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만주㉔] 서탑코리아타운: 조선인 거리에서 중국 최대의 코리아타운으로
[아! 만주㉔] 서탑코리아타운: 조선인 거리에서 중국 최대의 코리아타운으로
  • 안상경(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 승인 2022.09.02 11: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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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삼성으로 불리는 중국 만주에는 우리 독립운동 사적지가 곳곳에 있다. 의병운동,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독립지사들의 고민과 피가 어린 곳들이 도처에 있다. 이들 사적지를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연수사(延壽寺) 서탑(西塔) / 沈阳市 和平区 敦化路 20号
연수사(延壽寺) 서탑(西塔) / 沈阳市 和平区 敦化路 20号

어느 시인이 <창작21>에 발표한 연작시 ‘고구려의 바람 4 - 심양 서탑 거리’ 전문이다. 작품의 문학성 여부를 떠나 서탑코리아타운의 정체성을 아주 극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서탑엘 간다
요녕성 심양시 서쪽 거리 서탑엘 간다
7, 80년대식 카바레에
역전 식당식 간판이 요란한 서탑엘 간다
고구려 땅이었다가
독립군 활동이 뜨겁던 봉천(奉天)이었다가
고국은 한국이나 조국은 중국이라는
조선족 거리에 북한사람과 탈북자까지
뒤섞인 한국 교민의 거리
서탑엘 간다
한국의 역사가 백제원, 신라성, 고려원, 이조가든으로 나붙은 거리
북한의 모란각, 평양관, 동묘향관이 나란히 선 거리
신사임당떡집, 가야원떡집, 남원추어탕집, 전주집도 모자라
서울가마솥, 수원갈비, 황해노래방, 부산사우나가 다 모인 거리
모국어 하나면 다 통하면서도
중국인인 척, 한국인인 척, 조선족인 척
북한인은 모른 척 아닌 척
어깨를 스치다가도 된장국 한 그릇에 맘을 여는 거리
제각기 다른 나라 이름을 멍에로 달고
패인 웅덩이마다 질척이는 회한이 봄비로 고이는 거리
중국 안의 한국어가 단동 너머 압록강 너머
신의주 너머 38선 너머
고구려 바람에 이끌려 뒤엉키는
한민족의 거리
서탑엘 간다

서탑코리아타운 야경 / 중국 요녕성 심양시 화평구 서탑가
서탑코리아타운 야경 / 중국 요녕성 심양시 화평구 서탑가

서탑코리아타운은 중국 요녕성 심양시 화평구에 위치하고 있다. 청나라 2대 황제가 건립한 4탑4사(四塔四寺) 중 하나인 연수사(延壽寺; 백성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건립)의 서탑(西塔)에서 명칭이 유래했으며, 남북을 가로지르는 500m가량의 서탑가(西塔街)를 중심으로 2.58㎢ 부지에 상가와 주거단지가 밀집해 있다. 중국의 개혁·개방, 그리고 본격적으로는 한·중 수교 이후 중국의 대도시와 연해도시에 한국기업이 입주하면서 코리아타운을 형성했다. 그러나 규모는 물론 역사적 측면에서 중국의 가장 대표적인 코리아타운은 서탑코리아타운이다. 실제로 심양시 정부의 홈페이지에 화평구 서탑지구를 “중국 최대의 코리아타운”으로 소개하고 있다.

심양남역의 품팔이꾼부터 서탑지구 정미소의 직공까지

1875년 스코틀랜드 출신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가 심양에 선교부(宣敎部)를 설치했다. 그리고 이듬해 동관교회(東關敎會; 沈陽市 大东区)를 설립하고 한글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이는 존 로스가 조선의 변경지역인 봉황성(鳳凰城) 고려문(高麗門)에서 의주 상인 이응찬(李應贊), 백홍준(白鴻俊), 서상륜(徐相崙) 등을 만나면서 이루어졌다. 존 로스는 이들로부터 한국어를 익히는가 하면, 이들과 함께 성경 번역에 박차를 가했다. 결국 1882년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서 3,000부를 간행했다. 근대에 이르러 서탑지구에서 활동한 첫 조선인의 행적이라고 할 수 있다.

동관교회(東關敎會), 교회 입구에는 “번역조선문성경구지(飜譯朝鮮文聖經舊址; 조선어성경번역유적지)”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 沈阳市 大东区 东顺城街 三自巷 8号
동관교회(東關敎會), 교회 입구에는 “번역조선문성경구지(飜譯朝鮮文聖經舊址; 조선어성경번역유적지)”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 沈阳市 大东区 东顺城街 三自巷 8号

그러나 그 이후에는 누가, 언제, 어떻게 서탑지구로 이주했는지 확인할 방법이 묘연하다. 다만 1989년 심양조선족지, 1995년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2012년 심양민족지창 등에서 편린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자료를 보건대, 1900년 평안북도 영성군 출신 안봉태가 서탑에서 쌀엿 장사를 시작했다. 서탑지구 외곽으로는, 1906년에 우홍구(于洪区) 대흥조선족향(大兴朝鲜族鄕) 오가황촌(吴家荒村)에 김시순 등 3가구가 이주했다. 신민현(新民县) 공태보촌(公太堡村; 현 红旗堡村)에도 한인 5명이 이주했다. 이들은 고향에서 영위했던 방식대로 수전(水田)을 풀었다.

