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만주⑱] 김도선 집터: 나는 독립군과 의형제를 맺은 농민이었습니다
[아! 만주⑱] 김도선 집터: 나는 독립군과 의형제를 맺은 농민이었습니다
  • 안상경(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 승인 2022.04.07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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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삼성으로 불리는 중국 만주에는 우리 독립운동 사적지가 곳곳에 있다. 의병운동,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독립지사들의 고민과 피가 어린 곳들이 도처에 있다. 이들 사적지를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요녕성 선양시 조선혁명군 후손들의 항일유적지 답사1(2019년, 요녕성 무순시 신빈현 왕청문 양세봉장군기념비)
요녕성 선양시 조선혁명군 후손들의 항일유적지 답사1(2019년, 요녕성 무순시 신빈현 왕청문 양세봉장군기념비)

중국 요녕성 선양시에는 1930년대 서간도를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후손들이 살아가고 있다. 선열들의 손자·손녀로, 대부분 70대를 넘긴 노년들이다. 그럼에도 작은 커뮤니티를 결성하여 주변의 항일유적지를 정기적으로 답사하고 있다. 나는 이들로부터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독립군의 행적과 그 가족의 삶에 대해 듣곤 한다.

어느 날, 조선혁명군을 이끌며 연전연승의 신화를 창조한 양세봉의 외손녀 김춘련이 “나는 선생님만 뵈면 자꾸 죄송한 마음이 들어요”라며 누군가에 말을 건넨다. 알고 보니 조선혁명군의 지하통신원으로 양세봉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김도선의 손자 김용걸이었다. 나는 김춘련의 그 말이 잊히지 않는다. 왜 10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이런 아픔이 대물림될까? 언제라야 이런 아픔이 다 씻길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한편, 혹여나 아픈 역사가 반복된다면 나는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묻는다.

총을 메지는 않았지만 일가족 모두 독립군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

김도선(金道善, 1883~1934)은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부지런하여 다른 일꾼들에 비해 두 몫의 일을 하곤 했다. 그러나 가난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래서 1917년 중국 요녕성 흥경현(興京縣) 홍묘자(紅廟子) 오도구(五道溝)로 이주했다. 이곳에 가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땅은 드넓고 비옥했다. 그러나 무상기(無霜期)가 짧아 농사가 여의치 않았다.

요녕성 선양시 조선혁명군 후손들의 항일유적지 답사2(2020년, 길림성 도문시 토성리 봉오골반일전적지)
요녕성 선양시 조선혁명군 후손들의 항일유적지 답사2(2020년, 길림성 도문시 토성리 봉오골반일전적지)

다시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1931년 신빈현(新賓縣) 향수하자(响水河子)에 정착했다. 이곳에는 고구려 때 축조한 고려산성(高麗山城, 공식 명칭은 黑溝山城)이 있었다. 산성 인근의 울창한 숲속에 오두막을 짓고 화전을 일궜다. 외부와 거의 단절한 채 농사만 지었건만 수확 때가 되면 일제의 수탈이 따랐다. 나라 잃은 설움과 일제에 대한 반감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럴 즈음 조선혁명군의 총사령관 양세봉이 김도선의 집을 찾아 왔다. 첫 만남이었지만 허물없이 속마음을 터놓았다.

양세봉은 김도선에게 그의 집을 조선혁명군의 비밀접선 장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김도선의 집이 마을과 한참 떨어진 산비탈 외딴 곳에 위치하고 있어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그 지점이 서쪽으로는 환인현(桓仁縣)을 너머 관전현(寬甸縣)으로, 서북쪽으로는 신빈현(新賓縣)으로, 동북쪽으로는 유하현(柳河縣)으로 이어지는 사통팔달의 경계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김도선은 흔쾌히 허락했다. 총을 메고 직접 싸울 수 있는 형편이 아닐 뿐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독립군과 다를 바 없었다. 이렇게 그날,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었다.

김도선은 장남 김효길을 조선혁명군 청년단에 가입시켰다. 청년단은 독립군 지휘관들로부터 항일의지를 다지는 역사교육과 군사교육을 받았다. 독립군으로 활동하기 위한 전초 단계라고 할 수 있었다. 장남 김효길과 더불어 장녀 김금산, 차녀 김효순도 조선혁명군의 지하통신원으로 활동케 했다. 지하통신원은 독립군의 각종 문서를 비밀리에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는데,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주로 ‘밤통신(야밤에 문서를 전달하는 행위)’을 했다. 또한 자신은 초근목피로 연명할지언정, 독립군들이 찾아오면 옥수수죽을 끓여 된장에 풋고추나 마늘을 대접했다. 푸성귀였지만 그 맛이 오죽했으랴?

김도선의 집터(현 요녕성 신빈현 홍묘자향 사도구촌 고려산성 인근)
김도선의 집터(현 요녕성 신빈현 홍묘자향 사도구촌 고려산성 인근)

죽어서도 살아서도 사령인데 내가 어찌 그 목을 자를 수 있는가?

1934년 9월 20일, 밀정에 의해 양세봉이 순국했다. 군신(軍神)으로 숭앙받던 그로서는 허망한 죽음이었다. 조선혁명군 간부 50여 명이 양세봉의 시신을 고려산성 인근에 안장하고, 김도선의 집에서 며칠간 추모제를 지냈다. 그로부터 1주일 후 1934년 9월 26일, 이튿날이 추석이라 촌민들이 한창 들떠 있었다. 그때 통화시의 일본영사관이 군경을 이끌고 향수하자로 들이닥쳤다. 양세봉이 순국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부관참시(剖棺斬屍)라도 하여 보복할 작정이었다.

