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81] 하멜과 데지마
[유주열의 동북아談說-81] 하멜과 데지마
  •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2.11.09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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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이 여기서 1년간 지내면서 표류기를 썼다고 해요.” 언젠가 일본 나가사키(長崎)의 데지마 방문 시 우리를 안내한 지인이 들려준 말이다. 13년간 조선에서 억류생활을 한 후 일본으로 탈출한 헨드릭 하멜 이야기다.

데지마(出島)는 에도막부가 쇄국정책을 실시하면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상관으로 대여한 인공섬이다. 4000평 정도의 부채꼴 모습을 했는데 메이지유신 후 항만건설로 철거됐다가 1990년대 나가사키시에서 관광목적으로 일부 복원했다고 한다.

‘하멜표류기’로 잘 알려진 하멜은 네덜란드 홀란트지역에서 1630년에 태어났다. 21세 때 동인도회사(VOC)에 취직 아시아 본부가 있는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에서 3년간 서기로 근무했다. 1653년 하절기 계절풍을 이용 바타비아에서 설탕 등 일본과 거래할 물품을 싣고 대만을 경유 나가사키의 상관으로 출발했다.

네덜란드 호리쿰(Gorichem)시에 세워진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 동상.[사진=하멜기념관]
네덜란드 호리쿰(Gorichem)시에 세워진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 동상.[사진=하멜기념관]

그해 8월 하멜 일행은 태풍으로 닷새 동안 악전고투 끝에, 배는 좌초 파손되고 선원들은 제주도 대정현 해안에 표착했다. 선원 64명 중 선장을 포함 28명이 죽고 하멜 등 36명이 살아남았다. 그들은 대정현 관리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하멜 일행은 제주도가 나가사키 앞바다 고토(五島) 열도의 하나인 줄 알고 “야판? 야판?”하고 물었다고 한다. 일본을 ‘왜(倭)’로만 알고 있는 대정현 관리와 이야기가 통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난파된 배에서 빠져나온 포도주 통을 관리에게 바치면서 포도주를 맛보게 했다고 한다. 조선에 소개된 최초의 포도주였다.

제주목사가 남만인(南蠻人)의 표착을 조정에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오래전 표류 귀화한 남만인 박연을 급파했다. 박연이 하멜 일행을 만났으나 모국어를 잊어 한동안 대화가 되지 않았다. 박연(얀 벨테브레)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사략선(私掠船, 약탈목적의 무장선) 항해사였다. 1627년 그는 나포한 중국 장크선에 승선, 항해를 지휘하다가 폭풍을 만나 모선과 헤어지게 되었다. 조선 해안에 식수를 구하러 부하 2명과 함께 상륙한 사이 중국 선원들이 선상 반란을 일으켜 장크선을 탈취 도주해 버려 부득이 조선 땅에 남게 됐다.

박연 등은 훈련도감에 배치되어 정묘호란이 끝난 조선의 무기 제조에 큰 기여를 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박연 등 3명이 참전했다가 2명은 전사하고 박연만 살아남았다. 그는 귀화 후 이름자와 비슷한 발음이 나는 조선 이름 박연을 하사받았다. 박연은 조선 여인과 결혼해 자녀를 두고 조선의 무관으로 살고 있다가 하멜 일행의 통역 겸 안내를 위해 제주도로 내려 온 것이다.

하멜 일행이 제주 억류 10개월 만에 조정에서 연락이 왔다. 한양으로 압송하라는 어명이었다. 하멜 일행 36명은 제주를 출발 해남 영암 나주 공주 등을 거쳐 상경했다. 도중에 일행 한 명이 병으로 사망했다. 그들은 박연의 통역으로 효종을 알현했다. 병자호란 후 청나라 선양에서 8년간 볼모로 잡혔다가 돌아온 효종이 북벌을 계획하고 있어 군비 강화를 위한 화포 제조 기술자를 찾았다. 그들은 이미 사망했고 압송된 자들은 선박 제조 기술은 있어도 병기제조와는 직접 관계가 없어 효종은 실망했다. 효종은 그들에게 남씨 성을 하사하여 국왕 친위대로 임명 훈련도감에 배치했다. 하멜의 조선 이름은 ‘남하면’이 됐다.

조선에 서양인이 있다는 사실을 청나라에 숨겨온 조정은 청나라 사신이 올 때는 하멜 일행을 남한산성에 숨어지내게 하는 등 보안 관리를 했다. 어느 해 귀국길에 오른 청나라 사신 앞에 네덜란드 선원 두 사람이 뛰어들어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하소연하는 사고가 터졌다. 조선 조정은 당황하여 2명을 붙잡아 격리(후에 사망)하고 나머지 선원들은 청나라 사신을 만날 수 없는 강진 병영에 유배를 보냈다. 그들은 강진에서 담장을 쌓고 땔감을 마련하는 잡역을 하면서 탈출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강진에서 7년간 유배 생활 중 조선의 대기근으로 초근목피로 연명할 정도가 되어 선원 11명이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사망하자 조정은 그들을 여수 좌수영을 비롯 순천 남원의 병영에 3년간 분산 수용했다.

