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재일동포①-3] 베트남 ‘보트 피플’이 ‘재일조선인 처우’에 변화 가져와
[아! 재일동포①-3] 베트남 ‘보트 피플’이 ‘재일조선인 처우’에 변화 가져와
  • 다나카 히로시(田中宏) 히토츠바시대학 명예교수
  • 승인 2022.11.07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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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들은 어떤 길을 걸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가? 일본에서 어떤 차별과 핍박을 겪어왔는가? 현재 직면한 어려움은 무엇인가? 일본에서 이뤄지는 ‘한일기자시민세미나’의 강연을 연재로 소개한다. 이 세미나는 일반사단법인 KJ프로젝트 배철은 대표가 진행하고 있다.<편집자 주>

다나카 히로시(田中宏) 히토츠바시대학 명예교수
다나카 히로시(田中宏) 히토츠바시대학 명예교수

전후 30년인 1975년은 매우 중요한 해였습니다.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고 베트남 전쟁이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 결과로 남베트남에서 대량의 난민이 생겼습니다. 이른바 보트 피플입니다. 일본과 베트남은 그리 가깝지 않지만. 보트 피플은 일본에도 찾아왔습니다. 여권도 없고 비자도 없었습니다. 입국관리국은 이들을 지금처럼 ‘밀입국’으로 잡아 ‘오무라수용소’로 보냈습니다. 강제 송환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연이지만, 같은 해에 주요국 정상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1975년 11월 프랑스 롬부예에서 제1차 정상회담이 열려 미키 다케오 총리가 참석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뿐이었고, 나머지는 미국, 캐나다, 영국,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였습니다.

난민보호에 대해서는 국제적인 합의가 있기 때문에 일본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베트남 난민들을 강제 송환할 수 없어 일단 일시 상륙 허가했습니다. 이후 난민 수용처가 정해지면 내보기로 하고, 그때까지는 임시 체류 허가를 연장해 주기로 했습니다.

그때 프랑스의 르몽드지(1978, 5, 25)가 일본의 소극적인 난민 수용정책 배경에 조선인 차별이 있다고 썼습니다. 일본 기자는 쓸 수 없거나 쓰지 않았던 기사였습니다.

일본은 조선인을 차별하고, 이것저것 안 된다고 해왔다, 그 때문에 새로운 외국인도 받고 싶지 않아 한다. 일시 상륙은 허용하지만, 머지않아 다른 나라로 가달라고 한다는 기사였습니다. 외국인이 볼 때 일본은 난민을 모두 다른 나라로 떠넘긴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도요타 자동차를 팔아 해외에서 돈을 벌다 보니 일본 정부도 급기야 무거운 허리를 들어 국제인권규약과 난민협약이라는 두 조약을 잇달아 비준했습니다. 난민협약이 생긴 지 30년이나 지났을 때였습니다.

1997년 일본은 국제인권규약에 가입합니다. 이때야 비로소 공영주택, 공단주택, 주택금융공사라든가, 공공주택 관계의 국적차별이 철폐돼 외국인에게 개방됩니다.

공영주택은 싸기 때문에 난민들이 살고자 해도 외국인이어서 살 수 없었습니다. 그간의 차별을 받은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재일조선인들이었습니다. 베트남 난민 ‘덕택’에 그게 바뀐 거죠.

다음은 1981년의 난민조약 비준입니다. 이 비준으로 입국관리법이 ‘출입국관리 및 난민인정법’으로 바뀝니다. 이때 저는 참고인으로 국회에 불려가서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난민 지위에 관한 국제협약 비준 승인에 따른 관련 국내법 정비에 관한 법률안’이라고 적힌 흰색 표지 자료도 받습니다. 내용물은 간단했습니다. 앞서 화제로 삼았던 국민연금법과 아동수당 3법의 국적 조항 삭제 개정안이었습니다.

일본에 아동수당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모자가정을 위한 아동 부양 수당, 장애아를 위한 특별아동 부양수당, 그리고 셋째 아이에게서 나오는 아동수당입니다. 지금은 아이가 적으니까 첫째 아이부터 나옵니다. 소득 제한은 있어요. 이것들은 모두 ‘국적 조항’이 있어 외국인을 배제해왔습니다. ‘잊힌 황군’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난민협약 제24조에서는 난민들에 대해 사회보장에 있어서 자국민과 동등하게 취급하도록 하는 ‘내국민 대우’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비준하려면 국내법을 개정해야 했어요. 쉽게 말해 국민연금법과 아동수당 3법의 국적 조항을 삭제하는 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켜야 했습니다.

1965년 한일조약을 체결해도 달라진 게 없었는데, 일본이 난민조약을 비준하자 재일조선인들도 아동수당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공영주택에도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한일조약은 난민조약보다 못했던 것이지요.

