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성 칼럼] 아렌트와 요나스, 칼리닌그라드와 사할린 사이– ‘친일’과 ‘반일’, ‘평시’와 ‘전시’의 계조(階調)
[정대성 칼럼] 아렌트와 요나스, 칼리닌그라드와 사할린 사이– ‘친일’과 ‘반일’, ‘평시’와 ‘전시’의 계조(階調)
  • 정대성 문화칼럼니스트
  • 승인 2023.05.30 14:04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학가 이무영 재평가되어야… ‘북방정책’에 대한 성찰도 뒤따라야

5월 1일 <어린이 해방 선언>이 올해 100주년을 맞았다. 어린이 해방운동 하면 사람들은 방정환을 상기하고, 마해송에 대한 언급은 피하는 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웅’ 방정환은 ‘민족주의 신화’에 적극 소환되지만, 마해송은 ‘친일파’ 논란의 불편한 진실로 인해 기억의 뒷전에 미루어져 있다.

4월 혁명 기념일인 4월 19일은 ‘해군의 어머니’ 홍은혜 여사의 기일이다. 국립현충원에서 작게 열린 추모 행사에 갔다왔다. 그리고 이틀 뒤 23일이 ‘농민문학의 선구자’ 이무영의 기일이라, 충북 음성에 있는 그의 고향 집터에서 매년 열리는 ‘무영제’에도 다녀왔다. 이무영은 1960년 4.19 혁명 때 교수 데모에 참가 후 급사했단 설도 있지만, “교수 데모에서 이무영 교수 모습은 찾아보질 못했다”는 증언도 있다.

한국 근현대 문학사에서 마해송과 이무영에 대한 ‘친일파’ 논란의 수위는 묘한 차이가 있다. 마해송은 혐의 정도로 치부되고, 이무영은 ‘확신범’으로 비판받는다. 이른바 ‘친일파’를 거론할 때 다음과 같이 나뉜다. A1) 체제 순응적으로 자연스럽게 ‘친일’로 살았던 일반 대중, A2) 과거 특권층으로 기득권 세력이 된 귀족이나 양반, A3) 중인이나 하층 출신이면서 지식인으로 서양문물의 수용이나 근대 민족주의의 창출 노력으로 근대 체제에 동조한 세력, A4) 전시 체제하에서 어쩔 수 없이 동원당한 부류, A5) 전시체제에 스스로 적극적으로 협력한 자, A6) 무력으로나 외교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거나 저항한 자, A7) 독립운동을 하는 척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거나 이중간첩으로 일한 자이다.

이런 식으로 분류한 다음, 해방 후에 B1) 사과한 자, B2) 변명한 자, B3) 침묵한 자, B4) 신분제적 특권을 빼앗겨 시민으로 살게 된 자, B5) 체제 순응적으로 자연스럽게 ‘반일’로 살게 된 일반 대중, B6) 독립유공자나 그 가족, B7) 자신의 행적을 미화하고 유공자인 척하는 자로 나뉜다.

하지만 각각을 구별 짓는 경계선은 애매한 부분도 있고, 죄의 경중을 따져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래도 그 수가 제일 많은 A1이자 B5에 속하는 일반 대중은 그 수가 비교적 적은 A2, A3, A4, A5를 ‘친일파’로 이름하여 단죄해왔다. 마해송, 이무영 등 근대 작가들은 대부분이 A3, A4, A5이자 B1, B2, B3에 속한다. 계몽주의 시대에 작가, 문인, 문학자는 ‘대중’과 다르고 그들을 ‘지도’한다고 자처했기 때문에, 포스트 계몽주의인 현시대에는 ‘대중’으로부터 역습을 받는다. 여기에 ‘대중의 반역’, 나아가 그 대중의 횡포가 두드러지게 된다. ‘대중의 시대’는 양면성을 띤다. 한편으로는 각 개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가장 진보된 형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횡포가 극에 달해 과거 봉건시대의 폭군 위치에 ‘대중’이 군림하는 야만적 형태가 된다.

대중과 지식인이 공동전선을 펼친 경우도 있었다. 4월 혁명이다. 수유리의 4.19 묘지 옆에 있는 호텔의 객실로 복면 기자 ‘TK생(生)’의 실제 필자인 고 지명관 교수를 만나 봬러 여러 번 간 적이 있다. 필자는 일본 동경여자대학교에 있던 지명관 교수 정년 퇴임식에 참석한 인연도 있다. 교수님이 한나 아렌트를 열강하신 모습도 생각난다.

