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83] 계묘년과 아라비아 펠릭스
[유주열의 동북아談說-83] 계묘년과 아라비아 펠릭스
  •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3.01.09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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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묘년 검은 토끼의 새해가 시작되었다. 웅크렸던 토끼가 멀리 뛰듯이 그간 코로나로 침체됐던 나라 경제가 새해에는 크게 발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지난해 카타르에서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로 아라비아반도 국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방한해 300억 달러(약 37조 원) 규모의 투자협약을 체결했고, 새해를 맞이해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국빈 방문한 아랍에미리트로부터 사우디와 같은 300억 달러 규모의 투자유치 성과를 내는 등 제2의 중동붐 기대를 갖게 하고 있다.

필자가 외교부 입부 후 미국연수를 마치고 부임한 첫 근무지가 주아랍에미리트(UAE) 대사관이었다. 수도 아부다비에서 첫날밤을 지낸 아침, 확성기에서 울린 “알라후 아크바르(알라신은 위대하시다)” 소리에 잠을 깨면서 또 하나의 미지의 세계가 펼쳐져 있음을 깨달았다. 그로부터 3년 반에 걸친 대사관 근무는 세계역사를 바꾼 아랍과 이슬람 문화에 대해 그들의 시각에 의한 학습과 이해로 국제정세의 판을 읽는 눈을 크게 뜨게 하였다.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 있는 ETIHAD TOWER[사진=위키미디아 커몬스]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 있는 ETIHAD TOWER[사진=위키미디아 커몬스]

카타르 및 사우디아라비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아랍에미리트가 위치한 아라비아반도를 옛날에는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 사이에 놓여있는 “아랍인의 섬”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북쪽으로 지중해 남쪽으로 아라비아해 서쪽으로 홍해 그리고 동쪽으로 걸프(페르시아만)와 유프라테스 및 티그리스 강으로 둘러싸여 있는 고립된 세계였기 때문이다. 카타르의 유명한 방송사 ‘알자지라’는 섬이라는 의미인데 아라비아반도(섬)를 말한다고 한다.

아랍에미리트에서 걸프 연안을 따라 서북 쪽으로 가면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합류하여 흐르는 아랍 강을 만날 수 있다. 지금은 이라크의 바스라 주가 된 두 강의 사이(메소포타미아)는 비옥한 충적토가 만들어준 풍요로운 땅으로 아랍과 이슬람 문화의 중원(中原)이었다. 이곳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2000년 앞서 ‘지구라트’라는 신전을 만들고 쐐기 문자를 점토판에 새긴 인류 최초 수메르문명의 발상지였다. 유대인 및 아랍인의 선조로 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은 수메르(우르) 출신이라고 전한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일개 도시 국가 바빌론에서 시작된 고바비로니아는 수메르문명을 계승하여 인류 최초의 성문법전을 지은 함무라비 대왕이 메소포타미아 지역 전체를 통일하고 그의 영향력을 지중해까지 확대됐다. 고바비로니아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히타이트제국과 티그리스강 상류의 아시리아 왕국에 의해 멸망된 후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해 신바비로니아가 건국된다.

정복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지중해 연안의 레반트 지역과 유대왕국 예루살렘을 점령 수많은 유대인을 포로로 바빌론으로 끌고 왔다. 이탈리아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는 그 무렵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이야기가 배경이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고향을 잊지 못하는 부인을 위해 고대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공중정원을 만드는 등 타지마할을 건설한 인도 무굴제국의 샤자한을 연상시키는 애처가였다. 독일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에 복원돼 있는 푸른 자기 벽돌의 바빌론의 문(이슈타르의 문)은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 바빌론 도성의 정문이었다.

위대한 도시 바빌론은 포로로 잡혔던 유대인들의 아픈 기억 때문에 부정적으로 전해져 황홀하면서 위태로웠던 1920년대 헐리우드가 바빌론에 비유되어 그 실상이 최근 개봉된 영화 ‘바빌론’에서 보여주고 있다.

