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87] 조선백자와 로댕 그리고 수성못과 핫타댐
[유주열의 동북아談說-87] 조선백자와 로댕 그리고 수성못과 핫타댐
  •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3.05.09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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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망우리 공동묘지에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안창호, 한용운, 방정환 등 일제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에 헌신한 분들이 잠들어 있다. 그런데 그중에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891-1931)라는 일본인이 있다. 그는 조선총독부 산림과 직원으로 한반도 조림사업에 앞장섰고 조선의 서민문화를 사랑했다.

수년 전 지인의 안내로 그의 묘소에 가보았다. 묘비명에는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이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매년 4월이면 그의 기일에 맞추어 한일 양국의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추모식을 거행한다. 금년은 4월에도 92번째 추모식을 가졌다고 한다.

다쿠미의 출신지가 필자가 한때 근무했던 도쿄한국대사관에서 멀지 않은 야마나시(山梨)현으로 당시 그곳에 출장 가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1868)이라 하여 260여 년간의 에도(도쿄)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 중심의 신정부가 들어서기까지는 일본인들 중에 한반도에서 건너온 조선인(도래인)은 존경받았다고 한다. 조선은 문명과 문화의 나라로 여겨 배움을 원하는 일본인들은 스승으로 삼고자 했다는 것이다.

아사카와 다쿠미(왼쪽)와 형 노리다카 다쿠미
아사카와 다쿠미(왼쪽)와 형 노리다카 다쿠미

조선왕조가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단이었던 조선통신사 행렬이 지나가면 그들이 머무는 숙소를 찾아가 글을 받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대단했다.

야마나시현의 어느 마을에는 조선에서 집단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조선 출신임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동구밖에 ‘우리 조상은 조선에서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건너와 일본을 풍요롭게 하는데 기여했다’라는 내용의 비석을 세웠다. 마을을 드나드는 외지인은 부러워하고 마을 사람들은 뿌듯한 긍지를 가졌다고 한다.

메이지유신 후 그 비석이 돌연 없어졌다. 학교에서 조선은 야만인의 나라로 일본이 정벌해야 한다고 가르치자 조선 출신임이 창피해진 자녀들의 성화에 그냥 둘 수 없어 어딘가 묻어버렸다고 한다. 그 무렵 이러한 분위기를 알고 있던 근세 일본의 지도자 한 사람이었던 가쓰 가이슈(勝海舟)는 일본이 서양문물을 먼저 배워 우쭐해져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본인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조선을 업신여기는 것은 최근의 일로 옛날에는 일본 문명의 근원은 모두 조선에서 건너왔다. 조선 사람은 우리의 스승이었다.”

아사카와 형제가 찾아낸 도자기
아사카와 형제가 찾아낸 도자기

아사카와 다쿠미가 조선에 온 것은 그의 형 노리다카(浅川伯教, 1884-1964)의 영향이 컸다. 다쿠미가 농림학교를 다닌 것과 달리 형 노리다카는 사범학교를 졸업하여 소학교 선생을 하고 있었다. 노리다카는 고향 야마나시현의 중심도시 고후(甲府)에서 교회 관계로 알게 된 지인이, 조선의 골동품을 수집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의 수장품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때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조선에 대한 동경심이 생겼다. 노리다카는 1913년 경성(서울) 남산소학교로 부임, 조선에 첫발을 내디디게 된다.

노리다카는 조선에 살면서 청자뿐만이 아니라 서민들의 생활 용기인 백자의 매력에도 빠지게 된다. 그는 일본에 알려진 것과 다른 조선의 매력적인 도자기 문화를 보여주고 싶어 영림서에 근무 중인 동생 다쿠미를 불렀다. 다쿠미는 조선총독부 산림과 임업시험장 근무를 지원하여 1914년 조선으로 건너왔다. 그는 본업인 양묘연구와 조림사업에 종사하면서 형과 함께 도요지(가마터)를 찾아 조선의 백자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됐다.