칸트의 고향, 괴니히스베르그에서 태어난 한나 아렌트는 나치스의 유대인 대학살을 피해 프랑스, 미국으로 망명한 독일계 유대인이자, 전체주의를 비판한 철학자다. 그녀에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문제작이 있다. ‘악의 진부함=평범성’이라는 유명한 개념을 도출해냈을 뿐더러, 유대인 평의회의 나치에 대한 협력, 아이히만에 대한 이스라엘의 범법성도 지적했다. 그녀는 이 책을 쓴 탓에 유대인 공동체나 친구들로부터 고립됐다. 최근에는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속았다는 설도 제기됐지만, ‘악의 평범성’은 여전히 중요한 개념이다. 희생자인 유대인, 포퓰리즘적 대중 안에도 죄가 도사리고 있었던 즉, 그것을 한국사에 대입시킨다면 희생자인 한국인 안에도 죄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 자명하다. 아렌트는 나치의 악을 부각하면서도, 동시에 희생자로서의 유대인을 미화하는 예루살렘 법정의 태도와 논법, 그리고 포퓰리즘을 비판했다.

그녀는 당시 독일의 철학계의 거두, 하이데거의 애인이었다고 한다. 실존주의 입장에서 서양문명의 폭주를 우려하던 하이데거는 나치스의 사상과 행동이 서양문명에 대한 안티테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히틀러를 지지했다. 그런 친나치 행적 때문에 2차 대전 이후 5년간 활동을 금지당했고, 제자들은 그와 거리 두기를 했다. 그런데도 아렌트는 스승의 철학을 발전시키고 ‘악의 평범성’ 개념을 제기한 것이다. 참고로, 하이데거와 달리 카를 야스퍼스는 나치스의 탄압으로 교수직을 박탈당했다가, 전쟁 후에 복권됐다.

아렌트와 같이 하이데거의 제자이면서도 반나치 전선에 참여한 한스 요나스는 아이히만 논쟁을 둘러싸고 아렌트와 절교했다가 다시 화해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우정과 철학적 대화를 이어가며 함께 현대 철학의 태두가 됐다. 요나스는 독실한 유대교 집안에서 자라서 그런지, 인간의 생명 자체를 중시하며 현대 과학을 견제하는 사상을, 아렌트는 현대 과학을 비판하여 세계의 또 다른 새로운 연대, 혁명을 꿈꾸는 사상을 각각 길러 나갔다. 나치의 과학기술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면서도, 미국의 원폭 사용과 냉전 시대의 핵무기 경쟁과 핵전쟁의 공포에 경종을 울린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나치스와 철학사의 관계에서 이른바 ‘친나치’, ‘반나치’라는 것이 문제가 되지만, 그렇다고 그런 잣대로 철학사적 평가가 좌지우지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치스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보이는 플라톤, 니체 등을 포함해도 된다. 플라톤, 니체, 하이데거, 야스퍼스, 아렌트, 요나스의 철학사 흐름은 존중을 받고 있으며, 나치스와의 친화성이나 대립성이 문제 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계’에서다. 또 다른 문제계라 함은 1) 나치스 자체를 역사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하는가? 2) 나치스와 비슷한 독재 현상인 스탈리니즘, 모택동주의 등을 어떻게 볼 것인가? 3) 나치스, 스탈리니즘에 대항한다는 이른바 현대 자유민주주의 진영, 그 과학 문명에도 새로운 형태의 독재적 획일성과 타자의 자유에 대한 차별적 박해가 숨어있지 않은가? 등이다.

이런 현대 철학 관점을 우리에게 대입시켜서 볼 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른바 ‘친일’, ‘반일’이라는 현상은 문제가 되지만, 그것이 근대 한국문학사 평가에 절대적 평가 잣대로 악용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제 한국 인문학사의 성찰에서 다음 질문을 진지하게 던질 때가 된 것이다. 1) 일본 제국주의를 역사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하는가? 2) 현대 러시아 제국주의, 중국 제국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3) 우리 현대 자유민주주의 체제, 그 과학 문명 안의 새로운 형태의 독재적 획일성과 타자의 자유에 대한 억압, 박해는 없는가?

사르트르는 논설 <협력자란 무엇인가>에서 독일 나치의 프랑스 강점기(1940~1944)의 프랑스인 대독 협력자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1960년 모사드는 아르헨티나에 숨어 사는 아이히만을 찾아내 납치하여 예루살렘의 재판장에 세웠다. 유대인들은 증오가 극에 달해 있었고, 아이히만의 “명령에 따랐을 뿐” 따위의 담담한 변명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유죄판결 뒤 아이히만은 사형당했다.

레지스탕스에 스스로 참여했고, 그 경험을 소설화한 사르트르는 다른 프랑스 지식인들, 대중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인 대독 협력자에 대해 비판했다. 그렇게 보면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자기체험으로서의 독립운동을 그린 작가가 얼마나 되는가? 한용운, 이육사, 정인보, 연변의 김학철(본명 홍성걸) 등이 주목되는 이유다.

