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만주㉑] 훈춘 대황구 13열사능원: 고요한 수림에서 아픈 역사를 마주하다
[아! 만주㉑] 훈춘 대황구 13열사능원: 고요한 수림에서 아픈 역사를 마주하다
  • 안상경(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 승인 2022.05.09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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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삼성으로 불리는 중국 만주에는 우리 독립운동 사적지가 곳곳에 있다. 의병운동,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독립지사들의 고민과 피가 어린 곳들이 도처에 있다. 이들 사적지를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대황구 매력계곡 흔들다리(훈춘시 역사전람관에서 13열사능원으로 향하는 길목)
대황구 매력계곡 흔들다리(훈춘시 역사전람관에서 13열사능원으로 향하는 길목)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으로 황산(黃山)을 꼽는다. 구름바다 위로 드러나는 봉우리와 바위들의 장엄한 풍경은 가히 압권이다. 그래서 예술과 문학을 통해 끊임없이 찬사를 받아왔다. 그러나 나는, 황산의 위대한 자연보다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 영안진 대황구촌(大荒溝村)의 소박한 자연이 좋다. 무성한 수풀에 가려 속세와 인연을 차단한, 흡사 다른 차원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이 좋다. 계곡의 맑은 물, 조잘조잘 흐르는 물소리, 그 속에 비치는 세상이 잔잔해서 좋다.

대황구의 지명은 ‘극히 거친 도랑’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실제로 무성한 산림이 사방을 두르고 있다. 그러나 안자락은 너른 분지로서 비옥하다. 이곳으로 1890년대부터 한인들이 이주했다. 그리고 일종의 자치구를 형성했다. 1930년대에는 수백 가구에 2,000여 명이 모여 살았다.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아름답지 않은 시기였기에, 도리어 항일투사들이 피를 흘렸다. 관내 역사전람관을 에돌아 매력계곡의 흔들다리를 건너면 조용한 숲길이 펼쳐진다. 산책하기에 참 제격이다. 이 길을 따라 10여 분 걸으면 13열사를 만날 수 있다.

반제·반봉건 농민운동과 겸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

1927년 10월 중국공산당이 요녕성 심양에 만주성위원회(滿洲省委員會)를 결성했다. 그리고 산하에 동변도특별위원회(東邊道特別委員會)를 설치했다. ‘동변도(東邊道)’는 요녕성 심양을 기준으로 동쪽에 위치한 변방이라는 뜻이다. 간도 내지 동만주를 달리 일컫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중국공산당이 간도에 특별위원회를 설립한 이유는 이곳에서 한인들의 공산주의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고, 한인들의 항일무장투쟁도 가열하게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공산당만주성위구지기념관(中共滿洲省委舊址紀念館; 심양시 화평구 북시장 인근)
중국공산당만주성위구지기념관(中共滿洲省委舊址紀念館; 심양시 화평구 북시장 인근)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동북 일대를 장악하자,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는 즉각 항일무장투쟁을 천명했다. 그러나 만주성위원회는 일제에 맞설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이에 당장은, 1931년 10월 동변도특별위원회 명의로 ‘일제의 만주 점령을 반대하는 긴급 결의안’과 ‘농민운동 결의안’을 발표하여 간도를 중심으로 유격활동과 농민운동을 독려했다.

