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청년이 겪은 해방과 6.25 당시 북한 실상 체험담– 1
북한 청년이 겪은 해방과 6.25 당시 북한 실상 체험담– 1
  • 글 맹동욱, 해설 송광호(전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대표)
  • 승인 2022.07.14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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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동욱 러시아 공훈예술가의 북한 수기

지난 ‘박찬웅의 6.25일지(日誌)’(링크)는 예상외의 관심을 받았다. 6·25전쟁은 너무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오늘에 와서는 빛바랜, 아예 관심 밖 얘기처럼 보인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6.25는 그저 지난날 우리끼리 골육상쟁의 뼈저린 사연과 기억으로 남겨져 있을 뿐, 별 의미가 없는 듯하다. 그들 일부(40~50대)에겐 북한의 엄연한 ‘남침’ 사실조차 반대로 알고 있는 경우도 발견한다.

30년 전이다. 모스크바 초대 특파원(92년부터)으로 상주하던 시절이다. 1993년 한 고려인이 주러한국대사관 기자실로 찾아왔다. 모스크바 교외에 산다는 ‘맹동욱’ 러시아 공훈예술가였다. 그는 자신의 서명(sign)이 담긴 책을 건네며 “내 지난날을 적은 자서전(自敍傳) 내용이오”라고 말했다. 책 제목은 <모스크바의 민들레>. 맹동욱 자전소설이라 적혀 있었다.

나는 그의 책을 바로 읽지는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그의 책을 들추다가 알게 됐다. 말이 자전(自傳)소설이지, 그가 겪은 일종의 기록물이란 것을. 그가 북한에서 성장할 때의 배경과 8·15 광복부터 6.25 관련한 당시 그가 경험한 북한 주요 내용이 비교적 상세하고 정확하게 서술돼 있었다. 수려한 문장과 어휘 구사도 뛰어났다.

알고 보니 그는 고향 성진(함북) 시 배영중학교 시절부터 글짓기에 뛰어난 자질을 인정받고 있었다, 교내 게시판에는 늘 그의 글이 붙어 있고, 문학작품 콩쿨대회에 당선되는 등 문학적 소양을 빛냈던 젊은이였다.

그 후 격동의 세월을 겪으며 그는 1950년 6.25 당일엔 ‘아오지’ 정치범 형무소에 잡혀 있었다. 세상에 악명 높던 아오지 형무소. 그곳에서 매일 죄수(정치범)들이 죽어 나감을 목격한다. 그는 남한으로 월남하려다 체포된 죄, 파출소에서 무기를 훔친 죄, 감옥에서 탈출한 죄, 중국으로 탈북, 월경을 시도하다 잡힌 죄 등으로 결국 아오지 정치범형무소에 갇힌다.

하지만 6·25전쟁 당시 인민군이 밀릴 때 감옥에서 의용군으로 차출돼, 우여곡절 끝에 운 좋게 구소련 유학생이 된다. 그러나 1957년 북한소환 명령을 거부하고 소련 땅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25년간 청년극장 총감독과 연극대학 교수 등 실력을 인정받고, 1978년에는 구소련정부로부터 ‘러시아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오늘날 고려인 맹동욱 교수를 기억하는 한인들은 많지 않다. 모스크바에서 30년 이상 사는 현지 교포신문 박종권 발행인(현재 모스크바 한인회장)은 “맹동욱 (러 공훈예술가) 이름은 기억하지만, 그의 책은 읽지 못했다”며 “그의 자녀들은 러시아에 살고 있을 것”이라 전했다. 맹 교수에겐 3명 아들이 있다.

이제 지난날 북한에서 맞았던 해방과 6.25 당시 북한 실상을 그의 글에서 한번 들여다보자. 당시 20세 전후한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가 체험한 당시 북녘땅 내용을 일부 발췌, 정리했다. 글은 그의 8.15 서두 내용에서 시작, 6.25 당시 그의 ‘아오지 생활’을 거쳐 러시아 망명 생활을 밝혀놓았다. [해설=송광호 전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대표]

맹동욱  러시아 공훈예술가 증명

흉흉한 세월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았으나, 민족의 자주권까지 되찾은 것은 아니었다. 한반도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분할 점령하였다. 이때부터 ‘이북’이니, ‘이남’이니 하는 말이 통용되었다.

