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만주⑳] 훈춘 북일학교 터: 위국헌신의 교육 이념으로 독립군을 양성하다
[아! 만주⑳] 훈춘 북일학교 터: 위국헌신의 교육 이념으로 독립군을 양성하다
  • 안상경(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 승인 2022.04.28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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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삼성으로 불리는 중국 만주에는 우리 독립운동 사적지가 곳곳에 있다. 의병운동,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독립지사들의 고민과 피가 어린 곳들이 도처에 있다. 이들 사적지를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나자구 동림무관학교 터 입구(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 나자구진 태평구촌 진입로)
나자구 동림무관학교 터 입구(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 나자구진 태평구촌 진입로)

2019년 10월의 일이다. 국경절 연휴를 맞아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를 방문했다. 중국, 러시아, 북한이 맞닿아 있는 방천풍경구(防川风景区)를 비롯하여 동북아 경제의 황금 통로로서 훈춘통상구(珲春口岸), 밀강향(密江鄕)의 조선족 퉁소마을, 러시아 쇼핑거리 등 이색적인 볼거리가 넘쳤다. 그러나 훈춘시를 방문한 진짜 이유는 대황구촌(大荒溝村)의 항일유적지로서 북일학교 터, 김남극 묘소, 13열사 묘역, 유격대 포대 진지 등을 둘러보기 위함이었다.

바이두(Baidu)로 확인하니, 훈춘시에서 서북 방향으로 50km 지점에 대황구촌이 위치하고 있었다. 시내를 거쳐 영안진(英安鎭)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가파른 고갯길이 나타났다. 표지판을 보니 황구령(荒溝嶺)이라. 작은 여울이 저 높은 곳에서 구불구불 산을 타고 내려오는데 그야말로 장관이다. 마침 동북지역에 단풍이 드는 철이라 산과 계곡, 그리고 하늘이 만든 최고의 풍광에 절로 행복했다. 차를 세우고 잠시 여울에 발을 담갔다. 조잘조잘 흐르는 물소리, 그 속에 비치는 산속 세상은 잔잔하고 아름답기만 하다.

대황구촌에 도착했다. 어찌 이런 산속에, 어찌 이런 분지가 있을까? 무성한 수풀에 숨어 속세와 인연을 차단한, 흡사 다른 차원의 세상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100여 년 전에 이곳의 한인들이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비밀리에 양성했다. 항일유격의 근거지를 마련하여 북간도의 무장투쟁에 원동력을 제공했다. 이러한 사실에 기반을 두고, 오늘날에는 대황구촌이 홍색교육(紅色敎育) 기지로 변모하고 있다. 유적지의 보존과 활용도 잘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경신참변 때 화를 면치 못한 북일학교(北一學校)의 옛터에서 기초석이라도 찾아보려 했으나,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지라, 찾을 수가 없었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 영안진 대황구촌 입구(황구령 끝자락)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 영안진 대황구촌 입구(황구령 끝자락)

북간도와 연해주를 잇는 교통의 요지에 무관학교를 설립

만주지역의 독립전쟁은 하루아침에 기반을 다진 것이 아니었다.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북간도에서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를 설립, 운영했다.

동림무관학교는 1914년에 이동휘(李東輝)가 주도하여 설립했다. 이동휘는 원래 연해주에서 안공근, 최재형, 홍범도 등과 함께 무관학교 설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러시아와 일본이 동맹국이 되자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더욱이 러시아는 일제의 요구를 받아들여 한인 지도자들을 체포하거나 추방했다. 이동휘는 차선책으로 러시아 국경지역의 나자구(羅子溝), 즉 연해주와 북간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를 독립운동의 새로운 거점으로 삼았다.

동림무관학교를 설립하자 북간도는 물론 연해주에서도 학생들이 찾아들었다. 나자구 유지들이 운영하던 태흥서숙(泰興書塾)의 학생들도 편입했다. 무관학교로서 교훈(校訓)은 안중근 의사가 실현한 “위국헌신(爲國獻身)”이었다. 하지만 설립 초기에는 중국 관계기관이 기증한 장총 10자루와 운남성 사관학교인 강무당에서 입수한 몇 권의 군사 교재가 전부였다.

북일학교 터(대황구촌에서 서쪽으로 약 1km 떨어진 지점에 위치)
북일학교 터(대황구촌에서 서쪽으로 약 1km 떨어진 지점에 위치)

이동휘는 동분서주했다. 결과 군대식 사관학교로서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학생들도 점차 늘어 200여 명 규모로 발전했다. 그런데 1915년에 중국 동북의 지방정부가 획일간민교육변법(劃一民敎育辨法)을 반포했다. 북간도에서 확산하고 있는 한인들의 민족학교를 중국의 공교육 체제로 끌어들여 통제, 관리하려는 취지였다. 학교 설립부터 교과과정 편성에 이르기까지, 중국 당국으로부터 제반 운영에 관한 인허가를 받아야 했다. 중국어를 의무적으로 교육해야 함은 물론 이외의 한글 교과서는 내용을 검수받아야 했다.