일제는 향수하자의 촌민 70여 명을 강변으로 몰아넣었다. 촌장 로계봉(卢桂奉)에게 총을 겨누며 양세봉의 시신을 어디에 묻었는지, 촌민들 중에서 누가 양세봉과 접선했는지 고하라며, 그렇지 않으면 촌민들을 모조리 총살하겠다고 협박했다. 촌장은 양세봉의 시신을 안장한 곳은 물론 김도선의 그간 행적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곧바로 양세봉의 시신을 땅에서 끄집어냈다. 그리고 시신을 김도선의 집으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김도선을 대들보에 묶고 고문했다.

일제는 김도선에게 조선혁명군의 정보를 얻고자 했다. 온 몸에 몽둥이질을 해댔다. 콧속으로는 고춧가루를 탄 뜨거운 물을 뿌려댔다. 김도선은 “나는 모른다”라며 완강히 버텼다. 그러자 일제가 김도선에게 작두를 건넸다. 양세봉의 목을 자르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했다. 김도선은 “죽어서도 사령이고 살아서도 사령인데 내가 어찌 그 목을 자를 수 있는가?”라며 항변했다. 그러자 일제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도선을 향해 총을 쏘았다. 촌장 로계봉에게도 총을 쏘았다.

김효순과 전정혁의 만남(1991년 10월 14일, 김도선의 조선혁명군 지원 및 사망 경위 제보)
김효순과 전정혁의 만남(1991년 10월 14일, 김도선의 조선혁명군 지원 및 사망 경위 제보)

김도선은 자녀들에게 “원수 놈들을 기억하라!”라는 말을 남기고 마지막 숨을 골랐다. 일제는 이렇게 양세봉의 머리를 확보했다. 그리고 통화현으로 가져가 대로 한복판에 효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는 1940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을 이끌다가 전사한 양정우 사령관의 시신을 땅에서 끄집어내어 그의 배를 가른 행위로 이어졌다.

대를 이은 고통과 죽음, 그러나 누가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가?

1990년 신빈문화관에 근무하며 조선족의 항일민요를 조사하던 전정혁이 향수하자에 들렀다. 그리고 김효순을 만났다. 김효순은 전정혁에게 1934년 당시의 상황을 제보했다. 이튿날에는 그와 함께 고려산성 인근의 옛 집터를 50여 년 만에 방문했다. 집터는 황무지로 변해 있었다. 김효순은 그만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아버지를 부르며 대성통곡했다. 이 일을 계기로 김도선의 행적이 주변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김효순의 옛 집터 방문1(1991년 10월 15일, 소달구지를 타고 고려산성으로 이동 중)
김효순의 옛 집터 방문1(1991년 10월 15일, 소달구지를 타고 고려산성으로 이동 중)

2018년 6월 6일, 현충일을 기해 중국 선양시의 한중교류문화원이 ‘한민족의 독립정신 함양과 새로운 보훈문화 정착’을 목적으로 “중국 동북삼성 항일독립운동가 후손 초청 좌담회”를 개최했다. 그때 김도선의 손자 김용걸이 참석하여 가족사를 술회했다. 그 어떤 소설이나 영화에서도 그려내지 못할 비극이었다. 심지어 과거를 떠올리는 자체가 고통이라고 말하고 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아버지는 19살 젊은 나이였어요. 기실 저희 집안은 1930년대에 거의 다 조선혁명군 지하공작원 사람들이었어요. 제 아버지가 조선혁명군 청년대에서 활동을 했고요, 고모들은 조선혁명군 소년 단위였어요. 아버지랑 고모들이 그때 당시에 조선혁명군의 정보를 이곳저곳으로 전달했습니다. 추운 겨울날에도, 그때는 두루마기 입고 그랬잖아요? 거기에다가 종이쪽지를 딱 해가지고 추운 날에도 한 20리, 30리를 걸어서 통신하고 그랬어요. 정 추우면 술 한 모금 마시기도 하고, 그러면 좀 덜 추웠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 일본 경찰들이 ‘김도선의 아들이 김효길이다’ 하고 아버지를 잡아갔어요. 잡아가서 향수하자 경찰서에서 나무통에 못을 박아놓고 그 속에 아버지를 집어넣고 막 돌렸거든요. 몸이 전부 피투성이가 된 거예요. ‘너희 아버지가 양세봉을 도왔기 때문에 너도 이렇게 당해야 한다’고 그랬던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가 비가 오면 온몸이 아프다는 거예요. 원래 술도 못하셨는데, 너무 괴로우니까 정신도 그렇고 몸도 그렇고. 술을 마시면 좀 고통을 잊어버리니까, 술로 많이 세월을 이겨왔고. 자세하게 말하면 좋겠지만 저희들한테는 그런 사실을 다시 떠올리는 게 너무 괴로워요.

중국 동북삼성 항일독립운동가 후손 초청 좌담회(2018년 6월 6일, 한중교류문화원 주관)
중국 동북삼성 항일독립운동가 후손 초청 좌담회(2018년 6월 6일, 한중교류문화원 주관)

국가보훈처에서는 1995년에 양세봉을 위해 순국한 인물을 김추상(金秋霜)으로 추정하고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김추상과 김도선은 전혀 별개의 인물이다. 김도선의 후손들은 이를 조정하고자 애쓰고 있지만, 관련 자료가 불분명한 탓에 그저 답보 상태에 놓여 있다. 안타깝다는 말밖에 당장 다른 도리가 없다.

위대한 지도자가 있다면 그를 따른 무명의 용사들도 있다. 그를 지원한 무명의 일반인들도 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위대한 지도자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부대꼈던 숱한 무명씨(無名氏)들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후예로서 최소한의 도리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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