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기고] 가을이 성큼 내 곁으로
[해외기고] 가을이 성큼 내 곁으로
  • 황현숙(칼럼니스트, 호주 퀸즐랜드)
  • 승인 2023.04.24 16: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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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열기를 한껏 내뿜든 한여름의 햇살도 이젠 슬며시 꼬리를 사리며 자연의 법칙에 밀려나고 있다. 빛살이 스산하게 느껴지는 계절의 변화가 민감하게 피부에 와 닿는 4월의 끝날이다. 참으로 무더웠던 날들에 많이 지치기도 했지만, 유난히 파란 하늘과 뭉실하게 떠 있는 하얀 구름 뭉치를 보며 위로를 받기도 했다. “여자는 나이와 함께 아름다워진다”라는 어느 시인의 글이 있지만, 나이가 들수록 내면의 아름다움보다 육신의 변화를 먼저 느끼게 된다. 몸의 여기저기에서 보내는 불편한 신호는 나이가 들어감을 스스로 깨닫게 만든다.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만큼 나 자신도 한 발자국씩 뒤로 밀려 나가는 것이 삶의 이치가 아닐까 싶다. 그냥, 가을이 성큼 내 곁으로 다가와 버렸다. 

한국에서 4월 5일은 식목일이며, 중국풍습에서는 일 년 24절기 중 가장 청명하고 따뜻한 봄날이며 중국의 4대 전통명절의 하나인 청명절(Qingming Festival)이다. 이 축제는 중국에서 그리고 전 세계의 중국인 커뮤니티 구성원들 사이에서 경축하는 날이며, 주요 활동은 조상의 무덤을 청소하는 것이다. 한국과 중국은 전통적으로 유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후손들은 조상숭배와 제사를 아주 중요한 덕목으로 삼고 있다. 청명절의 유래는 춘추전국시대 진나라 군주 진문 공이 처음으로 한식 절 다음날을 청명절로 정했다. 그때부터 청명 날에 조상들에게 제를 올리고 찬 음식을 먹는 풍습이 생겨났다. 중국의 여러 지방에서는 청명절에 찬 음식을 먹는 풍속이 지금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청명절이 현재를 살아가는 자손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집안 행사인지 최근에 다녀온 여행을 통해서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청명절 날짜에 맞추어서 사돈집 가족들과 함께 말레이시아, 시부(Sibu)에 있는 안사돈의 묘지에 다녀왔다. 몇 년 전에 급작스러운 사고로 돌아가신 안사돈은 50대 중반의 멋쟁이 전문직 여성이었다. 비보를 들었던 그 날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게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는 해뜨기 전, 이른 새벽부터 성묘를 가는 차량으로 도로가 가득 메워져서 경찰들이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새벽 5시에 출발한 차는 한 시간여 산속으로 길을 달려서 집안의 묘소에 도착했다.

대리석으로 조성한 어마어마한 조상 묘의 규모에 먼저 놀라고, 옆의 묘소에 온 다른 조문객들이 큰 깡통 안에서 종이돈을 태우는 짙은 연기에 두 번째 놀래며, 불꽃을 터트리며 청명절을 축하하는 사람들의 요란한 제례에 세 번째로 놀라게 된다. 다행히 사돈네 가족들은 조용히 촛불과 꽃다발을 바친 후에 고개를 깊이 세 번 숙이며 명복을 비는 의식을 치렀다. 익숙지 않은 다른 조문객들의 축하식을 보며, 요란한 제사의식도 가능하구나 하는 새로운 경험을 했다. 중국문화와 한국문화 사이에 비슷한 부분도 많이 있지만, 체험을 통해서 서로의 다른 모습과 풍습을 엿볼 수 있었다.

눈 부신 햇살이 퍼지며 안사돈의 비석을 비추는데, 박사모를 쓰고 웃고 있는 그녀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앞날의 장례를 미리 준비해 놓은 바깥사돈의 텅 빈 묘소가 있었다. 산자의 무덤을 미리 보는 마음은 결코 편치않았으며 나의 미래가 겹쳐 보이는듯했다. 생전에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했던 안사돈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내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혔다. 언젠가는 다시 만나지겠지라는 내 나름의 의미가 담긴 눈물이 아니었을까. 자녀들은 이미 성공한 프로 직업인의 길을 걷고 있지만 함께 나누지 못하는 슬픔도 큰 것 같다. 엄마를 그리워하며 묘비 앞에서 울먹이는 자녀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나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언제 이곳에 다시 올지 모를 작별 인사를 조용히 속으로 되새겼다. “안녕히, 편안하게 휴식하세요”라고.

이제는 앞으로 다가올 시간 동안, 계절을 즐기며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삶의 여유가 있을 때 남기는 기억이 더 아름다울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풍족함보다는 부족함을 느낄 때, 그리고, 외로움을 느낄 때, 가슴으로 온기를 전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베풀고 나누는 삶이 교만이 되지 않도록 할아버지 다람쥐가 손자 다람쥐에게 해주는 충고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돕는다거나 자선을 베푼다는 표현은 교만을 불러오는 것이야, 나누는 마음을 가졌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내 것을 덜어 나눈다고 했을 때 신이 보기에도 좋은 것이야.”.

나는 많은 것들을 좋아한다. 무엇을 좋아할 수 있는 감정, 그 무엇엔가 집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인생의 멋이 될 수 있다. 어떤 것을 좋아하거나 사랑하지 않고는 삶의 존재와 재미가 가능하지 않으므로. 섣부른 감정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진실로 삶을 사랑하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용기를 이 가을에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

황현숙(칼럼니스트, 호주 퀸즐랜드)
황현숙(칼럼니스트, 호주 퀸즐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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