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76] 젊은날의 덩샤오핑(鄧小平)
[유주열의 동북아談說-76] 젊은날의 덩샤오핑(鄧小平)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2.06.07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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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유학 시절의 등소평[사진=위키미디어커몬스]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지 30년이 되는 뜻깊은 해를 맞아 오래전 베이징 대사관 근무 시절이 생각났다. 그 무렵 중국의 많은 도시를 방문했는데 그중 이름이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 충칭(重慶)이었다. 당시 지인의 설명에 의하면 겹경사(雙重喜慶)라는 뜻이 있는 그곳에 가면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이 지명이 시작된 것은 남송 때라고 한다.

여진족이 세운 금(金)이 북송의 수도 개봉을 함락시키고 휘종과 흠종 부자를 포로로 끌고 갔다. 흠종의 아우 고종이 강남으로 도피 임안(현 항저우)에서 남송을 건국했다. 고종이 퇴위하면서 태상황이 되고 황태자 조신이 즉위하니 효종이다. 효종은 장남이 요절한 후 자신이 총애하는 셋째 아들 조돈을 황태자로 세우고 쓰촨성 공주(恭州)의 공왕으로 봉한다. 첫 경사가 일어났다. 그 후 1년 만에 효종이 양위하면서 공왕이 황제(광종)가 되니 두 번째 경사였다. 충칭이라는 이름이 그때 탄생했다. 12세기가 끝날 무렵이었다.

지인은 그것은 과거의 일이고 20세기 들어와서 첫 경사는 중국의 최고지도자 덩샤오핑의 배출이라고 한다. 덩샤오핑은 1904년 8월 지금의 충칭과 북쪽으로 인접한 광안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윗대 할아버지가 과거에 급제 조정의 고위관리가 되어 패방(牌坊)이 허락된 명문 집안 출신이었다. 덩샤오핑은 어릴 때부터 서당 훈장으로부터 시셴(希賢)이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로 총명하여 가문을 다시 일으킬 인물로 기대를 모았다. 옛날 같으면 과거에 급제할 인재였으나 당시 중국(淸)은 그가 태어난 다음 해 과거제도를 폐지했다.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받고 충칭에 나와 공부한 덩샤오핑에게 기회가 왔다. 근공검학(勤工儉學)이라는 특수한 프랑스 유학 프로그램으로 ‘일하면서 배운다(勤于工作 儉以求學)’는 고학 운동이었다. 이는 1차 세계대전으로 산업시설에서 일할 노동력이 부족한 프랑스와 해외에서 서구문물을 배우려는 젊은이를 지원하는 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만들어졌다.

특별한 장학생을 제외하고 프랑스어 학습과 프랑스까지 여비는 자비로 충당해야 하므로 실력이 없거나 가난한 집안의 자제는 참가하기 어려운 제도였다. 덩샤오핑은 우수한 데다가 재력 있는 부모의 후원으로 인생의 갈림길이 되는 이 프로그램에 참가할 수 있었다. 16세의 장남을 혼자 보내는 것을 불안하게 생각한 아버지는 아들보다 3세 연상인 자신의 동생도 참여시켜 동행케 했다.

충칭에는 중국 최대의 내륙항 차오티엔먼(朝天門) 항이 있다. 창장(長江, 양쯔강)과 자링장(嘉陵江)이 만나는 곳이다. 명나라 초기 이곳을 출발하면 천자(황제)가 있는 난징(南京)을 향하여 갈 수 있다 하여 차오티엔먼을 세운 후 그 이름의 부두가 됐다고 한다. 덩샤오핑은 1920년 8월 28일 80여 명의 쓰촨성 동료 유학생과 함께 여객선 지칭(吉慶)호를 타고 차오티엔먼을 출발 양쯔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갔다.

9월 6일 상하이에 도착한 쓰촨성의 유학생들은 프랑스 선박을 승선하는 타 지역 출신을 위해 상하이에서 며칠간 보내야 했다. 조계지 상하이의 일부 공원에서 서양인들이 중국인을 차별하여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 현실에 놀란 덩샤오핑은 프랑스에서 선진 기술을 배워 낙후된 조국을 발전시켜 서양인으로부터 받은 수모를 씻어야겠다는 당찬 결심을 하게 된다.

