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75] 모젤강에서 볼가강으로
[유주열의 동북아談說-75] 모젤강에서 볼가강으로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2.05.06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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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외교활동의 일환으로 자신의 관저에서 주재국 인사와 주요국 외교관을 초청해 만찬 행사를 주최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만찬주로 국산 브랜드인 ‘마주앙’을 주로 이용했다.

1970년대 초 식량부족인데도 많은 양의 곡식이 술 만드는 데 소비돼 사회문제가 됐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식량 절약을 위해 전국에 펼쳐진 야산에 포도를 심어 포도주(와인)로써 곡주 대체를 검토해 보라는 지시를 했다고 한다. 그 후 우리의 기후와 지형이 유사한 독일의 와인 산지 모젤 지방의 포도 묘목으로 포도원을 조성하고 독일 기술자를 초빙 국산 와인 ‘마주앙’을 탄생시켰다. 마주앙은 ‘마주 앉아 즐기다’는 뜻이라고 한다. 마주앙에 대한 평가가 나쁘지 않아 모젤강과 그 지방의 와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모젤강[사진=위키피디아]
모젤강[사진=위키피디아]

모젤강은 프랑스 동부 보주산맥에서 발원하여 룩셈부르크를 거쳐 독일의 코블렌츠에서 라인강과 합류하는 길이 544km의 강이다. 인근에는 유럽 서부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를 거쳐 북해로 흘러드는 925km의 뫼즈(Meuse)강이 있는데 모젤(Moselle)은 작은 뫼즈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S형의 굴곡이 심한 모젤강 주변은 가파른 경사라 포도원이라고 해도 프랑스의 드넓은 평지의 그것과 달리 폭이 좁은 소규모의 테라스형 포도원이다. 북위 50도의 서늘한 기후로 한낮의 따끈한 햇볕으로 포도를 익히는데 모젤강에서 반사돼 올라오는 햇볕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포도원의 토질이 점판암으로 돼 있어 한낮에 데워진 점판암이 온돌 효과로 밤에는 포도의 뿌리를 덮고 그 열기가 포도원을 따뜻하게 해준다. 모젤 지방의 포도원은 주로 가족 단위로 와인을 생산하는데 유대인 상인들이 가가호호 생산된 와인을 집단 구매 유통시켰다. 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많은 유대인이 이 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그 유대인 집안에 마르크스라는 인물이 태어났다.

카를 마르크스(1818-1883)는 프로이센 왕국시대 모젤강의 중심인 트리어 출신이다. 친가와 외가 모두 랍비(유대교 성직자) 집안이었으나 변호사인 아버지는 프로이센 복음 루터교회로 개종해 소규모 포도원 몇 개를 소유하는 상류 중산층이다. 네덜란드 출신의 외가는 유명한 필립스전자를 창업한 유서 있는 집안이다.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법조인이 되기 위해 집에서 멀지 않은 본 대학 법과에 입학했으나 전공인 법학 공부는 흥미가 없고 시인 모임에 나가는 등 인문학에 관심을 보였다. 아버지는 분위기를 바꾸어주기 위해 다시 베를린 대학의 법과로 전학을 시켰으나 마르크스는 오히려 헤겔 철학에 빠져들었다. 그가 20세인 1838년 아버지가 사망하여 일시 경제적 어려움이 있었으나 아버지의 간섭을 더 이상 받지 않고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생겼다.

마르크스는 자유 성향의 예나 대학으로 적을 옮겨 1841년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철학자로서 다양한 세계를 해석하는데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 쾰른의 라인신문사에 편집장이 됐다. 1843년 러시아 정부는 니콜라이 1세에 대한 라인신문의 비판적 기사를 문제 삼아 프로이센왕국에 압력을 넣었다. 프로이센 정부는 라인신문사를 폐간시키고 마르크스를 국외로 추방했다. 마르크스는 쾰른을 떠나 프랑스 파리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평생 동지이며 후원자인 엥겔스를 운명적으로 만난다.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는 프로이센왕국의 방직공장 중심지로 쾰른에서 멀지 않은 바르멘(현 부퍼탈)에서 방직공장 사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들을 자신과 같은 자본가로 키우기 위해 학교보다 공장에서 일을 배우도록 했다. 머리가 뛰어난 엥겔스는 틈틈이 시민혁명과 자유주의 및 계몽사상에 관한 책을 두루 읽고 군 복무를 핑계로 아버지의 감시를 피해 베를린으로 갔다. 엥겔스는 군 복무와 함께 베를린 대학의 철학 강의를 청강하면서 헤겔의 좌파적 사상에 영향을 받아 계몽적 라인신문에 가끔 자신의 생각을 익명으로 기고했다.