예컨대 유격대로는, 1931년 10월에 남만의 이통현(伊通縣)에서 적위대(赤衛隊)를 조직했다. 대장 이홍광(李紅光)을 비롯하여 7명의 대원은 모두 한인이었다. 소규모로 출발한 단체였지만, 1932년 6월에 반석유격대(磐石遊擊隊)로 발전했다. 이후 한족 무장투쟁 세력과 통합하여 남만유격대로 개편하고,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60여 차례 공방전을 치렀다. 남만유격대의 규모는 250여 명이었는데 1/4이 한인이었다. 한편 농민운동으로는 1931년 가을의 추수투쟁(秋收鬪爭), 1932년 봄의 춘황투쟁(春荒鬪爭)을 반제, 반봉건 투쟁과 결합시켜 중국공산당의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나아가 유격대를 체계적으로 조직, 운영할 목적으로 1931년 12월 동변도특별위원회가 연길현 명월구(明月溝)에서 공청간부회의를 개최했다. ‘공청(共靑)’이란 공산주의 청년단의 줄임말로, 각지의 청년 대표 40여 명이 참석했다. 무려 10일에 걸쳐 결론을 도출했다. 그리고 1932년에 연길현, 화룡현, 왕청현에서 유격대를 조직했다. 소규모의 적위대로 출발하여 조직을 확대, 개편하는 방식이었다. 1933년에는 훈천현에서 영북유격대와 영남유격대를 통합하여 훈춘유격총대를 조직했다. 동만의 4개 현에서 결성한 유격대는 360여 명 규모였는데, 이 가운데 90%가 한인이었다.

대황구 13열사능원으로 향하는 숲길 입구
대황구 13열사능원으로 향하는 숲길 입구

북만에서는 1933년 4월에 허형식(許亨植) 등이 탕원(湯原)에서 유격대를 결성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금방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중국공산당 주하현위원회는 동년 10월에 동북의용군의 패잔병과 이계동(李啓東)을 비롯한 13명의 한인들을 주축으로 주하반일유격대를 결성했다. 대장은 조상지(趙尙志)였는데, 1934년 6월에 항일 마적 등을 포섭하여 동북반일유격대 합동지대로 발전했다. 북만의 유격대는 남만이나 동만과 달리 한인들의 비중이 크지 않았지만 결성 초기에 한인 간부들의 활약은 매우 두드러졌다.

훈춘유격총대를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

1931년 10월 중국공산당이 훈춘현 대황구 청수동(淸水洞)에 훈춘현위원회(琿春縣委員會)를 결성했다. 훈춘현위원회는 중국인 지주와 한인 소작농의 모순 관계 타파를 농민운동의 구호로 내세웠다. 그리고 당해에 추수투쟁(秋收鬪爭) 및 이듬해에 춘황투쟁(春荒鬪爭)을 전개함으로써 한인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이러한 인프라를 기반으로 연변지구에서 가장 먼저 항일유격대를 조직할 수 있었다.

1932년 1월 훈춘현위원회는 대황구 두도령(頭道領)에서 별동대를 조직했다. 대원은 15명이었다. 동년 6월에는 별동대를 주축으로 황구유격대(荒溝遊擊隊)를 조직했다. 황구는 두도령을 기준으로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달리 영북유격대(嶺北遊擊隊)라고 했다. 대장은 강석환(姜錫煥)이었고 대원은 20여 명이었다. 그리고 1932년 3월에 러시아와 맞닿아 있는 연통립자(煙筒砬子)에서도 돌격대를 조직했다. 동년 6월에는 돌격대를 주축으로 연구유격대(煙區遊擊隊)를 조직했다. 연구는 두도령을 기준으로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달리 영남유격대(嶺南遊擊隊)라고 했다. 대장은 강일무(姜一武)였고 대원은 30여 명이었다.

대황구 13열사능원 기념비
대황구 13열사능원 기념비

1933년 1월 훈춘현위원회가 영북유격대와 영남유격대를 통합하여 훈춘유격총대(琿春遊擊總隊)를 조직했다. 동년 3월에는 중국의용군 30여 명이 참여하여 조직을 강화했다. 전체 대원은 120명이었다.

훈춘유격총대는 반봉건투쟁을 중심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이어나갔다. 1932년 일본군이 영남유격대를 조직했다는 첩보한 입수하고 연통립자(煙筒砬子)로 진격하자 유격대가 매복 작전을 펼쳐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33년에는 반석향(磐石鄕)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는 목장을 습격하여 160여 마리의 소를 노획하는가 하면, 동흥진(東興鎭)에서 일본인의 군수품 상점에 납품하려는 25대의 마차를 기습하여 식량과 의류를 노획하기도 했다.

