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대학생의 6.25 일지(日誌)-1
어느 대학생의 6.25 일지(日誌)-1
  • 글 박찬웅, 해설 송광호(전 재외동포 신문방송편집인협회 대표)
  • 승인 2022.06.29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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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웅(1926~2003, 전직 교수) 저자는 1950년 6.25 한국전쟁을 서울에서 맞았다. 당시 그는 서울대 법대 4학년 재학생이었다. 갑작스런 남침으로 미처 피난을 못 간 그의 집안 모두 서울에서 전시(戰時)체험을 겪었다. 그는 훗날 캐나다이민 후 당시 일지에 담은 내용 책자를 펴냈다. 그때가 90년 6월이다. 6.25 전쟁이 발발된 지 만 40년 되던 해였다.

그러나 당시 출판은 극히 소량의 초판인쇄에 그쳐, 일반인은 거의 이 책을 접하기 어려웠다. 그는 80년대 중반 토론토 교포사회 한인회장이 됐다. 그는 송광호 전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대표와는 나이가 20년 차이였으나, 초교 동문이어서 가까운 사이였다. 일제강점기 그는 경성사범학교를 나왔고, 해방 후 다음 해 서울에서 태어난 나는 서울사대부속초교를 나왔기 때문이다. 같은 계통의 국립학교 출신이라 늘 송 전대표한테 동창생, 동문이라 호칭하며 친절히 대했다.

송 전대표는 6.25는 만 4살이 되던 해다. 그는 당시 서울 근교로 피난해 겪은 일부 기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한강 철교가 일찍 끊겨 나룻배를 기다리던 일 등. 어머니와 형제들은 근처 시골에서 지내다 9.28 수복을 맞았다. 이때 종로구 안국동에 살던 친조부는 인민서(人民署)에 잡혀간 후 영영 소식이 끊겼다고 한다. 북강원도 대지주였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박찬웅 씨 집안 뿌리 역시 강원도(철원)였다. 박찬웅 6.25일지를 송 전대표가 발췌해 해설을 겯들여 소개한다. 당시 공산 치하의 생생한 서울 거리 등을 엿볼 수 있다. 일지(日誌)를 통해 잊힌 6.25 당시 내용을 재조명하는 데 의미를 두려 한다.[해설=송광호 전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대표]

‘한국전쟁’ 전집(김중희) 첫 서문 시(詩)인용으로 6.25일지(日誌)를 시작한다.

포성(砲聲)이 울고 가던 산(山)마루마다
호젓이 피는 꽃은 아기 진달래
강산(江山)은 옛 모습 말이 없어도
아 너만은 알리라 기억(記憶)하리라
자유(自由)위해 피 흘린 6월 그날을

오랑캐 무찌르던 골짜기마다
목메어 우는 새는 사랑 두견새
가신 님 그리워 슬피 울어도
아 너만은 알리라 증언(證言)하리라
조국(祖國)위해 몸 바친 정든 그님을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피난민들

<한국전쟁 발발>

1950년 6월 25일(일)

이날 서울에선 전국학도체육대회가 3일째 되는 날이다. 당시 서울대 법대 4년에 재학 중이던 나는 학생야구연맹의 이사장직을 맡고 있어 서울운동장에 대회는 빠지지 않고 보러 나갔다. 오후 2시경 누군가가 내일아침신문을 가지고 왔다. 1면 톱에 ‘괴뢰군 38선 전선에 걸쳐 침입’이라고 크게 뽑은 기사가 보였다. ‘이게 진짜 전쟁이 되는 것인가?’ 슬며시 걱정이 되어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니 모두 도무지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이승만정권이 항상 뽐내는 국군의 실력을 믿어서 태평인 것인지(당시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소장 등은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고 호언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태연하고 야구는 계속 진행된다. 그러던 중 얼마 안 가 당국으로부터 운동경기 중지 명령이 내렸다. 야구협회 상무이사 금철(琴徹) 씨가 마이크로 “지금 괴뢰군 침공으로 말미암아 일체 집회가 금지됨과 동시에 본대회도 정지됐으니 관중 여러분은 정숙히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스코어 북을 정리하고 운동장을 나섰다. 닻 마크가 달린 해군 트럭이 을지로6가로부터 서울운동장 쪽으로 질주해 왔다. 무엇인지 숨 막히는 듯 공기가 서울 거리를 휩싸고 있다. 을지로6가까지 오니 사람들이 라디오 가게 앞에 잔뜩 몰려서 뉴스를 듣고 있다. 나도 들어보려고 다가서니 “이상으로 임시뉴스를 마치겠습니다”라며 뉴스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바로 집(장충동1가 38-40, 서울운동장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으로 돌아왔다. 전기가 들어와 있으므로 라디오를 켰다. 행진곡이 울려 나온다. 낮에 전기가 들어오는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무슨 특별 방송할 때 이외엔 잘 없는 날인데, 사태가 급하구나 직감했다.

