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독재운동가에서 미주 한인사회 구심점으로
반독재운동가에서 미주 한인사회 구심점으로
  • 조규일 특파원
  • 승인 2010.08.12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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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길 캘리포니아 세리토스 시장

 
LA 카운티에 속해 있는 인구 5만의 작은 도시 세리토스(Cerritos). 전미 2만 2천 고등학교 중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문 휘트니 고교가 소재한 전형적인 중산층 도시다.

살기 좋다는 캘리포니아에서도 최고의 도시로 평가받는 세리토스를 이끄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한인 동포 조재길(영어 명 조지프 조) 시장이다. 2007년 세리토스 시 최초의 한인 시의원에 당선된 그는 부시장을 거쳐 올 3월 시장으로 지명돼, 세리토스시의 행정을 책임지고 있다.

‘80년 광주’ 이후 사업가에서 반독재운동가로

조재길 시장은 1943년 충북 단양에서 태어났다. 1966년 서울대 사대를 졸업한 그는 공군장교를 거쳐 오산고, 보성고 등에서 교사를 하다 1974년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낮에는 청소부로, 주유소 직원으로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결과, 그는 도미 1년여 만에 LA카운티 전산국에 취직해 공무원이 되었다. 그리고 1977년 부동산 중개업에 뛰어들었고, 1980년대 그 어렵다는 ‘백만장자’가 되었다.

 
미국에서의 제2의 인생은 탄탄대로에 놓인 듯 보였다. 그러나 고국에서 들려온 1980년 ‘광주 소식’은 그의 인생항로를 확 바꿔 놓았다. 1981년 초, 전두환 대통령의 방미소식을 들은 그는 방미 반대시위에 앞장섰다. 당시 생활정보지 창간을 준비 중이었던 그는 아예 신문을 창간하며 한국의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1984년에는 일간지 ‘라성일보’를 발행했다. 신문제작에만 매년 40만 달러를 쏟아 부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자 그많던 재산은 사라지고 파산 위기에 처했다. 이후에도 그는 신문 기고자로, 라디오방송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한국의 민주화에 힘을 쏟았다.

10여 년간 반독재민주운동을 벌이던 그는 1990년대 들어 북한문제에도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북한을 바로 알기 전에는 민족화해도 통일도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는 북한을 두 번 방문해 경험을 토대로 ‘북한은 변하고 있는가’(1990년), ‘북핵위기와 한반도 평화의 길’(2006년) 등 다수의 북한 관련 저서와 논문을 출간했다.

정치력 신장은 미주 한인사회 발전의 원동력

1970년대에는 사업가로, 1980년대에는 반독재민주운동가로, 1990년대에는 북한문제전문가로 활동하던 그는 어느 한 순간 사회운동을 그만두게 된다. 계기는 한국의 민주화와 문민정부 출범이었다. 당시 LA의 한 라디오방송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던 그는 “내가 정말 제대로 알고나 떠드는가?”라며 스스로 의문을 갖게 됐고, 더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공부를 결심했다.

그리고 2002년 사업을 정리한 뒤 중국 연변대학 인문사회과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한국근대사를 배우고, 한중일 동양 3국의 근대화과정을 집중 연구했다. 많은 고민 끝에 그는 미주 한인사회의 발전에 초점을 맞추게 됐고, 한인동포의 정치력 신장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인 사회의 정치력 부재는 비단 다른 동네 이야기가 아니었다. 세리토스 시만 해도 한국계가 20%로 중국계(15%), 필리핀계(11%)보다 많이 살지만, 그동안 단 한 명의 시의원도 배출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으며, 미주 한인사회의 신흥중심지인 세리토스에서부터 먼저 정치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후 유력 한인 인사를 쫓아다니며 공직 출마를 권유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인들은 정치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그는 자신이라도 출마하며 불쏘시개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의 생각은 시작부터 벽에 부딪쳤다. 가족들이 반대한 것이다.