저는 『재일외국인』(이와나미신서)이란 책에서 베트남 난민이 가져온 변화를 「구로부네(黒船)」이라고 썼습니다. 편집부가 ‘구로부네’는 너무 심하지 않냐고 해서 인용부호를 달았는데, 그만큼 강렬한 충격을 가져온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때부터 ‘국적’이 갖는 의미, ‘국민’이 갖는 의미도 달라졌거든요.

아동수당이든 국민연금이든 국민체육대회든 출입국 관리와는 무관합니다. 스리랑카 여성 문제에 대해서도 입국관리국이 심하다는 것만으로는 이해되지 않아요. 일본의 외국인에 대한 인식을 ‘입국관리 체제’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국가 전체의 구조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1989년 출입국관리법 개정과 외국인 노동자

1989년 출입국관리법이 개정되면서, 외국인 노동자를 통제하는 구조가 처음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외국인에 대해 취업 가능 여부를 나누게 된 것입니다. 취업할 수 없는 외국인을 고용하면 처벌받는 구조를 도입한 것입니다. 이 법이 시행된 것은 90년입니다. 그래서 1990년부터 외국에서 노동자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속임수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 일본계인(일본인의 피가 들어간 외국인)은 특별 취급한다는 조항입니다. 이들에게는 「정주」라고 하는 체류 자격을 만들어, 자유롭게 취업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대부분이 브라질과 페루에서 왔습니다.

이들은 거의 자동차산업에 취업했습니다. 가장 수가 많은 곳은 도요타가 있는 아이치현. 다음은 혼다, 야마하, 스즈키가 있는 시즈오카현이었습니다. 그다음이 닛산이 있는 가나가와현입니다. 그다음이 스바로의 후지중공업이 있는 군마현입니다.

세계에 자랑하는 일본 자동차산업의 하청 취업은 일본계가 대거 들어와 이뤄지는 것입니다. 외국인 노동자가 아니라 일본계인을 받아들인 것이지요.

2016년에는 ‘외국인의 기능 실습의 적정한 실시 및 기능 실습생의 보호에 관한 법률’이 생겼습니다. ‘개발 도상지역으로의 기능, 기술 또는 지식 이전에 의한 국제협력 추진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 표면적인 법의 목적입니다.

‘타테마에(명분)’는 국제 공헌이지만 실제로는 노동력의 유입입니다. ‘기능 실습은, 노동력의 수급의 조정의 수단으로서 행해져서는 안 된다’라고 동법 3조에 넣었지만, 이것이 실제로 현상을 반영하고 있는 게 아이러니입니다. 최근에는 코로나로 실습생이 입국할 수 없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가의 이야기가 자주 보도되고 있습니다.

유학생 30만명 유입계획은 후쿠다 야스오 총리 때 입안되었습니다. 2008년 말입니다. 유학생을 받지만, 실은 노동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외국인 고용상황 조사’라고 해서, 매년 10월 1일 현재 기업에서 일하는 외국인수 통계가 나옵니다. 이것은 법적 신고가 의무화되어 있어서 비교적 정확합니다.

2020년 통계를 보면 1위가 영주자라든가 일본계라든가 하는 ‘신분’에 근거한 것으로 54만명, 전체의 31%입니다. 그리고 ‘기능실습생’이 40만 명으로 23%. 그다음이 ‘자격외 활동(유학생 등)’ 37만 명으로 21.4%입니다. 마지막으로 ‘전문기술직 등’이 35만명입니다. 예를 들어 대학교수라든가 ‘인문지식·국제업무·기술’의 대졸 화이트 칼러 전문직, 일본인과 경쟁하지 않는 프로야구 외국인 선수, 스모 선수 등입니다.

▼왜 이럴까?

끝으로 야우치하라 다다오(矢内原忠雄) 동경대 총장과 관료인 스즈키 하지메(鈴木一), 그리고 한건수(韓健洙) 교수에 대해 얘기하고자 합니다.

강원대학교 문화인류학과 한건수 교수가 쓴 글부터 말하겠습니다. 그는 ‘역사적 배경으로 본 한국의 다문화사회, 민족의 우월성을 딛고 다양성의 시대로’라는 글에서 일본의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단일민족론과 순혈주의는 극복돼야 한다고 말합니다. 문화적 우월주의나 문화적 동질성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잘못일 뿐 아니라 현실에는 맞지 않음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고 합니다. 새롭게 재편되는 한국 사회 또는 한국인이 민족과 문화의 다양성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내고 있는 계간잡지에 실려 있습니다(15권 2호, 208). 이 잡지는 8개 국어로 나와 있고 ‘일본어판’도 있습니다. 일본에도 국제교류기금이 있습니다만, 일본은 일본어와 영어뿐입니다. 한국은 역시 다릅니다.

