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청년이 겪은 해방과 6.25 당시 북한 실상 체험담– 4
북한 청년이 겪은 해방과 6.25 당시 북한 실상 체험담– 4
  • 글 맹동욱, 해설 송광호(전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대표)
  • 승인 2022.08.05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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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동욱 러시아 공훈예술가의 북한 수기

이번 연재 내용 중에는 1211고지 전투 얘기가 나온다. 1211고지는 1951년 9~10월 강원도 금강군 동부전선에서 벌어진 무척 치열했던 전투로 북한 인민군이 영웅적인 대승을 거뒀다고 선전하는 대격전지다.

또 53년 휴전 직전 6월 초부터 한 달여간 벌어졌던 351고지전투 또한 인민군의 5대 대승전투 중 하나라고 자랑한다. 남한에서 백마고지 전투를 손꼽는 것과 마찬가지다. 군대 계급 명칭도 북한 소좌는 한국의 영관급인 소령에 해당한다. 군단장은 당시 한국 중장계급에 따랐다.

북한 유명소설가 윤세중 선생이 종군(從軍)작가로서 맹동욱과 토굴 한 방에 있던 내용도 있다. 그가 전쟁군대 문화사업 일을 맡는 4부 연재 글을 이어 나간다. [정리·해설=송광호 전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대표]

1950년 9월 서울
1950년 9월 서울

우리는 전선 이동으로 부대들이 머무는 곳을 따라 길을 떠났다. 낮 동안 작렬하던 포격 소리도 멎고 고요한 밤길을 걸으며 나는 장평리 파출소에서 무기를 훔쳤던 밤이 생각났다. 그 일로 결국 아오지까지 끌려가고 죽을 뻔했지 않았던가. 전에도 친구를 구하려고 친구 죄까지도 혼자 뒤집어썼지 않았던가.

그처럼 혹독한 고통을 당하고도 지금 나는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를 자처하는 한 분대원을 위해 무기를 훔치려 하는 것이다. 내 마음 한쪽에서는 ‘그만두라’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렇지만 나는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내 걸음을 재촉했다.

우리는 전쟁 폐허 속에서 용케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길가 초가집 마당으로 들어갔다. 보초병은 종일 행군에 지쳐 총을 끌어안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주위를 살피니 집안 곳곳에 지쳐 잠들어 있는 전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코 고는 소리,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보초가 깨면 대꾸할 말을 미리 생각해 두었으나 보초는 깨어나지 않았다.

김종호를 밖에 남겨 두고 나 혼자 방 안으로 들어갔다. 손전등으로 방안을 비추자 곯아떨어져 있는 전사들 옆 한쪽 구석에 방안 가득 들어차 무질서하게 세워진 총기들이 보였다. 나는 소총 한 자루를 내 것 인양 들고 태연히 밖으로 나왔다.

김종호가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는데 그가 멀찍이 있는 수레 밑에 숨어 있다가 기어 나왔다. 그 꼴이 우스웠다. “자, 어서 받아. 다시는 잃어버리면 안 되네. 왜 수레 밑에 들어가 있나?” “소대장 동지, 고맙습니다.” “이제부터는 총을 바이올린처럼 아끼게. 그리고 내일부터는 자네가 우리 중대의 오락을 맡아보는 게 어때?”

“오락 지도원 말씀입니까? 그건 못하겠습니다. 제가 중대에서도 제일 못난 전사로 유명한데 오락 지도원이라면 모두 코웃음 칠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 재간을 발휘해서 위신을 좀 높여보란 말이오.” “위신? 그게 무슨 위신입니까? 그런 위신은 차라리 없는 게 낫습니다.”

1951년 3월 강원도 홍천
1951년 3월 강원도 홍천

“명령이야. 무조건이오.” “그런 명령은 복종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 정 고집을 부리겠나?” “소대장 동지는 지금 몇 살입니까?” “열여덟이오.” “난 스물한 살입니다. 소대장 동지의 형이나 다름없지요.” “전쟁이 끝나면 형이라 하지. 그러나 지금은 상관에게 복종해야 해.”

