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로㊷] 아프리카 난민 여성들의 자존감을 높이다 – 박진숙 에트랑제 대표
[아프로㊷] 아프리카 난민 여성들의 자존감을 높이다 – 박진숙 에트랑제 대표
  • 박진숙(에트랑제 대표, 前 에코팜므 대표)
  • 승인 2022.12.02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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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RO’는 국내 아프리카 전문가들의 모임이다. 외교부 한·아프리카재단에서는 이들의 활동을 소개한 책을 두 권 펴냈다. ‘Af-PRO, 한국과 아프리카를 잇다’는 제목의 단행본들이다. 한·아프리카재단의 허락을 받아, 이 책의 내용을 연재한다.[편집자주]

한때 박진숙 대표는 아이 둘을 키우며 심리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유일한 탈출구로 믿었던 취업도, 유학도 좌절되어 자존감이 많이 낮아진 박진숙 대표는 어느 날 인권변호사인 남편을 통해 아프리카 출신의 난민 여성들을 만났다. 박진숙 대표는 그전까지 우리 사회에 난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첫 만남을 앞두고 많이 긴장되고 두렵기도 했지만 막상 만나보니 아이를 키우는 또래 친구와 다를 게 없었다. 때마침 박진숙 대표는 C국 난민 여성들이 공용어로 쓰는 프랑스어를 전공했기 때문에 이를 살려 난민 여성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학구열이 높은 난민 여성들은 한국어 수업에 큰 열의를 보였다.

2년 동안 수업을 빼먹은 날이 손에 꼽힐 정도였다. 박진숙 대표는 그들이 자신을 선생님으로 존중하고 수업에 열심히 임하는 모습을 보며 오랜만에 자신의 존재 가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난민 여성들을 도우며 자존감을 많이 회복한 박진숙 대표는 이번에는 그들의 자존감을 높여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캐나다까지 날아가 이주단체들의 연례회의(CCR Consultation)에 참가해 이주여성들이 리더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았다. 특히 아프리카 이주 여성들이 미술치료를 통해 치유를 경험한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으로 들렸다.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난민 여성들을 위해 미술치료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여성들도 이내 그리운 고향과 사람들을 그리며 여태껏 억눌러왔던 복잡한 감정을 백지에 쏟아냈다. 그런데 이 그림들은 뜻밖에도 우리 눈에 무척 신선하고 이국적으로 다가왔다. 치료 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그림이지만 박진숙 대표는 이를 활용해 엽서, 티셔츠, 에코백 등을 제작하기로 결심하고 이주 여성을 지원하는 사회적 기업 ‘에코팜므(EcoFemme)’를 설립했다. 2009년부터 10년 넘게 에코팜므를 이끌어온 박진숙 대표는 현재 난민으로 인정받은 C국 여성 미야(Miyah)에게 대표직을 넘겨주고 1인 체제의 사회적 기업 ‘에트랑제(Etranger)’를 새로이 설립했다. 박진숙 대표는 에코팜므가 ‘난민이 대표인 국내 난민지원단체 1호’라는 상징성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고 여기며 이제 또 다른 도움의 손길을 찾아 새로운 곳을 향하고 있다.

관심 밖의 존재였던 난민과 마주하다

2006년, 나는 남편이 주말마다 난민지원단체에 가서 난민 연구모임에 참여하는 것이 영 탐탁치 않았다. 난민 연구 자체가 싫었다기보다 주말마다 가족을 두고 일하러 가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대학원을 다니면서 두 아이를 돌보느라 거의 집안에 갇혀있다시피 했고 남편은 사법연수원을 다니고 있었다. 남편은 주중에는 아침부터 자정까지 연수원에서 공부를 하다 왔기에 주말만이라도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주기를 바랐다. 남편과 함께 할 주말만을 기다려온 내게는 기운 빠지는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옳은 일이라는 생각은 들었기에 격주로 가기로 정했다.

