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88] 다시 찾은 홍콩 그리고 김대건신부의 마카오
[유주열의 동북아談說-88] 다시 찾은 홍콩 그리고 김대건신부의 마카오
  •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3.06.05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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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야경

코로나가 끝나면서 마스크를 벗고 그간 못한 외국 여행으로 제일 먼저 찾은 곳이 홍콩이다. 오랜만에 홍콩공항에 도착하니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함께 “좋은 꽃은 항상 피어 있지 않고(好花不常開) 경치는 늘 있는 것이 아니니(好景不常在)”로 시작하는 덩리쥔(鄧麗君, 등려군)의 <언제 다시 오시나요(何日君再來)>의 음악이 문득 귓전에 맴돌았다. 부산항에 돌아오듯 약속을 지켜 다시 홍콩에 왔다는 뿌듯함을 느꼈다.

홍콩은 베이징 대사관 근무 후 발령받아 찾아온 곳이라 고색창연한 고도 베이징과 다른 초현대적이고 활기찬 도시의 매력에 빠져 홍콩을 떠난 후에도 잊혀지지 않았다. 그 무렵 홍콩근무는 '3년 징역에 3천만원 벌금'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동료들 사이에서 환영받는 근무지는 아니었다. 홍콩섬의 북쪽에 아파트를 얻어 집과 사무실을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주말이 되어도 가족을 자동차에 태우고 드라이브할 만한 곳도 딱히 없었다. 당시는 홍콩섬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터널이 없어 섬을 한 바퀴 도는 일주도로를 타고 섬 남쪽의 부촌인 리펄스 베이 근처에 차를 세워놓고 가족과 함께 모래를 밟고 바닷물에 발을 담그면서 섬 북쪽에서 눈으로만 보던 바다를 몸으로 느껴보는 정도였다.

홍콩 리펄스 베이(The Repulse Bay)
홍콩 리펄스 베이(The Repulse Bay)[사진=위키미디아]

홍콩이 중국 본토와 가깝지만, 전철을 타고 중국 선전까지 가서 국경 통과 수속을 밟아야 하는데 중국 비자가 필요했다. 홍콩은 우리와 비자 면제 협정이 되어 있어 중국 거주 교민은 따로 비자가 필요 없이 수시로 홍콩 왕래가 용이한 것과 달랐다. 그러다 보니 섬에 갇힌 기분에 ‘징역’이라는 말이 나온 것 같다. 홍콩은 쇼핑과 관광의 중심으로 서울에서 지인이 찾아오면 씀씀이는 늘어나고 생활비도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그래서 3년을 근무하다 보면 저축은커녕 벌금 물 듯이 상당한 빚을 지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홍콩 근무 3년은 중국을 이해하는데 큰 보람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중국 전문가들이 대개 홍콩을 거쳐 간 것처럼 세계의 중국 전문가들도 홍콩을 거쳤거나 살고 있었다. 홍콩의 주요 호텔 연회장에는 매일처럼 중국 관련 세미나가 개최되어 중국을 알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또한 홍콩의 서점에는 중국 전문서점같이 다른 나라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중국 관련 서적이 풍부했다.

과거 중국이 죽의 장막으로 서방과 단절되어 있을 때 연구자들은 대륙에서 홍콩으로 밀항해 오는 난민을 통해 중국 사정 등 정보를 얻었다고 한다. 필자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어느 중국 전공 교수는 자신은 중국 땅을 밟아 보지도 않았지만, 홍콩에서 난민 대상으로 중국정세를 파악하여 중국을 연구했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렵지만 냉전 시대 중국 연구는 그러한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홍콩은 산이 많아 하이킹 등으로 건강 관리하기에도 좋았다. 홍콩의 40% 이상은 야외 공원(country park)이다. 산을 끼고 있는 야외 공원에는 트레일이라고 부르는 등산코스가 잘 정비돼 있어 누구든 운동화 신고 물병을 들면 되었다. 싱가포르, 시드니, 샌프란시스코도 아름답지만 산이 없어 아쉽다고 한다. 홍콩은 우뚝 솟은 산과 푸른 바다 그 속에 펜슬처럼 보이는 고층 건물이 조화를 이룬다.

M+ 뮤지엄
M+ 뮤지엄

이번에 다시 찾은 홍콩은 코로나 팬데믹의 긴 잠에서 깨어나 금방 세수한 소년처럼 신선했고 생기가 가득해 보였다. 흔히 홍콩은 맛과 멋의 도시라고 하는데 동서양이 만나는 홍콩의 미식 문화는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이 늘어나듯 과거보다 세련된 것 같다.

