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청년이 겪은 해방과 6.25 당시 북한 실상 체험담– 5
북한 청년이 겪은 해방과 6.25 당시 북한 실상 체험담– 5
  • 글 맹동욱, 해설 송광호(전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대표)
  • 승인 2022.08.16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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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는 북한 청년 맹동욱의 자전(自傳) 수기다. 그는 아오지 형무소에서 인민군에 강제입대한다. 18세에 중국에서 포중대 지휘소대장으로 전투에 투입됐다가 군(軍) 사열 중 우연히 친척 아저씨 김철우 소련정치군단장을 만난다. 그 친척의 배려로 군단(軍團) 군중문화지도원으로 근무하게 됐다.

그때부터 종군작가(從軍作家)와 토굴 생활을 하면서 연출자로서 직접 희곡을 쓰고, 연극단을 만든다. 일선 인민군들을 위한 공연 연주로 나날을 보내며, 포 중대에서 전사 김종호 바이올리니스트도 알게 된다.

어느 날 김일 인민군 전선사령관의 갑작스러운 연극관람이 맹동욱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는 계기가 된다. 공연에 무척 감격한 김일 전선사령관의 현지 특명으로 그는 ‘소련 유학’이란 뜻밖의 행운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즈음 전쟁은 38선을 두고 치열한 전투가 막바지에 달해, 휴전협상을 목전에 두던 시기였다. 맹동욱은 1953년 7월 27일 휴전(休戰) 다음 날 소련 유학을 떠난다.

이번 호는 앞선 언급대로 청년 맹동욱이 북녘땅에서 겪은 해방과 6·25전쟁 내용까지를 마지막으로 소개한다. 그 뒤의 유학 생활과 소련 망명, 훗날 소련 대학교수가 되고 공훈예술가로서의 파란만장한 내용과 당시 역사적 주요사건들은 다음 기회로 미루겠다.

다만 그가 모스크바 대학교수 시절 고르바초프의 개방정책으로 한국 KBS 취재팀의 소련방문이 이루어지고, 그도 한국에 소개돼 드디어 방한의 기회를 얻게 되는 관련 스토리를 끝으로 덧붙인다. [정리·해설=송광호 전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대표]

6.25전쟁 53년 7월27일 휴전 미군 인민군 악수

즉흥연기와 소련 유학

군단에 돌아오자 나는 다시 희곡 쓰는 일에 매달렸다. 희곡이 완성되자 제목을 <세 아들>이라고 붙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꾸준히 연습한 결과 얼마 후엔 연극의 시연(試演)회를 가질 수 있었다. 생전 처음 내 손으로 쓴 극본을 갖고, 내가 연출을 해 공연을 하게 된 것이다. 전선(戰線)의 초라한 막사에서 부족한 것이 많은 공연이었지만 최선을 다했기에 가슴이 뿌듯했다.

연극 시연회가 있은 며칠 뒤, 인민군전선사령관인 김일 장군이 우리 군단을 방문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다음 날 아침 군단장 김철우 장군이 불러 갔더니 그는 당황한 기색으로 내게 명령을 내렸다.

“전선(戰線) 사령관 동지가 연예구락부 문을 열고 그의 한쪽 발이 문지방을 넘자마자 ‘빠바방빵!’ 하고 연극의 막(幕)을 올리도록 하라!”

그러나 그날따라 공산주의 광신자(狂信者)의 막둥이 역을 맡은 배우 이진우가 말라리아에 걸려 누워 있었다. 그는 고열로 말도 못 하고 가끔 입에서 거품을 게워내는 등 실신 상태에 빠져 있었다. 나는 일이 어렵게 되었다고 그런 사연을 김철우 정치부 군단장에게 보고했다.

내 보고를 듣자 그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며 무섭게 화를 냈다. “야! 이 새끼야! 네가 연기해! 네가 극본을 썼으니 네가 환자를 대신해 연기하면 될 것 아냐!” “저는 한 번도 연습한 적이 없고, 대사도 외우지 못합니다.” “듣기 싫어! 빨리 가서 연습해. 어쨌든 막을 올려야 해. 무조건이야!”