훈춘유격총대는 전투 장비도 만만찮았다. 1934년 4월 6일 탑자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습격하여 부사령관을 사살하고 12자루의 자동 보총과 1,000여 발의 탄약을 노획했다. 동년 5월 12일에는 오두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습격하여 4명을 사살하고 13명을 생포하는 한편 17자루의 자동 보총을 노획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1933년 9월 민족주의 계열의 한국독립군과 공산주의 계열의 길림구국군 및 왕청유격대와 함께 동녕현전투(東寧縣戰鬪)에 참가하고자 진격에 나섰다.

오빈(吳彬), 박진홍(朴振興) 등 훈춘유격총대 13열사 묘비
오빈(吳彬), 박진홍(朴振興) 등 훈춘유격총대 13열사 묘비

변절자의 밀고로 훈춘유격총대 13명 대원들이 교전 중에 사망

1933년 6월 지청천(池靑天)이 이끄는 500여 명의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은 왕청현 대전자령(大甸子嶺)에서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과 연합하여 일본군 130여 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독립군과 길림구국군이 연대를 강화했는데, 이후 전개한 대표적인 연합투쟁으로 동녕현전투(東寧縣戰鬪)를 꼽을 수 있다. 이 전투는 중국공산당 동변도특별위원회의 참여도 이루어졌다는 데서 이념과 민족을 떠난 한·중 연합투쟁으로서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러시아 국경지대인 흑룡강성 목단강시 동녕현 삼차구진(三岔口镇)에는 500여 명의 일본군과 1,500여 명의 만주국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한·중 연합군은 기습을 통해 일본군과 만주국군의 군수품을 노획하고자 했다. 이에 동변도특별위원회도 한·중 연합군 지도부와 회합하여 왕청유격대와 훈춘유격총대를 공동으로 참여케 할 것을 결의했다.

1933년 9월 훈춘유격총대는 동변도특별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동녕현성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통지가 제때에 이루어지지 않아 집결지 근처의 노흑산(老黑山)에 다다랐을 때, 이미 전투를 끝내고 퇴각하는 왕청유격대와 조우했다.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 왕청유격대와 함께 왕청현 나자구(羅子溝)로 이동하여 승리를 자축하는 행사를 벌였다. 그리고 다시, 이틀간 행군하여 훈춘현 대황구에 도착했다. 추석을 고향 마을에서 쇨 겸 오랜만에 휴식도 취할 겸이었다.

중국공산당 훈춘현위원회 창건 기념비 전경
중국공산당 훈춘현위원회 창건 기념비 전경

그런데 그날 밤, 중국공산당 훈춘현위원회 비서로 활동하다 변절한 배원일이 60여 명의 일본군 토벌대를 이끌고 대황구로 잠입했다. 마을 경계에 1차 초소를, 유격대 본거지에 2차 초소를 두고 경계를 섰지만, 작정하고 들어서는 토벌대를 당할 수 없었다. 다행히 2차 초소에서 경계를 서던 김재근이 1차 초소의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대원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이미 토벌대가 두 갈래 방향에서 유격대의 본거지를 포위한 뒤였다.

토벌대는 유격대의 본거지에 수류탄을 투척했다. 여러 대원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박진홍(朴振興)과 오빈(吳彬)이 적진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20여 대원들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한 엄호였다. 이 과정에서 오빈이 복부에 탄환을 맞았다. 창자가 흘러내렸지만 오히려 적진을 향해 앞으로 나갔다. 심지어 마지막 순간까지 정신을 놓지 않고 총에서 노리쇠를 빼내어 던져버렸다. 자신의 총, 그 한 자루의 총이라도 일본군 토벌대가 노획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13명의 대원들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성(姓)이 “랑”이라는 만주족 대원을 제외하면 모두 한인이었다.

대황구 13열사 능원이 국가급 홍색관광(紅色觀光) 풍경구로 선정

살아남은 대원들이 유격대 본거지에서 서쪽으로 30m 떨어진 산기슭에 전우들을 안장했다. 이후 1960년 훈춘현 인민정부가 13명의 대원들에게 “열사” 호칭을 부여하며 기념비를 세우고 대황구 13열사 능원을 조성했다. 그리고 2004년에 제1기 공정으로 중국공산당 훈춘현위원회 기념비 조성, 훈춘시 역사전람관 건립, 대황구 13열사 기념비 건립 등을 추진했다. 2005년에는 제2기 공정으로서 대황구 소비에트 정부 유적지 조성, 두도령 군사준비회의 유적지 조성, 병기(무기) 공장 유적지 조성 등을 추진했다.