필자는 대학 시절, 사르트르의 레지스탕스 소설을 원서로 읽었다. 당시 어떻게 불어를 읽을 수 있었는지 이제는 까마득하나, 반파쇼 시인 루이 아라공의 시집도 애독한 기억이 있다. 당시 한때, 프랑스 공산당에 동경심을 느끼기도 했지만, 사르트르가 모택동을 지지하고, 그 영향 아래 68년 파리 5월 혁명 때 수많은 프랑스 청년들이 모택동주의자가 됐다. 이제 생각해보면 한국 민주화의 상징인 시인 김지하 석방 서명을 한 사르트르라 한들, 모택동 찬양을 한 것은 그의 ‘옥의 티’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 현대사를 다시 살펴볼 때, 해방, 한국전쟁, 독재체제, 군사 쿠데타로 이어진 ‘반공, 친미’ 코스가 그 역사의 시간 속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할지언정, 철학적 성찰 앞에서는 얼마나 정의로웠던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을 것이다. 단군 이래 유래를 찾아볼 수 없게, 자유 한국을 지키기 위해 UN군이 대거 참전했지만, 미국과 중국, 소련의 냉전 체제 아래 남북한의 대리전쟁의 모습을 띠었다. 김구, 여운형 등 암살당한 민족지도자들의 통일운동도 있었다. 이는 그들을 누가 암살했으며, 냉전과 분단 체제를 누가 만들었는가? 하는 근본 문제에 봉착하게 만든다. 동시에, 일반 대중을 놓고 보면, 그들은 결국, ‘친일, 반공’에서 ‘반일, 반공, 친미’로 갈아탄 것뿐이고, 누가 갈아타게 만들었는가? 대중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자유의지인 줄 착각하게 만드는 힘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그 주역들은 대략 짐작이 가지만,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주역이 실제 주역이 아닐 수도 있다. 예컨대, 지금도 살아있는 헨리 키신저가 1970년경에 대륙 중국에 다가갔고, 1972년에는 일본이 잽싸게 국교 정상화를 했다. 장개석 국민당의 중화민국 대만을 버리고, 모택동 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을 택한 것이다. 한국이 대륙 중국과 수교하는 것은 그 20년 뒤의 일이다. 미국과 일본의 대기업들이 중국으로부터 큰 이익을 얻었고, 그 뒤를 따라 한국의 대기업들이 끼어들어 큰 이익을 얻었다. 필자가 알기로는, 적어도 필자가 아는 범위의 일본이나 한국의 일반 중소기업이나 개인들은 죄다 중국 공산당에게 놀아나 망했다. 그 결과는 중국공산당 권력의 비대화와 그 인권유린적 독재정치의 강화와 동아시아의 힘의 균형, ‘평화’에 대한 위협이다. 여기서 대중들은 ‘반일, 반공’ 다음으로 ‘친중, 친러’로 흘러갔는데, 그 죄가 일제강점기의 ‘친일, 반공’보다 가볍다 할 수 있는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대만 전쟁도 거론되고 있다. 한미일 군사동맹의 유대도 날로 강조되고 있다. 기억나는 것은 1991년 말의 소련 붕괴와 1992년의 한중수교이다. 필자는 당시 여순, 대련을 포함한 중국 동북 3성 및 북경 일대를 여행했다. 당시 중국은 측은지심이 일 정도로 뒤떨어져 있었다. 이왕 중국과 전쟁할 것 같았으면 그때 전쟁했으면 쉽게 이겼을 것이다. 당시 대련까지 뻗어 있는 러시아식 건축양식의 범람에 러시아 제국 남하 정책의 역사적 흔적을 보았다. 또 연변 조선족 자치구의 공산당 당사에 가서 조선족의 최고 간부를 만났는데, 그 옆에 나란히 한족 최고 간부의 사무실이 버젓이 있는 것을 보고는, 동화정책의 무서움을 간파했다. 그 후 조선족 동포들이 한국에 대거 흘러들어오고, 한족들도 빈자리의 연변에 흘러들어 가면서, 연변의 조선족 인구 비중이 급격히 감소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데 대해 유식자들이 러시아 입장도 생각하여, 우리는 중립적 입장에서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을 본다. 그런데, 우크라이나가 동아시아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거론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기 전, 러시아 백군이 우랄 이동을 지배하고 있었던 당시, 우크라이나인들이 코사크, 브리아트 족들과 함께 연해주, 사할린 지역에 ‘녹색 우크라이나(극동 우크라이나 공화국)’을 창건한 적이 있었다. 당시 민족자결주의 바람에 힘입어 그들은 극동에서 독립국을 세웠노라고 선언했지만, 바로 적군, 일본군, 영국, 프랑스, 중화민국 등의 압력을 못 이겨 무너졌다.