6.25전쟁 판문점 휴전서명

나는 기가 막혔다. 즉시 구락부에 돌아와 단원들에게 사정을 말했더니 그들은 용기를 북돋아 주며 내 능력이면 능히 잘할 거라고 추켜세웠다. 나는 공연이 실패하면 내 인생도 여기서 끝장이라는 다급한 생각에서 오기(傲氣)가 생겼다. ‘그래, 해보자. 내가 쓴 대사(臺詞)인데 다른 사람이 하는 것보다야 낫겠지.’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대사 한마디 한마디를 연상해 가며 대역도 없이 혼자 연기를 연습했다. ‘오냐, 이 기회에 내 모든 억울함과 울분, 고통과 슬픔을 표출해 버리자’고 결심했다. 내가 연기할 증오의 대상으로 아오지의 흉악범 조장을 마음속 깊이 정했다.

연극 날 저녁 정각 6시. 김일 전선사령관과 그의 일행 수십 명이 구락부의 문을 들어서는 순간에 맞추어 즉시 막을 올렸다.

나는 온몸에 피와 흙이 뒤범벅된 처참한 모습으로 어머니를 찾아와 내가 죽게 된 까닭을 호소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다. 넌 아직 죽지 않았다. 아직도 내 품속에 살아있다.”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열정이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어머니! 놈들이 나를 다치게 했어요. 총으로, 칼로, 몽둥이로, 쇠사슬로….” “오. 내 아들아!” 어머니는 내게 다가와 조용히 상처를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불쌍한 아들아! 네가 아직 철도 들기 전에 죽었단 말이냐? 상처에선 아직 피가 흐르고 있구나. 이젠 너는 나와 함께 있을 수 없다는 말이냐? 아니다. 너만은 죽을 수 없다. 달이 가고 해가 가도 나는 너를 기다리련다. 이 어미만은 너를 기다리련다. 아무리 눈먼 전쟁일지라도 내 아들을 절대 내 품에서 빼앗아 가진 못한다!”

6.25 전쟁 53년 휴전
6.25 전쟁 53년 휴전

어머니의 절규에 뒤이어 내가 해야 할 대사를 나는 그만 연극의 격정적 분위기에 휘말려 잊어버리고 한 장면을 뛰어넘어 마지막 전투장면을 연기하고 말았다.

“소대! 앞으로!” 목청을 높이며 적을 향해 따발총을 갈기기 시작했다. 무대 뒤에선 음향효과로 공중을 향해 진짜 따발총을 쏘았기 때문에 연극은 더욱 실감이 났다. “난 당의 용감한 전사! 앞으로! 앞으롯!”

전에는 이 장면을 무대 좌측으로 해서 나가게 연출을 했으나, 나는 나도 모르게 연극의 분위기에 도취되어 맨 앞줄에 앉아 있던 김일 전선사령관의 어깨를 뛰어넘어 객석으로 뛰어나가며 소리 질렀다.

“이 미제의 앞잡이! 반동 개새끼들아! 모두 뒈져라!” 객석의 전사들은 웅성거리며 나를 피했다. 연극은 그렇게 끝났다. 너무나 즉흥적이고 무의식적으로 한 연기였기에 나는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했고, 행동했는지 기억조차 못 했다. 단지 연극이 끝났을 때도 연기의 연장인 듯 끓어오르는 흥분을 억제할 수 없을 뿐이었다.

단원들은 나를 끌어안고 감격에 찬 목소리로 축하했다. “아주 훌륭했습니다.” “기막힌 연기였어요.” 이때 뒤로 김일 전선사령관과 그의 일행이 나타났다. 김일 사령관은 나를 향해 곧장 걸어왔다. 단원 일동은 모두 일어나 차렷 자세를 취했다.