그런데 이 무렵 중국과 일본이 간도협약(間島協約)을 체결했다. 조선이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의 “동쪽은 토문강(土門江)을 국경으로 한다”는 내용을 두고 간도영유권 분쟁을 벌였던 차,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임의로 중국에 간도를 양도했다. 그리고 대신 무순탄광(撫順炭鑛) 채굴권과 안봉선(安奉線; 심양-단동) 철도부설권을 획득했다. 이에 1911년 10월 압록강철교를 완공하고, 동년 11월 안봉선 전 구간을 개통했다. 일본은 무순탄광에서 30여 년간 2억 톤에 달하는 석탄을 캐내고 안봉선을 통해 자국으로 실어 날랐다.

안봉선 개통으로 석탄은 물론이거니와 물류의 유통이 활발해졌다. 그런데 서탑 지근 거리에 석탄 하적장이자 물류 하차장으로서 심양남역(沈陽南驛)이 위치했다. 이곳에서 물류 배송이 이루어졌다. 이때 짚으로 짠 가마니가 포장재 대용으로 인기를 끌었다. 비록 품팔이였지만, 짚을 다루는 일자리가 급증했다. 그러자 한인들이 서탑지구로 모여들었다. 루트는 세 갈래였다. 하나는 집안(集安)-환인(桓仁)-무순(撫順)-심양(沈陽), 다른 하나는 단동(丹東)-본계(本溪)-심양(沈陽), 나머지는 영구(營口)-해성(海城)-심양(沈陽)이었다. 더불어 한인들을 위한 식당이나 잡화점도 늘어났다.

1920~1930년대 봉천성 경무국장 우진(于珍)의 사무공간 (건물은 시급 문화재로 보존하고 있으며, 내부는 리모델링을 하여 고급 레스토랑으로 운영하고 있다.) / 沈阳市 沈河区 中山路 196号
1920~1930년대 봉천성 경무국장 우진(于珍)의 사무공간 (건물은 시급 문화재로 보존하고 있으며, 내부는 리모델링을 하여 고급 레스토랑으로 운영하고 있다.) / 沈阳市 沈河区 中山路 196号

심양남역과 함께 북시장(北市場)이 인접한 상업의 중심지라는 지리적 여건 외에도, 서탑지구로 한인들이 모여든 까닭은 주변에 농업지대가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는 데 있었다. 당시 만주지역의 농업은 윤작(輪作)에 의존하고 있었다. 예컨대 고량(高粱; 일종의 수수)을 제1년 작물로, 조를 제2년 작물로, 대두를 제3년 작물로 경작했다. 그러나 한인들의 수전농법은, 비록 한랭기후에 속하는 지역이었지만, 갖은 노력으로 윤작의 한계를 극복했다. 이로써 수전농법이 비교우위를 차지했고, 나아가 한인들의 이주를 촉발했다.

1922년 통계에 따르면, 서탑지구에 401세대 1,902명의 한인들이 거주했다. 정미업 4세대, 특산품 무역업 4세대, 잡화업 5세대가 성업했고, 요식업이나 숙박업에도 30여 세대가 종사했다. 특히 정미소의 성업은 수전농법의 확산과 관련한 것으로, 금성정미소(1919년), 대경호정미소(1921년), 신성상회(1922년), 천민공사(1924년)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 중 신성상회는 직공이 무려 100명을 넘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는 남만정미소, 순흥정미소, 대흥정미소, 신창정미소, 대동정미소를 새로이 설립했고, 1940년대에는 금성정미소, 순흥정미소, 대동정미소가 합병하여 삼흥상사로 발전했다.

개고기 국밥집의 미망인부터 봉천방사공장의 여직공까지

심양시 중산로(中山路)에는 미쓰야협정(三矢協定)을 체결한 봉천성 경무처장 우진(于珍)의 사무공간이 남아 있다. 1925년 6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와 봉천성 경무처장 우진은 만주지역의 한인들을 중·일 양국의 치안을 저해하는 집단으로 규정하고, 심양에서 비밀리에 협약을 진행했다. 골자는 “독립운동가를 체포하면 일본 영사관에 인계할 것, 그러면 포상금을 지불할 것인데 그 일부는 반드시 체포한 관리에게 줄 것”이었다. 동북 군벌은 포상금도 포상금이려니와 일제가 만주지역으로 군대를 동원하는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한인 독립운동가를 탄압했다.