홍콩의 역사를 매립의 역사라고 한다면 구룡반도 남서쪽에 바다를 메워 새로운 홍콩 역사를 쓸 문화 명소(서구룡문화지구)가 조성되어 있었다. 좁은 땅의 홍콩에서 꿈과 같은 거대한 잔디밭과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M+ 라는 뮤지엄의 문을 열었다. 이름 그대로 사람들이 듣고 보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모아둔 초(超) 미술관이었다.

밤이 되니 백만불 가치의 야경 도시답게 황홀한 빛의 향연이 시작된다. 10여 년 전 홍콩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업해 개발된 음악과 레이저의 ‘빛의 교향곡(A Symphony of Lights)’은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문자 그대로 ‘지상 최대의 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처럼 맛과 멋이 있는 보석 같은 도시에 한때 가족과 함께 살았다는 것이 큰 행운이었고 자랑스러웠다.

‘중국의 황제는 홍콩제도를 대영제국 여왕에게 할양하여 앞으로 영국의 왕위를 계승하는 자가 영원히 장악하고 법규와 규정에 의해 통치될 것이다.’ 1841년 아편전쟁 후 중국(淸)과 영국이 맺은 난징 조약의 일부이다. 이로써 홍콩은 영국 여왕이 쓰는 왕관의 다이아몬드가 됐다.

그로부터 100년 후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 폭격과 함께 영·미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중국 선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항공대를 통해 카이탁 영국 공군기지를 기습 공격했다. 그와 동시에 일본 육군은 선전강을 건너 사틴을 거쳐 홍콩섬에 육박했다. 홍콩의 영국 주력 부대가 싱가포르 방위에 지원된 상황에서 일본군의 홍콩 점령은 시간문제였다.

홍콩 전투(1941년 12월 8일~25일)
홍콩 전투(1941년 12월 8일~25일)

12월 25일 홍콩에서 가장 호화로운 페닌술라 호텔에서는 영국의 홍콩 지배 백 주년의 기념 파티가 예정돼 있었다. 그날이 되자 파티의 손님은 온데간데없고 불 꺼진 호텔의 3층 대연회실의 희미한 촛불 아래 크리스마스 캐럴이 아니라 영국의 마크 영(Young) 총독이 일본군 사카이(酒井) 사령관 앞에서 항복문서를 읽는 비참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영국 여왕의 왕관에 백년간 박혀 있던 다이아몬드가 일본 천황의 보석상자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일본군은 영국 총독을 일시 감금했다가 상하이로 이송, 수감시키고 페닌술라 호텔을 동아호텔로 개명, 점령사령부로 징발했다.

홍콩 거리에는 일본 천황들의 이름이 나붙기 시작했다. 황후상 광장의 빅토리아 여왕 동상은 전리품으로 일본으로 실려 가고 광장은 소와(昭和) 광장이 된다. 홍콩의 주요 도로는 메이지(明治) 및 다이쇼(大正) 등 역대 천황의 이름으로 바뀐다. 현재 퍼시픽 플레이스가 있는 어드미럴티(金鐘) 영국 해군병영에는 일본의 신토(神道)신을 모시는 남해(南海) 신사가 들어섰다. 지금 대법원 건물로 쓰고 있는 네오 클래식 석조전은 악명 높은 일본 헌병 총사령부였다.

이소가이(磯谷) 일본의 초대 총독은 영국 총독이 입주해 살던 총독관저(Government House)의 중앙에 높다란 다락(첨탑)을 올렸다. 일본의 홍콩 성주의 거성에 천수각(天守閣)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자 세실 하코트 영국 태평양 함대 사령관이 8월 30일 홍콩에 진주하고 9월 16일 총독관저에서 항복 조인식을 거행했다. 영국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사카이 사령관은 1946년 전범으로 난징의 이슬이 되었지만 하코트 제독은 우리 총영사관의 주소(하코트 로드)로 살아 있다. 일본 천황의 보석 상자에 들어갔던 영국 여왕의 다이아몬드는 3년 8개월 만에 회수되고 1997년 7월 1일 중국에 정식으로 반환되었다.

