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대학생의 6.25 일지(日誌)-2
어느 대학생의 6.25 일지(日誌)-2
  • 글 박찬웅, 해설 송광호(전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대표)
  • 승인 2022.07.06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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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찬웅(26년생) 씨는 지난 1975년 토론토에 이민했다. 당시 만 49세 나이로 캐나다이민 연도는 나와 같다. 그의 선친고향은 (북) 강원도 철원군(철원은 남북으로 나뉨) 지주 집안에서 장남(8남매)으로 태어났다. 지금 고향은 비무장(非武裝)지대로 옛날에는 반남(潘南) 박(朴)씨 집성촌(集成村)이었다고 한다. 

그는 서울 종로구 관훈동의 약 5백 평 되는 집에서 성장했다. 큰 집에 행랑(行廊)채가 둘이나 있었다 한다. 일제 강점기 서울은 청계천이 동서로 관통돼 조선인과 일본인 거리가 확연히 구분돼 있었고, 북쪽은 조선인 거리, 남쪽은 일본인 거리였다. 조선인 거리는 관훈동, 인사동, 수송동, 견지동, 경운동 등이 속했다.

박찬웅은 경기 중과 서울대 법대, 뉴욕대학교 행정대학원을 나와 성신여대, 인하대 부교수를 지냈다. 캐나다 이주 후부터는 민주인권 운동 및 반독재투쟁으로 나머지 인생을 살았다. 늘 책 원고를 쓰는데 빠져들어 수필집, 역사소설, 기록물 등 10권 이상의 책을 발간했다.

그는 1987-88년에 토론토 한인회장을 역임했다. 캐나다 교포사회의 ‘살아 있는 양심’으로 불리기도 했다. 2006년(만 79세) 새벽 귀가 도중 노상강도를 만나 머리에 중상을 입고 아깝게 세상을 등졌다. 

내 집안 뿌리 역시 북강원도(회양군)여서 그와는 관련되는 부분이 있다. 서울 중구 예장동에서 태어난 나(46년생)와 초등학교(국립)가 같아 가깝게 지냈다. 일제 당시 경성사범이나 해방 후 서울사대 부속 초등교는 귀족학교로 소문나 있었다. 입학이 힘들었고, 당시 서울 장안의 내로라하는 집안 자녀들이 대부분 이 학교 출신이다.

그와 내 작은 넷째 친삼촌(육사 2기)과는 경기 동기동창이다. 삼촌은 6·25전쟁 때 헌병 사령관이었고, 박찬웅 씨는 전쟁 시기 50년 10월 육군 통역장교로 3년간 근무했다.

한편 그의 박씨 집안에는 가보(家寶)로 훈민정음 원본이 대대로 전해 내려왔다고 한다. 6·25전쟁 시 소실(燒失)위험 때문에 부친 박정서 국어학자는 그 원본을 최남선(崔南善, 1890-1957) 선생에게 넘겼고, 그것이 다시 ‘최남선 문고’로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는 것.

그의 모친 여윤숙은 경기도 양평 양수리 근처에서 빈한(貧寒)하게 살았다. 독립운동가 여운형(呂運亨) 선생과는 사촌지간이다.[해설=송광호 전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대표]

교각만 남은 한강다리
교각만 남은 한강다리

7월 29일(토)

바람이 좀 있어 그리 덥지는 않다. 오늘 아침 뉴스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1) 27일에 구례(전라도)를 점령했고 28일에 광양을 점령했는데 미군 저항이 완강했다. 2) 어제와 그제의 평양 폭격은 야수적 맹폭으로 피해가 격심하다. 3) 기타 전선에선 아무런 진전이 없다. 구례와 광양의 점령을 계산해보면 2일간에 10km 전진한 폭이다. 26일까지 하루에 30km 전진한 것과 대비해보면 이것은 큰 변화다. 미군이 이제 투입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전 전선에서 인민군이 크게 진격하기 어려우리라. 

이제까지 인민군 보도에서 “각 전선에서 인민군은 남진을 계속하고 있다”는 말이 빠진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아무런 전진이 없다”라고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 이 말은 앞으로도 별 진전이 없을 것임을 암시하는 말로 들린다. 보도는 상당히 정직한 것 같다. 

