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칼럼] ‘이아고’를 위하여
[대림칼럼] ‘이아고’를 위하여
  • 전은주 연세대학교 강사
  • 승인 2023.04.18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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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간(離間)은 두 사람 사이를, 개인과 전체 구성원과의 사이를 틀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이간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이를 ‘이간질’이라고 한다.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이간꾼’이 바로 ‘이아고’일 것이다. 이아고는 영국의 위대한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의 하나인 <오델로>에 나오는 ‘이간꾼’의 이름이다.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은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를 밑바닥에 깔고 있다. 그 인간관계 중에 가장 기본이 바로 가족이다. <햄릿>이 삼촌과의 문제로, <맥베스>는 가족 관계로, <리어왕>도 부녀 사이의 문제로 비극이 일어난다. <오델로>는 이간질을 당한 남편이 사랑하는 아내의 정절을 의심하여 생긴 비극이다.

구태여 구분하자면 앞의 3개 비극이 혈연으로 이루어진 인척 관계에서 파생된다면, <오델로>는 사랑으로 결합한 부부 사이에서 발생한다. 이간이 사랑마저 파괴하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혈연이 가장 질긴 인연이라고 하지만 ‘남녀 간의 사랑’이 그 관계를 뛰어넘기도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 왜 가족 간의 문제에서 일어났을까? 가족은 가장 익숙한 관계이기 때문에 가족 사이에서 벌어진 비극은 그만큼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수 있다. 가족이 부정당하는 사건은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준다. 물론 보통 가족은 웬만한 허물도 감싸 안으며 상처를 입어도 풀어나간다. 그렇지 않을 경우 엄청난 파장으로 삶 자체를 파국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에 비극이 된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오델로>에서는 그의 기수인 이아고의 시기 질투에 의해 찬란한 명예나 아리따운 사랑이 속절없이 무너진다. 이아고는 질투심 때문에 오델로 장군의 아내 데스데모나와 부관 카시오가 서로 정분이 난 것처럼 꾸며, 그를 순식간에 허물어뜨린다. 오델로는 아내의 정절을 의심하게 되어 결국 아내를 목 졸라 죽이고 자신도 죽고 만다.

오델로는 왜 이아고의 이간질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사람들이 충언과 이간을 쉽게 판별하지 못하듯이 오델로도 이간질에 말려들어 사리 분별조차 하지 못했다.

<오델로>의 등장인물을 살펴보자. 오델로는 전쟁터에서 가장 용맹스럽고 현명하게 군사를 다루어 전투에서 늘 승리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당당한 젊은 장군이다. 그는 자신의 용기나 굳센 의지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아고의 교묘한 이간질을 통해, 끓어오르는 질투심과 자신의 상상이 꾸며낸 아내의 불륜에 치를 떤다. 결국 흔히 말하는 정의감이나 인간에 대한 믿음, 아내에 대한 사랑마저도 부질없이 무너져버려 급기야는 아내를 목 졸라 죽인다.

그의 아내 데스데모나는 과연 바람둥이 기질이 있었을까? 아니다! 그녀의 성격은 명랑하고 쾌활했다. 그녀는 매사 거침없이 살았기 때문에 자신이 이아고가 꾸민 함정에 빠진 줄도 모르고, 부관 카시오를 위해 열심히 변명하기도 한다. 물론 남편의 태도가 변했음을, 이아고가 모든 술책을 꾸몄음을 전혀 눈치채지도 못하는 천진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이아고는 극 중의 모든 인물이 자신을 정직하고 분별력이 있으며, 성실한 사람으로 평가하게 했다. 그러나 뒤에서는 몰래 오델로와 데스데모나의 관계를 파멸시키기 위해 교묘한 말솜씨와 억측을 불러일으킬 만한 여러 술책을 쓴다.

왜 그럴까? 그는 세상에 아름답고 화애로운 고귀한 삶, 사랑스럽고 숭고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인식을 지녔을 것이다. 그것을 악마적 성향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러므로 자신도 모르게 이간질을 하는 사람은 이아고와 같은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 셰익스피어를 지금도 위대한 작가라고 칭송할까? 그의 작품에 구현되는 이러한 비극이 4백 년 전에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들을 탄탄한 희극 구조와 섬세한 심리 묘사와 감동적 결말 등을 통해 형상화하여, 그것이 어느 시대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인간적 비극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재현해놓았다. 인간은 욕망 때문에 바르지 못한 선택을 하고, 이간 때문에 가족이나 단체를 붕괴시키는 비극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외치고 있다.

이간에 대한 이야기는 셰익스피어만 한 것이 아니다. 세계 역사의 곳곳에서 이간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도 많이 등장한다. 물론 이 글에서는 이간의 부정적인 측면을 말하지만, <손자병법> 모공편(謀攻篇)에는 싸우지 않고도 적을 궤멸시키는 이간책이 긍정적 전술로도 나온다. 아군의 피해가 없이, 적대국의 내부나 동맹국 사이가 이간질에 의해 붕괴하여 자멸한다면 그것보다 더 바람직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조선상고사>에 나오는 백제의 멸망에 관한 이야기에도 이간의 경계가 나온다. 백제의 신하 임자는 무녀 금화를 국가 운명을 예견하는 능력이 있다고 의자왕에게 추천한다. 무당 금화는 의자왕에게 “충신 형제를 죽이지 않으면 망국의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의자왕은 김유신이 밀파한 금화의 이간질에 휩싸이고 만다. 그는 그 말에 대해 오랫동안 골똘히 생각하다가, 신하인 성충과 윤충의 이름에 충(忠)이 들어 있음을 알고 이들을 없앴다. 국방을 지키던 이들이 죽자 당나라 군대를 막지 못하고 백제는 멸망하고 만다.

