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86]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낙산의 이화장
[유주열의 동북아談說-86]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낙산의 이화장
  •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3.04.07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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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선비들은 순결하면서 은은한 향기로 흐드러지게 피는 배꽃(梨花)을 찾아 정자를 지어놓고 시(詩)를 지으며 봄을 맞이했다고 한다. 조선조 말기 한양 도성 내 정동의 배밭 동네는 미국 공사관이 자리 잡으면서 선교사들이 모여들어 이른바 공사관·선교사 거리가 됐지만, 낙산의 배밭은 그 풍경이 좋아 옛 선비들이 꾸준히 즐겨 찾았다.

한양의 서촌에는 우백호 인왕산이 있다면 동촌에는 좌청룡 낙산이 버티고 있다. 호랑이가 살았을 정도로 웅장한 인왕산에 비해 낙산의 지세가 허약해서인지 인근 동대문의 이름엔 ‘흥인지문’이라 하며 산맥처럼 생긴 지(之) 자를 추가로 넣는다든가 문 주위에 옹성으로 둘러싸게 하여 풍수 면에서 인왕산과 균형을 맞추고 있다.

낙산에서 가장 풍광이 빼어난 명승지가 신대(申台)였는데 조선조 신숙주의 손자로 영의정도 부러워한다는 대제학을 지낸 신광헌의 집이 있었던 곳이다. 낙산이 낙타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곳에는 낙타의 젖무덤같이 거대한 화강암 둥근 바위가 돌출해 있고, 약수가 젖처럼 흘렀다고 한다. 인근에는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후에 효종)과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집이 있어 왕기가 서린다는 소문도 있었다.

신대 부근 언덕 전체를 배꽃이 하얗게 뒤덮고 있었던 이화정 골짜기(梨花亭洞)가 우리 현대사에 등장한 것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 내외가 자리 잡으면서였다. 1945년 10월 이승만은 오랜 망명 생활을 끝내고 해방된 조국 땅에 첫발을 디뎠다. 그의 나이 70세(古稀)였다. 독립이 더 늦었더라면 망명지에서 생을 마감했을 수도 있는 나이였다.

이화장[사진=위키피디아]
이화장[사진=위키피디아]

이승만은 세종대왕의 맏형 되는 양녕대군의 후손으로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다. 김해김씨 어머니가 앞서 두 아들을 잃어 대가 끊어질 위기에 놓이자 40대임에도 북한산 문수봉 아래 암자에서 백일기도 끝에 얻은 귀한 자식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용이 안기는 태몽을 꾸고 낳았다 하여 승룡(承龍)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의 아버지는 범상치 않은 외아들을 잘 키워보겠다고 가족과 함께 상경하여 한성 남대문 밖 기우제 고개(雩守峴) 남쪽 지금의 도동으로 이사했다. 승룡은 늦게 성공할 사주라 하여 승만(承晩)으로 개명하고 우수현 남쪽에 거주한다고 하여 우남(雩南)으로 호를 지었다.

이승만은 입신양명의 유일한 길인 과거 합격을 목표로 이름 있는 서당에서 공부하면서 과거 시험 과목에 통달하여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그는 실력이 출중하여 소년등과의 기대 속에 나이를 속여 가며 과거를 보았으나 출제문제 유출 등 권문세도가 자녀에게 유리한 과거제도의 타락으로 번번이 낙방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마저 폐지되어 더 이상 응시할 수 없게 됐다.

이승만은 하는 수 없이 영어라도 배워 통역 등으로 생계에 보탬이 되고자 선교사가 세운 정동의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그가 배재학당에서 배운 것은 영어뿐만이 아니라 기독교 정신과 자유민주주의 사상이었으며 알게 된 것은 미국이라는 나라였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의 교사로 독립협회를 창설한 서재필의 영향으로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활동, 젊은 지도자로 부상했다.