홍콩 하코트 로드
홍콩 하코트 로드

얼마 전 개봉된 김대건 신부(1821-1846)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탄생>을 보고 그가 유학했던 마카오를 다시 가보고 싶었다. 이번에는 과거처럼 고속 페리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고 2018년 11월 개통된 홍콩과 마카오 및 광동성 주하이를 연결하는 강주아오(港珠澳) 대교를 자동차로 건너갔다. 세계 최장을 자랑하는 전장 55km 대교 건설은 중국의 광동성, 홍콩 그리고 마카오 등 메가 경제권을 하나로 묶는 그레이트 베이 에리어(Great Bay Area, 粤港澳大灣區)를 완성하는 프로젝트였다. 개통 당시 언론은 ‘교량의 에베레스트’라는 별명을 붙이면서 중국 토목 기술의 금자탑이라고 보도했다. 우리 돈 13조원(890억 홍콩달러)이 소요된 건설비는 광동성 정부가 44%, 홍콩 및 마카오 특별행정구가 각각 43% 및 13%를 부담했다고 한다.

마카오와 홍콩은 모두 중국이지만 각기 다른 체제를 가지고 있어 홍콩 차량이 그냥 다닐 수 없고 특별한 허가를 받은 플레이트(번호판)를 단 전용 버스 또는 소형 차량만 가능했다. 편도 30분 거리로 홍콩 란타오섬의 국제공항 근처에 진입로가 있었다. 얼마쯤 가니 거대한 컨테이너 선박이 다닐 수 있도록 6.7km 정도의 해저 구간이 나왔다. 해저 터널은 침매(沈埋)형으로 양쪽에 인공섬을 만들어 33개의 거대한 구조물(튜브)를 바다에 가라앉혀 만든 것이라고 한다.

강주아오 대교
강주아오 대교

왕복 6차선의 터널과 교량으로 연결된 강주아오 대교는 코로나 여파인지 다니는 차량은 많지 않았다. 앞으로 광동성에서 제조된 물품의 이동에 도움을 주겠지만 당분간은 마카오에서 홍콩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할 경우 편리해 보였다. 필자도 귀국 시 마카오에서 일박하고 오후에 대교를 거쳐 홍콩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했는데 과거 페리 경우 홍콩 중심부로 가서 다시 열차를 타고 공항으로 나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어 좋았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상징인 홍콩과 마카오 앞바다에 건설된 강주아오 대교를 지나가면서 이 대교가 만리장성에 버금가는 인공구조물이라는 흥분과 감동을 받았다. 베이징 근처의 장성에 가면 ‘만리장성에 가보지 않으면 대장부가 아니다(不到長城非好漢)’라는 비석이 있는데 ‘강주아오 대교를 가보지 않으면 좋은 사람이 아니다(不到大橋非好人)’라는 말이 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카오는 광동성 등 중국의 동남해안 어부가 계절에 따라 이동하여 생선을 잡는 작은 어촌이었다. 몽골족이 원(元)을 건국하면서 남송(宋)의 유민이 황제와 함께 남하하여 인구가 늘어났다. 현지인은 마카오를 작은 만으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뜻으로 아오믄(澳門)이라고 부른다. 마카오 지명은 바다의 안전을 지켜주는 여신인 아마(阿媽) 또는 마조(媽祖)를 모신 집(閣) 즉 마카악(媽閣)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16세기 중반 포르투갈인은 젖은 화물을 말린다는 핑계로 해금 정책의 명나라로부터 예외적으로 마카오를 영구임대 사용하면서 교류해 왔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593년 1월 조명연합군이 왜군으로부터 평양성을 탈환할 때 활약했고 그 후 조선의 주력 화포로 왜군을 물리치는 데 기여한 불랑기포가 바로 마카오를 통해 전해진 것이다. 불랑기(佛郞機)는 ‘프랑크’의 한자표기로 당시 이슬람권 및 중국에서는 유럽인 즉 포르투갈인을 프랑크(불랑기)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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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랑기포

포르투갈인은 인도의 고아에 이어 중국의 마카오에 거점을 가지면서 기독교 선교에 열중했다. 그들은 1543년 일본의 다네가 섬(種子島)을 비롯해 규슈 등 지방 영주에게 선교 목적으로 개인 화기인 화승총(조총 또는 철포)을 선물했다. 전국(戰國, 센고쿠) 시대의 일본인은 철포(鐵砲)의 우수함을 재빨리 간파했다. 일본인은 철포를 대량 복제해 내전을 조기 종결하고 일본을 통일했다. 1592년 4월 조총(철포)를 앞세워 조선을 침략,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한반도는 포르투갈인이 동아시아에 전래한 불랑기포와 조총의 대결장이 되었다.