오늘은 공습이 없었다. 16일 이래 공습이 없기는 오늘이 처음이다. 공습경보발령방식이 오늘부터 달라졌다. 이제까지는 비행기 폭탄이 투하한 후에나 발령이 났는데 오늘부터는 비행기가 아직 보이지 않는데도 발령이 났다. 아마 방공감시초소 같은 것을 새로 설치했나 보다. 그러나 공습경보가 세 번이나 울렸는데도 비행기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 민청(民靑)에서 동네를 호별 방문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젊은이들을 한 명씩 지명 호출하여 의용군으로 갈 것인지, 건설돌격대로 갈 것인지, 또는 시외로 전출할 것인지 그중 한 가지를 택하라고 강요하고 있다고 한다. 전출은 할 수가 없다. 의용군도 갈 수 없다. 남은 것은 건설돌격대인데 그들 말을 믿을 수 없다. 중압감을 느낀다. 
   
매일 불안한 일뿐이다. 그들은 내일 아침 집집마다 가택수사를 하기로 하고 오늘 호별방문은 중도에서 그쳤다고 한다. 가족이 모여서 대책을 숙의했다. 민청에서 일하고 있는 남동생 친구가 몸이 약한 동생더러 민청에서 일하라고 했다며, 동생은 민청에서 일하기로 했다. 그러나 서울이 유엔군 수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민청에서 일했으니, 빨갱이”라고 해서 학살당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서울 시민 가운데 젊은이들 거의가 의용군 아니면 민청에서 일하고 있지 않은가. 나도 몸이 쇠약하니 위장병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는 것으로 하고 버텨볼 때로 버티기로 했다. 오전 10시경 다른 친구를 찾아가는데 (그 집은 역산(逆産)으로 지정돼 가구가 모두 압류당했다) 그 집에 가려면 동대문병원(현 이대부속병원)의 긴 언덕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데 찾아가기가 좀 꺼림칙하다. 동대문까지 와보니 병원 입구에 3명 인민군 병사가 ‘경무원’이라는 완장을 차고앉아 있다.

그 앞을 지나 P 선배(법대 동문) 집으로 갔으나 사람이 나와서 없다고 한다. 의용군에 나갔다고 한다. 처음에는 설마 했는데 차차 듣고 보니 사실이다. 5일 전 학교 민청에서 나갔다는 것이다. 현재 성신여중에 합숙 중이라 한다. 마음이 약하니까 거절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간 모양이다. 아니 마음이 강해도 학교에 나가면 무조건 끌려나가게 돼 있으니까 일단 학교에 나가면 끝장이다. 거기서 못가겠다고 하면 당장 반역자로 몰린다. 그러니까 학교에 나가지 말아야 한다. 착하고 성실한 사람일수록 학교에 나가보게 되는데 그런 사람이 더 손해를 보니 이것이 모순이 아닌가. 

그 길로 신창동(법대 동기, 나중 판사) 집에 갔다 이 친구도 집에 없다. 있으면서 없다는 것 같아 내 이름을 댔는데도 없다고 한다. 헌책방이나 가보려고 충무로로 갔다. 충무로 입구에서 5가까지 쭉 걸어 봤으나 열려 있는 헌책방은 두 집밖에 없었다. 열린 집이라도 주인이 혼자 쪼그리고 앉아 있을 뿐 손님이 없다.

그 밖의 모든 가게가 거의 닫혀 있다. 열려 있는 집은 대개 아이스크림 가게뿐이다. 헌책방의 책들을 훑어봤으나 눈에 띄는 책이 없다. 양키 시장에 들러 봤다. 여기는 별천지로 북적대며 사람들이 끓고 있다. 타자기가 한 10대쯤 나와 있었지만, 그냥 지나쳤다. 한국은행 앞에서 전차를 탔다. 우체국 앞에 공고문이 붙어 있다. ‘3.8 이북과 이남 점령지역을 대상으로 통상우편을 취급한다’고 한다. 종전 우표는 사용할 수 없고 새 우표는 아직 안 나왔으니 현금으로 편지를 부치라고 쓰여 있다. 저녁에 한 친구가 “동회에서 나오라고 해서 갔다가 의용군으로 강제로 끌려가게 됐다”고 고민한다. 헤어질 때 “우리는 결코 안 죽을 것이니 얼마 후 다시 만나자”고 악수했다. 그러나 앞의 일을 어떻게 알겠는가. 아무도 알 수 없는 인간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다. 