젊은 시절 이승만[사진=이승만 기념관]

1899년 급진개혁 운동 참여와 갑오개혁을 주동한 박영효가 꾸몄다는 고종폐위 사건에 연루되어 한성 감옥에 갇히는 몸이 된다. 이승만은 감옥의 어려운 생활에서 배재학당 은사의 권유로 기독교(감리교)를 받아들이고 동료 죄수들에게도 개종을 권유했다. 그리고 명저 <독립정신>을 저술하고 영어를 보급하기 위해 영한사전도 집필했다.

‘조선이 제3국으로부터 부당하고 억압적 대우를 받을 경우 조약국인 미국은 이에 개입, 우호적 조정(amicable arrangement)을 행사함으로써 그 우의(friendly feelings)를 보여준다.’ 이는 1882년 5월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의 규정이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의 지나친 주권 훼손에 대해 미국 정부의 조정이 필요했다. 고종황제는 민영환 등의 추천을 받아 감옥에 5년 이상 중죄수로 복역 중이나 유창한 영어와 미국 선교사와의 인맥이 두터운 이승만을 풀어주어 밀사로서 미국에 파견했다.

1905년 8월 이승만은 하와이 한인 대표 윤병구와 함께 뉴욕 롱아일랜드에 있는 여름 백악관을 찾아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면담했다. 그들이 미국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으러 일본을 향하던 육군 장관 태프트가 이러한 비밀을 알 리 없는 하와이 한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윤병구에게 써준 소개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미 비밀조약으로 대한제국을 필리핀과 맞바꾸기로 결정하였기에 이승만 일행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승만은 조선의 독립은 일본과의 양자 관계뿐만이 아니라 국제적 다자문제로 관련국의 합의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터득했다. 국제법과 외교를 통해 그들을 설득하고 국제여론과 정세를 유리하게 이끌어 대처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필라델피아의 소극장에서 개최된 한인대표자대회에 참석했던 대표들의 기념사진(1919년 4월 14일~16일)[사진=이승만 기념관]

이승만은 국제법과 국제관계를 공부하기 위해 조지워싱턴대학에 2학년으로 편입해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하버드대학에서 석사 그리고 프린스턴대학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론>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의 독립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안은 국제법에 따른 중립 외교라는 것이 그의 논문에 녹아 있다. 당시 프린스턴대학의 우드로 윌슨 총장은 이승만을 가족 파티에 초대하는 등 장래 유망한 청년으로 아꼈다고 한다. 윌슨 총장은 후에 뉴저지주지사를 역임하고 미국 대통령이 되어 1차 세계대전 후 민족자결주의를 선언, 3.1 독립운동의 정신적 기반을 제공한 인물이다.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승만은 국권을 상실한 조국의 독립에 힘이 되고자 5년여 만에 귀국했다. 당시 절망적 국제정세 속에 한 줄기 희망의 빛으로 조선 젊은이들의 우상이 된 이승만은 YMCA 청년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독립정신을 일깨워주고 지방의 청년들을 위해 순회강연도 가졌다.

1911년 초대 총독 데라우찌 마사타케와 헌병 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는 항일세력을 탄압할 목적으로 총독 암살모의 누명을 씌워 애국지사 105인을 체포한 사건을 만들었다. 이어서 젊은 독립지사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자 이승만은 1912년 세계감리교 총회 참석을 명분으로 조국을 떠나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프린스턴대학 은사 윌슨 지사를 만나 조국의 독립에 대해 상의하고 그의 추천을 받아 미국의 영향력 있는 인사를 만나는 등 본격적인 독립외교의 시동을 걸었다.

한국인 최초로 미국 명문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윌슨 대통령을 위시하여 수많은 미국 지도자들과 탄탄한 인맥을 형성한 이승만은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천거되어 취임했으나 한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하와이를 거점으로 차세대 교육과 외교활동에 전념했다.