“제발 그따위 오락 지도원 같은 건 다른 사람을 선택해 주세요. 대중음악을 하기엔 제 자존심이 허락지 않습니다. 한번 그 일에 빠지면 저는 제 꿈을 영원히 잃어버리게 될 겁니다. 참된 예술의 높은 고지에 달하는 게 제 꿈인데, 꿈을 잃게 되면 저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습니다. 소대장 동지는 이해해 주리라 믿습니다.”

옥신각신하며 우리는 부대에 도달했다. 어색한 웃음으로 조심하라는 눈짓을 하며 헤어졌다. 나는 어린나무처럼 가냘픈 김종호의 깡마른 모습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를 지켜보았다.

전쟁의 와중에서 그와 같은 인물을 만나게 된 것이 기뻤다. 김종호도 이 무의미한 전쟁의 희생자였다. 그러나 그가 과연 앞으로 수없이 부딪치게 될 험한 일들을 극복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리하여 그의 예술을 꽃피울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명령 불복종

남과 북이 서로 밀고 당기던 전쟁은 양쪽에 무수한 죽음과 폐허의 잿더미만을 남긴 채 한반도 중간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한 치의 땅도 양보하지 않으려고 양측은 서로 최후의 발악을 하듯 처절한 혈전을 계속하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싸움터가 바로 백마고지와 1211고지였다. 양측이 가장 우수한 전사와 무기를 총동원하여 양대 고지를 집중 공격했다. 내가 속했던 제2군단은 1211고지를 사수(死守)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우리 포 연대는 산악지대라 군용차를 연대본부에 바치고 몽골초원에서 붙잡아온 야생마를 군마로 받았다.

인천 유토피아 다방
인천 유토피아 다방

말들은 훈련을 받지 못해 대포 소리에 놀라 산으로 올라가지 않으려 뻗대었다. 어떤 말들은 짐을 지고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지 못해 뒷걸음치다 포와 함께 산 밑으로 굴러떨어지는 등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병신이 된 말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형편이니 전사들은 말 대신 떼를 지어 포를 산꼭대기까지 끌어올려야 했다.

머리 위에선 연신 미군기가 쌕쌕거리고 주위에는 계속 대포가 날아와 터졌다. 머리 한쪽이 날아가 버린 병사하며, 여기저기서 죽어 나자빠졌다. 말도 사람도 다 미쳐버린 것 같은 상황이었다. 전사들은 서로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욕지거리를 주고받으며 우왕좌왕했다.

포탄이 날아와 터질 때마다 생지옥 같은 풍경이 벌어졌다. 도대체 속수무책이었다. 포는 산꼭대기까지 끌어올리지도 못한 채, 이러다가는 모두 총알받이가 될 것이었다. 전사들은 당황하여 사방으로 흩어진 채 중대장의 눈치만 보았다.

중대장은 현 상태에서 더는 산 위로 포를 끌어올린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무모한 짓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는 상부의 명령을 거역하고 말과 부하들을 안전한 곳에 피신해 있도록 명령을 내렸다. 어두워진 다음 포를 옮기자고 했다.

“봐라! 적의 정찰기가 계속 우리 머리 위에서 날면서 자기네 포진지에 연락하고 있다. 이러다간 전부 몰살이야. 모두 풀과 나뭇가지를 뒤집어쓰고 나무 밑이나 바위 아래에 숨어라. 절대 움직이면 안 된다.”

우리는 각 소대와 분대별로 적당한 은폐 처를 찾아서 숨었다. 그런데 이것을 바라보고 있던 중국 의용군 출신인 참모장이 부랴부랴 달려왔다.

