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로㊴] 한국에 아프리카 문화예술의 뿌리를 내리다 – 양문희 릴리 대표
[아프로㊴] 한국에 아프리카 문화예술의 뿌리를 내리다 – 양문희 릴리 대표
  • 양문희 릴리 대표
  • 승인 2022.09.22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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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RO’는 국내 아프리카 전문가들의 모임이다. 외교부 한·아프리카재단에서는 이들의 활동을 소개한 책을 두 권 펴냈다. ‘Af-PRO, 한국과 아프리카를 잇다’는 제목의 단행본들이다. 한·아프리카재단의 허락을 받아, 이 책의 내용을 연재한다.[편집자주]

어려서부터 춤을 춰온 양문희 대표는 20대 초반 처음 아프리카 춤을 접하고 이에 매료됐다. 한평생 춤을 춰왔기에 아프리카 춤도 어렵지 않게 익힐 수 있으리라 여겼지만 기니에서 아프리카 춤을 배우는 동안 양문희 대표는 매일 밤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곤 했다. 아프리카 음악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여태껏 춤출 때 사용한 근육과 다른 근육을 단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전통을 배우는 일이 얼마나 힘든 지를 뒤늦게 깨달은 양문희 대표는 다른 학생들이 깊은 잠에 빠져든 달밤에 혼자 춤 연습을 거듭하며 부단히 노력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날 즈음 드디어 음악이 들리기 시작했다는 그녀는 아프리카 댄서 중 가장 빠른 속도로 아프리카 춤을 섭렵했다. 순수한 열정으로 국내에 아프리카 춤을 전파해온 양문희 대표는 지난해 코트디부아르 출신의 유명 젬베(Djembe) 연주자 이브라힘 코나테(Ibrahim Konate)와 결혼했다. 공연예술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댄서와 뮤지션의 조합을 이룬 그들은 아프리카 문화예술의 뿌리를 찾는 동시에 국내에 아프리카 문화예술이 단단히 뿌리내리도록 힘쓰고 있다. 그들이 뿌리를 내리고자 노력하고 있는 사이 시나브로 맺힐 꽃과 열매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아프리카 춤에 눈뜨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늘 춤을 추고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발레를 시작으로 춤에 정식으로 입문한 후 한국무용을 거쳐 대학에서는 현대무용을 전공했다. 춤의 장르를 계속 바꾼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내 안에 가득 찬 감정과 에너지를 발산하기에 발레나 한국무용은 제약이 많았기 때문이다. 현대무용은 비교적 형식이 자유로워 보였다. 하지만 대학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하면서도 갈증의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되지 않는 듯했다.

그러던 중 대학교 3학년 무렵 교환 공연을 하러 미국을 찾았을 때, 한 수업에서 흑인 선생님이 추는 춤을 보고 큰 충격에 빠졌다. 여태껏 보지 못한 구조와 형태로 몸을 쓰며 추는 춤이 무척 독특해 보였다. 나를 한 순간에 매료시킨 낯선 동작과 리듬의 춤은 현대무용과 아프리카 춤을 접목한 아프로컨템포러리(Afro-Contemporary)였다. 나는 주저없이 그 선생님이 짠 작품에 참여해 안무를 배우고 무대에 올랐다. 나를 이토록 강하게 이끄는 춤이 현대무용과 아프리카 춤을 접목한 형태라면 과연 아프리카 춤의 원형은 무엇일까. 귀국행 비행기에 오른 내 머릿속에 커다란 물음표 하나가 새겨졌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포털사이트에 ‘아프리카 춤’을 검색했다. 그러나 검색 결과가 없다시피 했다. 크게 낙담했지만 곧 바쁜 일상으로 인해 잊어버렸다. 하지만 불현듯 떠오를 때마다 검색창에 ‘아프리카 춤’ 다섯 글자를 쓰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국내에서 아프리카 춤 워크숍이 열린다는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나는 당장 참가신청서를 보냈다. 뮤지션들이 젬베 등 아프리카 타악기를 연주하면 아프리카 댄서가 춤을 췄다. 처음 접한 아프리카 전통 춤은 아프로컨템포러리와 확연히 달랐다.