영화 바빌론
영화 바빌론

팔레스티나, 시리아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포함한 이른바 비옥한 초승달(Fertile Crescent) 지대를 장악했던 신바비로니아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 사후 이란의 동남부 파르스 지방에서 일어난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멸망되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2세는 바벨탑으로 알려진 바빌론 지구라트와 공중정원을 철저히 파괴하고 포로로 잡혀 온 유대인을 예루살렘으로 귀환시켰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은 동쪽으로 인더스강 서쪽으로는 이집트와 그리스 마케도니아 일부를 아우르는 대제국으로서 그리스와 끊임없는 갈등 관계 끝에 다리우스 3세가 알렉산더대왕과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멸망된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의 방대한 영토를 그대로 접수했다. 그의 사후 제국은 부하 장수들에 의해 분할되어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바빌론 총독 셀레우코스가 400년 가까이 지배했다가 동방으로 진출한 로마에 의해 병합된다. 로마 세력이 미치지 않는 페르시아 동쪽에는 여러 민족의 왕조가 난립했다가 과거 페르시아 제국을 재건한다는 기치로 일어난 사산 왕조가 이집트와 아나톨리아 반도 등 과거 페르시아 영토의 대부분을 수복했다. 사산 왕조는 동로마제국과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쇠퇴하였고 이 기회를 틈타 무함마드에 의해 이슬람화된 신흥 아랍족에 의해 멸망된다.

걸프연안국들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수메르 및 바비로니아)과 인다스 문명의 중계 무역으로 풍요로울 때 반도의 반대쪽은 유향(乳香, frankincense)과 몰약 무역으로 번성했다. 고대인들은 사람이 죽거나 제사를 지낼 때 유향을 피운다. 유향은 신분의 대명사처럼 귀족들은 항상 몸에 유향을 풍겨야 했다. 몰약(沒藥, myrrh)은 방부와 살균 효과로 미라를 만들 때 필요했다. 유향 및 몰약은 아라비아반도 남쪽 오만 및 예멘에서 자라는 유향 및 몰약 나무에서 추출된다. 감람나무 과에 속한 상록 관목인 두 나무에 상처를 내면 젖과 같은 순백색의 수액이 나온다. 수액을 2주 정도 말려 이집트 그리스 등 고대 국가의 왕족이나 귀족에게 팔려간다. 아기 예수 탄생 시 동방 박사가 가져온 세 가지 보물에는 황금과 함께 유향과 몰약이 포함돼 있었다. 부피가 크지 않은 유향과 몰약은 황금보다 귀해 사막의 낙타 카라반에 의해 운반됐다. 카라반(隊商)은 도적 떼를 막기 위해 무리를 지어 다니는 상인집단이었다.

구약성서 등에 나오는 시바 여왕은 기원전 10세기 유향과 몰약의 집산지 예멘의 여왕으로 유향과 몰약 무역으로 국부를 일으킨 당시 가장 부유한 국가의 여왕이었다. 전승에 의하면 그녀는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이 지혜롭다는 명성을 듣고 솔로몬 왕을 예방한다. 시바 여왕의 여러 가지 질문에 솔로몬 왕이 거침없이 답하자 지혜의 왕임이 인정되어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임신한 시바 여왕이 귀국길에 에티오피아에서 태어난 아기가 메넬리크 1세인데 1968년 한국을 방문한 하일레 셀라시에 에티오피아 황제의 먼 조상이라고 한다.

