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성 칼럼] 2022년 서울에서 본 ‘서쪽 나라의 멋쟁이’
[정대성 칼럼] 2022년 서울에서 본 ‘서쪽 나라의 멋쟁이’
  • 정대성 문화칼럼니스트
  • 승인 2022.12.14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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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9일부터 20일 사이, 명보아트홀 3층 라온홀에서 존 밀링턴 씽 원작, 정한용 연출의 연극 ‘서쪽 나라의 멋쟁이’가 상연됐다. 필자는 정한용 배우의 경기고 후배들을 따라가 함께 봤는데, 연기자들의 열연이 묘한 조화를 이룬 괜찮은 무대였다. 출연자 모두가 전문 배우가 아니었는데도 연기가 좋았고 연출도 좋았다. 무엇보다 여성 연기자들의 연기가 자연스러워 이 연극을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제국(강자)이 욕망을 채우는 데에 아이러니하게도 여자(약자)들의 도움을 받는다는 역설의 주제가 이 연극에 담겨 있었다.

‘서쪽 나라의 멋쟁이’는 연극역사 교과서에 꼭 언급되는 작품이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에서 신극 운동가들이 이 작품을 다루었고,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 작가가 써서 재일조선인 연극인들도 주목했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과 대만에서도 상연됐다. 아쿠타가와상을 창설한 영문학자이자 <문예춘추> 창립자인 키쿠치 캉이 아일랜드 문학에 경도된 바 있어 조선, 대만도 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번역문학사, 연극운동사 분야 여러 교수들과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과 우리 신문학운동을 비교해 연구한 적이 있다. 아일랜드의 예이츠, 씽, 와일드 등의 문학이 영문학을 풍부하게 하면서도 아일랜드의 독립과 국민국가 건설과 직결됐다는 해석이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씽과 다른 아일랜드 작가들의 연극이 줄곧 식민지시기부터 조선 연극인들에게 관심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번 공연은 최근 돌아가신 한 연극인에 대한 오마주였다고 한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씽의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1974년 서강대학교).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국민국가를 강화해가던 시기, 유라시아 반대편의 가장 멀리 있는 아일랜드의 문예부흥운동을 소환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리라. 대영제국에 이웃한 아일랜드는 대기근과 이민으로 인구 감소를 겪으면서도 독립국으로 살아남았고, 대한민국도 민족상잔, 분단이라는 최대 난국을 겪으면서 발전해왔다. 그러한 배경에 문화의 힘이 영향을 주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되리라.

역사의 흐름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조금 다른 측면도 보인다. 씽, 예이츠 등은 유니오니스트와 내셔널리스트 사이에 있었다. 앵글로 아일리쉬, 즉 영국계 아일랜드사람인 그들이 온전히 게일어를 선택하지 않고 영어로 창작한 것은 더 넓은 시각으로 볼 때 결국 대영제국의 그늘에 들어가면서 좀 색다른 영어로, 피지배 민족의 전통이나 들추어내면서 영어문화의 억압하는 힘에 교묘히 숨었던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게 씽, 예이츠, 와일드, 조이스 등을 깎아내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되레 그들의 놓인 힘겨웠던 상황과 특성이 현재 우리의 그것들과 비슷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1907년 애비극장에서 초연했을 때, 더블린 관객들은 이 작품이 “아일랜드 사람, 특히 여자들을 모욕한다”며 소동을 일으키고, 극장 안팎에서 “작가를 죽여라” 하고 외쳐댔다고 한다. 이 ‘폭동’을 진압하느라 무려 500명의 경찰이 동원됐다. 왜 이 작품이 아일랜드인, 특히 여자들을 모욕하는 작품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을까?

그럼 연극의 내용을 살펴보자. 아일랜드 시골 마을의 한 술집에 잘생긴 청년 크리스티가 나타나더니, “아버지를 죽이고 도망쳐 왔다”고 고백한다. 아버지 머리를 삽으로 내리쳐 죽였다는 그를 마을 사람들은 무슨 이유인지 용감하다고 칭찬하며 받아들인다. 카톨릭 교회 관례에 따라 멍청한 쇼온 키오와 부랴부랴 결혼해야 했고 자기주장이 강한 술집 딸 페긴도 크리스티에게 홀딱 반하고 고개 너머의 과부, 동네 처녀들과 연적이 된다. 신난 크리스티는 자신만만해지고 운동시합에서도 우승하자 마을 사람들은 그를 영웅시한다. 하지만 그가 죽였다는 아버지가 살아서 나타나자 크리스티는 아버지 머리를 다시 내리친다. 그러자 이번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를 잡아서 줄로 묶어 경찰에 넘기려 한다. 그러자 피투성이의 아버지가 다시 나타나 아들과 화해하고 함께 돌아간다. 우유부단하게 우왕좌왕했던 술집 주인과 마을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만, 페긴은 떠나간 영웅을 그리워한다.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은 발전된 서구의 근대합리주의에 대항하는 아일랜드 전통의 재발견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국민국가 창출의 도구였다. 국민국가의 리더는 봉건적인 낙후된 퍼스널리티가 아니라, 그런 케케묵은 낡은 것들을 깔아뭉개 버리는 새로운 힘과 상징이어야 했다. 그것이 크리스티였으리라. 페긴을 비롯한 여자들은 본능으로 그런 힘에 동경을 하고 일체화되고자 하는 욕구, 욕망을 감추지 못한다.

그것은 어쩌면 월드컵에서 자국팀만을 응원하는 국민들의 모습이다. 국가 간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많은 남정네들이 전통과 근대화 사이에서 우왕좌왕한다. 그런 이치를 이 작품에서 말하고 있다면, 초연 시 더블린 관객들의 반응이 이해가 되고, 식민지 시기의 조선이나 군부독재 시절에 이 연극이 떠맡았던 문화의 암호 코드도 해독되리라. 즉, 우리는 모두 힘에 동화되면서 주체를 끌어가려고 하거나, 주체를 견지하면서도 힘에 동화돼버린다. 그것은 모순이다. 결국, 우리는 주체를 잃고 힘에 눌려 소외된다.

코로나로 국민 생활이 규제되는 요즘, 눈을 감고 따르는 대다수 사람과 이를 반대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다. 아시아 반대편에 북아일랜드 문제가 있고 우리에게 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듯이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계속 남아 있는 2022년이다. 서울에서 이 연극이 상연된 의미는 한 연극인의 오마주에 그치지 않고 더 깊고 커다란 그 무엇으로 번져나가리라. 경기고 동창이 아닌 필자는 공연 뒤 술자리를 피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귀갓길을 다그쳤다.

정대성 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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