남편은 내가 못마땅한 기색을 보일 때마다 함께 모임에 나갈 것을 권했지만 탐탁치 않은 마음은 쉽게 누그러지지 않았다. 어차피 말리지 못할 일이라면 차라리 같이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남편이 난민 소송에 필요한 불어 자료들을 번역해 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했다. 불문과 대학원까지 나왔으나 전공을 가족학으로 바꾼 이후에는 불어를 쓸 일이 없던 터에 ‘감을 살린다’는 마음과 좋은 일 한 번 해 보자는 생각으로 번역 봉사를 시작했더랬다. 활자를 통한 만남이어서일까. 난민의 존재는 내게 별 감흥을 안기지 못했다. 그러던 중 그들을 직접 만날 일이 생겼다. 그래도 번역을 도우며 약간의 호기심이 생긴 터라 한 번 만나보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내 생각과 완전히 달랐다. 그저 일방적으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불쌍한 존재인줄만 알았던 난민들은 실제로 무척 밝고 쾌활하며 재치가 넘쳤다. 그리고 그들과 웃고 떠드는 사이 시나브로 친구가 되었다.

난민 여성 작품

난민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우리 사회에서 난민이 처한 상황에 눈을 뜨게 된 나는 남편과 함께 ‘피난처’라는 국제난민지원단체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국내에서 가장 처음 난민을 전문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한 시민단체인 피난처의 대표는 내게 불어권 아프리카 난민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실을 운영할 것을 제안했다. 나는 극구 사양했다. 당시 아이들이 어렸으며 나도 심리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던 터라 매주 가는 봉사활동은 자신이 없었다. 불문과 대학원씩이나 나왔지만 글로만 배운 불어라 막상 수업을 하다보면 밑천이 드러날까 두려웠고, 매주 아이들을 데리고 일산에서 봉천동까지 가야한다는 것도 부담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삼고초려’ 끝에 한글교사를 수락했고, 2007년 4월 C국 여성 4명을 위한 기초한글반 선생님이 되었다.

흔히 ‘아프리카 사람은 게으르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엄연히 잘못된 인식이다. C국 여성들은 열정적으로 수업에 임했으며 한국어 수업을 진행한 2년 동안 수업에 빠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 또한, 그들은 나를 ‘마담 박(Madame Park)’이라 부르며 선생님으로서 존중하고 대우해줬다.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나를 존중해주는 그들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조금씩 우울감을 털어낼 수 있었다. 애초에 그들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한국어 수업을 열기로 마음먹었는데 돌이켜보니 오히려 내가 자존감을 회복하고 있었다. 아이 둘을 키우며 공부하느라 사회와 일시적으로 단절된 것만 같았던 나는 난민 여성들이 놓인 상황을 누구보다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나의 존재 가치, 그리고 의미를 되찾았다.

난민영화제에서 부스운영

미술이란 씨앗으로 피어난 난민들의 희망

피치 못할 사정으로 고국을 떠나 온 난민들은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환경 속에서 자존감도 떨어져 우울해하기 쉽다. C국 난민 여성들 덕분에 삶의 의욕을 되찾은 나는 이제 소중한 친구가 된 그들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싶었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만으로는 부족했다. 방법을 고민하던 중 2007년 12월, 정부지원을 받아 캐나다에서 열리는 캐나다 전체 이주단체들의 연례회의에 참가할 기회를 얻었다. 당시 나는 난민이라는 존재를 막 발견한 봉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 난민을 비롯한 이주민 전문가들이 모인 국제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난민 인권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으며 또, 모두 출중한 능력을 지닌 인재라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그리고 인도, 수단 등에서 온 여성들이 리더가 되어 회의를 주재하는 모습도 인상깊었다. 이는 당시만 해도 세계관이 좁았던 내게 무척 생소한 광경이었다. 나는 그들을 보며 우리나라에 있는 난민 친구들도 한국 사회에서 충분히 리더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한편, 컨퍼런스를 통해 참관한 프로그램 중 미술을 통해 마음 속 상처를 치유하고 자존감을 높여주는 ‘아트 테라피(Art Therapy)’에 큰 매력을 느꼈다. 나는 한국에 가자마자 난민 친구들에게 컨퍼런스에서 보고 배운 것을 쏟아내며 우리도 아트 테라피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친구들은 ‘테라피’라는 단어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테라피’라는 단어에 이미 아프다는 전제가 내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불편해하는 기색을 눈치채고 이름을 ‘아트 플레이(Art Play)’로 바꿨다.