중국군(압록강)
중국군(압록강)

“야, 이 개새끼들아! 왜 전진하지 않나? 이 비겁한 놈들! 누가 너희보고 숨으라고 했냐?” 그는 화가 잔뜩 올라 뻘게진 얼굴로 중대장에게 욕을 했다. 그러나 중대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먼 산을 바라보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누가 전사들보고 은폐하라고 했나? 중대장, 당신의 명령인가? 왜 상부의 명령을 거역하는가? 어디 두고 보자. 중대! 내 말을 들어라! 인민군 용사는 대포 소리에 놀라는 비겁자가 아니다. 어서 앞으로 고지를 향해 전진하라! 앞으로! 앞으로!”

그러나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 중대장이 성난 기세로 참모장을 향해 소리쳤다. “이 미련한 놈아! 여기가 어디 중국 벌판인 줄 아느냐? 그 명령은 우리 모두를 죽음으로 달음질치게 하는 거다. 저 정찰기가 안 보이는가? 저게 뭔지 아느냔 말이야!”

“이 자식이 감히 참모장한테 달려들다니! 상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것도 모르나? 이게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참모장은 권총을 빼 들고 중대장을 향해 난사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참모장 바로 뒤쪽에 포탄이 떨어졌다. 일시에 하늘과 땅을 뒤엎을 듯 폭음과 함께 포연이 시야를 가렸다. 요란한 폭발음 소리에 고막이 다 터지는 것 같았다. 주위는 잠시 캄캄해졌다가 밝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흙을 뒤집어쓴 채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디를 다쳤는지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나간 채 엎드려 있었다.

잠시 뒤에야 자욱한 연기 속에서 사람의 형상이 겨우 보였다. 상처를 입은 병사들도 몇이 있고, 쓰러져 신음만 내는 병사도 있었다. 중대장은 그 와중에서도 꼿꼿이 선 채 대원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선 피가 흘렀다. 그러나 참모장은 일어나지 못했다. 파편이 머리와 가슴, 다리를 관통했던 것이다. 흙과 범벅이 된 피투성이 몸은 이미 생명이 끊어져 있었다.

캐나다 작가가 쓴 'THE LAST PARALLEL'(1957년)
캐나다 작가가 쓴 'THE LAST PARALLEL'(1957년)

우리는 서로 눈치만 보았다. 오랜 침묵이 흐른 뒤 중대장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근처 바위에 기대어 섰다. 그의 헝클어진 머리에도 흙이 덮여 있었다. 우리는 달려가 그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때야 그도 자기가 다친 것을 알고 놀라움을 나타냈다.

“중대장동지! 내 말이 들립니까? 다른 데는 다친 데 없습니까?” “걱정하지 말게, 이까짓 것은 상처도 아니네. 다친 사람이 많은가?” “별로 없습니다. 우선 좀 쉬십시오.” 그 와중에도 그는 보통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자기 생각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우리는 톱밥이야. 그런데 톱밥이 톱을 보고 어머니라고 부른다네.”

참모장 명령에 불복종한 이상철 중대장은 연대본부에 불려간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후 새 중대장이 임명돼 중대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이번 중대장은 전임 중대장과 너무 많은 차이가 났다. 거무튀튀한 얼굴, 육중한 몸에 비해 목소리는 아주 가늘었다. 군관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도 꼭 나무꾼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지식은 얕았지만, 당과 수령, 조국이란 세 단어는 말의 시작과 끝에 빼놓지 않고 끼워 넣는 버릇이 있었다. 또 엉뚱한 명령을 곧잘 내렸으며, 힘든 일은 앞장서 하기도 했다. 신임 중대장에 대한 실망과 불만 때문에도 전임 이상철 중대장이 더욱 그리웠고, 반동(反動)이란 누명을 쓴 그의 생사가 걱정되었다.

나는 김철우 정치부 군단장을 찾아가 중대장을 도와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전쟁의 뿌리는 소련에 있고, 김철우는 소련의 스파이로서 이 전쟁의 씨를 뿌린 대표자 중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미쳤다. 전형적인 사회주의자인 그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이 부질없는 일로 생각되었다.