동림무관학교는 타개책으로 중국인 교장을 기용했다. 그리고 교명을 ‘왕청현 제1고등초등학교’로 변경했다. 이로써 학교를 지속해서 운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즈음 일제의 지령을 받은 밀정이 동림무관학교의 실정을 염탐하다 교원과 학생들에게 발각되어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빌미로 일제는 동림무관학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결국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1916년에 중국 당국으로부터 학교 해산 명령을 받았다. 설립한 지 2년 만의 일이었다.

대황구 거친 땅에서 위국헌신(爲國獻身)을 기치로 독립군 양성

이동휘는 새로운 터전을 물색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곳, 중국의 간섭을 피할 수 있는 곳, 그런 곳을 찾아야 했다. 얼마 후, 이 조건을 충족하는 곳으로 훈춘현(琿春縣) 대황구(大荒溝)를 선택했다. 당시 훈춘현은 일제의 영향이 미치지 않았을 뿐더러, 대황구는 접근성이 떨어져 중국 당국의 영향도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황구라는 지명이 ‘극히 거친 도랑’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졌으니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대황구촌의 바이두 위성 사진
대황구촌의 바이두 위성 사진

그러나 대황구의 안자락은 너른 분지로서 비옥했다. 사방이 무성한 산림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북으로는 동녕현, 동으로는 왕청현, 동북으로는 연해주로 이어졌다. 이곳으로 1890년대부터 한인들이 이주했다. 그리고 일종의 자치구를 형성했다. 1909년에는 소학교 과정으로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설립했다. 교장 김남극을 비롯하여 2명의 교원과 28명의 학생이 고작이었지만, 기독교 계통의 학교로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면서 대황구의 한인들은 중국 지방 당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나마 좀 편히 살고자 함이었다.

이동휘는 대황구의 유지들과 의기투합했다. 그리고 1916년에 북일학교(北一学校)를 설립했다. 나자구 동림무관학교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대황구 동창학교의 기반을 활용한 결과였다. ‘북일(北一)’이라는 명칭은 북간도에서 최고의 독립군 양성소로 발전하라는 염원을 담은 것이었다. 설립 초기에는 이동휘가 명예교장을, 대황구의 한인 대표로서 양하구(梁河龜)가 교장을, 동창학교의 교장인 김남극(金南極)이 부교장을 맡았다. 부지와 건물로서는 대황구에서 서쪽으로 1km 떨어진 산기슭에 목재 건물로 8칸의 가옥에 3개의 교실을 마련했다. 전체 학생은 동창학교 학생 20명, 동림무관학교 학생 20여 명 등 40여 명이었다.

북일학교는 6개월 속성 및 1년 정규 과정을 두었다. 교과목은 한국어, 한국사, 한국지리, 수학, 물리, 화학, 중국어, 러시아어, 영어, 정치, 군사, 체육 등 다양했다. 특히 군사 과목은 군인 출신으로 동림무관학교에서도 교편을 잡은 고경재와 김립이 전담했다. 이들은 손자병법(孫子兵法)을 기반으로 한 병법 이론으로부터 창검술, 사격, 권투 등 실전에 필요한 군사 기술에 이르기까지 교수했다. 결과 4년 동안 배출한 200여 명의 졸업생들은 훈춘군무부, 철혈광복단, 한민회, 대한독군부 등 북간도의 무장투쟁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안중근 단지동맹기념비(러시아 크라스키노 추카노프카, 기념비에는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결사 동지 12인이 이곳 크라스키노에서 단지동맹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단지동맹을 했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안중근 단지동맹기념비(러시아 크라스키노 추카노프카, 기념비에는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결사 동지 12인이 이곳 크라스키노에서 단지동맹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단지동맹을 했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학교는 사라졌지만, 후예들이 북간도 항일유격의 근거지 건설

1919년 3·13만세운동을 계기로 북일학교가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주지하듯 3.1운동은 국내에서만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거족운동(擧族運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북간도 한인사회에서도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특히 연해주의 한인사회와 연계하는 데 주력했다. 이를 위해 북일학교 교장 양하구와 교사 박태환(전도사로서 성경 과목을 전담)이 훈춘현 대표로서 연해주의 지도자들과 함께 만세운동의 구체적인 전개 방법을 모색했다. 결과 대황구를 시발점으로 훈춘현 전역에 3.13만세운동이 번져나갈 수 있었다.