노리다카는 사범학교 재학시절부터 품어온 조각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틈틈이 조각 실습을 하면서 세계적인 프랑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을 흠모하고 있었다. 어느해 로댕의 작품이 일본으로 건너와 도쿄 인근 치바(千葉)에 사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 교수 집에 보관 중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야나기 무네요시
야나기 무네요시

무네요시는 해군 제독을 지낸 아버지와 일본 유도의 창시자로 아시아 최초의 IOC 위원을 지낸 외숙부를 둔, 명문 집안 출신으로 도쿄제국대학 미학과를 졸업한 미술평론가였다. 그는 1차 세계대전 후 인간의 존엄성 회복을 지향하고 자기 개성을 발휘하는 서양예술의 새로운 사조의 영향을 받아 친구들과 함께 시라카바(白樺, 자작나무)라는 동인지를 발간했다.

무네요시는 동인지에 로댕 탄생 70주년의 특집 게재를 계기로 로댕과 연락했다. 그는 로댕이 동갑내기 클로드 모네 등이 수집하던 일본 에도시대 풍속화 우키요에(浮世絵) 몇 점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우키요에 30점을 송부했다. 로댕은 감사의 표시로 자신의 브론즈 조각 3점을 보내와 무네요시는 자택에 일시 보관하게 된 것이다.

노리다카는 로댕의 작품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 동생 다쿠미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무네요시를 찾았다. 그때 방문 기념 선물이 조선의 백자였다. 무네요시는 처음으로 접한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 조선인의 예술적 감각을 높이 평가하고 조선의 민간공예(민예)에 큰 관심을 갖게 됐다. 조선백자를 통한 아사카와 형제와 무네요시의 우정이 두터워지면서 무네요시는 수차 조선 방문으로 조선의 민예를 연구하고 일본에서 민예 운동을 주장하면서 선도한다.

백자의 사람
백자의 사람

조선인보다 더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으로 알려진 무네요시는 조선의 3·1만세 무력 진압에데 대해 “반항하는 조선인보다 탄압하는 일본인이 더 바보스럽다”면서 비판했다. 그는 일본이 새로운 총독부 건물을 조선왕조의 정궁 경복궁 내에 짓는 잘못을 지적하고 ‘아, 광화문이여’라는 글을 통해 광화문 철거를 공개적으로 반대하자 일본 총독부는 철거를 중지하고 이축 보존했다.

무네요시는 조선 민족의 뛰어난 민예품을 보존하기 위해 아사카와 형제와 함께 경복궁 내에 ‘조선 민족 미술관’을 설립했다. 엄혹한 일 제치하에서 뜻 있는 일본인의 요구가 받아들여진 것은 당시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해군 출신으로 무네요시의 돌아가신 아버지의 후배였기에 가능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쿠미의 반생을 그린 휴먼스토리 <백자의 사람>이라는 영화를 보면 다쿠미의 동료 이청림이 리어카를 끌고 도요지 또는 가정집을 찾아다니며 생활 백자를 수집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쿠미는 그간 수집한 것을 조선 민족 미술관에 모두 기증했고 후에 조선이 해방되면서 귀국하는 노리다카도 자신의 소장품을 모두 이 미술관에 남기고 떠났다.

다쿠미는 한반도의 조림사업과 잣나무 묘목에 대한 애정으로 어느 날 비를 맞으면서 묘목 관리를 멈추지 않아 감기가 급성폐렴으로 발전, 40세 한창 일할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언에 따라 시신은 당시 임업시험장이 있는 청량리에 매장됐다가 나중에 망우리 공동묘지에 이장됐다. 노리다카는 동생이 못다 한 조선백자 연구를 계속하여 700여 개소의 도요지를 찾아 도편(陶片)을 수집·연구했다. 1946년 귀국하여 일본에서도 조선 도자기 연구를 계속하다가 1964년 8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서울에서 아사카와 다쿠미의 추모제가 열렸던 그 무렵 대구에서도 미즈사키 린타로(水崎林太郞, 1868-1939)라는 일본인 개척 농민의 추모 모임이 있었다.