1922년에 비로비잔(하바롭스크 근교)에 유대인 자치주가 설치된 것도 기억할 만하다. 여기에서 언급하고 싶은 것이, 하잘이다. 7세기경 ‘하잘 가한국’을 세운 돌궐계 민족이자, 우리 한국민족의 먼 친척이다. 하잘은 일찍 유대교로 개종했고, 유대인들과 혼혈하여 아슈케나지(백인 유대인)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크라이나는 유대인과 우리 먼 친척인 하잘의 혼혈 민족인 셈이다. 그래서 그들이 극동 우크라이나 공화국을 세우려고 했던 것도, 그 유해처럼 유대인 자치주가 극동에 남겨진 것도 이해가 된다.

그런데, 1900년대, 러시아 제국의 극동에서의 남하를 막는답시고,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삼킨 일은 주지하는 바다. 그때 유대인 국제 자본이 일본을 지원해준 것도 알려져 있다.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한 가지 가능성으로서는 유대인은 일본이 극동에 유대인의 보금자리를 만들어줄 것이라고 믿었던 모양이다. 사실, 근대 일본의 발전 이면에는 유대계 영국인, 미국인들의 막대한 지원이 있었는데, 그런데도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유대인을 배신하고, 독자로 만주 지배에 매진하게 된다. 거기에는 일본 국내의 빈부 격차에 따른 불만 등을 해소하기 위한 새 영토의 확보와 부의 재분배가 불가피했다는 사정도 있었겠지만, 어떻게 됐든 일본이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독일 나치즘과 이탈리아 파시즘 쪽으로 다가간 것이 1945년의 원자폭탄 투하에 의한 패전으로까지 이어진 셈이다.

동아시아 판세의 재편성이 구상되고 있는 지금, 지식인, 소식통들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입각한 지난 일본 제국주의의 만주, 중국 침략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앞으로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재편성이 일어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뒤늦게 대한제국을 세웠지만, 러시아가 우랄산맥을 넘어서 침략해오는 데 대해 속수무책이었고, 그 끝장이 아관파천이었다. 그런 점에서 동북아 유사시를 우려하면 휴전선으로 두 동강이 나 있는 한반도는 과거의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시기 및 그 ‘전후’의 교훈을 다시금 음미해야 한다.

1939년 마해송은 <모던일본 조선판>을 출간하는데, 이것이 당시 중일전쟁 상황에서 체제 협력적인 책이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필자가 연구한 무라야마 토모요시도 거기에 관여돼 있었다. 일본 문학 연구자들은 무라야마의 그런 행태를 가지고 ‘전향’이라고 비판했다. 중일전쟁은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공산당을 상대로 싸운 전쟁이라, 그 사상적 기저에 반공이 자리하고 있었다. 프롤레타리아 연극운동을 지도한 무라야마가 중일전쟁, 나아가 만주국을 지지한 듯 보인 것이 ‘전향’으로 비춰졌다. 하지만 책에는 전쟁 협력적인 내용이 노골적으로 나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무라야마 토모요시도 ‘조선인 친구들의 추억’ 같은 글로 최승희 등을 찬양한 것뿐이고, ‘조선의 미래를 논하는’ 좌담회에서 조선인 작가의 일본어 사용론에 언급했다. 한 기생의 인터뷰에서 무라야마가 요정에서 술 마시고 놀아나는 모습이 드러났지만, 무라야마는 달리 발표한 소설에서 조선인 작가들이 일본어 사용을 거부하는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진지하게 자기 반성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런저런 근거들에 따라서 필자는 무라야마를 ‘위장 전향’이라고 진단했다.

