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재일동포①-1] 1천엔 지폐의 이등박문과 안중근
[아! 재일동포①-1] 1천엔 지폐의 이등박문과 안중근
  • 다나카 히로시(田中宏) 히토츠바시대학 명예교수
  • 승인 2022.10.18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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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들은 어떤 길을 걸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가? 일본에서 어떤 차별과 핍박을 겪어왔는가? 현재 직면한 어려움은 무엇인가? 일본에서 이뤄지는 ‘한일기자시민세미나’의 강연을 연재로 소개한다. 이 세미나는 일반사단법인 KJ프로젝트 배철은 대표가 진행하고 있다.<편집자 주>

다나카 히로시(田中宏) 히토츠바대학 명예교수
다나카 히로시(田中宏) 히토츠바시대학 명예교수

1963년 11월, 1천엔권 지폐의 얼굴이 쇼토쿠 태자(聖徳太子)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 바뀌었습니다. 그때 저는 동경 고마고메의 ‘아시아문화회관’이라는 유학생과 연수생 숙소를 운영하는 민간단체의 직원으로 막 사회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 시대에 아직 이웃 한국과는 외교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숙소에는 대만, 홍콩, 동남아시아 학생들만 있었습니다. 동남아 화교의 후예를 화인(華人)이라고 하는데, 그 화인 유학생이 “다나카 씨, 일본인은 역사에 대해 공부하고 있냐”고 물어왔습니다. 왜냐하면 1천엔권의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 민족의 원한을 사서 하얼빈에서 총에 맞은 사람이었습니다. “전후에 다시 태어난 일본이 왜 그런 사람을 지폐에 넣느냐, 게다가 외국인 등록증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 사람 중에 가장 수가 많은 것은 재일교포일 텐데. 그들이 그 돈으로 쇼핑을 매일 하자면 상당히 잔혹한 일이 될 게 아니냐”고 했어요. 꽤 신랄한 비판이었습니다.

그 유학생은 이어 “전쟁 전에는 정부를 비판해 감옥에 갔지만, 전후에는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정부를 비판하는 문화인, 지식인이 많은데 그 누구 하나 1천엔권에 이토 히로부미는 맞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1억 명의 일본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섬뜩하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저는 유학생과 그다지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아서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들과 차를 마시러 갈 때는 ‘오늘도 이 1천엔짜리 지폐를 써야 하겠구나’라고 생각해야 하는 불편한 경험을 했습니다.

▼ 일본 내 외국인과 ‘입국 관리 체제’

유학생들과 이 같은 대화를 많이 했습니다. 당시 화인 유학생들은 이름을 ‘로마자’나 ‘가타카나’로 썼습니다. 한자로 쓰면 일본에 살고 있는 조선인이나 중국인으로 착각된다고 해서, 일본 정부가 그렇게 쓰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여러 나라의 사람이 많아서, 그런 일은 없을지도 모르지만, 당시에는 일본 사회에 외국인이 거의 없었습니다. 게다가 동남아시아의 화인은 얼굴 모양이 우리와 비슷합니다. 전철을 타고 가면서 광둥어나 푸젠어로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승객에게서 “여기는 일본이니까 조선어 같은 건 말하지 말라”고 호통을 듣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본에 사는 조선인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는 것입니다.

한 베트남 유학생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일본인은 글자로는 ‘외국인(外国人)’이라고 쓰지만, 속으로는 ‘나라에 해가 되는 사람’이란 뜻의 ‘해국인(害国人)’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라고 하더라고요. 일본어 발음은 ‘가이코쿠진’으로 똑같거든요.

당시 외국인등록증에는 위에 얼굴 사진이 붙어 있고, 그 아래에 시커먼 지문이 찍혀 있었습니다. 외국인한테는 그것을 상시 휴대할 의무가 부과됐습니다.

형사 드라마만은 아니지만, ‘지문’은 대개 범죄를 연상시킵니다. 일본 정부는 “외국인은 무엇을 할지 모른다. 범죄자 예비군이기 때문에 미리 지문을 등록해 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왜 외국인만 지문을 찍도록 하는가는 거죠.

그런 일로 해서 저는 일본에 있어서 외국인의 지위·처우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스리랑카 국적의 여성(라스나야케 리야나게 위슈마 산다마리 씨)이 나고야 입국관리사무소(入管)에서 숨진 사건이 매우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입관은 심한 곳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입관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게 제 견해입니다. 입관이라고 하면 입국관리사무소를 말하는 것으로, 지금은 출입국체류관리청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동경 동부의 시나가와에 사무소가 있습니다.

‘입관 체제’는 더 넓은 의미로, 일본 사회가 외국인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하는, 더욱 큰 문제입니다. 1970년대 입관법 반대 운동 때는 흔히 쓰였던 말입니다.

이미 타계했겠지만, 입관국장 아래 참사관으로 이케가미 츠토무라는 검사가 <법적 지위 200개의 질문>(京文社 1965)이란 책에서, “외국인은 삶아 먹든 구워 먹든 마음대로”라고 썼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당시 입국 관리를 하는 권력의 사고방식을 지극히 적절하게 표현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스리랑카 여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국인이니까 어떻게 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다음은 미국인 남편을 둔 일본인 여성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과거 지문날인 제도가 있어서 등록증 전환 시 구청사무소에서 지문을 찍었습니다. 미국인들도 가야 했습니다. 그랬더니 담당자가 “지문까지 부탁해서 미안해요. 일본에는 많은 조선인이 있으니까요”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마 그 관리도 무의식중에 말을 했을지 모릅니다. 서양과 달리 ‘일본 관공서는 너무 심하다’고 하는 말을 그 여성에게서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이것은 도쿄 대학원에 다니는 대만 남자 유학생의 경험입니다. 그는 세 들어 살던 집주인과 트러블이 생겼습니다. 자주 있는 일입니다만, 세든 집에 다른 사람을 재우면 안 된다는 묵시적 규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좀 멀리서 온 친구에게 “너 하룻밤 묵고 가라”고 할 수 있잖아요. 그랬다가 집주인의 아들과 싸움이 나서 경찰차가 출동하는 소동이 빚어졌습니다. 결국 집주인의 아들은 약식으로 벌금형을 받았지만, 유학생은 불기소 처분 통지서까지 받았었습니다.