타악기를 두들겨서 내는 소리와 박자감이 워낙 강렬하여 춤을 출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특히 즉석에서 음악을 연주하다 보니 댄서와 뮤지션이 서로 호흡하며 무대와 분위기를 자유자재로 이끌어 나갔다. 댄서와 뮤지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줄이 연결된 듯한 강한 연대감이 느껴졌다. 대학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하며 한 번도 라이브 음악에 맞춰 춤 출 기회를 얻지 못한 내게 아프리카 춤 워크숍은 일생일대의 충격과 같은 경험이었다. 여태껏 작품을 함께 구상하며 댄서들과 주고받은 영감보다 그날 뮤지션과 짧게 주고받은 호흡이 훨씬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음악에 모든 감각을 집중한 채 몸을 세차게 흔들수록 머릿속은 더욱 명료해졌다. ‘아프리카 춤을 해야겠다!’ 머릿속에 커다란 느낌표 하나가 새겨졌다.

일본공연
일본공연

시행착오를 통해 아프리카대륙을 알아가다

국내에서는 아프리카 춤에 대한 개념이 생소하게 느껴지다시피 했지만, 일본이나 등 이웃 나라들은 30여 년 전에 아프리카 춤을 들여와 이미 싹을 틔운 후였다. 나는 우선 가까운 일본, 타이완에서 열리는 아프리카 춤 워크숍에 참가했다. 그때 워크숍에서 만난 마스터 선생님들은 모두 기니 출신이었다. 아무래도 아프리카 춤을 제대로 배우려면 기니로 가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여러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착실히 모았다. 그 과정에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생기기도 했다. 아프리카에 한창 빠져있을 때 튀니지에서 활동할 봉사단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덜컥 지원한 것이다. 그때 당시 나는 튀니지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짬짬이 아프리카 춤을 배울 요량이었다. 그런데 설레는 마음을 안고 막상 당도한 튀니지는 아랍문화권의 북아프리카국가였다. 내가 배우고자 했던 아프리카 춤 문화와는 전혀 달랐다. 순간 내가 아프리카대륙에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깨달았다. 그때만 해도 아프리카대륙을 동경하면서도 잘 몰랐고 단순히 아프리카대륙을 하나의 문화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때의 실수로 나는 아프리카를 좀 더 진지하게 바라보는 태도를 갖게 됐다.

아프리카가 얼마나 크고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대륙인지 깨닫고 돌아온 나는 다시 경비를 모으는 데 매진했다. 동시에 기니에서 춤을 배울 마스터 선생님들을 알아봤다. 기존 워크숍에서 만난 선생님들, 직접 만나지는 못했으나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선생님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연락을 취한 선생님 모두에게 워크숍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로 워크숍을 신청했다. 거처를 여러 번 옮기는 불편이 뒤따르더라도 최대한 많은 선생님의 워크숍에 참여하고자 했다. 기니까지 어렵게 찾아가는 김에 다양한 춤을 보고 배우고 싶은 마음에 내린 결정이었다.

세계테마기행
세계테마기행

긴 비행 끝에 저녁 즈음 기니에 도착하자 후텁지근한 공기가 깊숙이 밀려 들어왔다. 첫 번째 선생님의 워크숍에 참여하고 있던 학생이 공항으로 마중 나왔다. 그가 운전하는 차가 한참을 달려 섰을 때 주위는 이미 캄캄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선생님이 플래시를 들고 나왔다. 선생님은 짧은 환영 인사와 함께 오늘은 피곤할 테니 방에 올라가 자라고 했다. 나는 휴대전화 불빛에 의지해 얼굴을 대충 물티슈로 닦고 첫날 그렇게 몸을 뉘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고 나는 자못 놀랐다. 방에 나 있는 창문은 유리 없이 방충망만 씌워져 있었으며, 그 너머의 풍경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모래바람 날리는 황무지에 나무판자로 지은 낡고 작은 집이 몇 채 있을 뿐이었다. 물도 잘 나오지 않았다. 물 나오는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어 그 시간이 되면 각자 물을 긷느라 한바탕 난리가 났다. 하루에 양동이 두 개 분량의 물로 빨래부터 샤워, 변기 물 내리는 것까지 해결해야 했다.