그리고 미술을 전공한 친구를 불러 본격적으로 미술 수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없다며 주저하던 난민 친구들도 이내 마음을 열어 그리워하던 고향과 가족들을 그리기 시작했고 여태껏 억눌러왔던 감정을 백지에 쏟아냈다. 그렇게 완성된 그림들은 지금껏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아프리카만의 이국적인 매력으로 가득했다. 그림 속 아름다운 색감과 형태는 나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과 미술 전문가들까지 매료시켰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소실점이나 원근법 등의 미술화법과는 맞지 않은 부분들이 오히려 자유롭고 신선했으며 독창적인 예술 감각으로 와 닿았다. 난민 친구들은 우리가 자신들이 그린 그림을 경이로워한다는 사실에 놀란 눈치였다.

당시 국내에서는 플리마켓(Flea Market)이 유행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플리마켓이 열렸고 작은 단체나 개인도 자유롭게 참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뜻을 모았다. 난민 친구들과 함께 수제 비누와 머리끈을 만들고 엽서도 그렸다. 엽서는 순식간에 다 팔렸고 난민 친구들의 그림이 상품성이 있음을 확신했다. 친구들도 모처럼 희열감에 들뜬 기색이었으나 문제는 수지 타산을 맞추는 일이었다. 장당 3,500원을 받고 판매한 엽서 한 장을 그리는 데 꼬박 2시간이 걸렸으니 시급으로 따지면 1,750원밖에 되지 않았다. 완판됐다는 사실에 잠시 기뻐하던 우리는 이내 시무룩해졌다. 여성부 지원으로 진행했던 <다문화 공방>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자 기쁨과 더불어 허무함과 자기 비판이 날아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내용으로는 연이어 정부 지원을 받는 사업을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자원활동가 처지에 프로젝트를 이어가자고 주장할 배포도 자신감도 없었다. 난민 여성들이 성장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그러나 ‘왜 책임지지 못할 일을 벌였을까?’라는 자책에만 휩싸여 있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기에 용기를 내 이듬해 2009년 봄 <에코팜므>라는 이주여성 전문 단체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설립 후에 첫 번째로 개발한 상품이 아프리카의 풍경을 담은 엽서세트였다.

다문화공방 프로젝트 때 통역을 돕던 친구가 인쇄 제작을 제안했고 우리는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그림들을 솎아내어 1,000장씩 인쇄하여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엽서 원본은 ‘오리지널 페인팅(Original Painting)’이란 이름으로 별도로 판매했다. 우리가 그림 판매에 고무된 모습을 본 또 다른 친구는 사회문제 해결을 주제로 혁신기업을 발굴하는 전국소셜벤처 경연대회에 나가보라고 권했다. 당시 난민 친구들은 정식으로 회사에 고용될 수 없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그래서 대회에 참가해 수상한다면 그들에게 경제적으로도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자존감도 높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넘나 쉬운 난민 이야기 포스터

사회적 기업의 대표가 되다

난민을 비롯한 이주여성들의 문화적 재능을 살려 이들을 한국 사회의 리더로 만들고자 설립한 에코팜므는 NGO 기반 사회적 기업의 형태를 띄었다. ‘에코(Eco)’는 생태(Ecology)와 경제(Economy)를, ‘팜므(Femme)’는 여성을 의미한다. 즉, 여성들이 친환경적인 방법으로 경제적 자립을 도모한다는 큰 뜻을 담고 있다. 나는 결혼, 육아 등의 이유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 특히 여성 예술가와 난민을 포함한 이주 여성들을 연결하여 미술 수업을 진행하고 함께 협력해 만든 공예품을 판매하는 사업을 구상했다. 그때가 2009년 5월이었다.