10월 14일. 소련군 사령부는 김일성을 환영하는 ‘평양시 군중대회’를 열고, 불과 33세에 불과한 새파란 젊은이를 민족해방에 혁혁한 공을 세운 항일유격대장이라 하여 민족의 영웅으로 부각시켰다. 또한 9월 초에 소련군은 남한과의 철도, 전신, 전화 및 우편 교류를 일체 단절시켰다.

더 기막힌 일은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국외상회의에서 남북한 신탁통치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46년 1월 2일 공산주의 정당과 사회단체 연명의 모스크바 결정지지 공동성명서 등이 잇따라 발표되어 신탁통치는 <후견제>라고 역설했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반탁운동은 금지되고, 급기야 조만식 선생은 연금되고 민족주의자들은 대부분 월남하거나 숙청당하였다.

김일성을 앞세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북한은 급속도로 소련의 식민지화 되어갔다. 북한지역의 학교, 관공서, 역 등 주요 건물과 거리는 소련의 붉은 깃발이 휘날리고 구리수염을 한 스탈린 초상화로 도배가 되다시피 했다.

1946년 3월 5일을 기하여 북한 전역에서 시행된 토지개혁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서 이루어졌다. 토지개혁 시행에 따라 지주와 상인 계층은 하루아침에 몰락했으며, 일제하에서 일제에 협력했던 지식인들도 대거 숙청당했다.

8월 30일에는 ‘북조선 노동당’이 결성되었고, 47년 2월 21일에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한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정식으로 발족했다.

1945년 평양

참으로 흉흉하고 끔찍한 세월이었다. 똑똑하고 존경받던 인사들은 어느 날 갑자기 주위에서 사라졌다. 어제까지도 친했던 이웃끼리 서로 반동이니, 친일파니, 반혁명 분자니, 원수니 하며 비방하며 죄를 뒤집어씌웠다. 서로 쫓고 쫓기며 잡아가고 죽이고… 그런 난리가 없었다. 대부분 사람은 언제 어떻게 누가 밀고할지 몰라 지은 죄도 없이 전전긍긍하며 공포에 떨었다.

반동과 노동자만이 가장 중심적인 계층으로 갑자기 부상하였을 뿐, 지식인은 지식 때문에 죽었고, 돈 있는 사람은 돈 때문에 죽어야 했다.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꾼이라 죽었고, 땅 있는 사람은 선조의 산소까지 빼앗긴 채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었다.

해방이 되었다고 하나 우리에게 돌아온 건 ‘우리말과 우리글을 찾았다’는 사실 하나뿐, 인륜이고 도덕이고 다 땅에 떨어진 채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이 계속되었다. 기막힌 일은 해방과 함께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은 부인이고, 어린 여학생이건 가리지 않고 겁탈했다. 반항하면 폭행하거나 죽이는 사건이 비일비재했다.

사람들은 기회만 있으면 월남을 기도했다. 누구는 한밤중에 배를 타고 남으로 내려가고, 누구는 산길을 따라 남하하는 등 맨몸뚱이, 맨주먹으로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였다. 특히 반동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은 언제 어떻게 끌려가 처형될지 모르는 판국이었다.

그들은 가족을 남겨둔 채 혼자서 아무한테도 눈치 채이지 않게 슬며시 없어지곤 했다. 한 민족이 남과 북으로 등을 돌리고, 이웃이 원수가 되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36년 동안이나 일본제국주의 게다짝에 짓밟히고, 다음엔 소련군의 무지막지한 군화에 짓밟힌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상징하는 듯한 사건이 우리 마을에도 일어났다.

김일성과 소련 군사령관 간부들
김일성과 소련 군사령관 간부들

우리 집에서 학교에 가려면 중간에 높은 고개를 넘어야 한다. 그 고개 이름이 쌍포고개다. 고개 꼭대기엔 오래 묵은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소나무 아래 포근한 잔디가 깔려 있었다. 학교를 오갈 때 가파른 고갯길을 넘노라면 숨이 차고 더워서 나는 늘 그 소나무 밑에서 쉬어가곤 했다.

그 소나무 잔디밭에서 내가 다녔던 소학교 일본인 교장 딸 요시코가 소련 군인들에게 강간을 당하고 목 졸려 죽은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 사건 이후 나는 그 소나무 밑에서 쉬기가 영 께름칙했다. 나는 작문 시간에 그 이야기를 시(詩)로 써서 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나를 불러 교탁 앞에 세운 후 야단을 쳤다.

“너는 우리의 해방군인 소련군을 모욕했다. 이 친일 분자 반동새끼!”