북일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복사하여 각 지역의 한인 단체에 전달했다. 학교 예배당을 만세운동 본부로 활용했으며, 만세운동 당일에는 북일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시위대의 선두에 섰다. 그러나 평화적인 시위로는 자유를 되찾을 수 없었다. 결사대를 조직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자고 구상한 것이 이 무렵이었다.

1919년 4월, 대한국민의회가 훈춘현에 지부를 창성했다. 이때 북일학교 교사 여남섭, 노종환, 김태정 등이 간부로 참여하여 150여 명의 결사대를 조직했다. 결사대는 군자금을 모집하고 무기를 구입하는 데 일조했다. 핵심 인력은 북일학교 교사와 학생들이었다. 또한 1919년 6월에 관내의 흑정자사립학교와 연계하여 청년동맹회를 조직했다. 1919년 7월에는 홍범도가 무장투쟁을 본격화할 작정으로 300여 명의 결사대를 조직했는데, 여기에도 북일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대거 참여했다.

북일학교 부교장 김남극 묘소(대황구촌에서 북쪽 방향에 위치)
북일학교 부교장 김남극 묘소(대황구촌에서 북쪽 방향에 위치)

그러자 일제가 훈춘현 지방 당국을 압박하여 북일학교에 해산령을 내렸다. 그러나 중국 당국은 교명을 ‘훈춘현립제6초등학교’로 개명하는 차원에서 학교를 존속케 했다. 대황구 유지들이 중국 당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20년 10월, 간도참변의 화(禍)는 피할 수 없었다. 일제는 북일학교를 훈춘현에서 제거해야 할 최우선 대상으로 삼았다. 북일학교는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북일학교의 교육 이념을 계승하여 대황구를 항일유격의 근거지로 발전시켜 나갔다.

일본 토벌대가 북일학교 부교장을 사살하고 돌배나무에 효시

1920년 10월, 독립군 연합부대가 간도로 출병한 일본군을 청산리 일대에서 10여 차례 전투 끝에 대파했다. 이에 일본군 토벌대는 도처에서 반인륜적 범죄 행위를 자행했다. 민간인을 상대로 보복성 만행을 서슴지 않은 것이다. 독립군의 위대한 승리였던 청산리대첩은, 반면 만주지역의 한인들에게는 재앙이기도 했다. 북일학교도, 이때 화염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1920년 10월 17일, 일본군 토벌대가 대황구로 들이닥쳤다. 연변대학교 연변역사연구소 리광인이 발표한 「경신년 대토벌과 연변조선족 군중의 반토벌 투쟁」(『한국학연구』제4집,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2)에 의하면, 일본군 토벌대가 북일학교를 수색하는 과정에서 안중근, 황병길, 백규삼 등이 단지동맹(斷指同盟)을 할 때 사용한 도끼와 잘려나간 손가락 마디를 교실 천정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그리고 분개하여 북일학교를 바로 불태웠다고 한다.

경신참변 때 일본군 토벌대가 북일학교 부교장 김남극의 시신을 효시한 돌배나무
경신참변 때 일본군 토벌대가 북일학교 부교장 김남극의 시신을 효시한 돌배나무

일본군 토벌대는 부교장 김남극, 교사 김하정(역사 교사로서 대황구 3.13만세운동 주도, 흑정자사립학교와 청년동맹회 조직 주도 등), 대황구 유지 양병칠(북일학교 설립 지원, 독립군 군자금 모집 등)을 비롯하여 20여 명을 체포했다. 그러자 김남극이 “북일학교는 내가 주도하여 설립한 것이며, 7인단지동맹의 물건도 내가 감추어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관계없으니 나만 죽이라!”라고 항변했다. 일본군 토벌대는 김남극의 기를 꺾으려 모질게 고문했다. 그러나 김남극은 굴하지 않았다. 결국 일본군 토벌대는 김남극과 양병칠을 북산 기슭으로 끌고 가서 기관총을 난사했다. 더구나 본때를 보인다며 김남극의 시신을 돌배나무에 효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국 정부는 김남극의 공훈을 기려 1991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995년에는 연변대학교 조선어문학부 최용린 교수가 묘비를 건립하여 추모했으며, 1999년에는 후손들이 김남극과 함께 순국한 양병칠의 묘비도 공동으로 건립하여 추모했다. 2019년에는 한국 국가보훈처가 묘소 주변에 울타리를 설치하고 바닥을 정비하고 봉분을 정비하는 등 개보수 사업을 진행했다.

필자소개
안상경 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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