중국공산당 훈춘현위원회 창건 기념비 뒷면
중국공산당 훈춘현위원회 창건 기념비 뒷면

중국, 러시아, 북한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방천풍경구(防川风景区), 이와 버금가는 관광 명소를 개발하려는 훈춘시의 장기 계획이었다. 결과 2017년에 훈춘시 대황구의 항일유적지가 중국 국가급 홍색관광(紅色觀光) 풍경구로 선정되었다. 동북삼성 최대, 최고의 청소년 애국교육 기지로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근간에는 매력계곡의 래프팅을 주제로 동방제일표류(東方第一漂流), 주목나무 주산지를 주제로 천년주목왕(千年紫杉王), 전원 휴양을 주제로 동방제일촌(東方第一村) 등 천혜의 자연환경을 활용하여 지역의 장소성을 높이는 데도 주력하고 있다.

대황구 항일유격대 근거지 기념비 앞면(“1928년 3월 북평향산자유원 졸업생이며 공산당원인 조진기, 류경운은 초빙에 의하여 훈춘현 제1소학교에 와 교직원을 담당하였다. 그해 8월 중국공산당훈춘현의 첫 번째 지방 조직인 중국공산당훈춘지부를 건립하였다. 조진기가 서기직을 담당하였으며 중공연변지구위원회에 귀속되었다. 1930년 8월 중공연화중심현위에서 김동수, 김성도, 주운광 등을 훈춘현에 파견하여 중공훈춘구위원회를 건립함과 동시에 중공훈춘현위원회준비건설사업을 진행하였다. 1930년 10월 중공동만특파위원회에서 류건장을 대황구 청수동에 파견하여 중공훈춘구위책임자회의를 소집하도록 하였다. 회의에서 중공훈춘한위를 건립하고 류건장이 현위서기직을 담당하였다.”)
대황구 항일유격대 근거지 기념비 앞면(“1928년 3월 북평향산자유원 졸업생이며 공산당원인 조진기, 류경운은 초빙에 의하여 훈춘현 제1소학교에 와 교직원을 담당하였다. 그해 8월 중국공산당훈춘현의 첫 번째 지방 조직인 중국공산당훈춘지부를 건립하였다. 조진기가 서기직을 담당하였으며 중공연변지구위원회에 귀속되었다. 1930년 8월 중공연화중심현위에서 김동수, 김성도, 주운광 등을 훈춘현에 파견하여 중공훈춘구위원회를 건립함과 동시에 중공훈춘현위원회준비건설사업을 진행하였다. 1930년 10월 중공동만특파위원회에서 류건장을 대황구 청수동에 파견하여 중공훈춘구위책임자회의를 소집하도록 하였다. 회의에서 중공훈춘한위를 건립하고 류건장이 현위서기직을 담당하였다.”)
대황구 항일유격대 근거지 기념비 뒷면(“1932년 가을에 창건 같은 해 12월 중공훈춘현위에서는 이곳에다 황구쏘베트정부를 성립하였다. 근거지에는 병기공장, 피복공장, 병원 등이 있었다. 1933년 하반년에 중공훈춘현위는 연통라자로부터 이곳에 옮겨왔다. 1934년 여름 근거지 군민들은 왕청금창지구에로 전이하였다.”)
대황구 항일유격대 근거지 기념비 뒷면(“1932년 가을에 창건 같은 해 12월 중공훈춘현위에서는 이곳에다 황구쏘베트정부를 성립하였다. 근거지에는 병기공장, 피복공장, 병원 등이 있었다. 1933년 하반년에 중공훈춘현위는 연통라자로부터 이곳에 옮겨왔다. 1934년 여름 근거지 군민들은 왕청금창지구에로 전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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