아침에 운동장에 갈 때 확성기를 붙인 육군 지프차 한 대가 “육해공군 장교와 사병은 전원 즉시 원대에 복귀하라!”고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길거리를 누비던 것이 생각났다. 저녁때 유엔 정전위 의장 중국 대표 어만 씨가 정전(停戰) 권고방송을 했다. 바로 직후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 대령이 ‘사력을 다해 싸우라’고 국민에게 격려했다. 저녁을 먹고 을지로6가까지 나가봤다. 군인을 만재한 트럭, 자동차, 지프차 등이 모두 전속력으로 거리를 달리고 있다. 군인트럭보다 민간트럭이 훨씬 많다. 군인들이 나와 지나는 민간트럭 등을 모두 징발하여 운전사들을 강제 취역시키고 있다. 그리고 모든 트럭이 경적을 울리는 대신 호각을 불면서 달리고 있는 점이다. 생전 처음 보는 긴장된 서울의 거리였다. 먼 데서 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잠시 있다가 같은 소리가 또 들린다. 옆에서 “대포소리구만”하고 태연히 말한다. 나도 그렇게 느끼고 있던 차였다. 전에 조부께서 인천에서 쏘는 포소리가 서울까지 들려 왔다고 말씀하시던 생각이 난다.

6월 26일(월)

전투는 의정부에서 전개되고 있다고 한다. 의정부는 38선과 서울과의 꼭 중간지점이다. 군 보도부 발표 이외엔 신문이나 라디오가 보도를 못 하니 뉴스의 신빙성을 알 수가 없다. 저녁 무렵부터 확연히 대포소리가 가까이 들려오는 것을 보니 의정부보다 가까이 온 것 같다. 그러나 서울이 그렇게 간단히 함락되지는 않겠지… 아침에 학교(종로구 이화동소재 서울법대)에 나가봤다. 학교는 조회 중이었다. 학교조회는 매주 월요일마다 하는 행사다.

6월 28일(수)

서울이 함락되는 이 날 나는 날이 밝아서야 잠이 깼다. 어제까지 들리던 포성에다가 총성까지 심하게 들리고, 우리 집 앞에까지 미아리 쪽으로부터 짐을 지고 걸어오는 피란민들로 가득 찼다. 정부는 어제도 하루 종일 라디오를 통해 서울시민들에게 “안심하라”고 방송했다. “국군이 해주(황해도)시를 완전 점령했으니 안심하라”, “의정부시를 탈환했으니 안심하라”, “미국이 원조할 것이니 안심하라”고 한다. 하지만 피난민 대열은 남쪽으로, 남쪽으로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25일 이후 정부가 오늘까지 전투상황에 대해 계속 발표하고 있으나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적군을 38선까지 완전 격퇴시켰다” “내일 미군이 참전하니까 하루 동안만 괴뢰군을 저지하라” “정부가 수원으로 천도한다” 발표했다가 잠시 후 그 보도는 오보라고 하니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자전거로 을지로6가까지 왔다. 왜 그런지 마음이 불안하다. 6가 로터리에 다 왔을 때 총을 들고 휘청거리며 도망쳐오는 국군 병사 2명을 봤다. “위험합니까?” 물으니 고개를 흔들며 골목길로 자취를 감췄다. 로터리를 도니 파출소가 비어있다. 순경들이 도망친 것을 보니 상당히 가까이 온 모양이다. 급히 을지로 서쪽으로 자전거를 몰았다. 사람들이 건물에 딱 달라붙어 북쪽을 응시하고 있다. 사람들이 별안간 골목길로 도망쳐 들어간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원남동 쪽에 탱크가 보이는데 어느 편 쪽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6.25 전쟁(납치 이동 광경)

