 위해 통역 겸 안내하는 의전관 역할도 했다. 당시 발전하는 한국을 보여주기 위한 울산·포항 시찰에 수행했다. 의전차량으로 5시간 정도 걸린 여정과 현지 행사가 끝나면 다시 귀경길에 오른다. 자연스럽게 인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인도 근무를 한 적이 없는 나로서는 좋은 공부가 됐다.

인도분들은 만나거나 헤어질 때 항상 두 손을 모아 “나마스떼” 하고 인사를 했다. 상대를 존경하는 말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나무아미타불” 하는 “나무(南無)”가 나마스떼의 음역이 아닌가 생각됐다. 우리가 부르는 인도(印度)는 7세기 당나라의 삼장법사 현장이 처음으로 기록했다는데 인도의 영어 국명 ‘인디아’와 뿌리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현장법사는 신(神) 중의 신인 ‘인드라’를 숭배하는 나라라 하여 ‘인도’라는 이름을 남겼다.

인디아는 인더스강에서 유래된다. 히말라야산맥에서 발원해 아라비아해로 흐르는 인더스강 유역의 일부를 고대 페르시아가 지배하고 있었다.

현지어(산스크리트어)로는 큰 강이라는 의미의 신드(Sindhu)라고 불렀는데 페르시아인들이 힌두(Hindu)로 알아듣고 힌두라 부르면서 고대 그리스에 전달됐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은 페르시아를 정복하면서 페르시아의 영토인 힌두도 지배하게 됐다. 로마에 와서는 힌두가 다시 인두(Indus)로 변형되고 지금의 영어에서 ‘인디아’라고 한다. 인도분들은 자신의 나라를 ‘바라트 공화국’(Bharat Ganarajya)이라고 부른다. 바라트는 지금의 펀자브 지역에 거주하던 고대 인도 아리안 민족의 하나라고 한다.

인도분을 만나면서 <정글북>의 저자 러디어드 키플링(1865-1936)에 대해서 알게 됐다. 키플링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로 영국인으로서 최초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는데, 그의 작품의 소재가 주로 인도를 무대로 하고 있다.

러디어드 키플링은 영국의 동인도회사 지배하의 봄베이(지금 뭄바이)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록크우드는 건축 조각가로 봄베이 예술대학교원이었고 어머니 앨리스는 19세기 영국에서 유명한 맥도날드 네 자매의 큰 언니로, 주변을 즐겁게 해주는 이야기꾼으로 알려져 있다. 맥도날드 목사는 4남 7녀를 두었는데 그중 네 자매가 개성이 강했고 막내 루이사는 보수 정권에서 3번이나 총리를 지낸 스탠리 볼드윈의 어머니였다.

어릴 때 러디어드는 인도인 ‘내니’(도우미 아줌마)가 들려주는 인도 동화를 듣고 잠들었다고 한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인도 전래동화는 어머니 유전자를 이어받은 어린 러디어드에게 상상력과 함께 이야기보따리를 만들어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러디어드가 5세 때 여동생과 함께 정식 교육을 받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가 지인의 가정에 위탁 양육됐다. 러디어드가 성장하면서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하고자 했으나 학비가 너무 비싸 아버지 수입으로 감당 못 해 진학을 포기하고 인도로 돌아오게 된다.

인도 북서부 펀자브지방의 라호르에서 박물관장으로 근무하게 된 아버지 주선으로 라호르 지방신문 편집보조로 일자리를 찾았다. 17세가 된 러디어드 키플링은 인도에서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게 됐다. 봄베이를 떠난 지 12년 만의 귀환이었다. 어릴 때 잘 몰랐던 인도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인도는 본래 거대한 섬이었는데 지각변동으로 아시아 대륙에 부딪히면서 인도 북부에 히말라야(萬年雪山)라는 해발 8,000m의 대형산맥이 형성됐다고 한다. 다행히 북서쪽의 인더스강 유역이 열려 교류의 통로가 됐다. 기원전 2500년경 인더스강 문명이 발달했고 그보다 1000년 후 아리아인들이 이란 고원을 거쳐 인도대륙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원주민 드라비다족을 밀어내고 브라만교(힌두교)를 탄생시켜 산스크리트(梵語)를 통용시켰다고 한다.