두루 알려진 바와 같이, 고 임종국 선생이나, 민족문제연구소, 한겨레신문사 같은 연구자, 언론 세력들이 친일작가 비판을 해왔다. 나아가, 예컨대, 2007년 3월 2일 자 <한겨레>는 “이광수・최남선 학병 권유 대담 발굴… 마해송 사회”라는 기사를 보도했다. 1944년 1월 동경 조선문화사 발행 조선화보에 그 대담이 실렸다는 것이다. 1943년 11월 이광수, 최남선이 일본의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학병 참가를 권유하는 연설을 한 뒤에 나눈 대담이라고 한다. 한겨레의 최재봉 문학전문기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11월 24일 메이지대 강당에서 열린 ‘특별지원병 궐기대회’를 가리켜 “참으로 내선일체가 실현된 것 같은 (…) 일종의 극적 광경”이라고 말했다. “모두가 울고 있더군요. 황국(皇國)을 위해 전장에 나가 죽자는 생각이 모두의 얼굴에 드러났더군요.” 그는 더 나아가 “(조선 학생들이) 좀 더 뜻을 크게 품어 일본 전체나 대동아 전체를 짊어지고 일어서려는 기개를 가졌으면 싶었다”고 했다. 최남선도 이에 질세라 “(학병 참가는) 우리들의 잠자고 있는 혼을 깨운다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신적 부흥을 위한 수행에 있어 하나의 ‘계기’”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최남선과 이광수는 신라의 화랑도와 고구려 무사 정신이 일본 무사도와 한 뿌리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중략) 한편, 두 사람의 대담은 신태양사 사장으로 당시 일본 잡지계에서 군림했던 마해송이 사회를 맡아 주목된다. 마해송에 대해서는 그동안 친일 여부를 놓고 논란이 계속됐는데, 학병 권유 좌담의 사회를 맡은 사실이 확인되면서 친일 쪽으로 좀더 무게가 실릴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 기사는 조선 청년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이광수, 최남선, 마해송을 비아냥거린 의도가 뚜렷하다. 하지만, 뒤집어 읽을 수도 있다. 당시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 제국주의는 대정익찬회를 선두로 한 이른바 ‘익찬 체제’, 국가 총동원 체제에 돌입해있었다. 국가, 식민지 지역의 모든 국민, ‘황국신민’이 ‘황민의 의무’로써 국가의 전쟁에 협력할 것을 강요받는 총동원 체제였다. 그 ‘협력’에 대해 자의, 타의를 가릴 수 있었을까? 침묵해도 전쟁을 묵인하는 것이고, 전쟁을 반대하면 생명이 위협당했다. 모든 집회는 관리되고 감시당하던 시기이다. 당시 조선 청년들은 이른바 ‘지원병’의 숭고한 역할을 짊어질 것을 요구받고 있었다. ‘지원병’이란 자신의 의지로 자발적으로 지원하여 전쟁터로 나간다는 것이고, 특히 그것이 스스로 죽는 것을 의미하는 유명한 ‘카미카제 작전’이었기에 더욱 문제시된다. 그들은 울고 있었다, “황국을 위해 전쟁에 나가 죽자는 생각”에. 당시 조선 청년들에게는 조국이 없는 상황이었다. ‘한일합방’은 사기극으로 끝나,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병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의 논리에는 “황국을 위해”라는 대의명분이 있었다. ‘황국’, ‘대동아’는 그들에게 있어서 정당하게, 그리고 합법적으로 그들의 조국이었던 것이다.

“우리들의 잠자고 있는 혼을 깨운다”는 ‘정신적 부흥’이란 무엇인가? 신라의 화랑도와 고구려의 무사 정신이 일본의 무사도와 하나 된 모종의 신시대적 개벽이다. 1910년의 ‘한일합방’과 1940년대의 ‘대동아공영권’은 실패했지만, 오늘날 우리는 한미일 동맹의 새로운 단계로의 도약을 내다봐야 하는 시점에 와있다. 19세기의 러시아의 한 예언가가 앞으로 동방에 ‘별의 민족’이 나타나, 러시아의 극동 영토를 회복하며 세계의 중심으로 평화를 누린다는 예언을 했다. 미국이 함께 하는 새로운 차원의 ‘한일합방’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시대적 요청으로서 부상해올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상황은 국뽕은 물론, 일국 민족주의론 대처할 수 없다.

‘카미카제 특공대’로 산화한 조선 청년들, 우리의 선배들은 죽기 싫어서, 죽음이 두려워서, 또는 너무나 억울해서 울었을 것이다. 그런데, 많은 분이 도망가지 않고 당당하게 ‘제로 전투기’에 올라타고 꽃 같은 청춘을 태평양에 바쳤다. 왜 도망가지 않았을까? 우리 선배들은 스스로 사지로 향했다. “내가 여기서 죽지 않으면 조선 민족이 영원히 욕보고 멸시당할 것이다”, “내가 여기서 죽음으로써 후배들이 자랑스럽게 살 것이다”는 신념을 가지고 산화했다는 얘기들이 전해지니, 그것은 우리에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는 주부들이 보는 와이드 쇼에서도 조선인 특공대 특집을 하여 일본 여성들의 눈물을 자아냈고, 우리 선배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졌기에 일본 우익들도 그 존재와 역사적 의미를 인지하고 인정한다.