군 복무를 마친 엥겔스는 영국 방직산업의 요람 맨체스터 인근에 아버지가 세운 공장에 근무하게 된다. 엥겔스는 공장일보다 자본주의가 발달한 영국에서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에 충격을 받고 노동자계급에 대해 깊은 연민을 가졌다. 1844년 엥겔스는 일시 귀국길에 파리에서 라인신문의 편집장으로 알고 있던 마르크스를 만나 영국 자본주의 문제점을 토론하고 그가 연구한 <잉글랜드 노동자계급의 상황>이란 자료를 보여주었다. 이론가인 마르크스는 엥겔스를 통해 실물경제 상황 아래 노동자의 실태를 알게 되고 유토피아적 공상적사회주의가 아닌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 즉 과학적사회주의의 이론을 완성한다. 두 사람은 그 이후 실과 바늘처럼 평생을 같이했다.

마르크스의 반체제적 선동 활동은 시민왕 루이 필리프의 프랑스에서도 견디기 어려웠다. 1845년 마르크스는 벨기에 브뤼셀로 옮기고 1847년에는 엥겔스와 함께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사회병리 현상을 해결할 공산주의자동맹을 결성하고 1848년 <공산당 선언>을 통해 유럽국가의 봄(Spring of Nations)을 기대했다. 1848년 2월 루이 왕의 퇴위와 제2공화국을 수립한 프랑스 혁명을 신호탄으로 나폴레옹 몰락 후 빈체제에 대한 전 유럽 자유주의자의 저항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프로이센 등 유럽 곳곳에서 일어났다.

한편 프랑스 2월혁명이 파급될 것을 우려한 벨기에 왕국의 추방 명령을 받은 마르크스는 파리 및 쾰른을 거쳐 1849년 영국 런던으로 망명했다. 마르크스는 노동 착취가 자본가를 부자로 만드는 구조인 자본주의 모순을 철저히 연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런던의 대영박물관 부속도서관에서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등 정치경제학 서적을 두루 섭렵 필생의 저서인 <자본론> 제1권을 완성 1867년 발간했다.

프랑스의 제2 공화정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루이 나폴레옹이 쿠데타(1851)를 일으켜 황제(나폴레옹 3세)가 되어 독재를 펼치다가 1870년 프로이센왕국과의 전쟁(보불전쟁)에서 패배 포로가 됐다. 1871년 1월 프랑스의 자존심인 베르사유궁에서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독일 제국의 황제로 즉위, 프랑스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안긴다. 그해 3월 분노한 군중과 무정부주의자 및 사회주의자가 파리를 점령 파리코뮌을 선언함으로써 노동자가 세운 세계 최초의 자치정부가 탄생했다. 런던의 마르크스는 큰 기대를 가지고 파리코뮌을 응원했으나 두 달 만에 진압돼 혁명이 실패하자 크게 좌절했다.

실의에 빠진 마르크스는 수년 전 발간된 <자본론> 1권의 후속으로 <자본론> 제2권 제3권의 원고를 작성했다. 1881년 마르크스는 부인의 사망으로 좋지 않은 건강이 점점 나빠지기 시작하고 더욱이 장녀 사망의 충격으로 젊은 날 군 면제를 가져온 폐렴이 재발해 1883년 5월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볼가강[사진=위키피디아]
볼가강[사진=위키피디아]

마르크스에게는 이름 그대로 천사 같은 엥겔스는 런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 마르크스의 묘지를 마련하고,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장인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Workers of All Lands Unite)라는 묘비명과 함께,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사상하기를 멈추었다(The greatest thinkers ceased to think)’라는 유명한 추모사를 남겼다. 엥겔스는 마르크스 유고를 정리 <자본론> 제2권 및 제3권을 발간하고 1895년 8월 죽으면서 마르크스의 남은 두 딸에게도 상당한 몫의 유산을 남겼다. 엥겔스의 묘지는 없다. 자신의 유언에 의해 화장된 유골은 도바해협의 바다에 뿌려졌다고 한다.

억압받는 노동자를 위한 계급 없는 공산주의 실현의 꿈을 꾸었던 마르크스가 숨을 거둘 때 런던에서 동쪽으로 3700km 떨어진 러시아의 볼가(Volga)강 중류 심비르스크(현 울리야노프스크)에서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이라는 13세의 소년이 성장하고 있었다. 현지어로 젖은 땅(江)이라는 의미를 가진 볼가강은 전장 3690km로 유럽에서 가장 긴 강이다. 서쪽으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사이 구릉 지대에서 발원 남하해 카스피해로 흐른다.