저는 한 교수의 글에 깜짝 놀랐습니다. 요컨대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단일민족이라든지 순혈이라든지 열심히 해왔는데 이제는 그게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런 것들을 극복하고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어떨까요? 식민지배를 ‘당했다’는 것은 조선 측, ‘했다’는 것은 일본 측입니다. 일본은 식민지 지배를 되돌아보고 무엇을 반성하며 그 극복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지, 일본에 그 문제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야우치하라 타다오(1893~1961)입니다. 야우치하라는 식민지 연구의 일인자로 여겨지는 사람입니다. 도쿄제국대학에서 ‘식민정책론’을 담당했고, 그의 저서 ‘제국주의하의 대만’(1929)은 당시 대만에서는 금서였지만, 일본에 유학한 학생은 눈물을 흘리며 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주 뛰어난 식민지 연구자였습니다.

야우치하라는 1937년 일본 정부의 대중국 정책을 비판하며 사표를 내고 도쿄대를 그만둡니다. 이후 전쟁 말기인 8년간 정도는 찬밥을 먹었습니다. 세상이 바뀌자 동경대학에 복귀한 그는 1951년부터 57년까지 동경대 총장을 맡습니다.

그런데 전쟁 전부터 식민지 문제를 계속해 온 전문가가 전후 어떻게 했을까요? 그는 식민정책론 강좌와 관련해서 “일본은 이제 식민지가 없어졌고 식민정책도 없어서 식민정책론 강좌를 국제경제론이라는 강좌로 바꿨다”(동대신문, 1958, 2, 12)고 했습니다.

그는 전후 일본을 고찰한 상하 2권의 「전후 일본 소사」(도쿄대 출판회 1958·60)의 편자이기도 합니다. 야우치하라는 ‘편집후기’에 “전후 일본 민주화의 여러 문제의 소재를 밝히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시사하고 싶다”고 적었습니다.

저명한 도쿄대 교수가 분담 집필했지만, 이 책에 일본에 남은 구식민지 출신자의 문제는 아무것도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전후 일본의 민주화 문제에 구식민지 출신자의 문제는 포함되지 않은 게 놀라운 일입니다.

전후에는 동경대 출신들이 일본 정관계가 밀집한 나가타쵸나 가스미가세키를 움직였습니다. 식민지 연구의 일인자로 꼽히는 동경대 총장이 일본은 이제 식민지가 없어졌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습니다.

고마쓰가와 이진우 사건이 있습니다. 도립 고마쓰가와 고등학교 여고생이 재일교포 소년에게 살해당한 사건입니다. 1958년 9월에 18세의 이 소년이 붙잡혀 지방 법원으로부터 사형 판결로 대법원까지 유지되어 1962년 11월에 처형됩니다.

이것은 당시 큰 반향을 일으킨 사건입니다. 작가 오오카 쇼헤이(大岡昇平, 1990~88)는 「부인공론(婦人公論)」(1960년 10월호)에, 「이 소년을 죽여서는 안 된다」를 썼습니다. 저명한 극작가 키노시타 준지(木下順二, 1914~2006)는 사건을 소재로 TV 드라마 ‘휘파람이 겨울 하늘에’를 썼고, NHK TV에서 방영된 것은 1961년 3월의 일이었습니다. 이 소년의 사형 집행 전입니다.

마침 그 무렵 북송선이 나오기도 해서 드라마에서는 그를 걱정하는 교사가 북송선을 타면 어떻겠냐고 권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자살하고 맙니다.

마지막으로 스즈키 하지메(1901~1993)는 고급관료입니다. ‘포츠담 선언’을 수락했을 때의 총리대신인 스즈키 칸타로의 아들입니다. 그는 입국관리국의 초대 국장입니다. 입국관리국은 1950년 10월, 외무성 산하의 출입국 관리청으로서 발족했습니다. 스즈키는 그 수장에 취임해 1952년 7월에 법무부 입국관리국 초대 국장이 됩니다. 입국관리 행정의 초대 책임자입니다.

“1950년 출입국관리청 장관으로 임명됐다. 이를 통해 처음으로 이웃나라인 조선 문제를 직접 담당하게 되었다. 나 또한 일본인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얼마나 이웃 나라에 대해 무지한가를 통감했“라고 그는 회고했습니다.(「한국의 마음」 요양사, 1968). 그리고 현직 국장명으로 아사히 신문의 「논단」(1954,4,구)에 「한일 우호의 지름길-외교 문제와는 별개로 종합 정책 서둘러라」라고 제목을 붙여 투고했습니다.”

그는 한때 일본인이었던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종합정책을 옳든 그르든 반드시 세워야 한다면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1백만 전 조선인이여, 벼가 출렁이는 낙토로 돌아가라’는 전단은 일부 과격분자의 책모에 불과하지만, 정부에 확고한 종합정책이 없는 한 재일조선인들은 불안과 분노에 빠지게 될 것이다.”

야우치하라는 동경대 총장 때 이 ‘논단’을 읽었을 것입니다. ‘부인공론’에 실린 오오카 쇼헤이의 글도, 키노시타 준지의 TV 드라마도 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과연 재일조선인에 대해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지, 이 문제는 매우 뿌리 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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