셀레시에 황제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자신의 근위병인 가장 용감한 군대를 파견하여 한국을 지원했다. 그가 파병 당시 장병들에게 “살아서 돌아올 생각 말고 전부 전장에서 맹렬히 싸워 전사하거라. 죽음의 대가로 자유를 한국인에게 안겨주어라”는 감동적인 말을 남겼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및 로마인들은 유향과 몰약으로 부를 이룬 남아라비아를 아라비아 펠릭스(풍요로운 아라비아)라고 불렀다. 유향과 몰약이 아라비아반도를 종단 지중해 무역항 가자 또는 알렉산드리아까지 운반되는 카라반 대상로, 즉 인센스 로드의 중간 거점도시 메카 메디나 페트라 예루살렘의 상인들도 풍요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은 대상들이 머물 숙소 및 낙타가 휴식을 취할 장소(caravanserai) 제공과 모자란 물품을 보충해주면서 부를 나눴다. 후에 걸프 연안 무역이 쇠퇴하고 오만의 선박에 의해 인도의 향신료가 도입되자 카라반 무역은 더욱 번성했다.

유향나무
유향나무

6세기 후반 예언자 무함마드가 메카의 지배계급이었던 쿠라이시족의 하심가에서 태어났다. 쿠라이시족은 아브라함의 서장자 이스마엘의 후손으로도 알려져 있다. 카라반 상인의 유복자로 태어나 그의 어머니도 일찍 죽어 고아가 된 무함마드는 12세의 나이에 카라반 상인의 삼촌과 함께 시리아를 드나들면서 상인의 길을 배웠다. 무함마드가 20대가 되자 삼촌은 부자로 명망 있는 과부 상인 카디자를 소개 그녀의 고용인이 됐다. 그는 메카와 시리아를 왕래하면서 카라반 무역에 수완을 보여 카디자의 신임을 얻었다. 40세의 카디자는 25세의 청년 무함마드에게 청혼하여 두 사람은 결혼에 이르게 된다. 부와 명예를 얻은 무함마드는 어린 시절 가졌던 종교적 감수성으로 금식과 함께 사색하여 진리를 찾기 시작했다.

어느날 계시를 받은 무함마드가 유일신 알라를 설교하기 시작하자 이를 비난하고 탄압하는 메카를 떠나 622년 메디나로 옮겨(헤지라 聖遷) 이슬람 신앙을 아라비아반도 전역에 전파했다. 후에 메카를 탈환한 후 632년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메디나로 돌아와 사망했다.

후계자 지정 없이 무함마드가 죽자 그의 친구를 중심으로 칼리프(최고 종교지도자)를 선출했다. 이른바 ‘정통 칼리프’ 시대로 3명의 칼리프가 선출됐고 4대째 칼리프 알리는 무함마드의 조카이면서 막내딸 파티마의 남편이었다. 무함마드는 아라비아반도를 통일했으나 그의 사후 3명 칼리프가 아라비아반도를 넘어 사산 페르시아 정복을 위시하여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지중해 연안 그리고 이집트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4대 칼리프 알리는 수도를 메소포타미아의 쿠파로 옮겼다. 당시 시리아 총독으로 메카의 우마이야 집안의 무아위야가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칼리프가 되면서 수도를 자신의 세력 기반인 다마스쿠스로 옮긴다.

무아위야의 쿠데타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순니-시아’의 이슬람 종파 분쟁의 발단이 됐다. 아들이 없는 무함마드의 급서로 이슬람 이전의 아랍족 공동체 관습(순니)대로 칼리프가 선출됐으나 무함마드의 사촌으로 그의 유일한 혈통과 결혼한 알리 추종세력(시아)의 불만이 컸다. 4대째가 이르러서야 알 리가 칼리프가 되긴 했으나 무아위야가 쿠데타로 알리와 그의 자녀까지 제거하여 우마위야 왕조에 대해 시아파의 원한이 깊어졌다.

