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만주㉒] 대전자령전투 전적지: 72시간의 폭우와 주림을 버티며 끝내 승리하다
[아! 만주㉒] 대전자령전투 전적지: 72시간의 폭우와 주림을 버티며 끝내 승리하다
  • 안상경(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 승인 2022.08.17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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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삼성으로 불리는 중국 만주에는 우리 독립운동 사적지가 곳곳에 있다. 의병운동,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독립지사들의 고민과 피가 어린 곳들이 도처에 있다. 이들 사적지를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사이섬(간도, 間島) 표지석(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개산툰진 선구촌)[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사이섬(간도, 間島) 표지석(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개산툰진 선구촌)[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간도(間島)의 위치와 영역은 확정된 것이 없다. 다만 강(江)을 기준으로 압록강 일대를 서간도(西間島), 두만강 일대를 북간도(北間島)로 지칭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일상에서 말하는 간도는 두만강 북쪽의 연길과 용정 일대로서 엄밀하게는 북간도를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내가 머무르고 있는 요녕성 선양시(瀋陽市)는 서간도에 해당한다. 100년 전 이곳에선 일종의 한인 자치기구로서 국민부(國民府)가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을 결성하여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이끌었다. 

국민부의 거점 지역은 신빈현(新宾县)으로 선양시로부터 300~400km 떨어져 있다. 대륙에서 이쯤 거리면 “옆 동네”라고 할 수 있기에 수시로 답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대에 북간도에서 활동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그리고 산하의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과 관련한 전적지는 선양시로부터 1,000km 넘게 떨어져 있을뿐더러 산야이기 때문에 접근성이 용이하지 않다. 이동하는 데만 하루 이상이 걸리니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연길시(延吉市) 출장을 핑계로 북간도 일대의 한국독립군 전적지를 답사했다. 우선 경박호(鏡泊湖)로 향했다. 1933년 2월 혹한 속에서도 호수 주변의 양쪽 기슭에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을 그릴 수 있었다. 이어 사도하자(四道河子)로 향했다. 경박호와 달리 번듯한 기념비가 서 있었다. 드론을 띄워 분수령이나 계곡 등 지세를 살폈다. 그제야 한국독립군이 왜 이곳으로 일·만군을 유인하여 섬멸하고자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관심을 두었던 대전자령(大甸子嶺), 그리고 인근의 동경성(東京城)은 동선이 맞지 않아 답사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다시 오면 되겠지, 하며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랬던 것이 벌써 4년이 지나버렸다. 힘들더라도 그때 달려갈 걸… 돌이켜보면 참 아쉽기만 하다. 언제나 후회만 하는 내가, 가끔은 한심할 때가 있다. 그래 이런저런 이유로 우선 대전자령전투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소개하려 한다. 그리고 후속으로 사도하자전투를 연재할 것인데, 그때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의 구체적인 상황을 소개하겠다. 

공산주의 운동의 확산에 맞선 민족주의 세력의 결집 

만주지역에서 공산주의 운동은 오히려 한인들이 주도했다. 1923년 9월에 코민테른(국제 공산당) 산하 조직인 코르뷰로(고려국)가 박윤서(朴允瑞), 주청송(朱靑松) 등을 길림성 연길(延吉)에 파견하여 고려공산청년동맹을 조직했다. 1926년 5월에는 국내 조선공산당이 흑룡강성 영고탑(寧古塔: 현 영안현)에 해외 지부로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건립했다. 반면 중국공산당은 1927년 10월에야 요녕성 심양(瀋陽)에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동변도특별위원회[동만특위]를 발족하고, 1928년 2월에 길림성 용정(龍井)에 중국공산당 지부를 건립했다. 

그런데 1928년 12월에 만주지역에서 조선공산당의 승인이 취소되었다. 코민테른 제6차 대회에서 결의한 일국일당(一國一黨)의 원칙에 따른 조치였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중국공산당에 합류하여 중국혁명에 동참하는 것으로 노선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즈음 1930년에 ‘간도 5·30 폭동’이 발생했다. 한인 공산당원들이 철도와 교량을 파괴하고, 일본영사관과 경찰서를 습격하고, 곳곳에서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일제는 함경도 회령에 주둔하고 있던 제75연대를 급파해 진압에 나섰다. 이는 득보다 실이 많은 사건으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해체를 불러왔다. 

