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재일동포②-1] 을사보호조약, 초안만 있을 뿐 정본이 없다
[아! 재일동포②-1] 을사보호조약, 초안만 있을 뿐 정본이 없다
  • 도츠카 에츠로(戶塚悅朗) 변호사
  • 승인 2022.11.11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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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들은 어떤 길을 걸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가? 일본에서 어떤 차별과 핍박을 겪어왔는가? 현재 직면한 어려움은 무엇인가? 일본에서 이뤄지는 ‘한일기자시민세미나’의 강연을 연재로 소개한다. 이 세미나는 일반사단법인 KJ프로젝트 배철은 대표가 진행하고 있다. 이래 글은 ‘한일관계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까’를 주제로 한 도츠카 에츠로(戶塚悅朗) 변호사의 강연이다. <편집자 주>

도츠카 에츠로(戶塚悅朗) 변호사
도츠카 에츠로(戶塚悅朗) 변호사

이곳은 의미 있는 장소입니다. 입구에 1919년 2·8독립선언의 기념 장소라고 적혀 있어요. 이곳에서 삼일절(3월 1일)보다 앞서 한국 유학생들이 독립을 선언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국 독립운동에서 획기적인 사건은 안중근 의용군 참모중장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암살입니다. 1909년 10월 26일의 사건이 일어났고, 5개월 후인 1910년 3월 26일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그 이후 112년이 흘렀습니다.

10월 26일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날이기 때문에 일본인들에게는 민감할지도 모르지만, 안중근이 처형된 날은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는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 종군위안부문제에서 을사조약까지

서울 안중근의사기념관에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 15개를 지적한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그중 첫째 죄악이 소위 민비 암살입니다. 1895년의 일입니다. 안중근은 일본의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공사가 중심이 돼 경복궁을 습격해 명성황후를 암살한 일을 첫 번째 죄악으로 꼽았습니다.

두 번째 죄악이 을사조약입니다. 1905년 11월 17일 덕수궁에 일본군이 몰려가 한국의 각료들을 총검으로 둘러싼 채 체결했습니다. 조문이 5개이기 때문에 ‘5조약’이라고도 합니다. 안중근은 일본군이 왕궁을 침략해 조약을 강제한 것을 두 번째 죄악으로 꼽았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이들 죄악을 이토 히로부미가 저질렀기 때문에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다고 검찰관에게 한문으로 써서 설명했다고 합니다. 이 비문의 원본이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만 나는 이것을 보고 매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안중근이 죄악의 두 번째로 꼽았던 1905년 11월 17일 자의 조약과 관련한 유엔의 보고서가 있습니다. 내가 이 보고서를 발견한 것은 1992년 가을이었습니다. 그해 2월 17일에 나는 유엔의 인권위원회에서 ‘종군위안부 문제는 섹스·강간문제다. 아시아에는 인권기관이 없어서 유엔이 움직여 일본과 피해자를 조정하기를 기대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해외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보다 1년 전 8월 14일에 김학순 할머니는 스스로 자신이 종군위안부라고 밝혔습니다. 이것이 종군위안부가 전시 폭력의 피해자라고 문제화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소위 미투 운동이 전 세계로 확산했습니다.

1993년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렸던 유엔의 세계인권회의에서 올려져 국제형사재판소라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 이루어졌습니다. 굉장합니다. 역시 여성운동은 매우 유효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저의 유엔 발언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일본 정부가 직접 반론에 나섰습니다. ‘종군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행위가 위법했다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법적 근거를 보여라’고 했습니다.

저는 유엔에서 같은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일본의 법률을 아무리 조사해도 위안부를 동원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법령은 없었습니다. 공창제도는 내무성의 법령으로서 확실하게 규정되어 있지만, 아무리 조사해도 종군위안부와 관련한 법령은 없습니다. 법률가로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의 법적 근거는 무엇이었을까를 조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은 1905년의 이른바 5조약(보호조약)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법적으로 어떤 의미를 두고 있을까를 조사해야 했습니다.

유엔 국제법위원회 보고서

▲강제에 의한 을사조약은 절대적 무효 – ILC 보고서

당시 저는 런던대학의 객원연구원이었기 때문에 런던대학의 도서관에 가 조사했습니다. 거기서 지금 소개한 보고서를 찾아냈습니다. 유엔에 국제법위원회(ILC)라는 기관이 있는데요, 그곳에 있는 1963년 보고서입니다. 국제법위원회는 유엔총회 아래에 있는 독립전문가로부터 구성된 위원회이며 세계적인 국제법 권위자가 그때까지 관습법을 정비한 조약법을 만들기 위해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조약이 무효가 되는 경우가 언제일까’라는 연구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국가의 대표를 협박해 서명시켰을 경우는 자유의지가 아니기에 조약이 절대로 무효라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무효가 되는 또 하나 경우는 국가에 조약을 강제할 경우입니다. 전쟁 등 이유로 국가에서 강제할 경우 유엔헌장에 위반한다면 무효입니다. 국가와 대표 개인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중복될 수도 있지만, 법적으로는 다릅니다. 때문에 개인에게 강제했던 즉 임금이나 대신이나 전권대표에게 강제한 조약은 무효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지금까지도 관습법상 그렇게 생각되고 있었지만, 구체적 사례도 예로 들고 있습니다. 1773년에 러시아가 폴란드를 침공해 의원들에게 강제했습니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과 똑같은 일을 자행했습니다.

그다음이 1905년입니다. 일본이 대한제국의 황제와 대신을 협박해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는 절대로 무효라는 것입니다. 그다음이 1915년의 미국입니다. 미국이 아이티의 의회에 조약을 강제했습니다. 또 1939년에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을 불러들여 권총을 들이댄 이야기입니다. 권총으로 협박해 영토를 할양시킨 조약입니다. 이 같은 경우는 절대적으로 무효라는 것입니다.