19세기 포르투갈은 아편전쟁의 혼란을 틈타 마카오 반도 앞바다의 타이파와 콜로안 2개의 섬을 무단 점령하고 1887년 청나라와 정식 조약을 통해 마카오 반도와 상기 2개 섬을 포르투갈 영토로 할양받았다. 1970년대 포르투갈 정부는 재정 부담으로 식민지 포기 정책을 시행, 마카오를 중국에 반환하려고 했으나 중국 정부가 거부했다고 한다. 1980년대 중국과 영국 정부 간에 홍콩반환이 결정되고 포르투갈이 다시 반환 의사를 표명하자 중국은 홍콩과 마찬가지로 일국양제(一國兩制)에 따라 1999년 12월 20일 정식으로 반환받았다.

마카오 성 바울 성당

마카오는 주권이 반환된 후 홍콩의 기업인 스탠리 호에게 독점권을 준 카지노(도박) 특허를 미국 라스베가스의 카지노 재벌에게 개방하였다. 미국의 카지노 재벌은 타이파와 콜로안 두 섬 사이의 얕은 바다를 매립 신도시(코타이)를 만들고 라스베가스를 옮겨 놓은 듯 대대적으로 개발했다. 그들은 이탈리아 베네치아 운하와 곤돌라, 파리의 에펠탑, 런던의 웨스트민스트 궁전과 빅벤(시계탑)을 모방하여 실물보다 적은 사이즈로 건축하였다. 또한 세계 일류 브랜드의 호텔을 유치하여 카지노와 함께 가족이 동시에 즐길 수 있는 호화판 엔터테인먼트 시설을 만들어 놓았다.

1836년 조선에 파견된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의 피에르 모방 신부는 신학생 3명(김대건, 최양업, 최방제)을 선발했다. 1837년 6월 신학생들이 마카오에 도착했을 때 홍콩은 이름 없는 바위섬이었고 타이파 등 2개의 섬은 무인도였다. 신학교는 포르투갈인이 모여 살았던 세나도(의사당) 광장이 있는 마카오 반도 남쪽에 있었다. 포르투갈 특유의 물결무늬 타일로 포장돼 있고 유럽 양식의 건물이 많은 세나도 광장에서 언덕 쪽으로 오르면 16세기 말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들이 설계 건축한 바로크 양식의 아시아 최대의 유럽풍 성당인 성 바울 성당이 버티고 있다. 바울 성당에 극동 최초의 신학대학이 설립되어 있어 모방 신부가 신학생 3명을 유학시킨 것으로 보인다.
 

김대건 신부 초상화

그러나 애석하게도 성 바울 성당은 그들이 유학 오기 2년 전인 1835년 대형 화재로 타 버렸다. 그 이후 복원이 되지 않아 지금도 성당의 정면과 일부 벽, 계단 및 지하실만 남아 있다. 186년 전 김대건 등 신학생들도 그 모습을 보고 실망과 함께 아쉬워했을 것 같다. 김대건 일행은 하는 수 없이 멀지 않은 성 안토니오 성당 부설 임시 신학교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성 안토니오 성당(1847년 소실 후 1930년경 재건)에 가면 두루마기 모습의 김대건 신부의 입상을 만날 수 있다. 3명의 신학생 중 최방제 학생은 마카오 도착 5개월 후 애석하게도 풍토병으로 희생되고 김대건과 동갑내기 최양업은 마카오에서 공부하다가 아편 문제로 마카오 정세가 혼란해지자 필리핀으로 피신해 사제수업을 이어갔다고 한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학업을 마치고 1844년 중국에서 나란히 부제 서품을 받은 후 김대건은 1845년 최양업은 1849년 사제 서품을 받아 각각 한국인 최초 및 두 번째 신부가 된다. 김대건 신부는 귀국 후 1년 만인 1846년 병오박해에 체포되어 용산 한강 변 모래사장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최양업 신부는 귀국 후 지방에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전염병에 걸려 1849년 순직했다. 한국 최초의 신부로서 25세 나이에 ‘피의 순교’를 한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맞아 로마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의 외부 벽감에 김대건 신부의 조각상이 세워질 예정이라고 한다.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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