예나 제나 우리는 이간질에 속아 고통스러워하고 서로 미워하며 조직조차 붕괴시키기도 한다. 전술적으로 이간을 쓰는 것이 아니라 친한 관계에서, 친목 단체에서도 이간으로 서로 헐뜯고 싸우다가 궤멸당하기도 한다.

이런 이간질을 당하지 않는 비법은 없을까? 불교에서는 사람이 지닌 10가지 나쁜 습관 중에, 말로 짓는 ‘나쁜 버릇’(惡習)을 4가지로 구분하고, 모든 인간은 좀처럼 그 습관에서 자유롭게 될 수 없다고 한다. 즉, ‘거짓말하기(妄語)’, ‘욕하기(惡口)’, ‘꾸며 말하기(綺語)’, ‘이간질하기(兩舌)’이다.

그중에 이 글에서 말하는 ‘이간질’은 두 사람을 서로 틀어지게 만들거나 가족이나 조직의 내부 분열을 불러와 붕괴시키는 부정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어떤 공간(조직이나 물질 등)을 없애는 힘을 지니고 있다.

종교에서는 모든 사람이 기본적으로 이런 나쁜 습관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크고 작은 차이는 분명히 있다. 그래서 방심하면 쉽게 이간질에 말려들고 만다. 오히려 이간의 말을 친절하고 다정한 말로, 진실한 말로 착각하기 쉽다. 이간의 말들은 자신의 시기 질투심을 숨기기 위해 늘 정당함을 주장하며 상대의 호감을 사려고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간질을 가려내기란 몹시 어렵다.

오죽하면 그 용맹한 오델로가 이아고의 이간질에 넘어가 아내도 죽이고 자신도 자결했겠는가? 이아고는 다른 사람을 간교하게 조정하고,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가장 취약한 부분을 건드려 자신의 말에 진실성을 부여한다. 이로써 상대의 의심에 불을 붙이고, 질투에 눈멀게 만든다. 의자왕도 마찬가지로 무녀 금화가 한 말에 걸려들어, 금화가 말한 “말이 충신이지 실제로는 충신이 아니다”는 말에 자신을 잃고 만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고, 말이 아니면 듣지 말라!” 옛 성현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길이 바른길인지, 어떤 말이 바른말인지 잘 모른다. 쉽게 자신이 가는 길을 바른길이라고 보고, 자신이 듣는 말을 바른말이라고 판단해 버린다. 길에 대한, 말에 대해 성찰을 해도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그걸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면 뭐가 문제일까?

그래서 옛 성인들은 우리를 위해 두 가지 교훈을 마련해 두었다. ‘이아고 감별법’이라고나 할까?

첫째,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그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은 듣지 말라! 그 말이 비록 상대를 칭찬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말에는 반드시 허점이나 단점도 들어 있을 수 있다. 사람의 무의식에는 시기 질투의 요소가 들어 있어서 오로지 칭찬만 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뿐만이 아니라 듣는 사람도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을 듣기 때문에 오히려 그 말 뒤에 숨은 비난과 단점을 새겨듣거나, 없는 말도 상상으로 지어내어 다르게 듣기도 한다. 그러므로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그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은 듣지 않아야 한다.

둘째, 편 가르기를 하는 말은 듣지 말라! 듣는 이는 말하는 이의 조건을 따져 듣지 않는다. 말하는 이가 슬쩍 조건을 바꾸면 앞말과 뒷말이 서로 달라도 같은 조건으로 듣고 만다. 그래서 제 말의 정당성을 믿게 하려고 편을 갈라 어느 한쪽의 관점이 정당한 것처럼 위장한다. 그때 사용하는 논리는 앞뒤가 맞지 않아도 조건이 바뀐 것을 모르면 분별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편을 갈라, 자신의 편이 옳고 상대가 그릇되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 드는 말은 듣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대부분 그 자리에 없는 다른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편 가르기를 하면서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우리의 무의식에 있는 나쁜 습관이 발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앞의 두 가지 상황에서는 듣기를 멈추어야 한다.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 이간에 동조하여 이간의 한편이 되거나, 반대로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하여 반대편에 서도 이미 이간에 휩쓸려 함께 이아고가 되고 만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상대의 이간질을 단죄하려는 것도 이미 이아고가 되어버린다는 뜻이다. 이간 경계를 흙탕물로 비유하면, 그 이간에 맞장구를 치거나 맞서 싸우거나 해도 모두 흙탕물을 뒤집어쓴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늘 경계하여 애초에 흙탕물을 피하는 게 최선이다.

그러나 살다가 보면 이미 흙탕물에 들어서 있다는 걸 알았다면 어쩔 것인가? 그 경우, 자기성찰이 필요하다. 자신이 이아고인지, 이아고의 이간질을 듣는 오델로인지, 그걸 보고 있는 구경꾼인 또 다른 이아고가 되어 분개하고 있는지 알아차려야 한다.

그 ‘알아차림’이 바른길을 보여줄 것이다.

필자소개
1986년 도문 양수 출생, 연변대학교 문학석사, 연세대학교 문학박사, 현재 연세대학교 시간 강사,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객원연구원, 재한조선족작가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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