그는 나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감탄의 미소를 띠며 축하했다. 그리곤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625 북한 보병부대
625 북한 보병부대

“당원인가?” “옛!”
“가까운 친척 중에 월남한 자는 없는가?” “없습니다.”
“친일파는?” “없습니다.”
“형(刑)을 받은 일은 없나?” “없습니다.”
“고중(고교)은 졸업했는가?” “옛!”
“출신 성분은?” “빈농 출신입니다.”
“음, 훌륭해. 이 전사를 소련으로 유학 보내도록 조치하시오.” “난 오늘 아주 훌륭한 연극을 보았소. 재간꾼은 전부 전선에 있어요. 앞으로 예술계 유학생들도 전선에서 파견해야 합니다. 당위원장 동무! 앞으로 많이 추천하시오.”

당위원장은 김일 전선사령관 앞에 긴장하여 말뚝처럼 서 있었다. “네! 우리 군단엔 재간 있는 전사들이 많습니다.”

전선사령관은 내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성공을 바란다고 했다. 그들은 곧 부대 뒷문으로 나갔다.

전쟁의 막바지에서도, 더구나 패색이 완연한 가운데서도 최전선에서 군중문화사업을 전개하여 연극을 공연하는가 하면 뛰어난 배우를 선발하여 소련 유학까지 보내는 실정을 이해하기 위해선 ‘북한의 문화정책’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1.4후퇴 흥남부두
1.4후퇴 흥남부두

북한에서는 ‘연극’이 다른 예술 분야보다 선전, 선동 효과가 크기 때문에 연극을 공산주의의 선전수단으로 많이 이용하였다. 특히 전쟁 기간에는 인민군에게 전쟁 의욕을 고취하는 작품과 미국의 잔학상을 과장되게 고발하고 규탄하는 선동적인 공연 위주로 연극을 상연했다.

전쟁 중이던 1951년 6월 30일, 김일성은 예술인들에게 1. 작가, 예술인들은 인민의 숭고한 애국심을 보여주어야 한다. 2. 인민군의 영웅성을 반영하여야 한다. 3. 적에 대한 증오심을 유발해야 한다는 교시(敎示)를 발표하였다.

전쟁 기간에 연극은 인민군대의 승리에 대한 확신과 영웅성, 불굴의 투지와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을 형상화하거나 반미투쟁을 묘사한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여느 때보다 연극의 정치성, 선동성이 중요시되자 북한 극단들은 종군공연 활동을 전개하였다.

연극인들은 최전선까지 진출하여 전사들의 투지를 위문하는 이른바 군중문화사업을 꾸준히 행했다. 연극인들은 무대장치를 위한 여러 도구를 등에 지고 하루에 1백여 리씩 행군하며 공연을 강행했다. 공연장소의 특성에 맞는 작품을 새로 구성하기도 했다.

이처럼 북한은 다른 어느 예술보다도 연극을 중요시하여 연극을 육성 발전시키는 데 큰 노력을 기울여왔다.

한창 전투가 치열히 전개되던 1952년 5월 북한에서는 무대예술인의 대우를 개선하여 인민배우, 공훈 배우, 공훈예술가 칭호를 제정했다. 또 조선인민군 창건 5주년 기념 문학예술상도 제정했다.

그날 연극공연 날 저녁 내게 벌어진 일은 모두 현실이 아닌 꿈속의 일인 것 같아 멍청히 서 있었다. 그러나 단원들은 순식간에 내 주위를 둘러싸더니 축하하며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어떤 단원은 흥분에 못 이겨내 목을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갑자기 굴러떨어진 이 행운을 믿을 수가 없었다. 또 전선사령관의 질문에 거짓으로 답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감옥을 탈출하고 아오지 수용소 생활을 했던 지울 수 없는 과거, 그것이 탄로 난다면 유학은커녕 또다시 반동이란 낙인이 찍혀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 모두에게서 떨어져 있고 싶었다. 혼자 토굴 속으로 들어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려드는 지난 추억들을 더듬어 회상했다. 잊고 지냈던 고향 생각, 늙으신 할머니, 여동생들, 아버지까지 그리워 눈물이 났다.