<가택명도(家宅明渡)령>

7월 30일(일) 흐림

지난 밤중에 유엔기가 세 번 내습했다. 밤에 폭격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포탄투하 소리를 두세 번 들었다. 인민군이 지상으로부터 조명탄을 쏘아 올리고 있었다.

아침에 우리 동네 인민위원회가 우리 집의 가택(家宅)명도를 명령해 왔다. 언젠가는 그런 일도 있겠지 하고 각오는 했었지만, 서울 시내에서 하필이면 우리 동(洞)이 맨 처음 걸리다니. “8월 5일까지 집을 비우고 시외로 전출하라”는 것이다. “북쪽으로 가는 사람에게는 교통 등 각종 편의를 제공하겠으나 남쪽에 남는 사람에 대해선 아무 편의도 안 봐 준다”고 한다.

전출명령을 낸 이유로서 그들은 공습을 내걸고 공중전을 내건다. 얼마 전 자전거와 짐 구루마(손수레)의 큰길 통행금지령을 내릴 때도 도시 미관을 내걸었다. 서울 폭격이 시작된 지 이미 한 달이 지났지만, 유엔기가 서울 시가지에 단 한발이라도 폭탄을 던진 일이 없다. 공산군 비행도 우리 시계(視界)에 단 한 번 나타난 일이 없다. 그런데도 ‘공중전이 있을 거니까 집을 버리고 5일 내로 나가라’고 한다. 

혜화동 숙부 집에 갔다. 숙부는 부재중이었고 사촌 동생이 근로대로 나갔다가 어제 풀려나왔다고 한다. 몸이 허약한 자 52명이 근로대로부터 제대되고 나머지는 모두 인민군에 편입됐다는 것이다. 아마 나이가 어려서(15세) 몸이 약한 자로 분류된 모양이다. 재수가 좋았다. 

그 사촌 동생이 인민재판이 벌어졌던 얘기를 한다. 근로대에 나온 서울대 문리대 학생 한 명이 인민재판을 받은 것이다. 전에 좌익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얻어맞은 일이 있는 그의 친구가 그를 고발한 것이다. 그 친구가 그 학생의 죄상을 말하고 모든 근로대원들에게 처치 여부를 물으니 “죽여라, 죽여라!”하고 소리쳤다 한다. 인민군 병사에게 통고하니 인민군 병사가 나와서 “다시 한번 잘 생각해서 결정해 달라”고 모든 학생에게 말했다는 것.

그러자 학생들이 또 “죽여라, 죽여라!”고 소리치므로 그 학생에게 유언을 말하라고 했다 한다. 그러니까 그 학생이 “나는 과거 잘못을 뉘우치고 그 죗값을 치르기 위해 지금 의용군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죽으라고 한다면 당연히 죽어야 합니다. 여러분 건투와 하루빨리 전조선의 해방을 빌 뿐입니다. 조선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말하고 바로 처형됐다는 것이다. 

죽음을 앞에 놓고 그의 마지막 한 마디는 진심이었는지, 살기 위한 동정 작전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떻든 학생들은 그를 살렸어야 했다. 아니, 학생들에게 이런 재판을 할 권리가 없다.

피난광경
피난광경

<불심검문>

8월 1일(화) 갬. 소나기. 흐림. 

아침 일찍 자전거로 혜화동 친구 집으로 가다가 도중에 효제인민위원회 앞에서 불심검문에 걸려 조사를 받았다. 그 앞을 지나는 젊은이는 보행이고 자전거고 다 잡아들였다. 내게 맡겨 둔 원고 한 뭉치를 그에게 돌려줄 생각으로 셔츠 속에 감추고 가는 길이었다. 빈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 불심검문에 걸리기 쉽다고 하여 자전거 뒤 침대에는 고무줄 뭉치를 잔뜩 감아 놓았다.