그 순간 타타타 고막을 찢는 기총 소리가 나서 놀라 나도 모르게 3가 쪽으로 자전거 페달을 혼신의 힘으로 밟아댔다. 우리 정부는 탱크가 없으니 분명 그 탱크는 북한군 것이다. 나는 을지로3가에서 충무로 쪽으로 좌회전했다. 원래 충무로에선 자전거를 못 타게 돼 있다. 피난민 떼는 도망치는 양떼 모양 동쪽으로 충무로를 메우면서 파도쳐 온다. 나는 자전거 종을 울리며 혼자서 서쪽으로 역류해 갔다. 고막을 째는 기총소리는 계속된다. 충무로4가부터는 피란민이 서쪽으로 흐른다. 기진맥진 담을 실컷 빼고 집에 돌아왔다. 처음 나간 목적 등은 다 비산(飛散)하고 말았다.

나는 2층에서 자고 있었지만 전 가족은 지하실에 내려가 있었다한다. 아침식사 시간이 돼 지하실에서 나왔다. 대포와 기총소리를 반찬으로 밥을 먹으니 밥맛이 좋을 리가 없다. 식사 후 다시 밖으로 나갔다. 밖의 피란민 떼는 계속 밀려들었다. 포탄소리가 머리를 스치더니 가까이서 콰아앙… 하고 터진다. 식구들은 지하실로 들어갔다. 지하실에는 우리 식구 10명(부모와 8남매)과 부친 친구 가족까지 17명이 가득 찼다.

한참 콩 볶듯이 시끄러웠던 소총 소리도 뜸해졌다. 밖을 내다보니 사람들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길을 다니고 있다. 물어보니 인민군이 입성했다 한다. 모두 지하실에서 나왔다. 전쟁이 이렇게 간단한 건가 감탄했다. 동네 사람들이 을지로까지 상황을 보러 간다기에 나도 집을 나섰다. 6가 소방대 한 모퉁이가 파괴돼 있었다. 시체가 하나 있었고 출혈로 빈사 상태에 있는 사람을 한 명 봤다. 그 사람 옆에 한 남자가 그 상처를 손으로 막고 있었다. 흐른 피가 땅을 적시고 있고 사람들은 그저 보고 지나갈 따름이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비참하다. 탱크도 군인도 안 보인다. 구경꾼들이 여기저기 떼를 지어 서 있다. ‘붉은 깃발의 노래’를 부르는 젊은이들을 태운 자동차가 한 대 지나간다. 차에 서서 손을 흔들며 고래고래 소리 질러대는 청년은 출옥한 사상범인지도 모른다.

<공산 치하의 서울>

1950년 7월 18일(화)

오전에 종로구 통의동 고모 집에 갔다. 고모 집에 하숙하고 있는 친구 K와 같이 고모 집을 나와 서울역행 전차를 탔다. 회현동 양키시장과 서울역 앞의 폭격 맞은 자리를 구경하려고 서울역 앞까지 가봤다. 6.25이전의 서울역 앞은 기차를 기다리는 장사진과 행상들, 거지들로 서울에서 가장 혼잡한 거리였는데 지금은 역 주변에 사람 그림자라곤 보이지 않는다. 역의 모든 유리창은 한 장도 남김없이 다 깨져있다. 건물 천장에 군데군데 큰 구멍이 나 있다.