경박호 협곡(흑룡강성 목단강시 영안시 경박호진)
경박호 협곡(흑룡강성 목단강시 영안시 경박호진)

하지만 조선공산당의 해체와 별도로, 한인들의 공산주의 운동이 연변 일대와 남만주에서 들불처럼 번졌다. 1929년 세계대공황이 만주지역에도 영향을 미쳐 수많은 농민이 파산했으며, 이로써 계급별, 민족별 대립을 초래했다. 특히 중국인 지주와 한인 소작농으로 상징되는 모순 관계는 만주지역 한인들의 최대 현안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민족주의 계열의 본산이던 만주지역의 한인사회가 사상적 분열과 대립으로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내, 북만주에서 활동하던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의 지도자 김좌진(金佐鎭)이, 1930년 1월 공산주의자에 의해 피살되었다. 

한족총연합회는 민족주의 계열 중에서도 무정부주의적 성향이 강한 인사들이 결성한 단체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족총연합회는 1930년 7월에 길림성 위하현(葦河縣)에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건했다. 공산주의 운동이 확산하는 데 맞서 민족주의 세력을 결집하려는 의도였기도 하거니와 남만주에서 정의부(正義府)와 일부 신민부(新民府) 계열의 인사들이 주도하여 결성한 국민부(國民府), 또 산하의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과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성립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독립당은 유림, 대종교, 의병, 무관학교 등의 배경을 지닌 양반, 지주 출신의 인사들이 주축을 이뤘다. 당연히 민족주의적 사고를 기반으로 반공적 색채를 띨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핵심 간부로서 중앙위원장에 홍진(洪震), 총무위원장에 신숙(申肅), 조직위원장에 남대관(南大觀), 선전위원장에 안훈(安勳), 경리위원장에 최호(崔灝), 감찰위원장에 이장녕(李章寧)을 선임했다. 그리고 산하 군사 조직으로서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을 결성해 총사령에 지청천(池靑天), 부사령에 황학수(黃學秀)를 임명했다. 

중동철도 호로군과 협력하여 한·중 연합투쟁을 전개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한국독립당은 일제의 침략이 만주지역에 국한하지 않을 것이라고, 즉 중국 전역으로 영향을 미칠 것은 물론 세계대전으로까지 확전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오히려 기회였다. 더 광범위한 세력이 연합할 수 있는 항일투쟁의 계기가 도래한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에서, 한국독립당은 10월 5일 길림성 오상현(五常縣)에서 긴급중앙위원회를 개최했다. 이때 시국에 따른 투쟁노선, 요컨대 한·중 연합투쟁의 방안을 모색했다. 그리고 각 군구에 총동원령을 내려 재향군인의 소집과 청장년층의 징집을 실시했다. 

그러나 북만주는 연변 일대나 남만주와 달리 500호 이상이 거주하는 한인 집거지가 없었다. 그만큼 독립군 부대의 창건 기반이 취약했다. 하여 창립 초기에는 한국독립군의 병력이 150명가량이었다. 그런데도 1931년 11월에 신숙(申肅), 남대관(南大觀)이 한국독립당의 대표 자격으로 중동철도(中東鐵道)를 지키던 호로군(護路軍) 사령관 정초(丁超)와 합의하여 한·중 연합투쟁의 실질적인 방향을 큰 틀에서 도출했다.  

참고로, 중동철도는 만주리(滿洲里)에서 하얼빈(哈爾濱)을 거쳐 수분하[綏芬河; 東寧]에 달하는 본선과 하얼빈에서 장춘(長春)을 경유하여 대련(大連)에 달하는 남부선 등 총 길이가 2,430km에 달하는 철도로서 러시아가 부설했으나,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괴뢰국을 건립하자 군사적 충돌을 피하려고 일제에 양도했다. 그리고 호로군은 이 철도를 지키는 용병이었으나, 만주사변 이후 일제에 항거하는 중국의용군으로 전향했다.  

김좌진 피살지 금성정미소(흑룡강성 목단강시 해림시 산시진)
김좌진 피살지 금성정미소(흑룡강성 목단강시 해림시 산시진)

나아가 1931년 12월에 한국독립군 총사령 지청천이 중국의용군 사령부와 3개 항에 합의했다. 첫째, 한·중 양군은 어떠한 열악한 환경을 막론하고 장기 항전을 맹세한다. 둘째, 중동철도를 경계로 서부전선은 중국군이 맡고, 동부전선은 한국군이 맡는다. 셋째, 한·중 양군의 전시 후방 교련은 한국군 장교가 담당하고, 한국독립군의 군수 물자는 중국군이 공급한다. 이에 한국독립군은 중국의용군과 수시로 교섭하는가 하면, 모병 및 군사훈련에 매진하며 대일항전을 준비했다. 결과 1931년 말에는 500여 명의 병력을 갖출 수 있었다.