나는 하도 분하고 억울해서 선생에게 대들었다. “저는 시에는 인간애가 있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이 반동새끼가 스승에게 대들기까지 해!” 선생은 더욱 화가 나서 내 양쪽 뺨을 후려갈겼다. 나는 부어터진 얼굴로 선생을 똑바로 쳐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해방된 조국에서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는 것이 어째서 반동입니까?” 선생은 화가 나서 씩씩거렸지만 더는 사건을 확대하여 문제로 삼지는 않았다.

나는 쌍포고개 마루에서 동해 쪽을 내려다보며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펴고 내가 가야 할 길을 생각하곤 했다. 바다 건너 낯선 곳, 자유로이 꿈의 날개를 펼칠 수 있는 곳으로 나는 매일처럼 떠나고 싶었다.

나는 이 쌍포고개에서 소학교 동창 정옥과 첫사랑에 빠졌다. 돌발적인 그녀와의 만남은 내 생활에 큰 변화를 줬다. 매일 고개에서 만나 학교에 가고, 하굣길에도 만나 같이 집으로 왔다. 어느 날 집안 장례 때문에 며칠 학교를 빠진 후 쌍포고개 소나무 밑에서 그녀를 기다렸으나, 3일째가 지나도 끝내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김일성  만경대 고향방문(1946년)
김일성 만경대 고향방문(1946년)

알고 보니 집안이 월남한 것이다. 그녀 마을 친구 순애를 통해 편지만 전해 받았다. 그 무렵에는 이런 일들이 흔했다. 아무도 모르게 심지어는 친한 친구나 친척에게도 알리지 않고 한밤중에 가족 모두가 월남하거나 움직이기 쉬운 남자만 떠나곤 했다.

“동욱 씨에게. 나는 멀리 갑니다. 확정된 주소도 모르고 가는 곳이 38 이남이라는 것만 압니다. 부모님이 한밤중에 나를 깨워 빨리 길을 떠나자는 갑니다. 동욱 씨에게 미리 알리지 못한 것, 용서해 주십시오. 저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일입니다. 이제 고백하지만 저는 진심으로 동욱 씨를 사랑했습니다. 남북이 갈라져 있다 해도 하나의 조국이고, 같은 하늘 아래 있는데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겠지요. 헤어지기도 전에 벌써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립니다. 정옥 올림”

시간이 약이라고 정옥을 잃은 슬픔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이번에는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분노와 저항감이 가슴속에 맹렬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노동자와 농민을 악덕 지주와 권력 계층으로부터 해방한다는 구실 아래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제도를 모방한 김일성과 스탈린의 1인 숭배와 우상화까지도 그대로 따라 했다.

1945년 8월 24일 소련군 제25군단이 평양에 입성했을 때 그 뒤에는 소련에서 살던 한인들이 뒤따랐다. 김일성 일행으로 구성된 약 300명의 훈련된 이들 한인 정치, 행정요인들은 소련군을 등에 업고 북한의 공산당 정권 수립과 소비에트 화(化)를 위해 앞장서 일했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계속 재소 한인들이 북한으로 들어왔는데 그 수는 무려 3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대부분 중앙아시아 지방에서 떡 장사, 쌀장사를 하던 사람, 농장의 조장쯤이나 했던 무식하고 몰상식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북한 함경북도 주택
북한 함경북도 주택

나는 정옥이 월남 후 가장 친한 친구였던 변경일 군을 찾았다. 변군 아버지는 성진 시내에 인쇄소와 도장방을 가지고 있었다. 변군은 평양에서 공부할 생각이 있었다. 평양대학에 시험을 치르기로 했다. 고등중학교를 졸업 못 했지만, 졸업장은 인쇄소에서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비록 가짜이긴 했지만. 어디 가서 무엇을 하건 지금보단 나을 것 같았다.

가짜 졸업장은 무사히 통과됐다. 변군은 미술대학에 합격했으나, 나는 사범대학 문과 시험에서 보기 좋게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궁리 끝에 해주(황해도)예술학교 시험을 치렀다. 당시 해주예술학교는 문학과가 없고 음악과, 연극과, 미술과가 있었는데, 예과 1년, 본과 3년 과정의 전문학교였다. 나는 연극과에 들어갔다. 이것이 내가 평생을 연극과 함께 살아가게 된 첫 발자국이 될 줄이야 그 당시엔 상상도 못 했다.