친구 원고는 자유주의 색채가 강하고 영어로 쓴 것이어서 들키기만 하면 그나 나나 최소한 며칠간 교화소(유치장)에 갈 것은 각오해야 하며, 교화소는 바로 의용군 나가는 대기소 같은 데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왜냐면 교화된 증거는 의용군지원으로 확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쓰고 있던 밀짚모자를 가슴에 대어 원고 뭉치로 가슴이 불룩 나와 있는 것을 감추면서 인민위원장이 앉아 있는 큰 테이블로 가까이 갔다. 길에서 마구 잡혀 들어온 젊은이들은 모두 한차례 조사를 받고 의자에 앉아 있다. 나이 40이 조금 넘어 보이는 마차꾼 같은 사람이 인민위원장이다.

“지금 사무소 앞을 지나가다 세워서 들어왔습니다.”
“어디로 가시는 길이지요?” 그의 말씨는 아주 공손하다.
“시외 전출명령을 받아 짐을 자전거로 혜화동에 사는 삼촌 댁으로 옮기는 중입니다.” “서울 사람에게 전출하라고는 안 했을 텐데…”
“장충동1가는 전부 전출명령이 내렸습니다. 장충동1가뿐이 아니라 그 부근은 전부 8월5일까지 모두 전출하게 돼 있습니다.” 
“말씨가 서울 사람 같지 않은데…” 내가 순 서울 토박이인데 이제 공연한 시비를 걸기 시작한다.
“안 그렇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 서울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서 산일이 없습니다.” 내 말은 누가 들어도 표준말이다.

나는 오른손으로 모자를 쥐고 오랫동안 왼쪽 가슴을 감추고 있는 것이 의심을 받지 않을까 하고 속으로 큰 걱정을 하고 있었다.

“나이가 몇이요?” 가장 곤란한 질문이다.
“28세입니다” 세 살 올려서 대답했다.
“왜 이제껏 의용군도 안 나가고 건설공격대에도 안 나갔지요?” 그는 의기양양해서 묻는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같이 의용군에 지원했었는데 몸이 나빠 심사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시골로 가 몸을 튼튼히 해서 다시 의용군에 지원할 생각입니다.”
“자전거에는 짐이 실려 있겠군요?”
“네, 밖에 세워두고 있습니다.” 자전거 짐대에는 고무줄 묶음이 한 줌 매여 있을 뿐이다.
“좋습니다. 돌아가시오.”

‘아이고 살았다’하고 사무실을 나와 혜화동 쪽으로 달리니 저 앞에서 또 자전거를 세우고 있는 광경이 보인다. 그래서 쓱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

친구에게 가서 우리 가족이 8월 5일 안에 서울을 떠나게 됐다고 알려주고 숙부댁에 갔다가 아침 10시가 넘어 집에 돌아왔다. 오후엔 충무로의 외숙모집에 인사하러 갔다. 청탄의 외숙부 집으로 전출키로 했기 때문이다. “비어 있으니까 가서 맘대로 쓰라. 그러나 가는데 고생이 많을 것”이라 하신다. 외숙모집에선 미군용 단파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전쟁 포로
전쟁 포로

천둥소리가 요란하다가 날이 컴컴해지고 소나기가 퍼부었다. 천둥소리인지 폭격 소리인지 구별이 안 된다. 오늘부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소련의 말리크대표 사회로 열린다고 한다. 오늘은 라디오에 잡음이 많아 NHK의 제1 방송이 잘 안 들린다. 제2 방송을 들어보니 야구 중계를 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천하태평으로 야구를 즐기고 있는 것이 부럽다. 

내 인생관은 이번 전쟁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후 나는 무엇이 되겠다는 출세욕이나 무엇을 얻겠다는 물욕을 일절 갖지 말자고 다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을 할 수 있다면 하루 세끼 보리밥 먹고 비 안 맞을 방 하나만 있으면 무엇이 더 필요하랴! 

용산방면을 빼놓고는 서울 시내에 대한 공중으로부터 공격은 없다.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그러므로 공산당의 행정기관이 활발히 움직여 도무지 견딜 수가 없다. 죽을 만치 괴롭다. 시가지를 폭격해 행정 질서를 교란시켜 일하고 있는 놈들에게 불안감을 주고 서울 분위기를 좀 술렁거리게 해줬으면 좋겠다. 서울 시민들은 시가지가 절대로 폭격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따라서 아무도 공습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방공호를 파라는 상부 지시에 모두 말은 못 하지만 콧방귀를 뀌고 있다.