전기도 오락가락했다. 밤에 땀 흘리며 자다가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면 눈을 번쩍 떴다. 하루 종일 멈춰 있던 선풍기가 돌아간다는 건 전기가 잠깐 들어온다는 사실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한밤중에 전기가 들어오게 되면 다들 침대에서 일어나 휴대전화를 충전하거나 노트북을 켜 영화를 봤다. 언뜻 보면 열악한 환경이 아프리카에서의 생활을 불편하게 했으리라. 그러나 적응을 잘해서인지 나를 힘들고 서럽게 했던 것은 생활환경이 아니라 아프리카 음악이 이해되지 않았던 점이었다.

풋내기에서 우등생이 되기까지

하루 일과는 단순했다. 아침 식사 후 오전 수업을 들었고 점심시간에는 주유소에 딸린 가게를 찾아 간식거리를 사 먹곤 했다. 그리고 오후 수업을 듣고 나면 다 같이 저녁을 먹었다. 저녁 식사가 끝날 즈음 사방이 캄캄해지면 선생님, 학생 할 것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어둠 속에 누워 음악을 듣고 또 들었다. 음악을 들으며 오늘 배운 동작을 머릿속으로 계속 시뮬레이션했다. 하다가 막히면 일어나 실제로 춤을 추기도 했다. 나는 사실 아프리카 춤이 이토록 어려울 줄 예상하지 못했다. 국내 혹은 이웃 나라에서 열리는 워크숍에 거듭 참여하면서 지금이라도 충분히 배울 수 있는 수준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현지에서 가르치는 춤은 차원이 아예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나 일본, 타이완 등지에서 열리는 워크숍의 경우 댄서는 아프리카대륙에서 직접 초청을 하더라도 뮤지션은 그 나라 사람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한번 상상을 해보라. 제아무리 열심히 갈고 닦았다 하더라도 외국인이 연주하는 사물놀이와 우리나라 사람이 연주하는 그것이 같겠는가. 연주의 속도감이나 리듬감 등의 디테일이 확연히 달랐다. 무엇보다도 해외에서 열리는 워크숍은 초보자를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아 훨씬 더 난이도가 낮았던 것. 나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준비하고 상상해 왔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난이도에 적잖이 당황했다.

워크숍이 열리는 현지 강습소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우선 거울이 없고 수업을 녹화할 수 없었다. 물론 음악은 라이브로 연주했다. 뮤지션들의 연주에 맞추어 선생님이 보여주는 동작을 따라해야 했다. 다른 학생들은 곧잘 따라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특히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음악인 데다가 기존에 듣던 음악과 너무도 달라 도저히 음악이 귀에 익지도 않고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할 수도 없었다. 평생 춤을 춰온 나로서는 처음 겪는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기니에서 춤 배우기
기니에서 춤 배우기

선생님은 ‘아프리카 춤은 음악이 알려주는 길로 가는 춤’이라고 강조하며 ‘아프리카 음악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아프리카 댄서라고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도 아프리카 춤에 매료된 이유가 뮤지션과 호흡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던 만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답답한 나날이 이어지니 울다 지쳐 잠드는 날들이 쌓여갔다. 그나마 수업 내용을 녹화하지는 못해도 녹음은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다른 학생들이 쉴 때 녹음 파일을 들으며 동작을 기억하고 감각을 익히기 위해 노력했다.

한 달 즈음 되니 기적적으로 음악이 들리기 시작했다. 도입부를 들으면 앞으로 곡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나는 계획대로 한 달간의 워크숍을 마무리하고 다른 선생님의 교습소로 거처를 옮겼다. 새로운 교습소에서 만난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며 내가 아프리카에 와서 춤을 배운 지 한 달 됐다고 하자 다들 깜짝 놀랐다. 겨우 한 달 배운 실력이라 하기에는 수준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몰랐으나 돌이켜 보면 나 자신을 무척이나 다그쳤던 것 같다. 친구들로부터 독하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멕시코 출신의 아프리카 댄서는 여전히 나를 보면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독하게 아프리카 춤을 배워 가장 빠르게 섭렵한 사람이 바로 너다’고 한다. 다른 학생들이 놀라는 반응을 보며 조금씩 자신감을 되찾은 나는 1~2주 간격으로 교습소를 옮겨 다니며 최대한 많은 선생님을 만나고 다양한 춤을 몸에 익혔다.