가진 것 없이 처음으로 집을 떠난 내 생활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아버지가 보내주는 돈으로는 열흘도 연명하기 힘들었다. 어떨 때는 하루에 한 끼도 못 먹고 냉수로 배를 채우기도 했다. 변군 역시 아버지가 인쇄소를 빼앗겨 어려운 처지였으나, 최선을 다해 나를 도와주었다. 내게는 물질적인 도움보다는 변군과 주고받는 예술과의 갈망과 포부, 꼭 성공하자는 다짐 등이 더 큰 힘이 되었다.

해주는 북위 38도선, 남북이 갈라진 접경지역으로 불과 몇십 리만 가면 남한이었다. 또 해주는 북한지역에서 맨 처음 음악학교가 생긴 곳으로 북한 전 지역에서 몰려든 성악과 피아노,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음악도들이 많은, 북한지역의 음악 중심지였다. 북한에서는 1947년 평양에 중앙예술공작단을 조직한 것을 필두로, 해주에는 예술공작단이 조직되어 연극을 이용하여 근로대중을 선동하고 있었다.

해주에 온 지 어느덧 1년이 지니고 내게는 새로운 친구들이 생겼다. 대부분은 같이 공부하는 연극과 학생이었다. 그중 가장 가까이 지낸 것은 이영이란 친구였다. 그는 해주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해방 전까지 변호사로 일했는데, 해방되어 북한지역이 공산화되자 월남했다고 한다. 재산은 넉넉하게 넘겨 놓았다.

김일성이 49년 소련 모스크바를 방문했다(6.25 전쟁 직전)
김일성이 49년 소련 모스크바를 방문했다(6.25 전쟁 직전)

李 군은 키가 크고 우람하고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로 나이도 나보다 3살이 많았다. 그와 나는 학교에서 ‘꽉쇠’란 단막극에 출연했다. 꽉쇠는 해방 후 공산주의 제도 하에서의 시골 학생들의 애국심과 집단주의 정신을 그린 작품이었다.

이 연극에서 나는 李군의 아버지 역을 맡았다. 그는 체격도 작고, 나이도 어린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하고, 자기 인격을 비하하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역을 바꾸어 달라고 연출하는 김순익 선생에게 요구했다. 김순익 선생은 하락하기는커녕 핀잔만 주었다.

“넌 이제껏 호화스럽게만 살았지, 고통을 당한 일이 없지 않으냐? 그래서 넌 아직 충동적이고 어린애처럼 행동할 때가 있어. 부르주아적 냄새도 풍기고.” “제가 그렇게 형편없는 인간이란 말입니까?” 급우들 앞에서 인격적 모독을 당한 李군은 얼굴이 빨개져서 소리쳤다. 그 순간 나는 이군이 너무 안되어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달랬다.

“李형! 무대 위에선 네가 날 아버지라 하고, 일단 무대를 떠나면 내가 형이라고 부를게.” 그 일을 계기로 그와 나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이형은 내가 배를 곯는 것을 알고는 그의 집으로 데려가 맛있는 음식을 먹여주곤 했다. 그러나 나는 음식보다도 그의 집에 있는 30년대의 연극, 문학잡지와 소설책, 시집 등 문학책을 빌려보는 재미에 자주 드나들었다.

이 형은 시내에 있는 중국식당이며 술집까지도 단골로 트고 다녔으며,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으레 음식점이나 술집엘 가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나는 난생처음 진하게 분칠한 아가씨가 부어주는 술을 마시곤 정신없이 취했다. 술에 취해 정옥을 마음껏 불렀다.

당시 정세는 남한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을 선출할 때다. 북한에서는 48년 8월 25일 대의원 선거를 하고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의 수립을 선포했다.