찬탈자 무아위야는 세습 칼리프를 선언하면서 우마이야 왕조를 시작 100년(661-750) 가까이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반도까지 지배하는 방대한 영토를 점유했다. 그러나 오랜 정복 전쟁의 피로로 쇠퇴한 틈을 이용 무함마드 삼촌의 한 사람인 아바스 후손들은 시아파의 협력을 얻어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긴 후 아바스 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시아파에 대한 보상은커녕 오히려 탄압을 가하자 시아파는 미래를 기약하고 이란 고원으로 숨어들었다. 후에 시아파 후손이 사파비 왕조(1501-1736)를 세워 이란은 완전히 시아파의 나라가 됐다.

아바스 왕조 500여 년은 과학 문화 천체 등 아랍 이슬람 문화가 꽃을 피웠고 수도 바그다드는 세계 최대의 도시로 그리고 학문의 중심지로 명성을 얻어 아랍 이슬람의 황금시대를 구가하다가 1258년 몽골군에 의해 멸망된다. 아바스 왕조는 중국(唐)과 중앙아시아(탈라스) 전투에서 승리 중국 포로로부터 도입한 제지기술로 만든 종이로 그리스 학문을 아랍어로 번역 세계 최대의 도서관을 지어 보급했다. 몽골군 침입으로 바그다드가 파괴되면서 티그리스 강은 전사들의 피로 또 한번은 버려진 수많은 책자들에서 나온 먹물로 두 번 물들었다고 한다.

압둘아지즈 빈 압둘 라만 알 사우드
압둘아지즈 빈 압둘 라만 알 사우드

메카 출신의 쿠라이시족이 세운 우마이야 및 아바스 왕조의 멸망으로 아랍 이슬람의 제국 시대는 끝나고 셀주크 및 오스만 제국 등 중앙아시아 출신의 튀르크계의 비아랍 이슬람제국의 시대가 시작됐다. 이슬람을 일으킨 아랍인들은 고향인 척박한 사막의 아라비아반도로 돌아와서 수백 년 메카 메디나 성지를 지켰다. 그들은 우마이야-아바스에 이르는 과거 칼리프 왕조의 영광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그들 국기에 흰색과 검은색이 빠지지 않는 것은 두 왕조의 깃발이었기 때문이다.

아라비아반도 중앙 해발 600m의 리야드 사막에 이븐 사우드 가문이 있었다. 1700년대 와하브라는 인물이 찾아왔다. 그는 부패한 오스만 제국에 환멸을 느끼고 쿠란의 본위로 무함마드의 시대로 돌아가자며 이슬람 복고주의를 주장했다. 이븐 사우드는 와하브의 주장에 동조하고 “알라 외에는 신이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使徒 rasulu)이다”라는 쿠란 구절을 깃발에 내걸고 아라비아반도의 통일에 나섰다. 이븐 사우드는 메카-메디나로 진격 부패한 종교지도자를 축출했다. 이스탄불에서 이 소식을 들은 오스만 제국은 1818년 군대를 보내 이븐 사우드 군을 진압하고 그를 추방했다.

이븐 사우드의 5대손인 압둘아지즈(1875~1953)는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이용, 할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정복 사업을 다시 시작했다. 그 무렵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영국은 아라비아반도의 아랍인을 선동 독일의 동맹국인 오스만 제국에 반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했다. 영국은 아라비아반도 두 개의 명문인 메카-메디나를 관리하는 하심가와 내륙의 세력자 사우드 가와 접촉했다. 사우드 가는 이슬람 복구 주의(와하비즘)에 의한 정복 사업을 하고 있어 영국의 제안을 거절했으나 하심가는 독립왕국을 세워준다는 영국의 약속을 믿고 오스만 제국에 반란을 일으킨다. 1960년대 ‘아라비아 로렌스’라는 영화에는 영국의 정보장교 T.E 로렌스가 하심가와 연합 오스만 제국을 괴롭히는 장면이 나온다. 전후 영국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놓고 프랑스와의 분할 약속을 지키느라 하심가와의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다만 하심가의 두 아들을 요르단 왕과 이라크 왕으로 만들었다. 이라크는 군사 쿠데타로 왕정이 끝났지만, 요르단은 지금도 하심가 왕국을 유지하고 있다. 한편 사우드 가의 압둘아지즈는 정복 전쟁을 완성,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건설했다. 그가 무함마드 빈 살람 왕세자의 할아버지다. 알라신이 축복이라도 내리듯이 신생국 설립 후 걸프 연안에 기름이 발견된다.

