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조의 맛과 멋을 소개하고 창작을 북돋우기 위해 연재물로 소개한다. 고시조와 현대시조 각기 한편씩이다. 한국시조협회 협찬이다.[편집자주]
* 고시조
백설이 잦아진 골에
- 이색(李穡)
백설(白雪)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梅花)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夕陽)에 홀로 서이서 갈 곳 몰라 하노라
이색(李穡1328~1396)은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유학자로 자는 영숙(頴叔), 호는 목은(牧隱)이다. 포은(圃隱) 야은(冶隱)과 더불어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데 이 작품은 눈이 녹아 없어진 골짜기에 험한 구름이 몰려들었구나! 맑은 절개를 가진 반가운 매화꽃은 어디에 피어 있을까? 날이 저물어가건마는 나그네는 외로이 서서 갈 곳을 모르는 듯 망설이고 있구나 하는 시조로 고려 국운의 쇠퇴에 대한 한탄과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충정이 서려 있는 작품이다. ‘백설’은 고려 유신이고, ‘구름이 머흐레라’는 이성계 일파가 득세함이며, ‘매화’는 충정 있는 선비, ‘석양’은 고려의 국운이 기우어감을 비유하여 쓴 말이다.
* 현대시조
서울 1
- 서벌
내 오늘 서울에 와 만평(萬坪) 적막을 사다.
안개처럼 가랑비처럼 흩고 막 뿌릴까 보다.
바닥난 호주머니엔 주고 간 벗의 명함…….
서벌(徐伐(1939~2005) 경남 고성 출신. 본명은 서봉섭(徐鳳燮), 호는 평중(平中)으로 1964년 시조문학에 3회천료한 후 한국시조시인협회장을 지냈다. ‘서울 1’은 궁핍한 시대의 삶을 벗어나고자 상경한 1960년대 시인의 자화상이다. 상경은 하였으나 반겨 줄 이 없다. 가난한 시인 앞에 적막감만 만평이다. 벗들을 만났으나 그들이 건네는 명함만 바닥난 호주머니에 쌓인다. 호주머니가 바닥난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벗들의 명함이 아니다. 밥이나 책을 살 수 있는 얼마간의 돈일 성싶다. 가난한 시인의 마음에는 추적추적 가랑비가 내리고 시인의 내일은 안개 속처럼 알 수 없다. 종이쪽에 지나지 않는 명함을 막 흩어버리고 막 뿌려버리고 싶은 비애감만 젖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