김일성 만경대 동네 방문
김일성 만경대 동네 방문

9월 말부터는 시내에서 거의 매일 군중대회를 열었다. 북 치는 소리, 꽹과리, 피리, 나팔 소리에 뒤이어 ‘김일성 장군의 노래’가 북한 각지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군중대회나 무슨 회의를 시작하거나 끝날 때는 꼭 국가처럼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불렀다. 뒤를 이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만세’와 ‘김일성수상만세’, ‘조선노동당만세’를 외쳐댔다. 남한에 세워진 괴뢰정부는 불법적, 반민족적이며 북의 인민공화국만이 유일한 합법적 정부라는 정치선전 삐라가 매일같이 뿌려졌다. 김일성 우상화는 날로 극심해갔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북한 탈출단 5명은 탈출계획을 3.8선 남쪽 대신 만주 쪽을 택하기로 했다. 우리는 두만강을 헤엄쳐 건너야 해서 봄까지 기다렸다. 1950년 봄. 우리 5명 반동 패거리들은 거의 빈손으로 이번에는 북을 향해 길을 떠났다. 우선 용정에 있는 변군 고모부를 찾아간 후 거기서 다음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아리랑의 작가 나운규 고향 회령을 지나 두만강 상류에 이르러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경비는 허술했다. 물결을 거슬러 간신히 건너편 강변 가까이 왔을 때였다. “서라. 돌아오라”고 국경경비대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밤하늘을 찢는 듯 총소리가 연이어 들려 왔다. 이상하게 조금도 무서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강을 무사히 건너 안도하며 천천히 강변을 향해 나왔다. 이때 알아들을 수 없는 다부지고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른 봄이라 두꺼운 솜옷에 털모자를 푹 눌러쓴 중국 경비원들이 우리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고장에는 중국교포들이 많이 살고 있으니, 우리도 곧 풀어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 저항도 없이 그들아 가라는 대로 따라갔다. 사방 깜깜하여 길도 보이지 않았으나 그들 중 한 사람이 앞장서서 우리를 인도했다. 잠시 후 우리는 작은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전등불 밑에는 북한 경비대들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새끼들! 인민군대에 가기 싫어 도망쳤지?” 경비대 대장인 듯 키가 크고 얼굴이 원숭이 볼기짝처럼 빨간 군인이 우리를 쏘아보더니 소리쳤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중국으로 도망치는 젊은이들이 많아 조·중 국경 경비가 심하고, 두만강을 무사히 건넌다 해도 중국경비대에 잡히면 즉각 북한 측에 도망자를 넘겨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북한 우표(50년-광복 5주년기념)

우리는 어이가 없어 멀뚱히 그들을 쳐다만 보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왜 대답이 없어? 그렇지? 빨리 자백하지 못해?” 원숭이 볼기짝은 맨 앞에 선 변군의 아랫도리를 발길로 찼다. “우린 아직 군대에 갈 나이가 안됐습니다. 연변 예술대학에 공부하러 가는 길입니다.” 변군은 자기의 신분증을 내보였다. 경비대원들은 비교적 점잖았다. 더는 우리를 때리거나 협박하지 않았다. 날이 밝으면 경비대 본부로 넘기겠다는 말만 했다.

나는 무척 초조하고 불안했다. 경비본부로 넘겨지면 틀림없이 내 탈출 사실이 탄로 나고 친구들까지 공모자로 몰려 곤욕을 치를 것이 뻔했다. 나 때문에 친구들 목숨까지 위태롭게 할 수가 없었다. 혼자 결심했다. ‘내가 희생하기로 하자. 어차피 탈출기록이 있는 건 나뿐이니까. 여기서 도망치면 친구들은 살아날 수 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눈여겨 봐두었던 내 옆 구석에 있는 삽을 슬그머니 쥐고 순식간에 전등불을 쳐서 깨트렸다. “얘들아, 도망쳐! 빨리!” 나는 변군을 뒤로 끌어내고 경비대를 막아섰다. 경비대원은 갑자기 당한 일이라 우왕좌왕했다. 전등을 깼기 때문에 오두막 안은 칠 흙같이 어두웠다.

그들은 나한테 한 덩어리로 몰려들어 삽을 빼앗고 내 머리를 내리쳤다. 친구들은 캄캄한 어둠을 이용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갔다. 경비대에서 새 전구를 찾아 끼웠을 때 보니 내 코에선 피가 계속 흘렀다. 천만다행으로 친구들은 하나도 붙잡히지 않았다. 친구들을 무사히 도망쳤다는 승리감과 희열이 내 전신을 타고 내렸다.

나는 히죽이 웃으며 경비대장에게 말했다. “인민군대에 자원하겠습니다.” 그들은 경비대 본부에 가서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를 꽁꽁 결박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본부로 연행되었다. 인민군대에 갈 자격을 심사하는 심사원이 내가 내민 가짜 증명서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내 아래위를 흘겨보았다. 그리곤 무슨 서류 같은 걸 뒤적였다.

“이놈이야! 틀림없어. 이놈이 바로 학성군 유치장에서 도망친 악질 반동 새끼야.” 이렇게 해서 나는 ‘아오지 탄광’(정치범 형무소)으로 보내졌다. 죽음의 ‘아오지’로. 그날이 바로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계속)

평양 (대동강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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