아버지 울리야노프는 존경받는 교사 겸 장학사로 레닌은 교육수준이 높은 가정의 6남매의 셋째였다. 특히 4살 연상의 바로 위 형은 레닌의 멘토였다. 레닌이 16세 때 아버지 울리야노프가 사망하고 1년 후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하던 형이 알렉산드로 3세 암살모의에 연루돼 처형되자 큰 충격에 빠졌다. 레닌은 형의 죽음을 계기로 형이 가담했던 브나로드(민중 속으로) 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탐독했다.

레닌은 집에서 멀지 않고 아버지의 모교인 볼가강 연안 도시 카잔의 카잔대학에 진학했다. 레닌은 당시 학생사회에서 유행했던 자유 및 평등을 주장하는 집회에 단순 참석했는데도 형의 전과에 연좌돼 제적이라는 중벌을 받았다.

다행히 레닌에게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의 법과 청강생 자격은 주어져 후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다. 레닌은 일시 어머니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와 변호사 일을 하다가 밖에서 보는 러시아의 현실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서유럽여행을 떠났다. 그 무렵 러시아 지식인들은 브나로드 운동을 통한 농민계몽 활동은 차르(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두터웠던 농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테러리즘으로 전환하고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을 승리로 이끈 러시아의 알렉산드로 1세는 서유럽의 자유주의 물결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후계자 니콜라이 1세도 데카브리스트 청년 장교들의 저항을 힘으로 진압했다. 시대의 변화를 인지한 알렉산드로 2세는 농노해방 등 개혁정치를 하면서 제한적이나마 자유주의 사상을 인정하려고 노력했으나 급진 테러리스트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뒤를 이은 알렉산드로 3세는 국민들에 대한 불신으로 오히려 전제군주제를 강화했다. 황제의 반동정치에 대해 불만을 가진 혁명가들에 의해 암살위기를 수차례 넘긴 알렉산드로 3세의 갑작스런 죽음과 부황에 세뇌된 니콜라이 2세의 즉위를 보면서 레닌은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차르 전제정치를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1895년 서유럽여행에서 귀국하자마자 차르 정부에 의해 체포된 레닌은 투옥과 시베리아 유형 생활을 겪고 본명 울리야노프에서 레닌으로 이름을 바꾼다. 바이칼호수에서 발원해 예니세이강 일부가 됐다가 동쪽으로 갈라져 북극해로 흘러 들어가는 레나강에서 이름을 얻었다.

1898년 반 차르 혁명가들은 러시아 사회민주 노동당(RSDLP)을 결성했다. 마르크스주의를 중심으로 계급투쟁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는 것이 목표였다. 브뤼셀과 런던에서 개최된 당대회에서 레닌은 중앙위원 다수를 차지해 볼셰비키 당이 됐고 소수파 율리 마르토프는 멘셰비키 당으로 분열했다.

1905년 초 러일전쟁 패배에 따른 민중의 불만이 폭발한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러시아는 혁명의 열기가 고조됐다. 레닌은 일시 귀국했으나 당국의 검거를 피해 다시 해외 망명에 나선다. 1917년 3월(러시아 구력 2월)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러시아 여성 노동자들이 ‘빵과 평화’를 내세우며 대규모 파업과 대대적인 시위 활동을 벌였다. 그렇지 않아도 정치에 염증을 느낀 유약한 니콜라이 2세가 스스로 퇴위하자 사회주의 혁명당의 알렉산드로 케렌스키(1881-1970)가 사회주의 공화국 임시정부를 세웠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출신의 변호사 케렌스키는 레닌과 심비르스크 동향으로 케렌스키의 아버지는 레닌 어린 시절 은사였다.

스위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레닌은 러시아의 분열을 기도한 독일 제국이 마련한 봉인열차를 이용 스웨덴과 핀란드를 우회해 1917년 4월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으나 혁명노선이 다른 케렌스키 정부의 체포 명령으로 다시 핀란드로 피했다.

1917년 11월(러시아 구력 10월) 멘셰비키당에서 볼셰비키 당으로 전향한 우크라이나 유대계 출신의 레프 트로츠키(1871-1940)가 조직한 적위대(red army)가 케렌스키 정부를 무력타도함으로써 드디어 세계 최초로 노동자·농민의 무산계급 공산혁명이 성공했다. 마르크스가 런던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자본론>을 처음 발간한 지 50년 후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러시아 땅에서 탄생한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성공도 잠깐 레닌은 암살 미수로 인한 부상 후유증과 실어증을 앓다가 뇌출혈로 세상을 떠난다. 1924년 1월이었다.

레닌의 묘는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안치돼 있지만, 이오시프 스탈린(1875-1953) 등 그의 후계자들이 러시아 혁명을 변질 타락시키고 국내외 수많은 해악을 끼쳐 레닌의 공산주의 조국은 혁명 74년 후인 1991년 12월 붕괴됐다.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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