전에 그렇게 명랑하고 활기에 차 있던 중대원들은 하나같이 풀이 죽고 우울해 보였다. 그러나 겉으로는 누구 하나 드러내 불만을 표현하지 못했다. 비실거리며 남의 눈치만 보았다. 나 자신을 포함해 집권자의 야욕을 채우려는 이용물로, 우두머리에 맹종하는 양 떼와도 같았다.

휴전 후 북한동맹국 지원물자
휴전 후 북한동맹국 지원물자

인민이란 개인 존재가치를 상실한 채 김일성이란 태양을 떠받드는 무지몽매한 대중 이름에 다름 아니었다. 김일성은 전쟁에 계속 패배하면서도 그것을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후퇴하면서도 여전히 승리의 행진곡을 불렀다. 명령에는 오직 복종만이 있을 뿐 아무리 정당한 사유(事由)가 있어도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중대장도 부하들의 무의미한 죽음을 구하려 한 것이 결국 반동이란 누명을 쓰게 된 것 아닌가.

저녁 식사를 끝낸 나는 바이올리니스트 김종호를 찾았다. 울적한 심사를 달랠 겸 중대장 일을 같이 의논하고 싶었다. 김종호는 전과는 달리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을 꺼냈다. “난 이제 무서운 게 아무것도 없어요. 난 자살을 결심했어요. 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견디어 낼 수 없어요. 가장 저열한 것들까지도 나를 비웃고 멸시하는걸요.”

그러면서 작은 나뭇가지를 쥐고 바직바직 꺾기 시작했다. 그의 목덜미와 손은 전과 다름없이 때가 덕지덕지 끼어 나무껍질 같았다. “죽는단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네. 죽음이야말로 가장 손쉬운 현실도피 방법이 아니오?”

그는 내 말을 꺾으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천길 물속에서 끄집어낸 물고기가 이 살벌한 사회에 적응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 나는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에 심어진 장미꽃과도 같다고요.”

나는 말머리를 돌려 김철우 정치부 군단장에게 부탁해 중대장을 구할까 생각 중이라고 했다. 그는 발작적으로 주먹으로 자기의 앙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폭격맞은 평양시 기림리
폭격맞은 평양시 기림리

“구원? 말만으로 구원이 됩니까? 행동을 해야지요. 정치부 군단장이란 훌륭한 빽이 있으면서 왜 가만히 있어요? 무슨 짓을 하든 중대장을 꼭 구해내야 합니다. 벌써 죽였을지도 몰라요. 중대장 같은 사람까지 변절자로 몰아 군사재판에 회부하는 현실이 하도 암담해 내가 자살을 생각하는 겁니다. 이젠 희망이 없기 때문이에요.”

“김종호, 고맙네. 훗날 얘기해 주겠지만 나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불쌍한 놈이오. 나까지도 반동으로 몰릴 것이 두려워 망설인 것이 부끄럽네. 이젠 결단코 공포의 쇠사슬에서 벗어나겠네.” 우리는 은밀한 시선을 주고받으며 굳은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군단 사령부는 산골짜기에 많은 통나무 토굴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군단사령부를 찾아가며 내게 있어 조국(祖國)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둘로 갈라진 조국, 나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이 무의미한 전쟁에 참여케 한 조국이 진정 내 조국인가를 물었다.

조국이 과연 내게 무엇을 주었는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이 오늘의 전쟁 현실 앞에서 나의 존재란 무엇인가? 내 존재의 끝은 어디일까를 끝없이 회의하며 걸었다.

군단사령부 보초병에게 내 이름을 적어주며 정치부 군단장에게 알리라고 했다. 잠시 후 김철우 군단장 자신이 반갑게 소리치며 나오더니 나를 끌어안았다. “오랜만이야. 그러잖아도 널 찾으려고 했다. 전선(戰線)신문에서 네가 쓴 시를 읽었다. 훌륭해!” “정치부 군단장 동지!”하고 나는 방문목적에 대해 보고하려 했다.