여수에 있는 하멜 전시관
여수에 있는 하멜 전시관

일본에 가까운 여수에 배치된 하멜은 혹독한 노역을 하면서도 구체적 탈출 계획을 세웠다. 1666년 9월 4일 하멜 일행은 구입해 둔 어선 두 척으로 인근 순천에 배치된 동료 2명과 함께 8명이 썰물을 이용 남동쪽으로 내려갔다. 9월 6일 일본의 고토 열도에 도착했고 9월 14일 상관이 있는 나가사키로 갔다. 하멜 일행은 나가사키 부교(奉行, 행정책임자)의 꼼꼼한 취조 심문에 응해 13년간 조선에서 경험한 모든 정보를 낱낱이 알려주었다. 그리고 외교 통로로 조선에 잔류되어 있는 나머지 선원들의 나가사키 행이 이루어지도록 요청했다.

하멜은 조난으로 받지 못한 13년간의 급료를 받아내기 위해 데지마 상관에 체류하면서 일지형식으로 기록을 정리했다. 우리가 아는 <하멜 표류기(Hamel's Journal And A Description Of The Kingdom Of Korea 1653-1666)>였다. 하멜이 귀국 이전에 그의 표류기가 네덜란드에서 출간되어 베스트 셀러가 되자 각국에서 번역되어 하멜은 일약 유명인사가 되고 코레아라는 은둔의 나라가 서양에 알려지게 됐다. 동인도회사는 조선과 통상을 하기 위해 ‘코레아 호’를 우정 건조하기도 했다.

하멜의 조국 네덜란드는 1588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여 공화국을 건국했다. 1602년에는 그간 각 도시별로 결성된 동인도회사를 연합(united)하여 본격적으로 동인도 무역에 뛰어들었다.

유럽인의 식생활에 필요한 인도의 향신료는 아라비아반도를 거쳐 동로마 제국 그리고 베네치아 등 해상 도시 국가들에 의해 유럽에 전달됐으나 가격이 비쌌다. 포르투갈 등 대서양 국가들은 이슬람 세력 확대로 동로마제국 멸망 후, 지중해 무역이 불안해짐에 따라 새로운 항로를 개척, 지속적이고 값싼 향신료를 조달코자 했다.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에 황금이 많다는 것을 안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서해안을 탐사하고 있었다. 이 탐사 경험을 이용,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아프리카의 최남단 희망봉을 발견했고 1498년에 바스쿠 다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 남서부 갤리컷에 도착함으로써 인도 항로를 개척했다.

포르투갈이 인도 항로에 열중한 사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희망봉을 돌지 않아도 서회항로를 개척하면 인도에 갈 수 있다고 생각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을 설득 지원을 받았다. 1492년 콜럼버스가 도착한 곳이 지금의 카리브해 산살바도르였다. 콜럼버스는 그곳이 인도라 생각하고 원주민을 인도인(인디언)이라고 불렀다. 그 후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인도가 아니고 새로운 대륙임을 밝힘으로써 카리브해 일대를 서인도, 포르투갈이 개척한 항로를 통한 인도와 그 동쪽을 동인도라고 구분하여 부르게 됐다. 인도란 과거 페르시아 동쪽 국경인 인다스 강에서 유래했다. 그리스인은 인다스 강 동쪽의 모든 나라를 인도라고 불렀다.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을 둘러보면서 하멜보다 50여 년 앞서 나가사키의 반대편 태평양 연안의 오이타현 우스키해안에 표착한 네덜란드인을 생각했다. 당시 일본의 실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이들을 이용 내전에 승리하여 에도막부를 개창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작가 제임스 클라벨은 이 스토리를 중심으로 <쇼군>이라는 소설을 집필 크게 성공하여 미국의 TV드라마로 제작 방영되기도 했다.

나가사키 해군교습소와 데지마[사진=위키피디아]
나가사키 해군교습소와 데지마[사진=위키피디아]

1600년 3월 일본 규슈의 동쪽 우스키 해안에 역청으로 까맣게 칠한 흑선이 표착했다. 즉시 관아에 신고되고 현지 사무라이들은 서양인의 내항임을 알고 포르투갈 예수회 신부를 데리고 현장에 갔다. 예수회 신부는 표착한 서양인을 카톨릭교도가 아닌 개신교를 믿는 네덜란드인임을 알았다. 수년 전 네덜란드는 카톨릭교의 스페인과 전쟁을 일으켜 독립한 나라로 카톨릭과는 적대적 관계였다. 예수회 신부는 네덜란드 선박이 해적선이라고 하면서 생존자를 즉각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지 사무라이들은 신부의 말을 따르지 않고 우선 상부에 보고했다. 당시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사망한 지 2년이 되고 그의 측근들이 공동통치를 하고 있었다.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우고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규슈에서 올라온 보고를 받고 50여 년 전인 1543년 다네가섬(種子島)에 표착한 서양인이 가져온 뎃포(鉄砲, 鳥銃)를 생각했다. 그의 주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뎃포를 활용 전국시대의 일본을 통일했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 사후 그의 아들 히데요리와 천하를 두고 일전을 앞두고 있었다. 생각이 깊은 이에야스는 표착한 상선과 선원을 에도로 보내도록 지시했다.