그러나 이미 전선사령관은 내게 소련으로 유학을 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명령은 누구도 당위원장까지도 거역하지 못한다. 유학을 가면 5년 이상이나 가족들을 보지 못한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나는 불도 켜지 않고 누워있었다. 내일이면 나는 이곳을 떠나 평양으로 가서 유학시험을 보아야 한다.

휴전, 그리고 모스크바로

우여곡절 끝에 평양에서 무사히 유학시험을 치르고 합격했다. 바로 그 이튿날인 1953년 7월 27일 나는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좁은 땅덩어리에서 밀고 밀리는 공방전으로 3년간이나 끌어온 전쟁, 한반도 거의 전 지역을 전장의 폐허로 만들어 놓고, 그 숱한 생명들을 희생시키고 동족상잔(同族相殘)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끝내 종전(終戰)이 아닌 정전협정, 즉 휴전(休戰)이라는 수치스러운 결말을 가져왔다.

6.25 한국 장군들
6.25 한국 장군들

총소리만 멈추었을 뿐 여전히 남과 북은 38선에 가까운 지역에 동서를 가로지르는 155마일에 걸친 철조망으로 갈린 채 서로 대치하게 된 것이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는가? 승자가 없는 전쟁이었다. 남쪽도 북쪽도 패자(敗者)인 전쟁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자기편이 승리한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평양에선 오랫동안 드리워졌던 어둠의 장막이 걷히고 승전축하의 불꽃놀이로 밤하늘이 아름답게 장식되었다.

하루아침에 평양은 죽음의 도시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의 도시로 변해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 왔다. 우리 유학 대기 생들도 군복을 벗어 던지고 체코제 양복으로 갈아입은 뒤 거리로 놀러 나왔다. 모란봉 근처에서 노파가 하는 국숫집에 들러 농마국수를 먹고 갖고 있던 돈을 모두 노파에게 주었다. 더는 북한 지폐가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내일이면 이 땅을 떠나 소련으로 가는 기차를 타는 것이다.

다음날 동트기 전 나는 조국의 흙을 한 줌 소중히 손수건으로 싸고 싼 다음 배낭 속에 간직했다. 앞으로 있을 내 인생 항로를 같이할 내 어머니의 체취와도 같은 조국의 흙이었다.

신의주에서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으며 나는 되돌아보며 조국 땅을 바라보았다. 그렇게나 탈출하려 했던 유형(流刑)의 땅, 그 땅을 정말 우연히 잡은 행운으로 떠나는 것이다.

눈앞에는 두만강의 푸른 물결이 출렁이고 있었다. 중국에서 다시 국제열차를 갈아타고 소련으로 가는 것이다. 남쪽도 중국 땅도 아닌 소련으로, 그것도 도망자가 아닌 유학생 신분으로 가는 거다. 잘 있거라, 조국의 산하(山河)여! 마음속으로 온갖 회한의 감정이 교차했다.

나는 피와 눈물로 얼룩진 3천 년 역사 위에 죽음의 그림자만이 드리워져 있는 것 같은 북녘의 땅을 바라다보았다.

해방직후 풍경
해방직후 풍경

모국 방문

소련은 내가 잠시 거처하는 곳일 뿐이다.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진짜 내 집은 내 고향 함경도의 옛집, 그 하나뿐이었다. 그간 나는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는 나이가 되도록 집 없이 떠돌아다닌 것이다.

모처럼 식구들과 집에서 따뜻함과 편안함을 느끼며 집필 생활을 하고 있을 즈음. 소련의 정치사회에도 냉전의 기류가 물러가고, 개혁(改革)과 개방(開放)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었다.

소련 공산당은 나중 고르바초프가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하면서 소련이 달라져 갔다. 고르바초프는 개혁정치를 본격화해 유배 중이던 반체제인사들과 정치범들을 석방했다. 또 일반 시민들의 해외 출국을 완화했고 소련계 유대인의 해외 이주를 확대해 나갔다.