“그런 짓은 그만두고 어서 들어와.” 그의 안내로 들어간 토굴 안은 사령부의 분위기와는 딴판이었다. 서양식 베개와 이부자리가 질서 없이 어지러이 널려있었다. 곧 간호 군병 두세 명이 들락거리며 방안을 정리했다. 군단장은 그들을 향해 “이봐, 차를 가져와.”하고 소리쳤다.

해방직후 평양 박물관
해방직후 평양 박물관

내겐 웃음 띤 얼굴로 “아버진 어떻게 지내느냐?”하며 물었다. “네, 좋습니다.” 나는 간단히 대답하고 즉시 중대장에 관해 물었다. 그러자 자기는 그런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다며 군 정치보위부에 전화 연락을 취해 문의했다. 상대방도 소련에서 파견된 사람인 듯 그들의 대화는 모두 러시아어로 이루어졌다.

“그가 누구냐?” “저희 중대 중대장입니다.” “더는 중대장이 아니다.” “그럼?” “군 비밀재판에서 처리됐다.” “처리되다니요?” “형을 받았다. 반동이야. 그런 인간은 우리 군(軍)에 필요 없다.” “아닙니다. 반동이 아닙니다.” “너, 제정신이냐? 반동을 동정하는 거냐?” 군단장의 얼굴색이 금세 변해, 나를 보는 시선이 날카롭고 매서워졌다.

“그 문제는 더 얘기 말자. 네가 이왕 여기 왔으니 말인데, 군단에 연예 대를 조직해라. 전쟁에 지친 전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줄 연예대의 조직이 시급하다. 네 계급도 중대장으로 진급시켜 주마. 정치부 군단 군중문화지도원으로 말이다.” “글쎄요….” “군대에선 글쎄라는 말이 없다. 빨리 내 명령을 접수하라.”

그는 또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다시 러시아어로 통화했다.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동족이 동족을 서로 죽이고 짓밟는 이 잔인무도한 전쟁에서 우리 민족은 소련과 미국의 허수아비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전쟁의 주도권은, 최고 명령계통은 철저히 이방인이 쥐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나는 새삼스럽게 조선인의 가면을 뒤집어쓴 철저한 소련인 김철우에 대해 맹렬한 분노를 느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말 한마디에 죽고 사는, 한 마리 버러지만도 못한 존재였다.

“난 너를 전선의 대포 밥에서 구해 후방사업으로 돌리려고 하는데 딴생각은 말아라. 전임 중대장 말을 더 꺼냈다간 네 목숨이 위태롭게 된다. 옛정을 생각해서 또 네 아버지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것이니 꼭 이 전쟁에서 살아남기 바란다.”

파괴된 거리
파괴된 거리

그때 명랑한 표정의 중년 소좌 한 명이 나타났다. “군단장 동지! 명령대로 인민군 협주단 부단장 박한무 대령했습니다.” “됐다. 바로 이 애에게 군중문화사업을 맡기도록!” “옛!” 나는 박한무 소좌를 따라나섰다. 그는 나를 종군작가들이 파견된 토굴로 데리고 갔다. 그곳엔 유명한 작가 윤세중(尹世重) 선생이 머물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윤세중 선생과 한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는 내가 옆에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 원고지에만 파묻혀 지냈다. 어느 날 나는 용기를 내어 윤 선생에게 물었다. “선생님! 무슨 작품을 쓰십니까?” “응…. 역사소설인데 홍경래 난을 다룬….”

그는 간단히 대답하곤 입을 다물었다. 종군작가로서 오늘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소재로 하여 작품을 쓰는 게 아니라 과거 역사인 홍경래 난에 관해 쓰는 것이 매우 의아스럽게 생각됐다.