미즈사키 린타로
미즈사키 린타로

린타로는 일본 기후(岐阜) 사람으로 기후 시장을 역임했고 중의원 선거에서 낙선하자 뜻한 바가 있어 46세 때 개척 농민 자격으로 대구에 왔다. 그는 대구 수성평야에서 원예 농장을 했는데 홍수와 가뭄의 피해가 늘자 치수와 농업용수 확보 목적으로 조선총독부에 댐(제방) 건설을 요청하면서 대구시민과 수리조합을 만들어 수성못 축조에 앞장섰다. 1925년 수성못(저수지) 완성으로 황야처럼 방치됐던 수성평야가 옥답으로 변했고 수성못은 대구시민의 휴식처이자 관광명소가 됐다.

린타로는 수성댐 완성 15년 후인 1939년 대구에서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장례를 조선의 전통에 따라 치루어 줄 것과 수성못이 보이는 곳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와 함께 수리조합을 결성, 수성못 축조에 공헌한 대구시민이 그의 유언에 따라 지금의 위치에 묘지를 만들고 관리하여 왔다. 매년 수성못이 완성된 4월이 되면 대구시민뿐만 아니라 린타로의 고향 기후 시민들이 참여하여 그를 기리는 추모제를 열고 있다.

오래전 타이페이 여행에서 일본의 어느 타이완 총독의 묘지가 타이페이 시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타이페이의 흙이 된 일본 총독이 누군가 하고 이번 기회에 찾아보았더니 러일전쟁 당시 군 첩보(스파이) 활동으로 일본의 승리에 공헌했고 그후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통감 아래에서 경무총장으로 악명이 높았던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1864~1919)였다.

모토지로는 후쿠오카 출신으로 일본 육사 및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1902년 러시아 주재 일본대사관으로 근무했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의 일본대사관이 중립국인 스웨덴으로 이전됐다. 모토지로는 영일동맹에 근거하여 영국의 비밀정보부 요원과 협력해 난공불락이었던 뤼순(旅顺) 요새의 도면을 확보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아카시 모토지로와 타이페이에 있는 무덤
아카시 모토지로와 타이페이에 있는 무덤

모토지로의 첩보 활동의 또 다른 업적으로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를 붕괴시키고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이야기가 전해진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운동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을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나 레닌이 이끄는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에 일본의 자금 지원을 제안했다. 레닌은 조국을 배반하는 것이라고 거부하자 모토지로는 “당신은 타타르 사람인데 타타르를 정복 지배하는 로마노프 왕조를 무너뜨리는 것이 어찌 조국에 대한 배반이 되겠느냐”고 설득했고 그를 지원결국 러시아 혁명의 성공을 도왔다고 한다.

그 후 모토지로는 조선 통감부 근무 시 맺은 데라우치 마사타케와의 인연인지 마사타케가 내각 총리로 영전되자 대장으로 진급하고 1918년 7대 타이완 총독으로 임명 발탁됐다.

타이완 총독이 된 모토지로는 심기일전 타이완의 철도 전력 등 인프라 부설 작업과 타이완인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노력을 쏟았다. 특히 당시 토목 기술자 핫타요이치(八田與一)가 준비한 타이완 남서쪽 자난(嘉南) 평야의 한발 홍수 대책으로 핫타 댐 건설과 우산터우(烏山頭) 저수지를 통한 관개수로 공사를 추진했다. 모토지로는 거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수리 토목사업 완성을 위해 자신의 인맥을 이용 본국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아냈다.

이러한 모토지로가 타이완 총독 역임 후에는 본국의 내각 총리로 영전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1919년 10월 공무로 일시 귀국 중 해상 여객선에서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스페인 독감에 걸렸다. 병세가 심각해 도쿄로 가지 못하고 고향 후쿠오카로 돌아가 55세로 사망했다. 그는 자신의 시신이 타이완에 뭍혀 혼이라도 타이완의 발전을 돕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모토지로는 타이페이시 외곽에 있는 묘지에 매장되어 타이완의 흙이 된 유일한 일본 총독이다. 그의 사후 핫타요이치에 의해 댐 건설과 관개수로 사업이 완성됐다. 요이치의 이러한 공로로 그는 일본-타이완 간 우호의 상징으로 남았다고 한다.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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