육당은 일찍이 고조선과 일본 신도의 관계를 밝혔고, 단재는 일국 민족주의를 확립했다. 둘 다 귀한 업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일국 민족주의가 한계성을 드러내, 동북아 공동체적 틀이 요구되는 국면에서는 육당의 방향성이 더욱 생산적일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실지로 일본 신사에는 지금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우리 조상들이 신으로 모셔졌다. 어찌 야스쿠니 신사만을 문제 삼으랴? A급 전범이 모셔졌으니 문제인가? “1억 옥쇄(玉碎)”하고, “1억 총 참회”한 나라가 일본이다. 그리고 역사 전공자들이 흔히들 ‘음모론’이라고 치부하고 거들떠보지 않는 역사의 이면에 진실이 있을 공산이 크다.

마해송의 은인인 일본 언론계의 대부, 키쿠치 캉은 1947년 미군 정부 GHQ로부터 공직추방 처분을 받고 급사했다. 처분 이유는 “문예춘추가 일본의 침략 전쟁에 지도적 입장을 취했다”는 것이었다. 키쿠치는 “전쟁이 터지면 나라를 위해 온 힘을 다하는 것이 국민의 의무다.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했단 말이냐?”고 억울해했다고 한다. 키쿠치가 일궈낸 문예춘추는 지금도 일본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최고의 잡지라는 지위를 지니고 있고, 키쿠치가 제정한 아쿠타가와 상, 나오키 상 등은 지금도 일본 신인 작가들의 메이저 등용문 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이 전범 비판을 충분히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필자도 학생 시절의 정의심에서는 비판적으로 생각했었지만, 일본 안의 피억압 민족인 재일조선인을 음으로 양으로 키우고 일본 사회에 정착하게 하는 정책은 미국, 일본 정부, 그리고 CIA와 협력한 재일조선인들이 합작해서 만들어낸 것이고 그렇게 해서 출현한 것이 ‘전후 일본’이라는 현상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우익적 지식인들이 “일본은 어째서 ‘전후’가 끝나지 않는가?” 등의 문제의식을 토로하곤 하지만, 앞으로도 ‘전후’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전에 제3차 대전이 일어날 판국이기도 하다.

맥아더가 1945년, 한국, 일본에 미 군정을 폈을 때, 일본에는 천황제를 남겼고, 한국에는 민족종교를 인정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맥아더의 이 결정이 상당히 의미심장하며 지금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미국이 한국, 일본과 동아시아 재편을 나선다면, 반드시 그 종교적 힘을 빌려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친미, 친일’의 테두리에서 언론, 문학, 문화 활동 등이 알게 모르게 권장되거나 석권될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제국주의적 수단이 아니라, 새로운 방법론으로 자유의지, 자발성, 다양성이 보장되면서 진행될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 자신이 자신의 민족종교를 소홀히 하고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 ‘친미’ 테두리에 갇힌 기독교 일변도의 신앙 태도 탓일까?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이 똑같듯이 우리 전통 신앙의 하느님과 기독교의 하나님은 똑같음을 깨쳐야 할 것이리라.

다시 아렌트와 칸트의 고향으로 돌아가 보자. 1945년, 괴니히스베르그가 러시아 땅으로 편입된 사실을 아는 이도 드물다. 이듬해, 칼리닌그라드라 러시아식으로 개명됐다. 러시아는 원래, 몽골제국 때 몽골족에 협력한 해적 세력 루스족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 지역은 그 해적들의 고향이라고 한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이 칼리닌그라드에 러시아의 핵무기가 배치돼있다. 폴란드에 인접해 있는 칼리닌그라드는 최근 핵이 배치된 벨라루스보다 독일, 프랑스에 더 가깝다. 우크라이나 정세의 행방에 따라서는 유럽 땅이 순식간에 방사능으로 오염된 폐허가 될 수도 있다.