프랑스 우편 화물선 안드레 레퐁호는 중국 각지에서 참가한 유학생들을 태우고 1920년 9월 11일 상하이를 출발 홍콩 베트남 싱가포르 등을 경유 수에즈운하를 통과하고 지중해를 거쳐 10월 19일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 항에 도착했다. 40일에 가까운 긴 여행이었다. 마르세유는 기원전 그리스 식민지로 건설된 역사가 오래된 프랑스 제2의 도시로 아시아 아프리카 등에서 프랑스로 입국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다.

덩샤오핑 일행은 마르세유에서 하선하여 다시 775km 떨어진 수도 파리를 향해 북상했다. 지금은 고속열차(TGV)로 3시간 정도 걸리지만, 당시만 해도 증기기관차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을 것이다. 중국의 근공검학 유학생들이 대거 파리에 도착했지만, 프랑스 정부는 당초 약속과 달리 공장에서 기술을 배울 기회를 주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후 불황을 맞아 많은 공장이 폐업되고 그나마 남아 있는 산업시설에는 제대군인들이 차지했다.

중국 유학생에게는 프랑스인이 기피하거나 기술이 필요치 않은 일만 남았다. 더구나 학교는 공장이 있는 파리 근교가 아니고 먼 시골로 배치되어 유학생들은 크게 실망했다. 노르망디 시골 학교로 배치된 덩샤오핑은 파리로 나와 아버지가 보내준 학비로 별도로 사립학교에 등록했으나 학자금 부족으로 자퇴하고 여기저기 허드렛일을 하면서 크루아상 하나로 끼니를 때울 때가 많았다.

어느 날 자신의 운명을 바꿀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를 만나게 된다. 6세 연상의 저우언라이는 유복한 백부를 두어 일찍이 일본 유학을 다녀와 세상 물정에 누구보다 밝았다. 1919년 5·4운동에도 난카이(南開)대학의 학생으로 참가했다가 1920년도에 근공검학 케이스로 프랑스에 왔다. 그는 모교의 장학금과 이스바오(益世報) 신문사의 유럽 통신원 자격을 얻어 프랑스 정부에 얽매이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 후 유럽은 어수선했다. 민족자결주의 영향으로 과거 식민지는 독립국가로 떨어져 나가 경제 상황은 좋지 않았다. 100여 년 전 나폴레옹 전쟁의 전후 처리를 위한 빈 체제를 주도했던 러시아의 알렉산드로 1세의 로마노프 왕조가 공산혁명으로 허망하게 무너지고 혁명의 물결이 유럽을 위협하고 있었다. 저우언라이 통신원은 영국의 런던 및 에든버러 등을 방문 러시아 혁명 이후 유럽 내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현실을 취재했다.

1921년 7월 중국에서 공산당이 창당됐다. 저우언라이는 덩샤오핑 등 근공검학 유학생들을 청년공산당에 가입시키고 츠꽝(赤光)이란 기관지를 발행했다. 당시 인쇄기술로는 토머스 에디슨이 발명한 등사판(mimeograph) 인쇄가 유행했다. 저우언라이는 자신을 큰 형님처럼 따르는 덩샤오핑을 편집에 참여시켰다. 덩샤오핑은 기사가 작성되면 철필로 스텐실(기름종이)에 옮겨적어 찍어내는 작업을 담당했다. 덩샤오핑의 별명이 ‘등사판(油印) 박사’로 불린 것은 그때였다. 쓰촨성을 떠나본 적이 없는 시골 출신 덩샤오핑은 저우언라이를 알게 됨으로써 세계의 정세 동향과 함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지식을 넓혀가면서 그를 통해 장래 중국 지도자들과도 교류했다.