그는 스탈린 시대 폭력을 고발한 영화의 상영을 허용했고, 체제 저항소설 <아르바트의 아이들>도 발간했다. <의사 지바고>의 작가 파스테르나크도 복권했다. 1987년부터는 일부 기업에 독립 채산제를 채택했고, 개인 영업도 허용하였다. 공산체제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어느 날 꿈에 그리던 대한민국의 모습이 소련 TV에 나왔다, 1988년에 서울에서 제24회 올림픽이 열린다는 소식이다. 남반부의 수도 서울에선 경제 강대국에서나 열 수 있다는 올림픽이 개최된다는 것이다.

전쟁의 폐허 속에 남겨진 잿더미로만 기억되던 조국의 산하, 내 첫사랑 정옥이를 찾아 몇 번이나 월남하려다 실패의 쓴맛을 봤던, 꿈속에서나 가 볼 수 있었던 땅, 남반부 서울에서 올림픽이 개막된다는 사실이다.

나는 남한이 그렇게 잘사는 나라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시베리아의 벌목장에서 만난 거렁뱅이 꼴을 한 북한 노무자들, 중앙아시아 농장에서 본 문명의 혜택을 못 받는 내 동포들, 그것이 늘 내 머릿속에 담긴 내 민족, 내 겨레의 모습이었을 뿐이다.

소련 TV에서 본 서울과 서울 사람들은 활기에 넘쳐 있었다. 즐비한 고층 건물들과 자동차, 시민들의 화사한 옷차림, 부지런히 움직이며 풍요로운 삶을 구가하는, 내가 그리던 이상사회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침체한 사회 속에서 의기소침해 있던 나는 잃어버린 청춘과 꿈을 되찾은 느낌이었다.

나는 다시 무대예술의 일선에 나섰다. 알마아타(카자흐스탄) 조선극장의 총연출가로서 공산 독재의 만행을 폭로하는 <위대한 부처님 도와주소서. >라는 연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바로 이때 재미교포작가 김은국 씨가 한국 KBS 취재진과 함께 소련을 방문했고, 알마아타로 와서 나를 인터뷰했다. 이것을 <재소한인들의 생활>이란 특집프로로 서울을 비롯한 남한 전역에서 KBS TV를 방영하였다. 이 프로는 남한에서도 굉장한 반응을 일으켜 안 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라고 들었다.

그런데 이 프로를 본 한국에 사는 내 친구들이 40년 전의 내 이름을 기억하고는 즉시 KBS로 김은국 씨를 찾아, 내가 두만강에서 중국경비대에 함께 붙잡혔던 자기들 친구란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들로부터 소련에 있는 내게 편지가 날아왔고, 친구들의 노력으로 나는 살아생전엔 이루지 못할 꿈이라 여겼던 모국 방문의 염원을 이룰 수 있었다.

드디어 아예로플로트 소련 비행기가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한 것은 1989년 11월 23일 저녁 9시였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인상은 ‘가난한 후진국’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머리에 남아있는 모습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이었다.

북한 우표(72년-전투 실전)
북한 우표(72년-전투 실전)

김포공항에는 나를 맞이하기 위해 고향 친구들과 동창들이 나와 있었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며 끌어안을 적만 해도 나는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었고, 어리벙벙하기만 했다. 모두 머리가 허연 백발의 늙은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아, 너로구나. 네가 바로 김한이구, 네가 정재호구..” 기억을 더듬어 40년 전 기억 속의 그들을 겨우 찾아내자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제는 눈물이 다 말라 버렸으려니 했는데 아무리 닦아도 눈물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그 어렵던 삶의 여러 고비에서 목숨을 부지해 이런 날을 맞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북녘 고향을 등지고 그곳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아닌가. 우리 고향은 38선으로 가로막히고 아무리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공산주의 체제의 꽁꽁 얼어붙은 땅이 아닌가. 고향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얼싸안고 한바탕 서럽게 울었다. 나는 가슴 한구석에 맺힌 한(恨)의 덩어리가 조금씩 녹아 나오는 후련함을 맛보았다.

한국방문 이틀째 나는 이북5도청에서 마련한 함경북도 도민회에 참석했다. 넓은 강당엔 도민들로 가득 찼고, 그들은 소련에서 온 나를 강당에 세우며 한국에 온 소감을 말하라고 했다. 나는 벅찬 감동으로 목이 메어 한참을 서 있다가 그만 즉석에서 지은 시를 낭송했다.