무효이지만 나중에 유효로 하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을 법적으로 ‘추완(追完)’이라고 말하고 법적 행위로서 인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경우는 추완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보고서는 쓰고 있습니다. 이는 영국의 국제법 권위자 험프리 월독(Humphrey Waldock)이라는 학자가 특별보고서로서 원안을 썼습니다. 이를 유엔총회에 제출해 총회는 이를 환영했습니다.

이를 찾아냈을 때 정말 기뻤습니다. 그래서 즉시 주변의 사실을 조사해 논문을 썼습니다. 이를 팩스로 일본에 보내 참의원 의원이며 사회당의 모토오카 쇼지(本岡昭次) 선생한테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무실에서 “이를 지금 발표한다면 분명 살해당할 것입니다. 단념하는 편이 좋겠습니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일본에서는 이 이야기를 ‘누구도 알지 못한다’ 하고 말했습니다. 한국 정부도 몰랐습니다. 북한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책으로 간행됐습니다. 유엔총회에도 제출한 것이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물론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알고 있었지만 입을 닫고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이를 학술논문으로 발표한 곳은 총감부 설치 100년 기념(2006년) 때의 류고쿠(龍谷)대학의 연구지입니다. 그것이 최초의 학술논문입니다. 그때까지 저는 이를 학술논문으로 발표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팸플릿으로 해 모토오카 사무소가 발행했던 것이 있었습니다만 그것을 기초로 모토오카 쇼지 선생이 국회에서 질문을 해주었습니다. 노동조합 집회 등에서 얘기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 늦었습니다. 최초는 유엔의 휴먼라이트 위원회에 NGO(IFOR) 이름으로 영문문서로 내놓고 그것을 마이니치(每日)신문이 보도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은 널리 알려지게 됐습니다. 재팬타임즈도 보도해주었습니다.

유엔에 문서를 제출해 한국 정부도 북한 정부도 일본 정부도 입수하게 됐습니다. 제 이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16년이 걸려 ‘류고쿠법학’에 앞서 얘기한 논문을 게재했습니다. 매우 안타까운 얘기입니다만 ‘일본에는 논문의 자유가 없다’고 통감했습니다. 서서히 연구를 진행해 여기까지 온 것은 26년이 걸렸습니다. 지금은 여기저기서 강연을 해도 괜찮게 됐습니다.

▲ 안중근의 재판과 한일협약(을사조약)

이 연구 도중에 일이 일어났습니다. 2008년 12월 서울에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지금은 새롭게 변해 국립으로 됐습니다만 여기에서 ‘이토 히로부미 죄악 15개조’를 발견해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사실 류고쿠 대학에는 안중근의 위묵이 있습니다. 후카쿠사(深草) 도서관의 보존창고 속에 들어있는 것을 발견해 교원 여러 명과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기념관에서 그것을 알고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안중근 재판 판결

김호일 관장은 ‘보러 가겠습니다’고 말했습니다. 류코쿠대학의 도서관에 유묵이 있어 대학 측에 특별히 주문해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합병 100년’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의 해에 “서울에서 대대적으로 행사를 열고 싶어서 그 유묵을 빌리기를 바란다”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내 한 사람에게만 “대여하겠다”고 요청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관장님이 대학에 와서 강연해 주세요” 하고 부탁해서 김 관장과 동행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관장님한테서 “안중근 의사의 재판은 위법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연구를 해달라”고 의뢰받았습니다. 저도 “그렇다면 판결을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판결의 속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재판을 전부 방청해 일본어로 속기록를 만들었습니다. ‘만주일일신문사’ 간행입니다만 그것을 복사해 주셨기 때문에 빠르게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정말로 도움이 됐습니다.

1910년 2월 14일에 려순(旅順)의 지방법원에서 재판이 열렸습니다. 재판소의 판결 [3]은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한일협약의 제1조에 한국의 외교는 일본 외무성이 수행하며 따라서 외국에 있는 한국인에 대해서는 일본의 영사가 보호한다, 재외 대한제국의 국민에 대해 일본의 영사가 모든 권한을 갖는다. 때문에 형사재판의 권한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형법을 적용할 수 있다. 세세한 얘기가 되기 때문에 생략합니다만 보통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컨대 재판은 이 한일협약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학문상, 한일협약이란 무엇입니까. 운노 후쿠주(海野福壽) 라는 한국합병조약에 대한 전문가가 책을 출간한 게 있습니다.

한국합병에 이르는 경위를 보면 1904년 한일의정서에서부터 19010년의 한국합병에 관한 조약까지 조약이 5건 있습니다. 판결에 있는 한일협약은 그중 3번째인 1905년의 조약이며 한국어 타이틀은 한일협상조약입니다. 이것이 을사조약, 한국보호조약이라고도 하는 조약입니다.

운노 후쿠주(海野福壽)의 책

운노씨의 저서에 나오는 것으로 타이틀에 둥글게 표시돼 있습니다. 법원이 열거했던 것입니다. 후반 부분에 ‘일본국의 외교대표자와 영사로서 한국의 신민 및 이익을 보호해야 한다’고 돼 있습니다. 따라서 재판권이 있다고 법원이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엔에 따르면 이 조약은 절대적으로 무효입니다. 재판권이란 재판관할권입니다. 재판관할권이 없다면 법적으로는 모의재판과 같습니다. 위법한 재판으로 사형판결을 언도한다면 그것은 살인입니다.

그래서 이 조약이 유효한지 무효인지는 안중근 의사의 재판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저는 이를 찾아내 ‘이것은 더욱 당연히 무효’라고 생각했습니다. 무효인 조약을 근거로 하고 있어서 당연히 무효라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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