그런데 역 맞은편에 있는 건물들은 모두 말짱하다. 폭탄 파편 때문인지 소총알 자국 같은 것이 많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안에서 아이스크림 등을 팔고 있다. 도보로 남대문 옆을 지나 양키시장으로 갔다. 도중에 플래시 라이트(손전등)를 파는 아이가 있어 값을 물으니 3,500원이라고 한다. 인민군 병사들이 마구 사가니까 값이 뛰었다는 얘기다. 인민군 병사들이 시계와 만년필 노점상 앞에 많이 서 있는 것을 보니 1945년 해방 당시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병사들의 모습이 생각난다.

45년 8월 15일 나는 38 이북에 있었다. 8월 3일 서울을 떠나 선영(先塋)의 땅인 이북 강원도 철원에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으로 진주해 들어온 소련 병사들은 대부분이 머리를 빡빡 깎은 시베리아 유형수들이었다. 그때 소련 병사들은 시계를 좋아해 나는 길에서 양쪽 팔뚝에 시계를 3개씩 차고 있는 소련 병사들을 본 일이 있었고, 여러 가지 진풍경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양키시장에 와보니 대단히 한산했다. 그저께 폭격이 있었기 때문이고 또 시간이 너무 일러서였는지도 모른다. 전부터 사려다 비싸서 못 샀던 영문타자기가 똥값이 됐다는 말을 듣고 찾아봤으나 보이지 않았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미군이 참전했다는 사실을 서울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런데 전황에 대해선 인민군 발표와 돌아가는 소문 이외엔 알 길이 없다. 양키시장을 한 바퀴 돌아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무렵 비행기 폭음이 나서 쳐다보니 바로 상공에 새하얀 4발 폭격기 한 대가 보였다. 그저께와 어제도 대폭격이 있었던 지라 급히 시장길을 내려오니 순경(내무서원)이 모든 시민의 통행을 막았다. 한 가게에 들어가 사이다를 마시며 기다렸다. 약 30분 기다리니 해제가 돼 명동의 미락(味樂/식당)의 초밥 간판이 눈에 띄어 찾아들었다. 보리밥을 김으로 만 김밥을 8개 내주고 2백 원을 받는다. 속엔 맛이 변한 단무지가 들어있을 뿐이다. 신당동에 사는 후배 집에 좋은 라디오가 있어 그 라디오를 들으러 가면 좋겠는데, 전화가 고장 나 연락을 못 했다.

6.25전쟁 거제도 포로수용소
6.25전쟁 거제도 포로수용소

길에서 만난 한 동창으로부터 “대전도 함락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집에 와보니 경기 동창인 홍승면(나중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와서 동생과 대화하고 있었다. 같이 저녁밥(죽)을 먹고 밤 뉴스를 들어봤으나 별 소식이 없다. 전도가 막연하다. 그런데 요새 의용군 차출이 잠잠해져 좀 마음이 놓인다. 아침에 민청(民靑)에서 소집이 있어 동생이 나가봤다. 그저께의 폭격현장을 정리하러 갔다 왔단다. 12-3명으로 조를 짜 가지고 서울역 앞까지 갔다가 공습경보가 나서 되돌아왔다고 한다. 소위 ‘건설 공격대’라는 것이다. 요새 민청의 소집은 언제나 전원소집이 걸린다. 그런데 전원이라야 모이는 것은 언제나 20명 정도라 한다. 나는 한 번도 가 본 일이 없다.

오늘 김일성은 ‘이승만 괴뢰군 사단장 및 장교들에게’라는 제목으로 투항, 귀순을 촉구하는 권고문을 발표했다. 언제나 마찬가지로 선동적 문장이다. Big Brother 김일성이 직접 이를 방송했다는 사실과 “용감히 돌아오면 지금 당신들이 갖고 있는 그 직위와 계급을 그대로 보장해서 대우한다는 것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와 조선인민군 총사령부를 대표해 성명한다”고 말한다.