봉천방사공장(奉天紡絲工場) 옛 건물과 신축한 금원화성(金苑华城) 아파트 / 沈阳市 和平区 抚顺路 60号
봉천방사공장(奉天紡絲工場) 옛 건물과 신축한 금원화성(金苑华城) 아파트 / 沈阳市 和平区 抚顺路 60号

1920년대 심양을 중심으로 한 서간도는 독립운동의 르네상스 시기였다. 그러나 미쓰야협정으로 독립운동가의 희생이 늘어갔다. 무고한 농민도 큰 피해를 입었다. 여기에 더해 1928년 3월 봉천 군벌이 ‘일선인토지임대금지법령(关于禁止向日鲜人租借土地的禁令)’을 공포했다. 중국인 지주가 한인에게 땅을 임대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이었다. 농민들은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었다. 어쩔 수 없이 거처를 도회지로 옮겨 일용직 노동자로 변신해야 했다. 이때를 전후하여 독립운동가 미망인 8명이 서탑 한복판에 개고기 국밥집을 차렸다.

국밥집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중국은 세계 최대의 개고기 소비국이지만,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은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예컨대 1791년 사은사(謝恩使)로 중국을 방문한 김정중(金正中)은 연행록에서 “중국인들은 비둘기, 오리, 거위 등은 먹지만 개고기는 먹지 않는다”고 했다. 만주족은 기마민족이었다. 개는 그들에게 수렵의 동반자였다. 누르하치가 적에 쫓겨 정신을 잃었을 때, 충복이었던 개가 불길에서 누르하치를 구했다는 전설도 있다. 만주족이 개고기를 먹지 않자 중원의 한족도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가 변함에 따라 식습관도 변했다. 수육 무침에 곁들인 국수는 한인이든 중국인이든 누구나 선호했다.

1978년 중국 개혁·개방 이전의 서탑가 모습 / 연대 미상
1978년 중국 개혁·개방 이전의 서탑가 모습 / 연대 미상

한편 1921년 동북 군벌 장쉐량(張學良)이 서탑에 봉천방사공장(奉天紡絲工場)을 건립했다. 미국으로부터 방사기, 방직기, 발전기 등을 수입하여 1923년부터 생산에 돌입했다. 1930년 5월 통계에 따르면, 봉천방사공장의 직공은 1,862명이었다. 공장 내에는 직원 및 가족 숙소, 구락부, 직업학교도 있었다. 특히 경봉철도(京奉鐵道; 베이징-심양간)의 지선을 공장으로 연결하여 상품의 배송이 매우 용이했다. 그러나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봉천방사공장의 설비와 자산을 빼앗았다. 그리고 일본 최대 재벌이었던 미쓰이 그룹의 종연방직회사(鐘淵紡織會社)에 인도했다.

1930년대 미쓰이 그룹이 봉천방사공장을 운영했다. 그리고 일본 관동군의 군복을 생산했다. 미쓰이 그룹은 내선일체(内鮮一体)를 기치로 봉천방사공장에 한인들을 대거 고용했다. 겉으로는 한인들을 위한 지원 정책이었지만, 한인 여성들이 중국인들보다 손재주가 좋았을 뿐더러 청결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에 서탑지구로 한인 여성들이 몰려들었다. 그러자 한인 청년들도 몰려들었다. 당시 심양 최고의 상권으로서 북시장(北市場)도 호황을 누리고 있던 터라, 인근의 북시장과 서탑지구를 중심으로 청춘남녀들이 왁자지껄했다.

1936년 통계에 따르면, 서탑지구에 1,176세대 6,178명의 한인들이 거주했다. 한인이 경영하는 상점은 30여 업소였다. 정미소를 제외하고 고무신, 가죽제품, 특산품, 생활용품 등을 취급했다. 그런데 이 중에서 10여 업소가 고무신을 취급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청춘남녀를 타깃으로 신발이나 의류, 액세서리 등을 판매하는 일종의 로데오거리를 형성한 것이었다. 그러나 광복 후 대형 상점주들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서탑지구에는 작은 상점들만 남았다. 상권이 무너져버렸다. 그러자 주변의 위생 상태도 나빠졌다. 치안 질서도 혼란스러웠다. 같은 한인이었지만, 인근 지역의 사람들은 서탑 사람들과 혼사를 치르지 않겠다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서탑대냉면(西塔大冷麪) / 沈阳市 和平区 市府大路 31号
서탑대냉면(西塔大冷麪) / 沈阳市 和平区 市府大路 31号