나는 많은 사람이 자포자기적인 기분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내가 죽어도 좋으니 서울 시가지를 마구 폭격해 줬으면 좋겠다. 이건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그러나 유엔군이 정말 시가지를 폭격한다면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피난준비>

1950년 8월 2일(수) 소나기

내일 아침 일찍 청탄(경기도 광주군 남종면 수청리)으로 출발하기로 해 오늘은 아침부터 짐을 꾸린다. 처음엔 짐수레 한 대로 가기로 했는데 한 대론 도저히 안 되겠어서 두 대로 가기로 했다. 나는 나대로 짐을 정리했다. 일체의 편지를 태워버리고 책이나 원고나 자질구레한 물건 중 없애기 아까운 것을 천장 위에 숨겼다.

아침 민청으로부터 15세 이상 35세까지의 남자 전원의 소집이 있었다. 우리 형제는 천장 위에 숨고 이미 전출했다고 말했다. 신문을 보니 인민군 점령지구 내에서 실시될 선거 얘기로 가득 차 있다. 아직 서울에서는 실시되지 않고 지방에서만 한다고 한다. 

입후보자는 상부(?)에서 지명한 자만이 나올 수 있다. 이(里)인민위원회 정원이 10명이면 10명의 입후보자 이름이 상부로부터 발표된다. 국민들은 그 입후보자에 대한 가부만을 투표로 결정한다. 그 방법은 선거장에 흑과 백의 상자를 마련해 놓고 투표자는 자기가 그 10명 입후보자를 좋다고 생각하면 백 함에, 싫다고 생각하면 흑 함에 미리 받은 표를 넣는 것이다. 

18세 이상 모든 남녀는 선거장에 동원된다. 공산 치하에서 기관의 권고(?)에 따르지 않는 자는 모든 고역과 죽음까지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입후보자 10명을 한데 묶어놓고 투표시킨다는 자체가 이미 틀린 것이다. 게다가 흑백 함이라니 이는 난센스의 극치다. 그들이 입후보자를 상부에서 지명하는 이유를 1) 난립 방지, 2) 전 인민이 이해대립이 없고 이해가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고, 3) 개인보다 상부 기관이 사람을 더 잘 감별할 수 있다는 이유라 한다. 

미군 부산상륙
미군 부산상륙

<피난길>

1950년 8월 3일(목) 갬 

그저께 효제인민위원회에 잠시 잡혔던 이유가 판명됐다. 8월1일부터 동회별로 할당된 의용군을 각 동회가 통행인을 잡아 채우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길을 걷는다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이제까지 써 둔 일기를 오늘 아침까지 결정을 못 하고 있었는데 아침에 메모해 둔 쪽지는 모두 1층 천장 위에 던져 버리고, 원고지에 쓴 것은 둘둘 말아서 끈으로 묶어 2층 천장 위에 던져놓았다. 가족은 동대문으로 나와 광나루 행 기동차를 타고(당시 동대문에서 뚝섬 행 기동차와 광나루 행 기동차의 두 선이 있었다) 광나루역에서 우리 짐수레와 만나기로 했다. 두 대 수레 중 한 수레는 내가 뒤에서 밀고 동생이 자전거로 앞장을 선다. 

왕십리까지 오니 좀 마음이 놓인다. 서울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시골에서는 길에서 사람을 잡지는 않겠지. 이때 앞에서 짐 검사가 있다고 한다. 이것은 예기치 않던 일이다. “군수품과 미제품은 다 내놓고 가시오.” 북에서 온 내무서원이 지나가는 짐수레마다 다 세워놓고 이렇게 말한다. 군수품이란 무엇이든 국방색인 것을 말한다. 또 비싼 물건은 다 군수품이다. 어린이 녹색 비옷으로 구루마에 실은 짐을 덮고 왔는데 이것도 내놓으라고 한다. 제복을 입은 내무서원은 인간 같지가 않다. 

서울 길을 벗어나니 길이 나빠진다. 짐수레 뒤를 미는데, 여간 힘이 들지 않는다. 다리가 폭격으로 끊겨 있어 진흙으로 된 비탈길로 돌아가느라고 혼이 났다. 우리가 가는 도중 길가의 어떤 집 아낙네가 바께쓰(양동이)에 물을 떠 가지고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의 목을 축여준 것을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일이었다. 