북인도에는 수많은 브라만교 군소왕국이 난립했는데 기원전 6세기 그 군소국의 어느 왕자가 깨달음을 얻어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탄생했다. 그 후 기원전 3세기 북인도는 알렉산더대왕에 의해 정복된 인도땅을 수복한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통치 아래 있었다. 그의 손자인 아소카 대왕은 불교를 내세워 전 인도를 통일하고 불교선교사를 이집트 및 시리아 그리고 멀리 그리스까지 파견했다고 한다.

아라비아반도에서 일어나 페르시아를 지배한 이슬람교는 7세기 북부 인도를 침략, 세력을 확장해 소규모의 무슬림(술탄) 왕국을 세웠다. 13세기 들어와서는 몽골고원에서 발원한 징기스칸 군대가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고 징기스칸 사후 그의 아들들에 의해 여러 한국(汗国)으로 나누어 지배됐다. 징기스칸의 둘째 아들 차가타이는 카스피해를 중심으로 하는 차가타이한국을 건설했다. 14세기 차가타이한국의 장군 티무르는 정변을 일으켜 자신의 제국(티무르제국)을 세웠고 16세기 초 티무르제국의 바부르는 인다스강을 건너 북인도로 들어와 이슬람국과 힌두교국을 정복, 무굴제국을 세웠다. 무굴은 몽골의 현지발음이다.

15세기 유럽인은 인도(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포함)를 향료 등 값비싼 물자가 나오는 환상적인 부(富)의 원천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로가 이슬람 세계의 지배하에 놓이자 대서양을 통한 인도 항로를 개척했다. 1595년 네덜란드가 동인도회사를 건립 인도 항로에 진출 향료무역을 본격적으로 개시하자 이에 자극받은 영국의 상인들도 1600년 이와 유사한 회사를 세워 경쟁했다. 동남아시아 향료무역에서 네덜란드와 격렬한 투쟁에서 패배한 영국은 인도대륙으로 후퇴 봄베이와 캘카타(지금의 콜카타)를 중심으로 인도의 면직물 수입에 주력했다.

18세기 초 무굴제국이 쇠약해질 때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막강한 해군력으로 인도 전역을 지배했다. 1858년 용병(세포이)의 반란을 계기로 동인도회사는 인도 지배를 영국 정부에 넘겨주자 영국은 1877년 무굴제국을 멸망시키고 인도제국을 건설 빅토리아여왕을 초대 황제로 즉위시켰다.

키플링이 태어났을 때는 인도가 동인도회사의 지배를 받았으나 다시 인도에 돌아왔을 때는 인도제국 시대였다. 키플링은 봄베이에서 기차를 타고 3일 걸려 라호르로 갔다. 부모가 있는 라호르에서 지방신문에 편집보조를 하면서 기사를 쓰고 자신의 단편소설을 게재했다. 인도에서 모험을 즐기는 영국인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왕이 되려고 한 사람’(The man who would be king)이라는 소설도 이 무렵 이야기였다.

지금은 파키스탄이 된 라호르는 펀자브의 주도이다. 펀자브는 5개강(五河)이라는 의미로 그곳에서는 인더스강의 본류와 지류 4개가 손가락처럼 흐른다. 그중에는 젤롬강에는 인도 원정에 나선 알렉산더대왕의 애마, 부케팔로스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무굴제국 시대 라호르는 델리 아그라와 함께 3대 중요도시로 황제의 무덤 및 별장이 있다. 키플링도 라호르의 문화유산에 흠뻑 빠졌다. 특히 17세기 중반 5대 황제 샤 자한이 세운 나우라카 궁(Naulakha pavilion)을 좋아해 후에 자신의 집의 이름을 나우라카로 짓기도 했다. 아그라에 있는 유명한 타지마할도 샤 자한이 사랑했던 부인의 무덤으로 건축한 것이다.

키플링이 라호르에 근무 시 영국과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두고 패권쟁탈전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을 하고 있었다. 라호르 거리에서 부랑자 생활을 하고 있던 ‘킴블 오하라’라는 소년을 중심으로 그레이트 게임을 파헤친 <킴(Kim)>이라는 소설도 이 무렵 구상한 것으로 보인다.

키플링은 인도 중부의 대도시 알라하바드시에 소재하는 파이오니아 신문사로 직장을 옮겨 더 많은 시와 소설을 발표한다. 그에 대한 소문은 런던의 문단에도 알려졌다. 키플링은 런던에 가서 본격적인 문학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 파이오니아 신문사에 자신의 작품 판권을 팔아 그 돈으로 세계 일주와 런던에서 학비에 충당키로 했다.