반대로 동쪽 끝부분인 시베리아, 연해주 쪽에는 사할린이 있다. 1875년 치시마 카라후토 교환조약에 의해, 사할린섬을 포기한 일본은 노일전쟁에 이김으로써 섬의 남반부를 획득했지만, 1945년에 소련군에 점령당해 다시 빼앗겼다. 일본은 ‘전후’가 끝나지 않기 때문에, 북방영토 문제라 해도 사할린을 포함하지 못한다. 그런데, 사할린 한인들이 3만 여 명이 남아있어, 지금도 살고 있다. 중앙아시아에도 10만 명 이상의 고려인들이 살고 있고, 우크라이나에도 만 수천 명에 달하는 고려인이 있다. 그들은 러시아 전체주의, 전제주의 아래에서 민족적 정체성의 위기에 놓여있다. 인권 유린의 동화는 신식민주의적 민족말살 정책이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평시’에 일어나고 있는 ‘전시’의 소리 없는 학살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북방외교’는 고 노태우 전 대통령 때 요란하게 시작됐다. 필자가 아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 러시아, 중국에 한국의 선진 기술을 팔아먹거나 한국의 산업에 대한 그들의 침투 와해 공작에 협력하는 것 같은 반민족적 짓거리도 보인다. 현재진행형의 ‘친중, 친러’는 눈 감아 주고, 과거의 ‘반일’에 얽매어있는 행태에는 모종의 정치적 속셈과 욕심, 즉, 오늘날의 악행을 덮기 위한 과거사 들추어내기의 의도가 알게 모르게 감춰져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알아야 할 것들을 잘 모르고, 심중히 다시 해석하거나 너그럽게 봐줘야 할 것들을 감정적으로 맹비난하기에 급급하다. 교육 기관과 사회의 공기인 언론 매스컴, 방송 매체, 문화 권력 등의 조작과 부패, 무능이 그 주된 원인이라면, 그 종사자들의 죄가 크면 컸지, 괜한 데에다가 희생양을 만듦은 언어도단이다.

이무영이 창시한 한국형 농민문학은 계몽주의문학과 경향(프롤레타리아)문학의 색채를 띠면서도 그것들을 뛰어넘은 자연주의적 통속문학이나, 일종의 목적문학 요소가 있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계몽주의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의미가 있을 것이고, 전시체제에 동조한 부분을 ‘콜라보 문학’으로 정당하게 비판하는 수는 있으나, 그 보편적 목적성을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 속에 가두어 ‘친일’이라고 몰아세우기만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된다. 농촌을 무대로 한 목적문학이 농촌 근대화에 유익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문화 영토(헤게모니)는 확보되어도 무방하리라 여겨진다.

이무영의 농민문학을 보면, 시골 사람들이 자본주의 경제에 포섭되어, 자질구레한 숫자 계산에 쫓기는 모습이나 생활고에 시달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 부분은 훌륭한 리얼리즘 문학의 달성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물론, 그 자본주의는 아렌트, 요나스가 경계한 물질기술 문명이기도 한데, 이무영은 자연 속에서 싸우는 인간, 그 생명의 찬가를 잘 묘파해냈음은 이광수류의 단순한 계몽주의문학이나 카프류의 단순한 계급투쟁 문학의 수준에서 벗어나 한국문학의 다양성에 기여한 바 크다 하겠다.

젊어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농촌을 그리는 자연주의 작가로 출발해 통속작가가 된 카토오 타케오(加藤武雄)의 문하생으로 기숙했던 이무영이 그 집에 있던 세계문학 전집을 다 읽는 와중에 토쿠다 슈우세이(德田秋聲), 시마자키 토오송(島崎藤村), 발자크, 스탕달 등 일본, 프랑스 등지의 사실주의, 자연주의 작가들, 러시아 작가들의 소설들 등을 통독한 토양에다가, 이무영의 고향에서의 농민으로서의 실생활이 씨앗으로 뿌리내려 훌륭하게 꽃을 피운 것이다. 이무영뿐만이 아니라, 작가나 작품들에 대해 여러 가지 시각들이 있을 수 있고, 연구들은 다양하게 진행되어야 마땅하다. 허나, 인민재판처럼 딱지를 붙이고 나무에 매달리고 대중의 눈에 띄게 공개하는 따위의 짓거리는 삼가는 게 바람직하다. 지나치면 유족들에게 명예훼손이 될 수 있고, 심각한 손해마저 입힐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하마터면, 사르트르가 모택동을 지지한 꼴이 된다.

충청북도 음성군, 이무영 생가터에서 해마다 가창, 악기 연주, 낭독 등 아기자기하게 행해지는 무영제 행사가 계속 발전되기를 기원한다. 목사를 겸하는 이장님이 모금해서 멋진 도서관 카페 겸 문학관이 건립될 계획이란다. 내년 무영제에는 많은 분이 방문할 것 같다. 이무영은 해방 후 6.25가 터지자 해군으로 참전했다. 손원일 제독, 맥아더 장군과 함께 싸운 것이다. 손원일 제독이 북한 포로들에게 관대한 조치를 해준 일화와 함께, 현금 ‘전시’ 분위기 속에서 문학인으로서의 하나의 모범으로 이무영이 기억될 성도 싶다. 음성군청에서는 부디 이무영을 재평가하기 바란다.