영화 아라비아 로렌스
영화 아라비아 로렌스

필자가 근무한 아랍에미리트 등 걸프연안국들은 수메르 이후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인다스 문명과 중계 무역으로 번성 인류 최초의 이상향 에덴동산이 있었다는 딜문(Dilmun) 문명의 발상지였다고 한다. 그 이후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 문명의 영향을 받았으나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가 동로마와 대립하면서 걸프 연안은 쇠퇴하였다. 16세기 이후 바스쿠 다가마의 인도항로 개척으로 이 지역에 포르투갈이 내항하여 지배하기 시작했다. 18세기경 걸프만을 항해하는 유럽의 상선을 대상으로 아라비아 해적선이 출몰하여 해적 해안(pirate coast)이라는 오명을 얻었고 영국의 동인도 회사의 상선이 피해를 많이 보자 영국 정부가 해적을 소탕한 후 ‘서양의 상선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협정을 맺어 휴전 해안(trucial coast)이라는 이름도 얻었다.

결프 연안국들은 연안 내 소규모 무역 또는 천연진주 채취로 경제를 유지하면서 영국의 실질적 보호 아래 있었다. 일본에서 개발된 진주 양식에 의한 인공 진주가 세계 보석 시장을 석권하자 진주 채취 산업이 어려워졌으나 석유가 발견되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1968년 영국이 수에즈 운하 동쪽에서 철수한다는 선언으로 독립의 기운이 높아지자 아부다비를 중심으로 9개 에미리트(토후국)가 연방(Federation of Arab Emirates, FAE)을 결성했으나 석유생산의 호조에 힘을 얻은 바레인 및 카타르는 단독 독립을 선택하고 나머지 7개 에미리트가 연합 1971년도 아랍에미리트(UAE)를 건국했다.

네옴 시티 프로젝트
네옴 시티 프로젝트

필자가 아랍에미리트 대사관 근무 명령을 받자 출퇴근 때 낙타를 타고 다녀야 하느냐. 사막이라 녹색의 고향이 그립겠다느니 하면서 주변에서 걱정이 많았다. 막상 부임해 보니 석유가 가져온 부로 거리에는 최고급 승용차가 굴러다니고 즐비한 고층 건물은 냉방이 잘 되어 실내에서 추워서 소매 짧은 셔츠를 입을 수 없었다. 현지 아랍인들은 세계를 지배한 관록으로 자존심이 대단했다. 언젠가 현지 거주 지인이 천연(석유)자원이 많은 것은 알라 신의 축복이 아니겠냐고 했더니 한국은 인적(인재) 자원이 많아 부럽다고 겸손해했다고 한다. 미국의 셰일 유전 개발, 전기차 등 온실가스 감축 등의 탄소 중립국이 늘어나는 등 석유 의존도가 점차 떨어지자 탈석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부르즈 칼리파를 위시한 아랍에미리트(두바이)의 관광 및 부동산 산업, 스포츠 엔터테인먼트의 카타르, 금융을 내세우는 바레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네옴시티 프로젝트 등 신산업으로 아라비아 르네상스를 일으키고 있다. 대한민국은 과거 근면한 인력과 기술의 K-건설로 1차 중동 붐을 맞이했다면 이제는 꾀 많은 토끼(卯)처럼 앞뒤로 호랑이(寅)와 용(辰)을 제치고 원전, 방산 및 IT 산업을 통한 K-스마트로 2차 중동 붐을 만들어야 한다. 21세기 아라비아 펠릭스가 아라비아반도에서 부활하고 있다. “알라후 아크바르!”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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