그리고 한 달 후 열린 서울·강원지역 소셜벤처경연대회에 참가하여 권역대회 수상 후 전국대회까지 진출해 우수상을 거머쥐었다. 대회를 마친 후 우리는 다시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태국, 베트남, 중국 등에서 온 이주 여성들이 함께 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하나 둘 떠나가고 끝내 나와 아프리카 출신 친구들만 남았다. 우리는 이주 여성을 위한 상담 프로그램과 이주 여성들의 재능을 발굴하기 위한 다채로운 교육 프로그램을 시도했다. 특히 예술적 소양을 발굴하여 작가로 양성하는 데 힘썼으며 그들의 손에서 탄생한 공예품을 판매해 경제적 자립을 도왔다. 또한, 난민 인권 교육 매뉴얼을 발간하고 자선 바자회를 여는 등 난민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식 개선 활동도 펼쳤다.

2012년에는 친환경 패션 브랜드 ‘오르그닷(Orgdot)’과 함께 C국 친구들이 그린 그림을 프린트한 티셔츠를 출시하며 론칭 행사를 가지기도 했다. 나는 그때 미야가 발표한 소감을 잊을 수 없다. “우리 문화가 그려진 옷을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것이 신기하고 자랑스럽다. 아프리카 문화도 한국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음에 뿌듯하다.” 그동안 난민 친구들이 자존감을 회복하길 바라며 시작한 미술수업과 여러 사업들이 미야의 발표를 통해 결실을 맺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품어 왔던 내 진심과 의도를 난민 친구들을 비롯해 에코팜므 직원들 모두가 알아준 것 같아 큰 감동과 보람을 느꼈다.

부르키나파소

난민에서 기업의 리더로

에코팜므를 운영하며 정말 기쁜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2011년 미야가 7년간의 시도 끝에 난민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우리나라는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난민법을 제정했으나 1994년부터 2021년까지 누적 난민 인정율은 1.5%에 머물러 있다. 심지어 2020년에는 0.4%에 그쳤다. 전 세계 국가들의 평균 난민 인정율이 30%임을 감안하면 ‘아시아 유일의 난민법’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로 터무니없이 작은 숫자다. 난민으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고국에 돌아갈 수 없는 이유를 증거로 제출해야 한다. 그런데 난민들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는 긴박한 상황에서 도망치다시피 출국을 하다 보니 증거를 가지고 나오기 어렵다.

탈출한 후 고국에 남은 사람들에게 증언을 하거나 증거를 취합하여 보내줄 것을 요청하더라도 본인들이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 협조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와중에 2011년 7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미야가 난민으로 인정받았다. 미야의 경우 벨기에에 있는 친언니가 이메일로 증언을 하고 국내에서 정신과 치료를 담당한 의사가 소견서를 써주어 3심만에 겨우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미야가 난민으로 인정받는 데 변호사인 남편의 법적 지원이 컸다. 한번은 미야가 난민으로 인정받기 전 KBS에서 다큐멘터리 제작을 제안하며 촬영차 방문했다.

그런데 촬영을 지켜보다 뜻밖에도 미야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에 대해 묻는 PD의 질문에 미야는 “She is always there”이라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너무 단순한 답변에 나는 순간 실망하여 ‘내가 어디 가나’, ‘내가 거기 있는 것이 뭐 그리 의미가 있지’라며 속으로 반문했다. 하지만 이후 미야의 진심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난민을 지원하는 일을 하다 보면 열정을 가지고 나타났다가도 금세 사라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한결같이 옆에 있어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힘이 되는 일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 당시 미야가 했던 말이 떠올라 마음 한편이 뭉클해지곤 한다.

나는 2019년 에코팜므 대표직을 미야에게 넘겨줬다. 난민이 대표로 있는 난민 지원 단체는 지금까지 국내에 없었다. 지원을 받는 대상에서 지원하는 주체가 됐다는 사실로도 상징성을 가지지만, 난민 출신 대표만이 가지는 특별한 힘이 있었다. 무엇보다 난민이 직접 난민 이야기를 할 때 비로소 진정한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난민 이야기를 하는 것과 미야가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한번은 난민 관련 국제컨퍼런스에 미야와 함께 참석했는데 사람들은 나보다 미야의 이야기에는 더 집중했다.