광나루에서 기동차를 타고 온 식구들과 만나 점심을 먹었다. 기동차는 너무 사람이 꽉 차서 아이들이 울고불고했다고 한다. 

잠시 쉬었다가(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계약하고 탔다. 형편없이 비싼 값이다. 공산 치하가 됐지만 아직은 수요공급의 자본주의 원칙에 따른다. 같은 방향으로 나가는 K 씨 너와 두 배로 같이 가기로 했다. 배는 청탄까지 못 가고 두머리까지만 간다고 한다. 계약하고 배를 타니 바로 뱃삯을 내란다. 그 말투 또한 굉장히 횡폭하다.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차츰 이야기를 들어보니 두머리까지 짐을 조사하는 인민군의 초소가 한 군데 있는데 거기서 심한 약탈을 한다는 것이다. 

“그 배 대시오!”라는 소리에 깜짝 올라 쳐다보니 총을 메고 완장을 찬 청년 2명이 강가에 딱 버티고 서 있다. 그 옆에 젊은 여자도 하나 서 있다. 그들 완장에는 ‘자위대원(自衛隊員)’이라고 묵서(墨書)가 돼 있고 거기에 빨간 도장이 찍혀 있다. 동네마다 자위대가 생겨서 동네 청년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이다.

“어디 가는 거요?” 누구 것을 약탈한 것인지 미제 색안경을 쓰고 허리에 탄대를 차고 총을 철럭거리면서 건방지게 생긴 20세 전후의 청년이 묻는다. “청탄 쪽으로 전출해 가는 길입니다.” 대답하는 K 씨는 비대한 편이다. 이 공산 치하에선 비대하다는 것도 죄악이 된다. 몸이 비대한 것은 인민을 착취한 심볼로 보기 때문이다. 

“흥, 부자구나!” 증오하듯이 말한다. “증명서를 내놓아?” 순경이 도둑을 잡았을 때의 말투다. 표준말을 쓰는 것을 보니 서울이나 그 근방 놈이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그런데도 평안도 사투리를 간간이 섞어서 쓴다. 인민군이 석권해 들어오니까 평양 사투리를 흉내 내는 것이다. 참으로 불쾌한 현상이다. 

배의 짐은 모두 땅에 올려졌다. 아주 세밀한 검사가 시작됐다. “아이고, 좋은 화장품인데…” “이 와이셔츠가 너무 화려하지 않소?” 조소하며 짐을 조사하는 내내 계속된다. 여성 동맹원이 째지는 목소리로 “이 물건들은 모두 착취한 것”이라고 떠들어댄다. 

이 민청원이 우리 배로 왔다. “거짓말하면 죽인다.” 색안경이 총을 갖다 대며 만나는 사람마다 죽인다고 소리친다. 민청원은 조사를 하다가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이것 하나 가져도 되겠지요?”하고 묻는다. 여기서 안 된다고 말할 장사가 있겠는가. 일상준비약품이 가득 들어있는 트렁크를 몰수당하고, 고급 양말 몇 켤레와 셔츠를 뺏겼다. “카메라가 있으면 내놓으라”고 몇 번씩이나 말한다. 굉장히 갖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우리 직업을 일일이 캐물었다. 우리 3형제가 다 대학생이라니까 여맹원이 두 손을 번쩍 쳐들고 크게 몸짓하며 “모두 훌륭한 분이시군요. 큰 부자군요”라고 떠든다. 형용할 수 없는 고약한 분위기가 조성된다. 모친이 여운형 씨 종매(從妹, 친사촌 누이동생)이므로 부친이 그 얘기를 하고 “우리는 모두 인민공화국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왜 죽은 사람을 끄집어내는가! 죽은 사람이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어?” 하고 큰소리를 친다. 

그렇게 난리를 치른 후 우리는 짐을 다시 꾸려서 싣고 떠났다. 도시미에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 

평양에서 국군입성 환영
평양에서 국군입성 환영

1950년 8월 4일(금) 갬

우리 배가 두머리 까지 밖에 못 간 이유는 두머리를 지나면 바로 배 등록증 검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 묵은 도시미의 외딴집 주인 배는 이미 등록이 돼 있다고 해서 청탄까지 가기로 했다. 아침부터 해가 쬐어 팔다리가 불고기같이 빨갛게 익었다. 낮부터는 쓰리고 아프기 시작했다. 모두가 인민군에게 짐 검사당할 걱정만 머리에 가득 차 있다. 