스위스 제네바 국제연맹회의 참석 당시 이승만(1933년)[사진=국가기록원]
스위스 제네바 국제연맹회의 참석 당시 이승만(1933년)[사진=국가기록원]

1931년 9월 일본의 관동군이 만주 전역을 점령하고 괴뢰국(만주국)을 세우는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중국 정부는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에 일본군의 부당함을 제소하자 국제연맹은 리튼 조사단을 파견했다. 리튼 조사단은 보고서를 작성하여 만주에서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했다.

일본에 대한 국제여론이 나빠지면서 1933년 국제연맹총회가 개최되는 제네바에는 국제연맹 회원국 외교관과 언론매체가 모여들었다. 외교의 천재 이승만은 만주에서의 일본만행을 비난하고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세계만방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임시정부로부터 국제연맹총회에 한국 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된 이승만은 제네바로 와서 각국 외교관을 접촉하고 언론매체를 만나는 등 적극적 외교활동을 수행했다. 그의 나이 환갑을 앞둔 58세 때였다. 그 무렵 국제연맹총회에서는 압도적 다수로 리튼 보고서의 권고안이 채택되자 일본 대표 마쓰오카 요스케는 준비해간 국제연맹 탈퇴 선언서를 낭독하고 퇴장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고 있었다.

1933년 2월 21일 바쁜 하루를 보낸 이승만은 체류 중인 호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자 했으나 이미 만원으로 빈자리가 없었다. 호텔 종업원이 한구석에 오스트리아 출신의 모녀가 식사하는 4인용 테이블을 찾아 합석 양해를 구하고 이승만을 안내했다. 그때 프란체스카 도너 양을 만나게 됐다.

프란체스카 도너

프란체스카 도너는 1900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사업가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나 부친의 사업을 잇기 위해 영국 유학을 한 이혼 경력이 있는 인테리 여성이었다. 프렌체스카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치고 있는 이승만에게 감동하여 국경과 25년의 나이 차를 초월한 사랑으로 결혼할 것을 결심한다. 1934년 그들은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모국어인 독일어뿐만 아니라 영어 및 불어에도 유창하고 타자와 속기에 익숙한 프란체스카는 국제무대에서 독립운동에 바쁜 이승만의 부인이자 비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일본이 국제연맹을 탈퇴, 고립을 자처하여 본격적으로 미국과 대립하면서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유럽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수도 워싱턴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미모와 능란한 사교로 워싱턴 정가의 유명인사가 된 프란체스카는 “여자는 말이 없어야 한다(Woman should be seen, not heard)”는 이승만의 뜻에 따라 소리 없이 내조를 했다고 한다.

이승만이 일본의 야망을 꿰뚫어 보고 미국에 대한 침략이 머지않았음을 경고하는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라는 영문 저서를 발간했다. 몇 차례 원고 수정 등 손가락이 부르터가면서 찍어낸 프란체스카의 타자에 의해 탄생된 것이다. 1941년 6월 책이 발간됐을 때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으나 수개월 후인 12월 초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경고 예언이 현실화되자 이승만의 정세 분석의 정확함에 모두 놀라고 책은 순식간에 베스트 셀러가 됐다.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식

이러한 배경으로 미국 내 여론 조성을 위해 한미협회(Korea-American Council)를 창설한 이승만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중국 충칭 소재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하고 한국을 미국의 우방국으로 편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의 노력이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에 보태져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의 선언문에 ‘일본에 의한 한국인들의 노예 상태(enslavement)를 기억하고 일본패망 후 적절한 절차를 거쳐(in due course) 한국이 자유 독립국이 되도록 결의했다’는 문구가 들어가 한국이 유일하게 국제적으로 독립을 보장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1945년에 들어와서는 소련에 유리하게 돌아가는 전후처리를 예상한 이승만은 얄타 비밀협약 폭로 등으로 미 국무성 실무관리들을 불편하게 했다. 강대국의 속셈을 간파하는 통찰력과 예지력을 가진 이승만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대소련 유화책이 한국인에게 ‘소련의 멍에’를 지워 줄 것으로 경고하고 이는 러일전쟁 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대일 유화책이 ‘일본의 멍에’를 지어주어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40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게 한 것을 상기시켰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드디어 조국이 해방됐다. 해외 독립지사들이 속속 귀국했지만 미 국무성은 이승만의 귀국을 방해하고 있었다. 하루가 급한 이승만은 국무성을 움직일 수 있도록 더글라스 맥아더 연합군 최고 사령관에게 연락, 도움을 청했다. 몇 년 전 이승만 내외가 사는 워싱턴 주택가에 로물로라는 필리핀 가족이 살고 있어 가족끼리 친교를 맺고 있었다. 이승만은 로물로로부터 맥아더 장군을 소개받아 서신 교환 등 교류를 해왔다. 로물로는 맥아더가 필리핀 군사 고문 시절부터 알고 지낸 그의 오랜 친구였다.