그러나 시를 다 마무리하기도 전에 좌석에 앉아 있던 외삼촌과 사촌, 동창과 고향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놀라서 내 이름을 부르며 무대로 뛰어 올라와 나를 끌어안고 난리를 치는 통에 그만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들은 내가 소련에서 온 것도 잊고 마치 북한 자기 고향에서 온 것으로 생각해 북에 남겨 두고 온 친척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묻기 시작했다. 그 소동 속에서도 나는 그들 중에 혹시 정옥이가 끼었나 싶어 두리번거리며 정옥이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정옥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와 정옥을 만난들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더라도 나는 정옥을 꼭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해방후 분위기

이튿날 저녁때였다. 그날도 바쁜 일정을 보내고 침대에서 쉬고 있는데 호텔 프런트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맹 교수님! 어떤 여자분이 찾아오셨는데요? 방으로 모실까요?” “누구라고 합니까?” “이름은 밝히지 않으시는데요. 여기 커피숍에 계세요.” “그럼 내가 곧 내려가지요.”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가슴을 두근거리며 1층 커피숍으로 내려갔다. 커피숍에는 웬 할머니 한 분이 어색하게 웃으며 나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을 뿐, 정옥이라고 짐작되는 여인은 없었다. 나는 할머니 쪽을 한번 힐끗 보고는 커피숍을 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나를 불러세웠다.

“맹 교수님!” “네?” “제가 바로 맹 교수님을 찾았어요.” “그래요? 누구십니까?” “전날 도민회에서 비웠지만 하도 분주한 것 같아…. 오늘에야 만나 뵙자고…. 혹시 제가 무례한 짓을 한 건 아닌지….”

여인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자꾸 끊었다가, 이윽고 잇지 못하고 슬피 우는 것이었다. 여인이 머리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순간 나는 그 여인의 귀밑에 커다란 점을 발견했다. 바로 정옥이었다. 나는 주위 사람들이 놀라 돌아다볼 정도로 큰소리를 질렀다.

“정옥이? 정옥이가 맞지?” 그리고 오랜 침묵이 지났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생소한 이 늙은 여인 앞에서 나는 당황했다. “내가 몹시 변했지요? 나는 동욱 씨를 금방 알아봤는데…. 날 알아보지 못하겠어요?”

1953년 6월 휴전직전

“용서하십시오. 내 머릿속에 늘 그리던 정옥이는 고향의 쌍포 고개 아래에서 흰 목수 건을 날리던 그 시절 정옥이만 생각나서….”

“이렇게 나랑 만난 게 반갑지 않으세요?” “뭐라고 한마디로 대답할 수가 없군요. 그간 나는 숨 한번 쉴 때도 정옥이를 생각했어요. 내가 겪은 모든 역경을 정옥이 생각으로 이겨낼 수 있었지요. 그렇게 늙어 왔지요. 아마 정옥이는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동욱 씨만 그런 건 아니에요. 나도 6.25가 터지자 동욱 씨를 만나려고 군 간호사로 지원하여 북으로 갔었지요. 부모님 성화에 시집을 가서도 동욱 씨를 잊을 수 없었어요. 3년 전에 남편은 세상을 떠났어요.”

우리는 서로 주름진 얼굴에 주르르 눈물을 흘리며 옛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눈앞에 앉아 있는 여인은 이미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가 아니라 그 옛날처럼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쌍포 고개를 힘들게 올라오고 있는 검은 눈동자의 소녀, 옛날의 그 정옥이었다.

서울 거리는 네온사인이 하나둘 켜지고 밤이 내렸다. 내 마음속 40년 동안이나 내린 두터운 어둠 속에서 반짝! 하고 작은 별빛이 켜지는 걸 나는 느꼈다. 이제는 다 사그라진 내 정열의 잿더미 위에 한 점 불씨가 살아나 아주 조그맣게 피어나는 걸 나는 보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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