레닌의 러시아 볼셰비키 당은 1917년 10월 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고 이에 반발하는 황제파(백군)와의 적백내전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놀란 유럽 열강들은 러시아의 사회주의 팽창을 우려 볼셰비키 당을 철저히 고립시키자, 레닌은 마르크스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을 기초로 1919년 3월 공산주의 인터내쇼날(국제공산당) 즉 코민테른을 조직 오히려 주변국의 공산혁명을 촉진시켰다. 그 후 1922년 12월 레닌은 우크라이나 및 벨라루스 등 소비에트(노동자·농민의 자치기구) 사회주의 공화국들과 연방을 결성 소련을 탄생시켰다.

한편 중국(淸)에서는 1911년 신해혁명에 성공한 공화주의자들이 난징에서 쑨원(孫文, 1866~1925)을 임시대총통으로 추대 중화민국을 수립했다. 수도 베이징에서 청조로부터 대권을 위임받고 마지막 황제 선통제를 퇴위시킨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가 쑨원의 양보를 받아 중화민국의 대총통이 됐다.

1915년 위안스카이는 돌연 중화제국을 선포 스스로 황제(홍헌제)에 즉위했으나 국내외에서 비난이 쏟아지자 이를 취소한 후 정신적 불안과 건강의 악화로 다음 해 급사했다. 그 후 중국은 위안스카이 부하 군벌이 지배하는 북중국과 쑨원의 국민당 영향 하에 있는 남중국으로 나뉘게 됐다. 쑨원은 자체 군사력이 없어 필요 시 군벌로부터 군사력을 빌려 쓰다가 배신당하기도 해 그의 국민당은 취약해 보였다.

왕조 전환기에 이어 위안스카이의 사망에 따른 혼란스러운 중국에 주목한 소련은 정부 차원에서 베이징의 군벌 정부를 지지하고 쑨원의 국민당에게는 코민테른을 개입시켜 지원했다. 코민테른은 자체 군사력이 필요한 쑨원에게 군사 고문단 파견을 통해 국민당 육군 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 설립을 제안했다. 초대 교장에는 쑨원의 심복 장제스(蔣介石, 1887~1975)가 맡았지만, 공산당 사상교육을 담당할 정치주임으로 저우언라이가 추천됐다. 1924년 저우언라이는 파리에 덩샤오핑을 홀로 남겨두고 광저우 황포로 귀국했다.

원만한 성격의 덩샤오핑은 저우언라이로부터 배운 공산당 이론과 조직관리를 통해 중국 유학생 사이에 책임자로 급부상했다. 그 무렵 공산당 이념에 빠져들고 있는 중국 유학생에 대한 프랑스 당국의 감시가 강화되고 그 중심에 있는 덩샤오핑에 대한 체포의 그물이 조여들고 있었다. 자신의 숙소가 수색되는 등 신변의 위기를 느낀 덩샤오핑은 소련으로 탈출을 감행했다. 파리를 떠나 중국 공산당 유럽지부가 있는 독일의 베를린을 거쳐 1926년 1월 모스크바에 도착한 덩샤오핑은 코민테른의 안내로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입학했다.

레닌은 코민테른을 통해 아시아(동방) 노동자(toilers) 및 유럽(서방)의 소수민족(national minorities)을 중심으로 한 혁명가들에게 공산주의 이론과 조직 건설을 체계적으로 교육시킬 수 있는 특수교육기관을 1921년 설립했다. 이른바 ‘동방노동자 공산대학’과 ‘서방 소수민족 공산대학’이다. 중국의 류사오치(劉少奇) 베트남의 호치민 전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티토 등이 수학했다.

1925년 3월 베이징을 방문 중인 쑨원이 위암으로 사망했다. 코민테른은 쑨원의 유지를 받든다는 취지를 내세워 ‘동방노동자 공산대학’에서 수학 중인 100여 명의 중국 공산당 및 국민당 소속 유학생을 떼 내어 쑨원의 이름으로 ‘모스크바 중산(中山) 대학’을 별도 설립했다. 1925년 가을로 덩샤오핑이 모스크바 도착 수개월 전이었다.