유엔군 비행기가 계속해서 하늘을 난다. 대단히 저공으로 스쳐 가므로 상당히 무서운데 사공은 아직 이런 배를 공격한 일이 없다면서 태연하게 노를 젓는다. 산 저쪽을 폭격하던 3기의 전투기가 우리 탄 배 위로 와서 초저공으로 선회하기 시작하자 사공이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나도 겁이 났다. 그중 한 대가 이상한 선회를 하더니 급강하, 굉음을 내면서 기관포를 쏘아댔다. 배에 납작 엎드려서 쳐다보니 기차 터널 속으로 쏘아 넣은 것이다. 터널 입구에서 연기가 홱 피어오른다. 2번 기가 또 급강하. 이번엔 기관차에 기총소사를 가했다. 기관차 아래에서 연기가 올랐다. 우리 배 바로 위에서 발사하니 무섭기 그지없다. 

“저기 콘크리트 건물이 보이지요. 저기가 인민군이 짐 검사한 뎁니다.” 사공이 가르치는 쪽을 보니 멀리 오른쪽으로 집이 보인다. 가족 전부가 긴장한다. 부자라고 지목받거나 반동이라고 지목받으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나와 동생들을 포함해 젊은이 4명이 있으니 그들이 볼 때 이것은 의용군 기피자임이 뻔하다. 가까이 올수록 가슴이 떨린다. 

“삐삐…” 하고 호각소리가 들려온다. 소리 난 왼쪽 강변을 보니 나무 밑에 사람들이 몇 명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그들이 우리를 부른 것인지 확실치 않다. 호각소리는 다시 나지 않았다. “우리 배를 부른 것인지?” 요새 호각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기관원임이 틀림없다. 그러니까 우리를 부른 것이라면 빨리 가봐야 한다. 사공이 “부르셨어요?” 소리를 질러봤다. 그래도 아무 대답이 없다. “준비는 돼 있으니 하여튼 가봅시다.” 소심하신 부친이 말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불안해하며 강가에 배를 댔다. 

“사공 나와라!” 아직 20도 안 돼 보이는 거만한 낯짝의 젊은이가 40이 넘은 사공에게 소리쳤다. 완장을 차고 있을 뿐 총은 가지고 있지 않다. “네 양심을 보려고 여기 가만히 앉아 있던 거다. 능글맞은 놈. 왜 불렀는데 빨리 오지 못해! 여기서 검사가 있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왜 살짝 도망치려는 거냐? 배는 몰수한다. 너 같은 놈은 내무서로 데려가야 한다.”

부친이 내려서 자꾸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그 젊은 놈을 치켜 올려 기분을 맞추셨다. “배의 통행은 일절 금지다. 모두 배에서 내려 육지로 가라.”

건너편 모래사장에 짐을 풀고 가까운 마을에 가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마을에 가서 지게꾼을 불러왔다. ‘알미’라는 작은 마을에 가서 하룻밤을 잤다. 청탄까지는 10리라고 한다. 이로써 일단 우리의 뱃길은 끝난 것이다. 힘들고 공포에 찬 여행이었다. 사흘 동인 짐수레를 끌고 배를 밀고, 배에서 내려선 강가로부터 알미마을까지 좁은 모랫길로 리어카(손수레)를 밀었다. 덕분에 밥맛은 좋았다. 

저녁 식사 후 아픈 다리를 뻗어 거적 위에 누우니 은하수 속에 들어있는 북십자성과 견우직녀가 아주 가깝게 보였다.
     
** 저자 가족은 다음날(8월 5일) 겨우 목적지인 청탄에 도착해, 두 달 동안 피난 생활을 하다가 9.28 수복 후 10월 초에 도보로 서울 장충동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도중에도 군데군데 동네의 자위대라는 청년들에게 신분을 조사받느라고 괴로움을 당했다고 토로하고 있다. 지면 관계상 6.25 발발 후 40일간 서울 생활만 주로 게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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