나는 곧 군악대를 박한무에게서 접수했다. 그리고 거기에 바이올린에 있는 것을 보고 즉시 김종호에게 알려 그를 오도록 했다. 한편으로는 각 연대와 사단에서 배우를 모집하여 연극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단원은 우선 10명 정도로 구성했다.

공연을 하기 위해선 대본이 있어야 했다. 내가 직접 희곡을 쓰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희곡 제목을 1121 고지를 소재로 쓰려 했으나 적당한 줄거리가 생각나지 않아 고민했다. 그러다 새로운 주제를 찾던 중 문득 전쟁에 남편과 아들 셋을 빼앗긴 어머니의 비극적인 모습이 영감처럼 머리에 떠올랐다.

한번 영감이 떠오르자 나는 신들린 듯 원고지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내가 보아왔던 희곡과는 전혀 다른 구성으로,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대담한 시도를 하기로 했다. 잿더미로 변해버린 집터에 주저앉아 넋을 잃은 어머니에게 이미 전쟁터에서 죽은 남편과 3명 아들이 차례로 나타나 자기가 죽은 까닭은 어머니에게 들려주는 형식을 취했다.

내가 집필에 몰두하고 있을 때 김종호가 군단으로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의 앞에 바이올린을 내놓았다. 그는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이올린을 바라보더니 거칠어진 자기의 손으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의 두 눈에서는 소리 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북한 강원일보 신문

“아, 설마 이것과 다시 만날 때까지 내가 살아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았는데….” 그리곤 지그시 눈을 감고 음을 고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소 흐트러진듯하던 음색이 차츰 신비스럽고 황홀한 음색으로 이어졌다.

전쟁과 죽음, 폭격의 굉음과 총소리, 비명에 익숙해져 있던 내 귀에 전혀 새로운 음(音)의 소리가 열리고 있었다. 새가 지저귀고,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리는…. 음악이 얼마나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고 고양하는지 나는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와락 김종호를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자넨 정말 위대한 음악가네. 난 오늘에야 비로소 음악이야말로 가장 직접 우리의 황폐한 정신을 위로해 주는 예술이란 걸 발견했네.” 나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넌 훌륭한 음악가다. 이제부터는 군 연예대에서 일해라.” “아니요. 난 중대로 돌아가겠습니다.”

“거긴 왜? 거기서 넌 미친 사람, 바보 취급만 받지 않았느냐?” “바로 그 때문입니다.” “난 이해하기가 힘들군.” “가장 어려운 시기에 그들과 한솥밥을 먹으며 생사의 고비를 숱하게 넘었습니다. 노래를 모르고 살아온 그들에게 진정한 음악이 무엇인지 들려주고 싶습니다.”

북한 지원증서(속 표지 1996년)
북한 지원증서(속 표지 1996년)

나는 서운했지만 그의 고집을 아는지라 그를 내 옆에 붙들어 둘 수가 없음을 알았다. 그 이튿날 우리는 같이 중대로 갔다. 작은 음악회를 열기 위해서였다. 오랜만에 폭격 소리도 멈추고 전선의 밤하늘엔 별들이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그날 밤, 내 사회로 음악회가 열렸다. 김종호는 이제껏 중대원들이 보아왔던 모습과는 전연 다른 위대한 예술가로 그들에게 소개되었다.

그는 신중하고도 열정적으로, 때로는 신들린 듯이 바이올린 활대를 움직이며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냈다.

그날 밤의 그는 영락없는 음의 마술사였다. 한없이 신비롭고 환상적인 멜로디로 기나긴 전투에 지칠 대로 지친 전사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끊어질 듯 가늘게 이어지고 다시 폭발할 듯 커졌다가는 흐느끼는 듯 떨리던 바이올린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음악회가 끝나면서 전선의 밤공기는 전사들의 우렁찬 박수와 환호 소리로 뒤덮였다. 엄청난 반응이었다. 김종호는 이날 이곳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난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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