대전자령 계곡에 매복한 채 야생 버섯으로 요기 

1932년 초 연변 일대에서 중국 구국군이 봉기했다. 일제는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제19사단 1,600여 명을 간도파견군으로 출동시켜 진압에 나섰다.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1933년 중반 이후 구국군의 활동이 사라졌다. 그러자 일제는 간도파견군을 한국으로 철수시키려 했다. 예정일은 6월 28일이었다. 이때 한중연합군이 노송령(老松嶺)을 넘어 동서검자(東西臉子)에 머물다가, 왕청현(汪清縣) 나자구(羅子溝)에 주둔하고 있는 간도파견군이 연길현(延吉縣)을 거쳐 한국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절호의 기회였다. 매복 작전을 잘 펼친다면 간도파견군을 섬멸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문제는 지점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간도파견군이 연길현으로 이동하려면 대전자령(大甸子嶺)을 넘어야 했다. 40~50리가량 뻗어 있는 긴 협곡으로 ‘乙’ 자 모양으로 굽어졌을 뿐만 아니라, 험준한 절벽에 울창한 산림이 가려져 적을 공격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한중연합군은 3일간 100㎞를 행군하여 대전자령 북방 노모저하(老毋猪河)에 도착했다.

한국독립군의 주력부대는 500여 명이었고, 길림구국군의 주력부대는 2,000여 명이었다. 그리고 녹림대(綠林隊)가 추가 지원 세력으로 참여했다. 녹림대는 마적(馬賊)이나 토비(土匪) 출신의 무장 단체였다. 한중연합군은 대전자령 서쪽 양편 계곡에 깊숙이 매복했다. 그런데 6월 28일 아침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여름 장마였다. 때문에 간도파견군이 출발을 연기했다. 한중연합군은 꼼짝없이 폭우를 받아들였다. 움직이지 않았다. 간도파견군이 언제 이동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사흘이 흘렀다. 참호 속엔 빗물이 차올랐으며 건량(乾糧)도 바닥났다. 총사령 지청천이 쉴새 없이 독려했지만, 한국독립군은 물론 한중연합군의 사기가 전체적으로 떨어져 갔다. 이때 군의관으로 참여한 한의사 신홍균(申洪均)이 숲에서 자생하는 검은 버섯을 전투식량으로 활용했다. 신홍균은 검은 버섯을 소금에 절여 요기 거리로 제공했다. 중국인들도 검은 버섯을 즐겨 먹었기에 거부감이 없었다. 한국독립당의 선전위원장으로 전투에 참가한 조경한(趙擎韓)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赤鳥黃兎近三匝  해와 달이 뜨고 지기 세 차례건만
苦待天狼奚到遲  기다리는 이리떼는 보이지 않네
餱糧罄竭飢侵肚  바닥난 군량으로 굶주림은 더하는데
䨟沛連綿冷逼肌  장맛비 차가움은 뼛속까지 스며드네
黑蓸採取和鹽食  검정 버섯 따다가 소금 절여 먹어보니
非獨治風且療饑  요기도 되려니와 치풍도 된다 하네
可愛奇方何處出  어여쁜 사람, 어디에서 온 누구인가
姓申名矻是軍醫  성은 신이요 이름은 굴인 군의관이라네

- 「大甸子大捷에 대한 詩」 中에서

한국독립군 총사령 지청천(왼쪽, 池靑天, 1888~1957)과 한국독립군 군의관 신홍균(오른쪽, 申洪均, 1881~1948)
한국독립군 총사령 지청천(왼쪽, 池靑天, 1888~1957)과 한국독립군 군의관 신홍균(오른쪽, 申洪均, 1881~1948)

짧은 글이지만, 사흘간의 매목, 군량의 부족, 검은 버섯의 활용 등 당시 급박했던 상황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성은 신이요 이름은 굴인 군의관”은 신홍균을 말한다. 신굴(申矻)은 신홍균의 가명이었다. 신홍균은 한의사로서 1911년 중국 장백현(長白縣)으로 이주하여 원종교(元倧敎) 중심의 항일단체에서 활동했다. 이후 한국독립군의 군의관이자 지휘관으로 활동하며 쌍성보전투(雙城堡戰鬪), 경박호전투(鏡泊湖戰鬪), 사도하자전투(四道河子戰鬪), 동경성전투(東京城戰鬪), 대전자령전투(大甸子嶺戰鬪) 등에 참여했다. 