워크숍
워크숍

한국과 아프리카에서 서로의 문화를 알리다

기니에서 3개월 만에 돌아왔을 때 나는 여느 때보다 체력과 기운이 넘쳤다. 빨리 이 에너지를 발산하는 동시에 내가 보고 느낀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대중의 반응은 냉랭했다. 여전히 아프리카에 관심이 낮을 뿐만 아니라 시선도 호의적이지 않았다. 무대에 올라 아프리카 춤을 알리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그리고 아프리카 춤 이야기를 꺼내면 과반수가 ‘우가우가’ 하는 원시적인 소리를 내며 아프리카 문화를 희화화했다.

그런 반응을 접할 때마다 그들 앞에서 춤추고 싶은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국내에서 아프리카 예술문화에 종사하는 사람은 극소수였고 서로의 존재가 오랜 가뭄 끝에 온 단비처럼 무척 소중했다. 기니에서 돌아오자마자 여러 경로로 연락이 왔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과 함께하면 나도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그렇게 뜻 맞는 사람들을 모아 ‘포니케(Fonike)’라는 아프리카 공연예술 그룹을 결성했다.

확실히 여럿이 모이니 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졌다. 2016년 코트디부아르에 춤을 배우러 갔을 때의 인연으로 남편인 이브라힘 코나테를 만났다. 남편은 코트디부아르 출신의 젬베 연주자로 이미 일본을 거점으로 활동하며 아시아 전역에 이름이 나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첫눈에 알아봤다. 여러 국제 워크숍을 함께 하며 정을 쌓은 우리는 마침내 결혼을 약속했다. 뮤지션인 남편과 댄서인 나는 함께 보여주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결혼과 동시에 코로나19의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처음에는 많이 답답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한국에 온 남편에게 미안했으나, 우리는 이 시기를 서로에게 집중할 기회로 삼았다. 남편은 쉬지 않고 실험적인 시도를 하며 새로운 음악을 만들었고, 나 역시 댄서로서 실력이 녹슬지 않도록 계속 연습하고 있다. 코로나19로 대외활동이 줄어든 시간 동안 오히려 춤이 더 늘었다면 사람들이 믿을까.

또한, 남편과 뜻을 모아 ‘릴리(Lily)’라는 회사를 차렸다. ‘릴리’는 기니의 말링케 (Malinke) 언어로 ‘뿌리’를 의미한다. 아프리카 문화예술이 우리나라에 뿌리내렸으면 하는 마음에 회사명을 릴리로 정했다. 사업차 아프리카대륙을 여러 차례 다니면서 아프리카대륙에 우리나라를 알리는 일 역시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일전에 코트디부아르를 찾았을 때 남편의 인지도와 인맥으로 국영방송 메인 뉴스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그날 촬영을 끝내고 길거리를 걷는데 사람들이 처음으로 내가 한국인임을 알아봐 줬다.

희열감에 온몸에 전율이 오른 그 순간 나는 아프리카에서 우리가 하는 활동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필요성을 다시 한번 느꼈다. 열정과 의지가 컸던 만큼 성과가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오랫동안 여겨왔지만 코로나19로 잠시 숨을 고르며 숨 가쁘게 지나온 시간들을 돌이켜보니 이룬 것도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8년 EBS <세계테마기행>에 출연하여 대중들에게 서아프리카 춤의 매력을 전했는가 하면, 아프리카 문화체험기를 엮은 책 <아프리카에 춤추러 가자: 태양을 닮은 댄서 ‘Moon’과 함께>를 2019년 출간하기도 했다. 이제 더는 우리 앞에서 ‘우가우가’ 소리를 내는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나 말고도 아프리카 춤을 열심히 추고 알리는 이들이 많이 늘어났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된다. 앞으로도 한국에 아프리카 문화예술이 단단히 뿌리내리도록 활동을 이어나가고 동시에 아프리카 대륙에서 더 깊은 뿌리를 찾아 나설 상상을 하니 몸이 들썩거린다.

코나테이브라힘과 공연
코나테이브라힘과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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