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내가 가장 궁금했던 몇 가지 화두 중의 하나는 ‘인간의 변화 가능성’이었다. 주어진 운명에서 얼마만큼 더 나아가고 얼마만큼 더 긍정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었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들어 인간의 속성에 관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동굴에 갇혀 있는 인간은 자신의 그림자만 보고 그림자의 세계가 진짜라고 굳건히 믿고 살게 된다. 그러나 어느 날 동굴 밖을 나가본 한 사람이 처음으로 빛에 의해서 드러난 진짜 세상을 보고, 동굴 안의 사람에게 “저것이 진짜야”라고 말해 주어도 동굴 안의 사람은 그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동굴 밖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나가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진리를 보려고 하지 않는, 많은 사람을 동굴 안에 묶여 있는 사람에 비유했다.
오랜 시간 동안 관습에 굳어온 것들, 그대로 생존 가능케 했던 과거의 인식이 동굴 안이라고 한다면, 동굴 밖에 나가는 일은 어쨌거나 새로운 모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변화를 거부하는 인간의 본성 자체가 ‘운명론’을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즉 동기부여가 되지 않은 삶 자체가 운명으로 굳어지는 것이다.
삶이라는 여행길에는 수많은 삶의 안내자가 있고 길이 있고 선택이 있다. 배움은 그 사이사이 존재하는 것이며 시간과 함께 흘러간다. 우리가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공기처럼 스며들기도 하고, 번개 치듯 다가오기도 한다. 체험 자체가 배움이 될 수는 없지만, 그 체험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절망하게 하는 체험을 ‘무엇인가 얻게 하는 실패’로 이끌어 나가는가 하면, 반대로 반성 없는 삶=운명이라는 매트릭스에 영원히 갇히게 할 수도 있다.
실패하는 삶이 두려운 게 아니다. 실패에서 나아가지 못하는 삶, 배우지 못하는 삶이 두려운 것이다. 생산이 있는 실패를 통해 도약하는 삶으로 나아가려면, 적절한 지도와 평가를 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사람은 밖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 내 안에도 분명 존재한다.
심리학에서는 이 능력을 ‘메타 인지’라고 하는데, 한때 교육에서 유행하는 학습법이 되기도 했다. 스스로가 동굴 안과 바깥을 구분하고 자신을 둘러싼 관습의 울타리를 인식하는 일, 다시 말하면, 동굴 바깥의 진짜 세상을 구분하는 내 안의 목소리를 발견해야 한다.
<가상계>라는 책에서 브라이언 마수미는 흥미로운 실험을 하나 소개한다. 그가 소개하고 있는 뇌파 실험에 따르면 자극에 따라 손가락으로 숫자를 가리키는 행동에서 뇌파를 기록하는 기계는 주어진 자극에 대해 행위자가 어떤 행동을 할지 결정하기 전에 0.3초간의 두뇌 활동이 있었다는 것을 기록했고 자극에 반응하여 손가락을 구부리기까지 다시 0.2초의 경과 시간이 있었음을 기록했다.
즉, 자극에 대해 몸에서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과 그것을 외부로 표현하는 행동의 완성 사이에 0.5초라는 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단히 흥미롭게도 마수미는 최초의 자극을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 행동으로서 의지를 표명하기까지 걸린 0.5초의 시간이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동참하거나 거부하는 반응들로 가득 차 있다고 설명한다.
의지 이전에 수많은 반응의 세계가 이미 놓여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 잠재적인 세계를 마수미는 가상계라고 정의한다. 작은 자극 하나에도 이미 수많은 반응이 전제되어 있고, 그 가능태의 세계를 뚫고 우리의 행동과 실천들이 날마다 행해지고 있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판단같이 보여도 동참과 거부의 엄청난 교합 끝에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동’(情動)이라고 불리는 초기 단계는 눈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미지 수용과 같은 선택에 실제로 관여하고 있으므로 마수미는 이를 잠재계로 본 것이다.
운명을 바꾼다는 것은, 잠재계를 바꾸는 일이고 그것은 0.5초의 순간과도 같은 반응을 바꾸는 일이다. 그것은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우리의 잠재의식 안에서 수없이 걸러지고 정비되고 재구성되고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 다시 의식의 표면 위로 올라올 테니까 말이다.
바로 일어나는 반응을 인식하기도 어려우니 생각 하나 바꾸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인가? 우리는 모두 사소한 습관 하나 바꾸는 조차 쉽지 않은 일임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것은 엄청난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고, 교육을 비롯한 내·외적인 많은 힘이 들어가는 일이다. 추상의 시간이 아닌 뚜렷한 ‘순간’들 속에서 자신의 실존을 하나하나 확인해 가는 길이다.
새로운 학기의 시작을 앞두고 이런저런 소망과 기대를 걸어본다. 어떤 학생들을 만날까? 어떤 선생이 될까? 한 학기 동안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 가르치는 사람이지만 배움고 싶은 욕망도 항상 내 안에 있다.
허겁지겁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보다 호기심을 바탕으로 한 발견과 창조에 대한 욕망이 우리를 더 설레게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것을 ‘넘침’ 혹은 ‘생산’으로 설명을 하는데, 종이 한 장 차이 같으면서도 욕망의 각기 다른 두 얼굴이다. 불안한 삶의 환경 속에이만 이 땅의 모든 선생님과 학생들이 새 학기를 맞으면서 즐거운 표정을 지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필자소개
이미옥 재한조선족작가협회 이사: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서울대학교에서 한·중 현대시 비교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