우스키 해안에 표착한 네덜란드 선박은 연합되기 전 로테르담 도시에서 설립된 동인도회사 소속이었다. 그들은 5척의 상선을 마젤란 해협을 경유 남아메리카 서해안 탐사와 교역을 위해 파견했다. 상선 4척은 도중 풍랑을 만나 파손 침몰되고 선원들은 원주민에 의해 피랍 또는 살해되었다. 겨우 남은 한 척 만이 태평양을 횡단하여 일본의 규슈 동쪽 해안에 표착한 것이다. 네덜란드 선박인데도 항해사는 영국인 윌리암 아담스였다. 당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해양 후진국이면서 개신교인 영국인을 고용하고 있었다. 뉴욕의 허드슨강을 발견하여 이름을 남긴 헨리 허드슨은 영국인이지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으로 허드슨강을 탐험하여 허드슨강 일대와 맨해튼을 네덜란드 영토로 만들었다. 네덜란드는 그곳을 뉴네덜란드라고 선포하고 그 중심을 뉴암스테르탐(지금의 뉴욕)으로 명명 수도로 정했다.

이에야스는 네덜란드 선원 중에 무기 제조 및 선박 건조에 지식이 풍부한 항해사 아담스와 2등항해사 얀 요스텐을 가까이 두었다. 이에야스는 그들의 건의로 상선에 장착돼 있는 청동대포를 하역시켜 6개월 후 발발한 세키가하라 내전에 활용 전세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러한 공로로 아담스는 요코하마 근처 미우라(三浦)를 영지로 받고 얀은 지금의 도쿄 중심지에 거대한 주택을 하사받았다. 아담스는 미우라 안진(三浦按針), 얀은 야에스(耶楊子)라는 일본 이름도 얻었다. 오늘날 도쿄역 근처 야에스 지역은 얀의 에도 저택이 있었던 곳이다.

이에야스는 얀의 요청을 받아 1609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관을 일본의 유일한 개항지인 규슈의 히라도(平戶)에 두게 하고 몇 년 후에는 아담스의 교섭으로 영국 동인도회사 상관도 허가했다. 일본 정부는 신도 불교 등 일본의 전통신앙을 부정하고 기독교를 전파하는 포르투갈과 달리 종교에는 관심이 없고 교역에만 집중하는 네덜란드인을 선호했다.

나가사키 데지마의 네덜란드상관
나가사키 데지마의 네덜란드상관

에도막부는 나가사키에 조성된 기독교 교회령을 몰수하여 막부직할령(天領)으로 지정하고, 금교령(禁敎令)과 함께 포르투갈인의 활동을 감시 관리하기 위해 인공섬 데지마 건설에 착수했다. 규슈의 시마바라(島原) 기독교 교도(키리시탄)들의 반란을 진압한 에도막부는 기독교 전파와 관련되는 포르투갈인을 모두 추방하고 그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었던 데지마에 히라도의 네덜란드 상관이 이전 사용토록 했다.

1646년 데지마로 옮겨온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관은 에도 막부의 유일한 대외무역창구 역할을 했다. 매년 데지마 상관장이 에도를 찾아 최고 지도자 쇼군(將軍)에게 국제정세를 설명했다. 일본이 중국에서 일어난 아편전쟁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것도 데지마의 상관을 통해서였다고 한다.

데지마 상관은 네덜란드를 배우겠다는 일본인들에게 난학(蘭學, 란카쿠)의 중심이 됐다. 일본은 란가쿠라는 이름으로 유럽의 학문 의학 기술 등을 도입했다. 동양에서는 신생공화국 네덜란드보다 홀란트라는 이름이 익숙했다. 홀란트는 네덜란드의 중심지역으로 대외무역은 홀란트 사람이 했기에 홀란트가 많이 알려져 있었다. 일본에서 음차하여 오란다(和蘭, 阿蘭陀)로, 중국에서는 허란(荷蘭)으로 부르고 표기한다.

일본의 근대화는 200년간 데지마를 통한 난학의 보급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 개화기 교육가 후쿠자와 유키치도 나가사키에서 난학을 공부하여 에도에 네덜란드 어학교(蘭學塾)를 개설했고 후에 게이오기주쿠대학(게이오대학)으로 발전시켰다. 난학으로 개화된 일본이 1942년 스승의 땅 바타비아(인도네시아)를 점령 지배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나가사키의 데지마에서 하멜을 만나면서 <소설 하멜>을 집필한 고 김영희 대기자가 한일 역사의 운명을 갈라놓은 지점이 ‘데지마’라고 역설한 뜻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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