그 유학생이 저한테 와서 불기소 처분됐는데, 비자를 연장하러 갔더니 반 년짜리만 주더라고 하소연했어요. 유학생들은 일 년에 한 번 비자 연장을 위해 출입국관리국에 갑니다. 1년짜리가 아니고 반 년짜리로 주는 게 이해가 안 된다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그를 데리고 법무부에 가서 담당 입국관리국 과장을 만났습니다. 불기소를 받았는데 왜 비자를 반년으로 줄이느냐, 이상하지 않냐고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그 담당관은 “일본인한테 폐를 끼쳤다”고 말했습니다. 유학생 때문에 집주인의 아들이 벌금을 부과받았다, 그래서 경고의 의미로 반년으로 줄였다, 반년이 지나면 또 비자는 늘어나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저는 출입국관리국과는 여러 사건으로 관련되었습니다만, 그들은 ‘외국인과의 최전선에서 일본인을 지키고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 한일병합과 식민지 출신자

일본은 이웃한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었는데, 그때의 절차와 결과에 어떤 문제가 있을까 하는 것도 생각해 봅니다. 한국병합조약 제1조에는 ‘한국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 영구히 일본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물려줘서 전부 일본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조약에는 ‘완전하고 영구히’라고 써 있습니다. 병합 조약이 유효한지 무효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유효하다면 조선은 영구히 독립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독립했다면 역시 조약이 만들어지는 방식에 문제가 있고 유효·무효가 문제입니다.

그 전 1905년의 ‘한일협약’에는 ‘일본국 정부는 동경에 있는 외무성에서 향후 한국의 대외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할 수 있도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병합 조약은 일본이 스스로 만들어 연출한 ‘자작자연(自作自演)’ 극이 됩니다.

한마디로 무리한 조약이었습니다. 조선을 일본 안에 다 포함시켰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전쟁에서 지자 ‘조선인은 내지에 거주하는 자도 포함하여 모두 일본 국적을 잃는다’는 통지를 하달해 1952년 4월 28일에 일방적으로 재일조선인들을 ‘외국인’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때까지 일본은 연합국에 점령되어 있었지만, 평화조약이 효력을 발휘하여 주권을 회복하면서, 통지문으로 재일조선인들의 국적을 없애버렸습니다.

헌법에는 ‘일본 국민의 요건은 법률로 정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일본 국적을 가지며, 어떤 경우에 일본 국적을 상실하는지 국적에 관한 것은 국회를 통과한 법률로 정한다(법률주의)고 헌법 10조에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국적을 잃는 중대한 일을 법률이 아니라 한 장의 통지문으로 했습니다. 헌법 위반이지요.

이에 대해서 재판을 제기한 사람이 있습니다만, 1964년 4월 5일 대법원 대법정 판결로 통지문을 인정해 지금도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과거 일본이 동맹을 맺고 전쟁을 치렀던 독일이 이웃한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면서 오스트리아라는 나라는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독일이 전쟁에서 지자, 오스트리아는 부활합니다. 조선이랑 똑같아요.

하지만 서독은 법률(1956년)을 제정해 병합으로 부여된 독일 국적은 오스트리아 독립 전날 소멸한다고 규정합니다. 다만 서독에 있는 사람, 즉 재독 오스트리아인(재일동포와 비슷)은 자신의 의사표시를 통해 독일 국적을 회복할 권리를 갖는다고 했습니다. 일단 국적을 다 소멸시키지만, 스스로 신고하고 의사표시를 하면 없어진 독일 국적을 돌려받도록 한 것입니다. 요컨대 법률을 만들어 국적을 선택하게 한 것입니다.

일본의 경우는 다릅니다. 일본은 병합에 따라 일본 국적이 된 조선인에 대해 한반도에 있는 사람이나 일본에 있는 사람이나 모두 대일평화조약이 효력을 발효했을 때(1952년 4월 28일)에 ‘일본 국적’이 없어진다고 정했습니다.

대한민국이 생긴 것은 1948년 8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48년 9월입니다. 일본 정부의 논리에 따르면 양국은 일본 국적자가 만든 나라이고, 그 후 52년 4월 강화 조약 발효 때 그 ‘일본 국적’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독일의 경우는 오스트리아 독립 전날 독일 국적이 전부 소멸되도록 법률로 정하고 있어, 일본과는 크게 다릅니다. 독일과 일본은 여러 점에서 비교되지만, 이런 점에서도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일본은 국적 소멸을 통지문으로 끝내고 맙니다.

국적이 소멸되면 외국인이 됩니다. 이 때문에 국적을 취득하려면 일본에 귀화를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귀화 결정권은 일본 법무대신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도 독일과 일본은 전혀 다릅니다. 전후 40년(1985)이 되던 해 바이츠제커 서독 대통령은 연방의회에서 유명한 연설을 합니다. 과거에 눈을 감은 사람은 현재도 볼 수 없다는 내용의 기념사를 합니다.

같은 전후 40년째이던 8월 15일에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에 처음으로 공식 참배합니다. 이 때문에 국내외로부터 맹렬한 반발을 샀습니다. 이처럼 전후 40년 때도 독일과 일본은 전혀 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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