또한, 에코팜므가 진행하는 인기강좌 ‘넘나 쉬운 난민 이야기’에서도 난민 출신 강사들이 하는 강의의 만족도가 가장 높게 나타났다. 결국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은 당사자 본인이 들려주는 진짜 이야기였다. 물론 미야가 대표직을 맡으면 어려움도 많이 있을 것이다. 언어의 한계로 폭넓은 외부 활동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으며 미야의 성격이 적극적인 편도 아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다 이겨내고 미야 본인만의 리더십을 발견해 개발하며 잘 해내리라고 믿는다. 그렇게 나는 에코팜므의 더 큰 성장과 밝은 미래를 꿈꾸며 대표직을 내려놓고 평범한 후원자로 자리를 옮겼다.

에코팜므 대표에서 물러난 나는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또 다른 사람들을 찾아 1인 기업 ‘에트랑제’를 설립했다. 에트랑제는 불어로 ‘이방인’을 의미한다. ‘우리는 모두 어디선가 이방인이다’라는 마음으로 난민을 비롯한 이방인들에게 진정성 있는 도움을 주고자했기 때문이다. 혼자이기 때문에 한 번에 내딛을 수 있는 보폭은 줄어들었지만 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공정무역 제품을 판매하는 국제 사업도 추진하고 있으며, 그림책으로 부르키나파소 아이들을 가르치는 ‘그림책으로 놀자’ 프로그램 디렉터로도 활동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삼성꿈장학재단의 지원을 받아 부르키나파소에서 교육인력을 양성하고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보내는 사업이다. 나는 프로그램 구성과 그림책을 선정해 1년간의 커리큘럼을 짜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직접 부르키나파소에 가서 아이들과 선생님을 만났고 내가 짠 커리큘럼으로 수업을 참관하는 기회를 얻었다. 국내에서 난민들을 지원하는 일 못지않게 국제개발협력 사업을 통해서도 현지의 긍정적인 반응을 접하며 내가 하는 일에 큰 매력을 느낀다.

난민이란 이름의 친구

지난해에는 M국 이주 여성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진행했다. 독특한 색채와 그림체로 많은 사랑과 인정을 받는 에코팜므 소속 아티스트 ‘아이샤(Aicha)’와 딸 ‘이만(Imane)’이 그 주인공이다. 5개 국어를 구사하는 남달리 총명한 딸 이만이 아픈 엄마를 대신하여 경제 활동을 하며 엄마를 돌본다. 나는 촬영장에 종종 통역가로 동행했다. 한번은 PD가 이만에게 한국에서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이만은 “여성을 위한 단체를 세우고 싶다”고 답했다.

“에코팜므를 통해 엄마가 사회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는 일이 기쁘다”며 “엄마와 같이 소외된 여성들이 전문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돕는 사회적 기업을 만들고 싶다”고 덧붙여 말했다. 이만의 답변을 들으며 기특하면서도 여태껏 내가 해온 활동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 모녀는 한국에 온 이후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에코팜므가 이만이 꿈을 구체화하는 데 일조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벅차올랐다.

한편, 미쇼는 미야만큼 가깝고도 오래된 나의 친구이다. 언젠가 미쇼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가 함께 했던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했다. 여기에 미쇼는 뜻밖의 대답을 내놨다. 미야와 나 이렇게 셋이서 예술의전당에서 하는 전시를 보고 서래마을에서 커피를 마신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동안 여러 프로그램과 행사에 같이 참가했지만 가장 좋았던 순간이 사적으로 만나 우정을 쌓았을 때였다고 하니 마음 한편이 살짝 저렸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은 똑같은 눈높이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마음을 열 수 있는 친구라는 사실이며, 동시에 미쇼가 나를 진정한 친구로 생각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다. 난민 봉사를 통해 선생과 학생의 입장으로 만나 오랜 시간 그들을 도왔지만 베풀고 받는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친구로서 신뢰를 쌓았기에 15년이란 시간동안 관계를 이어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가끔 난민들을 만나기 전의 나를 떠올린다. 지금 내가 누리는 행복을 그때의 나는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과거의 내가 누렸던 행복과 지금 내가 누리는 행복은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내가 이토록 당당하고 행복한 사람으로 변했기에 다른 사람에게도 난민과 친구가 되기를 권하고 싶다. 나아가 우리 사회에 다양성이 존중되어 난민들이 더 이상 소외되지 않도록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였으면 한다.

※ 난민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출신국가를 밝히지 않는 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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