맥아더의 주선으로 이승만은 출국할 수 있게 됐고 귀국길에 도쿄의 사령부에서 군정청 존 하지 중장을 배석시킨 가운데 맥아더 사령관을 면담하고 1945년 10월 16일 그의 전용기로 귀국했다. 이승만은 조선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가 지인의 도움으로 돈암동에서 일시 지내고 다시 마포장으로 전전하는 등 거처를 수시로 옮겨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이러한 사정을 아는 지지자들이 돈을 모아 지금의 이화장을 마련해 주었다. 1947년 11월, 귀국 2년 만에야 겨우 안정적인 사저를 갖게 됐다. 이승만은 이곳에서 동대문구 제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국회의장을 거쳐 대통령이 됐다. 이승만 내외는 이화장을 떠나 하지 사령관이 일시 사용한 조선총독 관저를 ‘경무대’라고 고치고 입주했다.

제헌국회 개헌식(1948년 5월 31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한미동맹 등 많은 업적을 남겼음에도 장기 집권과 부통령 선거 부정으로 민심 이반을 겪으며 결국 1960년, 4.19 학생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공과(功過)가 뒤섞인 파란만장한 경무대 생활 12년 만에 이화장 사저로 돌아왔으나 한 달 후 하와이로 망명한 후 1965년 7월 19일 그곳의 요양원에서 9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까지 이승만의 병상을 지킨 프란체스카 여사는 그와 사별한 후 오스트리아 친정으로 돌아갔다가 1970년 영구 귀국하여 이인수·조혜자 양자 내외의 보살핌 속에 1992년 9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최근 지인의 안내로 대한민국 건국의 산실이었던 이화장을 방문하면서 워싱턴 포토맥 강변의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마운트 버넌 사저를 찾아갔을 때가 생각났다. 조지 워싱턴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1789년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가 8년 후인 1797년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났다. 당시 대통령 임기 제한 규정이 없어 미국인들은 워싱턴이 유럽의 왕처럼 종신 대통령이 되어 줄 것을 간청했지만 워싱턴은 듣지 않고 마운트 버넌 사저로 돌아와서 여생을 보냈다. 워싱턴의 결단은 그 후 미국 대통령의 3선 이상 연임을 통한 독재 정권의 출현을 막았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경우에는 6.25 전쟁을 겪으면서 북한의 재침 우려와 전후복구 등 당시의 불가피한 국내외 사정을 고려해야 하고 그의 33년간 해외에서 독립운동의 업적과 재임 중 한미동맹 등 자유대한민국의 초석을 놓는데 기여한 공(功)은 그의 정치적 허물을 덮고도 남는다고 한다. 다만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귀국이 어렵게 된 충격 속에 고국을 그리면서 보낸 비참한 말년을 떠올리면 과잉 충성 측근들이 억지 논리로 통과시킨 사사오입 개헌(중임제한 철폐)을 거부하고 1956년 예정대로 배꽃이 만발하는 이화장으로 돌아와서 프렌체스카 여사와 여생을 보냈다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 없는 생각이 들었다.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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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영 2023-04-08 19:13:48
참 저속하다. 참으로 양심없다. 참으로 뻔뻔하다 . 글 접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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