대전자령전투, 노획물의 규모로는 전례 없는 대승

한중연합군이 매복한 지 3일, 6월 30일 오전 6시, 간도파견군이 드디어 주둔지에서 출발했다. 화물차 100여 대, 우마차 500여 대, 자동차 수십 대가 호송 행렬을 이었다. 당시 간도파견군은 회령 주둔 보병 제75연대 500여 명, 함흥 주둔 보병 제74연대 3개 중대, 산포(山砲) 2개 중대, 기관포(機關砲) 1개 중대, 야포(野砲) 2개 중대, 기병(騎兵) 1개 소대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보병, 포병, 공병, 기병을 혼성한 2대 대대 규모로 전체 병력은 1,300명 가량이었다. 

오후 1시경, 간도파견군의 전초부대가 지나갔다. 얼마 후 화물차를 앞세운 본대가 계곡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중연합군은 후미부대가 골짜기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때 총공세를 펼치자, 미리 작전을 짰다. 그러나 길림구국군의 시세영(柴世榮) 부대가 성급히 사격을 개시했다. 이에 한중연합군이 총공세를 펼쳤다. 한국독립군은 사격도 사격이려니와 바위를 굴려 화물차와 우마차를 파괴하는 데 주력했다. 간도파견군은 기습에 당황했지만, 곧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가했다. 그러나 지리적 이점을 안고 있는 한중연합군을 당할 수 없었다. 

4~5시간의 접전 끝에, 간도파견군은 130여 명의 병사를 잃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중무기와 차량은 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중연합군은 간도파견군의 퇴로마저 차단했다. 간도파견군은 가까스로 대전자령 계곡을 빠져나갔지만, 화물차, 우마차 등 일부 호송 행렬은 화피전자(樺皮甸子) 동쪽 골짜기에서 또다시 한중연합군의 공세에 맞닥뜨렸다. 간도파견군은 이때도 도주하는 데 급급했다. 이렇게 수차례의 기습을 받고, 간도파견군은 7월 4일에야 용정 백초구(百草溝)의 일본영사관 분관에 안착할 수 있었다. 

한중연합군이 노획한 군수 물자는 박격포 등 각종 포 8문, 기관총 110자루, 소총 580자루, 탄약 300상자, 수류탄 100상자, 권총 200자루, 도검 40자루, 군용지도 2,000여 매, 각종 문서 300여 부, 피복, 담요, 기타 군장비 2,000여 건, 장갑차 2량, 망원경 25개, 약품 50상자 등이었다. 기록마다 차이가 있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노획물의 규모로는 전례가 없는 대승이었다. 즉 대전자령전투는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에 버금가는 대첩이었다. 그러나 노획한 군수 물자가 오히려 한중연합군의 분열을 초래했다. 

대전자령 정상부(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대전자령 정상부(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맹자(孟子)는 그의 왕도론(王道論)을 전개하며, “하늘의 때는 땅의 이득만 못하고, 땅의 이득은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라고 명쾌하게 단정했다. 이 논리를 대전자령전투와 연결하면, 천시(天時)는 그때 마침 간도파견군이 왕청현에서 연길현으로 이동한 것, 지리(地利)는 그곳에 마침 적을 공격하기에 적합한 대전자령이 뻗었다는 것, 인화(人和)는 한국독립군과 길림구국군이 마침내 연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천시, 지리, 인화, 어느 것 하나도 기울지 않고 고루 삼위(三位)가 어우러져 위대한 승리를 이룩한 것이었다. 

그러나 군수 물자라는 물질, 즉 분배라는 자본적인 속성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신적 협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인화가 깨져버렸다. 그 이후에는 아무리 좋은 때를 가려, 아무리 좋은 곳에서 전투를 벌였을지라도, 쌍성보전투로부터 대전자령전투에 이르기까지 한중연합군이 이룩한 연승 신화를 재현하지 못했다. 맹자는 인화를 이루는 근본 조건을 ‘사랑’과 ‘도리’로 보았다. 그렇다면 한국과 중국의 연합군이 더욱 사랑했더라면, 더욱 도리를 지켰더라면 어땠을까? 이는 100년 전 그때나, 또 지금 이때나, 한국과 중국이 서로 숙고해야 할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필자소개
안상경 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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