서탑대냉면의 단골부터 백제원의 한·중 기업인 고객까지

서탑지구의 한인들은 생존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그 일환으로, 1949년 7월 심양시 정부 민정과 전복민 과장이 주도하여 서탑가도판사처(西塔街道办事处; 일종의 주민자치센터) 자리에 소비합작사(消费合作社)를 설립했다. 그리고 매장을 개장하여 곡물류, 가공식품류, 생필품 등 250여 종의 상품을 판매했다.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연말에는 품목이 700여 종으로 늘어났다. 1952년에는 조선족 특색 음식점을 증설하기로 합의했다. 냉면을 제일 특화상품으로 하고, 곁들여 밑반찬과 떡을 출시했다. 지금까지도 성업하고 있는 서탑대냉면(西塔大冷麪)이 이때 개업했다. 참고로, 중국 냉면은 짜고 시큼하면서도 단맛이 나는데 서탑대냉면은 짠맛만 난다. 조선족이 주로 논일이며 밭일을 하니 염분을 보충하기 위해 그 맛을 냈다고 한다.

소비합작사는 조선족의 생필품을 공급하는 동시에 서탑지구의 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5년에는 지사가 7개로 늘어났다. 영업망도 넓어져 요녕성의 36개 소수민족 상점 및 동북지역의 45개 조선족 상점과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이를 통해 상품의 과부족을 조절할 수 있었고, 해외 시장도 개척할 수 있었다. 나아가 1956년에는 가공식품점을 독립적으로 분화하여 350여 종의 식품을 판매했다. 조선족이 선호하는 품목은 명태, 황태, 곱창, 고사리 등 30여 종이었다. 가을에는 마늘, 고춧가루, 생강, 새우젓 등을 출시했다. 서탑지구는 물론 외곽 변두리까지 조선족의 김장 수요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백제원(百濟園) / 沈阳市 和平区 图们路 72号
백제원(百濟園) / 沈阳市 和平区 图们路 72号

1978년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했다. 편승하여 서탑지구도 변모를 시도했다. 질퍽이는 골목길에 난잡한 상점들, 허물어진 벽돌담과 일그러진 양철지붕, 서탑지구는 여전히 ‘조선인 거리’에 불과했다. 이에 대형 백화점을 메인으로, 조선족 특색 상점을 서브로, 노천 재래시장을 옵션으로 하는 상업지구, 그러면서도 너른 녹지에 오락 시설을 갖춘 문화지구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드디어, 1988년 심양시 전기기계국 주택개발공사 김학수 대표가 서탑지구를 조선족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로 변모시킬 청사진을 내놓았다. 3억 6천만 위안을 투자하여 서탑의 중앙로를 확장, 연장하는가 하면, 백화점, 무역청사, 호텔, 병원, 문화센터 등을 건립하고, 주변에는 녹색공원을 조성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낡은 주택들을 철거하고는, 자금 부족으로 후속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이제는 심양시 정부가 서탑지구 개발에 직접 뛰어들었다. 2억 위안을 투자하여 33만㎡ 부지에 아파트를 짓고 2,400여 가구를 입주시켰다. 그리고 기존 1,000여 가구의 거주 환경을 개선했다. 1994년에는 한국인 여태근 대표가 서탑 한복판에 백제원(百濟園)을 개업했다. 심양시 외자기업 관할 부시장의 지원으로 ‘만주 봉천 개고기 골목’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한국식 호텔, 식당, 사우나, KTV가 복합된 공간을 조성했다. 먹고 마시며 쉴 수 있는 이색적인 공간을 마련한 것인데, 한국인은 물론 중국 현지인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다. 또한 때를 맞춰 대한항공이 심양 노선으로 취항을 시작했다. 이는 한국인, 한국상품이 대거 심양으로 유입할 수 있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백제원의 개업이 서탑코리아타운 형성에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면, 대한항공의 심양 노선 취항은 서탑코리아타운 발전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나아가 2002년부터 시작한 한국인, 한국문화 축제로서 심양한국주간(沈陽韓國周) 행사를 계기로 서탑코리아타운이 한국문화를 중국사회에 알리는 제일 창구로 거듭났다. 이에 힙입어, 2014년에는 신생활그룹(New Life)의 안청락 부회장이 사재를 털어 한중교류문화원(韓中交流文化院)을 개원했다. 문화 교류를 통해 한국과 중국, 한국인과 중국인의 우호를 돈독케 한다는 비전을 갖고 한국인, 북한인, 조선족은 물론 한족까지도 더불어 하나 되는 미래를 위해 경주하고 있다.

2021년 한중투자무역박람회 및 중국 심양한국주간 / 한식체험 행사 (한중교류문화원 최봉란 비서 진행)
2021년 한중투자무역박람회 및 중국 심양한국주간 / 한식체험 행사 (한중교류문화원 최봉란 비서 진행)

필자소개
안상경 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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