덧붙여 5.16이나 5.18은 공론 형성이 제대로 안 되고, 국론이 분열돼 엉망진창이다. 또 이 글을 쓰는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인데, 사실은 단군과 관련된 기념일이었음을 아는 이가 전혀 없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 또한 며칠 뒤에 있을 ‘단오절’도 우리 가까운 친척인 초나라의 시인인 굴원을 기리는 날임을 아는 이도 거의 없다. 과연, 이 나라, 이 민족은 어디로 가는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생활이 편리해지고는 있으나, 정신문화는 신대륙의 우리 먼 친척들의 자그마한 자치구마냥, 기술 문명으로 포위당하며 박제화돼가고 있는 건 아닌가?

아렌트, 요나스 같은 철학자들의 사고의 기저에 칸트의 정언명령이 있는데, 요나스가 말한 갓난 아기의 비유에 의한 정의론은 맹자의 측은지심과 상통된다. 요나스는 미래 세대라는 타자의 자유를 현재의 우리가 탄압하면 안 된다고 했고, 핵전쟁에 의한 인류의 종말을 우려했다. 아렌트는 세계의 종말 이전에 세계에 새로운 혁명이 올 것을 기대했는데, 맹자의 혁명론과 상통된다.

‘군자, 천자’에 의한 정치를 이상으로 삼은 공자, 맹자는 철인정치를 설파한 플라톤과 상통된다. 플라톤의 국가론에서의 ‘철인’이 독재자가 되어 엘리트주의로 치닫는 경우, 나치즘, 스탈리니즘 같은 전체주의로 변질할 수 있다고 할 때, 그렇다면, 공자, 맹자도 전체주의의 개연성을 숨기고 있는 걸까? 북한을 ‘유교 사회주의’라고 평가할 때, 그 이면에는 전체주의의 리스크가 도사리고 있고 실지로 그리되어 있음도 동시에 직시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남한은 괜찮을까? 아렌트, 요나스가 우려한 테크놀로지적 전체주의에 남한 사회가 도달해있음 또한 꿰뚫어 보고 경계해야 하리라. 과학기술과 공존하되, 나라 안팎에 타자의 자유, 다양성, 자발성, 생명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극동 러시아를 포함한 만주, 몽고, 중앙아시아와의 대연합 구축을 구상해야 한다. 그리고 ‘어린이’, ‘미래 세대’, ‘후손’이라는 타자부터 시작해서, 현재의 우리가 오늘날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찾아야 한다. 제2차 대전, ‘전후’에서 교훈으로 배워서 되뇌어 곱씹어야 우리는 미래를 대비할 수 있다.

정대성 문화칼럼니스트
정대성 문화칼럼니스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윤진한 2023-05-31 04:12:46
석전대제로 유교의 부분집합중 하나임.국사 성균관(성균관대)나라.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승계로, 6백년 넘는 역사를 국내외에서 인정받고 있는 한국 최고(最古,最高)대학. Royal 성균관대. 세계사의 교황반영, 교황윤허 서강대는 국제관습법상 성대다음 Royal대 예우. 두 대학만 일류.명문대임. 해방후 조선성명 복구령으로, 유교국가 조선의 한문성명.본관등록이 의무인, 행정법.관습법상 유교나라 한국. 5,000만 한국인뒤 주권없는 패전국 불교 Monkey 일본의 성씨없는 점쇠(일본에서는 천황). 그뒤 한국에 주권.학벌없는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점쇠가 세운 마당쇠). 그 뒤 새로생긴 일제강점기 초급대 출신대나 기타의 비신분제 대학들.

윤진한 2023-05-31 04:12:14
@동아시아 세계종교인 유교나, 서유럽의 세계종교인 가톨릭의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절대적 초월자이십니다.

@ 공자님의 시호. 하늘이 보내신 성자이신 성인 임금 공자님은 황제 칭호인 문선제(文宣帝).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의 오랜 전통으로 호칭되어 오고 있습니다.聖人에 이르신 스승(至聖先師). 은나라 왕족의 후손이신 공자님. 참고로 하면, 공자님 아버지 시호는 계성왕(啓聖王)이시고 공자님 어머니 시호는 계성왕 부인(啓聖王夫人)이십니다.

http://blog.daum.net/macmaca/3127@한국 유교 최고 제사장은 고종황제 후손인 황사손(이 원)임. 불교 Monkey 일본 항복후, 현재는 5,000만 유교도의 여러 단체가 있는데 최고 교육기구는 성균관대이며,문중별 종친회가 있고, 성균관도 석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35가길 11(한신잠실코아오피스텔) 1214호
  • 대표전화 : 070-7803-5353 / 02-6160-5353
  • 팩스 : 070-4009-2903
  • 명칭 : 월드코리안신문(주)
  • 제호 : 월드코리안뉴스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다 10036
  • 등록일 : 2010-06-30
  • 발행일 : 2010-06-30
  • 발행·편집인 : 이종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호
  • 파인데일리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월드코리안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k@worldkorean.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