<공포의 거리 /계속되는 공습>

7월 23일(일) 비

아침 인민군 방송이 전주의 ‘해방’을 전한다.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이제 전라북도가 다 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인민군 작전은 중공군과 같이 무조건 침투하는 주의다. 식량과 노동력을 현지조달하면서 취약한 데를 찾아 마구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다. 밤새 거세게 퍼부은 비가 아침에는 멎었는데 아직 날씨가 험악하다. 악천후는 제공권을 쥐고 있는 우리 측에 불리한 것은 당연한 일.

유엔군은 지상군의 심한 열세를 공군활약에 기대하는 판국이다. 밤은 인민군에겐 낮이다. 완전히 제공권을 뺏기고 있는 인민군으로선 일체의 보급, 기타 수송이 밤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부대 이동, 무기수송 등 모두 밤중에 트럭과 화물차를 최대한으로 이용해 이루어진다.

요새 나는 일찍 자고 일찍 깨는 모범생이 돼 버렸다. 등화관제 때문에 빨리 자게 되고 빨리 깨게 된다. 아침 6시엔 일어난다. 전보다 한 두 시간 일찍 일어나는 셈이다. 아침 길에서 조간 파는 아이들 소리가 나면 사서 본다. 7시엔 라디오로 인민군총사령부 아침보도를 듣는다. 아침 9시와 10시 사이엔 영락없이 폭탄 소리, 고사포 소리, 폭격기의 폭음, 그리고 졸리 운 듯 공습경보 사이렌 소리가 순서대로 난다. 소리 순서가 모순돼 있어도 그 순서는 언제나 변함이 없다.

6월 25일에 전투가 시작되고 28일에 서울이 함락돼 7월 3일부터는 원뢰(遠雷)와 같은 은은한 포성도 그쳐 서울은 평온을 되찾았는데, 서울 거리에 총소리가 그치는 날이 없다. 인민군 병사들이 밤낮없이 쏘아대는 총소리다. 처음엔 그 총소리에 사람이 하나씩 죽는 것으로 알고 시민들은 전율했다. 그러나 곧 공포(空砲)인 것을 알았다. 병사들은 이 공포를 상호간 연락신호라고 설명했으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인민군 병사들은 툭하면 이 공포를 예사로 쏜다. 공포로 인해 사람이 죽는 것은 아니지만 시민들은 공포에 떤다.

인민보(人民報)의 제1면 톱에는 언제나 소련의 위성국가들로부터 김일성에게 보내온 격려편지가 실린다. 오늘은 웽가리아 민주여성동맹 평화대회로부터 온 편지가 실렸다. 내용은 언제나 천편일률적이다. ‘웽가리아’라는 국명에 흥미가 있다. 부다페스트라는 말이 나온 것을 보면 헝가리라는 뜻인데.

오후 3시에 일본 NHK 방송이 영덕(경상도)이 공산군에 함락됐다고 전한다. 중공군이 개입해 올 것에 대비해 미국이 경계한다고 한다. 재미없는 얘기뿐이다. 그러나 ‘2만7천톤 급 항공모함이 미 항공모함이 8일 7시간을 항해해 미국에서 일본에 도착했다’는 소식은 위안이 된다.

인민군이 서울을 함락하고 즉시 착수한 일이 선무공작이며 그중에서도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노래 보급’이었다. 노래들이 한두 가지 빼놓고는 모두 유치하고 저열하다. 그러나 이 노래 보급이 일반 대중에게 주는 영향은 크다. 특히 아이들에겐 노래로 세뇌가 잘된다. 인민군 병사들도 자신들을 고무한다. 해방의 노래, 애국가, 김일성 장군의 노래, 인민유격대의 노래, 인민공화국 선포의 노래 등이 있다.

걱정이 의용군 강제모집이다. 식량이 떨어지면 의용군이라도 나가야 밥을 먹을 게 아니냐는 말도 한다. 쌀값이 많이 올랐으나 아직도 시장에서 매매가 된다. 이번 의용군 모집은 당원들 모집이라는 것이다. 의용군 질의 향상과 당원의 정리라는 일석이조 효과를 노린 것이라는 소문이다.