덩샤오핑이 중산대학에서 수학할 때 알고 지낸 학우로 장제스의 장남 장징궈(蔣經國, 1910~1988)가 있었다. 후에 중화민국 총통이 된 장징궈는 중산대학을 졸업하고도 아버지 장제스의 반공 정책에 반발 귀국하지 않고 우랄산맥의 철강공장에서 근무하다가 러시아 여인을 만나 결혼한다. 또 한 사람의 학우는 장시위안(張錫媛, 1907~1930)이라는 여학생이다. 장시위안은 베이징의 철도 노동자의 딸로서 바오딩 여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공산당에 가입, 후에 저우언라이의 부인이 된 덩잉차오(鄧穎超, 1904~1992)를 알게 되고 당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 왔다. 두 사람은 남녀 관계보다 중국의 미래와 학문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는 사이였다.

덩샤오핑의 관심은 당시 소련의 신경제 정책(NEP)였다.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은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의 생산 의욕을 무시한 사회주의 건설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농민들의 수확물 자유판매 허용, 소상공인의 자유로운 상거래 인정과 외국인 투자를 장려하는 시장 사회주의 방법을 채용했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국내체제의 개혁 및 대외개방) 정책의 신념을 가진 것이 이때부터였다는 분석도 있다.

1927년 초 군벌 펑위샹(馮玉祥, 1882~1948)이 모스크바 중산대학을 찾아왔다. 펑위샹은 리홍장이 이끄는 회군(淮軍)의 하급장교의 아들로 태어나 바오딩 무관학교를 졸업 장래가 촉망되는 군인으로 성장했다. 그는 기독교로 개종, 부대 내에 교회를 세우는 등 ‘크리스챤 제네럴’로 명성을 얻었다. 펑위샹은 국민당과 소련으로부터 신뢰를 얻어 세 자녀를 중산대학에 유학시키고 있었다. 펑위샹이 소련 측에 자신의 근거지 시안의 군인들에게 공산당 이념을 지도할 수 있는 정치위원 추천을 의뢰했다.

코민테른의 권고를 받은 덩샤오핑은 모스크바 중산대학을 떠나, 7년 가까운 유럽 생활을 끝내고 귀국하게 된다. 그해 4월 12일 장제스의 상하이 쿠데타로 공산당원들이 피해를 입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당에 가까운 펑위샹은 덩샤오핑에게 어떠한 위해를 가하지 않고 자유로운 행동을 권했다. 덩샤오핑은 저우언라이를 찾아간다. 덩잉차오와 결혼(1925)한 저우언라이는 중산함 사건(1926) 이후 장제스와 결별 황포군관학교를 사직 상하이로 나와서 공산혁명을 선동 지휘하고 있었다.

덩샤오핑이 저우언라이를 돕고 있을 때인 1928년 초 모스크바 중산대학의 학우였던 장시위안을 우연히 만나 결혼한다. 덩샤오핑이 비밀 지하공작 임무를 위해 이름을 ‘샤오핑(小平)’으로 고쳐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고 한다. 덩샤오핑이 혁명활동에 분주한 사이 장시위안은 꽃다운 23세 나이에 출산 산욕열로 사망한다. 덩샤오핑의 첫사랑이고 첫 부인인 장시위안과는 이렇게 사별했다. 후에 2남 3녀를 두고 해로한 줘린(卓琳, 1916~2009)은 그의 세 번째 부인이다.

1997년 3월 중국 정부는 충칭을 쓰촨성에서 분리 직할시로 승격시킨다. 베이징 상하이 톈진에 이어 네 번째 직할시다. 서부대개발 교두보로 삼고 세계 제일의 산샤댐 수몰민을 정착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당시 덩샤오핑 주석의 사망 1개월 후였음을 볼 때 고향 충칭을 사랑한 덩샤오핑에 대한 오마주였다고 생각된다. 중일전쟁 기간에 전시수도로서 직할시 기능을 해오다가 전쟁이 끝난 후 쓰촨성의 일개 도시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고 다시 직할시로 태어난 것이다. 덩샤오핑에 이어 두 번째 경사였다. 신충칭(新重慶)이라는 말이 나올 만하다.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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