키플링은 버마의 랑군(지금의 미얀마 양곤)에서 출발하는 당시 유행했던 토마스 쿡의 세계 일주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1889년 3월, 24세의 청년 키플링을 태운 여객선은 랑군을 떠나 싱가포르와 홍콩을 거쳐 일본의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키플링은 메이지유신 후 서구화로 발전하는 일본의 모습을 목격하고 다시 태평양을 횡단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키플링은 여행기를 파이오니아 신문사에 송고하여 독자들과 공유했다. 그는 미국의 서부와 동부의 주요 도시를 둘러보고 뉴욕에서는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을 만난 후 그해 10월 영국의 리버풀에 도착했다.

1892년 키플링은 미국 버몬트주 출신의 친우 월코트의 여동생과 결혼 신혼여행으로 처가가 있는 버몬트로 건너갔다. 미국 동부 뉴잉글랜드 지역의 버몬트주는 캐나다의 퀘벡주와 접하고 동쪽으로 뉴햄프셔, 남쪽으로는 뉴욕주와도 접한다. 키플링은 겨울이 길고 특히 눈이 많이 내리는 이곳에서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정글북>을 완성했다. 인도 남부의 열대 정글에서 일어난 일들을 눈에 파묻힌 버몬트의 작은 오두막집에서 저술한 셈이다.

인세로 경제적 여유를 가진 키플링 부부는 태어난 자녀를 위해 집을 넓혀야 하기에 코네티컷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2층 패미리하우스를 짓는다. 집의 이름을 라호르 시절 즐겨 찾았던 무굴제국의 황제 샤 자한의 여름별장 나우라카라고 지었다. 미국 작가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펄벅(1892-1973)이 만년에 여생을 보낸 버몬트 댄비가 나우라카에서 멀지 않아 키플링의 인도와 자신의 중국과 관계에서 동병상련을 느낀 펄벅이 가끔 찾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나우라카는 미국에 남은 유일한 키플링의 유산으로 지금은 키플링의 기념관으로 명소가 됐다. 1895년 영국은 남미의 영령 기아나(지금의 가이아나)와 인접한 베네수엘라와 국경문제로 대립하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몬로주의를 들어 영국을 견제하면서 미국 내 영국인에 대한 시선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불안을 느낀 키플링은 5년간(1892-1896)의 미국 생활을 접고 가족과 함께 버몬트를 떠나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는 1901년 <킴>을 출간하고 1907년에는 영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그리고 역대 최연소(41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키플링은 대영제국의 대표작가로 작품활동을 계속하다가 1936년 십이지 궤양으로 사망한다. 그가 죽은 지 이틀 후 당시 국왕 조지 5세도 사망하여 두 사람 관계를 잘 아는 사람들은 여행을 좋아하는 키플링이 국왕을 안내하여 저승길 여행을 같이 떠났다고 이야기했다.

키플링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달라진다. E.M 포스터(1879-1970)는 자유주의 적이며 인본주의적 작품인 <인도로 가는 길(1924)>을 저술하여 제국주의적이며 백인우월적인 키플링 작품과 대비시켰고 갠지스강 유역(벵골지방)의 아편 재배지 관리주임의 아들로 태어나 <동물농장(1945)>을 저술한 조지오웰(1903-1950)은 키플링을 제국주의 신봉자이며 전도사로 비판했다.

인도의 식민지지배를 정당화한 키플링의 작품은 인도인 시각에서 보면 불편한 내용임에 틀림없으나 19세기 미개한 국가를 계몽시키는 것이 ‘백인의 책무’로 생각한 빅토리아 시대의 상식을 그 후 반식민지 사상의 잣대로만 평가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인도에 태어난 키플링은 인도인들의 어려운 삶을 가까이에서 관찰해 인도를 더 깊이 이해, ‘착한 영국인’이 되려고 했던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정글북(1894)>의 주인공 소년 모글리와 <킴(1901)>의 주인공 소년 킴의 대립 구도에서 정글(인도)과 문명(영국) 그리고 동양(인도)과 서양(영국) 사이의 경계인으로서, 문화적 혼혈아로서 키플링 자신의 정체성 혼란과 고민이 묻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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