밤 9시가 넘어 취침했는데 공습경보 사이렌이 났는데 폭탄투하 소리는 안 들린다. 비행기 폭음 속에 잠이 들었다.

6.25 전쟁 미국발행 우표
6.25 전쟁 미국발행 우표

1950년 7월 24일(월) 쾌청

아침 5시 반쯤 눈 뜸. 날씨가 쾌청. 쾌청. 항공대 만세. 이 쾌청이 서울탈환 시까지 계속되기를 원한다. 어젯밤 인민군 보도는 어제 평양에 대폭격이 있었다고 전한다. 5백 킬로그램 내지 1톤급 폭탄이 문화시설, 병원, 학교, 노동자, 농민, 부녀자, 아이들에게 마구 투하되었다고 보도했다. 오늘 아침 인민군 보도는 아주 씩씩하다. 어제 서부전선에선 광주를 점령했고, 중부전선에선 옥천, 영동을 점령했다고 한다. 서부전선에선 하루 40킬로미터를 내려가고 있다는 얘기다. 이대로 간다면 순천, 여수도 닷새면 떨어지겠다. 그러면 목포와 부산 사이가 끊어지게 된다. 만약 인민군이 2주일 내 추풍령을 넘는다면 유엔군으로선 대위기에 놓일 것 같다. 인민군은 상당히 세다. 내가 이제까지 전투상황을 써 놓고 있던 내 자신의 백지 지도엔 전주 이남은 들어있지 않았다. 인민군이 그 아래까지 내려가지는 못할 것이라고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남한 지도를 그리고 점령지에 빨간 표시를 하고 보니 아직 인민군 침범을 받지 않은 데는 경남뿐이다. 경북도 영덕과 문경을 뺏겼으니 앞으로 더욱 침투당할 가능성이 크다.

상당히 가까운 데서 폭탄이 작렬한다. 집이 쿵쿵 울린다. 그러나 식구들 얼굴에 걱정하는 빛이 없다. 오전 11시경에 또 폭격이 왔다. 더위는 몸을 극도로 피곤케 한다. 창문이 열리게 돼 있지 않아 늘 닫아놓으므로 방은 찌는 듯 덥다. 머리도 두 달이나 안 깎고 있어 어디 가서 거지를 시작해도 괜찮을 정도다.

1950년 7월 27일(목) 쾌청

아침에 민청원은 나오라는 소리가 들리기에 식사 후 혜화동의 친구 홍승면(나중 동아일보 편집국장) 집으로 피해갔다. 을지로6가에 왔을 때 또 공습경보가 난다. 경보가 나면 인민군과 내무서원(순경)은 모든 교통을 정지시켜 버린다. 자동차, 전차, 마차, 짐차, 자전거와 모든 통행인을 세워놓는다. 이때까지의 공습경험으로 우리는 유엔기가 서울 시가를 해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공습경보해제는 비행기가 사라진 지 15분이나 20분이 지나야 겨우 울린다. 경보나 경보해제나 모두 느릿느릿하다.

창경원 앞을 걸어서 문리대 북쪽의 홍승면 집으로 갔다. 그는 산뜻하게 이발을 하고 앉아있었다. 그의 침대에 누워 방에 흩어져 있는 6월 초, 중순 발행의 아사히(朝日)신문과 요미우리(讀賣)신문을 읽었다. 승면이 어머니가 차려주신 보리밥을 나눠 먹었다. 그의 집 마당에서 딴 토마토도 먹고 저녁 7시경 집으로 돌아왔다.

7월 28일(금) 흐림

날이 흐려 며칠간 계속된 혹서에서 벗어난 느낌이다. 아침 인민군 보도가 여수, 순천의 함락을 전한다. 10살 아래 동생과 장기를 뒀다. 시간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말은 현재 우리겐 합당치 않는 말이다. 무엇이든 시간을 헛되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지도 모른다. 아침에도 폭격이 몇 번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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