자녀들은 “시청에 한 번이라도 가봤냐”, “그 영어로 어떻게 시의원을 하냐” 며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부인도 “북한방문기 썼다고 그간 빨갱이 소리를 지겹게 들었는데 선거에 나가면 또 나오지 않겠냐”며 결사반대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의 진심을 알게 됐고, 그토록 반대하던 부인도 “당신이 원하면 한 번 해보라”며 따뜻한 격려를 보냈다.

우여곡절 끝에 출마했지만 선거운동은 쉽지 않았다. 신통치 않은 영어실력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선거운동을 펼치지 못한 그는, 대신 한인 가구를 방문해 유권자등록운동을 하는 한편 틈나는 대로 같은 아시아계인 필리핀인, 베트남인, 인도인의 집을 방문해 서툰 영어로나마 지지를 호소했다.

삼수 끝에 시의원 당선, 이제는 인기 정치인으로 우뚝

 
하지만 현실 정치의 벽은 높았다. 2003년 첫 출마한 선거에서 그는 보기 좋게 낙선했다. 그리고 2005년 선거에 나섰지만 이번에는 아깝게 떨어졌다. 한인 동포가 막판 출마를 선언하며 표 분산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2007년 세 번째로 도전, 마침내 세리토스 시 최초의 한인 시의원으로 당선됐다. 당시 선거매니저는 “보다보다 너 같은 크레이지(crazy)는 처음 본다. 당신처럼 영어를 못하면서 선거에 나선 사람은 처음 봤고, 선거운동하면서 영어 공부하는 사람도 처음 봤다”라며 그의 당선자체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당선은 됐지만 문제는 그 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세리토스 시의회는 의원들의 좌석이 직원들과 수많은 방청객들 앞에 앉는 구조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 대법관처럼, 시의원들이 단상 위 의자에 일렬로 앉아 업무를 보고, 또 그 장면이 TV를 통해 생중계된다. 영어가 짧은 그로서는 여간 곤혹스런 상황이 아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미국 시의원의 경우 보좌진이 없다. 혼자 의정활동을 펼치며 지역구 관리를 해야 한다. 게다가 LA카운티 88개시의 유일한 한인 시의원으로 한인을 대표해야 했다. 세리토스 시 아시아계 커뮤니티 행사에 가는 것만도 벅찬데 LA카운티 내 수많은 한인행사에 참가하고, 또 그를 지지한 노조 및 소속 민주당 행사 등 수 많은 모임을 챙겨야하니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정도였다.

그러나 힘들게 뛴 만큼 성과는 바로 나타났다. 아시안마약남용방지기(AADAP)로부터 공로상을, 한미연합회로부터 성취상을 받았다. 시의원 활동으로 이런 상을 받은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동료 및 시민들의 호평도 이어졌다. 시의원 보궐선거에 나온 4명의 후보자 중 3명이 현직 시의원 중 그가 일을 가장 잘한다고 꼽았다. 방청온 고등학생들도 유독 그에게만 사인을 청했다.

주 하원의원 출마 고려… 한인사회 발전의 밀알 되고파

마땅한 사람이 없어 자신이 직접 정계에 뛰어들었지만 그는 자신보다는 젊은 세대들이 정치에 나서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그리고 시장이 되자마자 이를 실천에 옮기고 있다. 시의원이 되면 임명직 커미셔너(위원)를 10명까지 임명할 수 있는데, 그는 그중 5명을 한인으로 뽑았다.

백인들의 눈치를 보느라 그동안 다른 아시아계 시의원들은 못했던 과감한 결정이었다. 예상치 못한 선정에 동료 시의원들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그래봤자 커미셔너 50명 중 한인은 5명이다.

인구 비율로 보면 오히려 적다. 만일 당신들이 한인을 한 명씩 뽑으면 나는 안 뽑겠다”며 그들을 납득시켰다. 그는 젊은 이민 1.5세 및 2세들이 주류정치에 보다 쉽게 진출할 수 있도록 이 같은 지원체계를 적극 구축할 생각이다. 이와 관련해 그는 모국도 동포들의 현지 정치력 신장을 위해 차세대 정치인을 발굴하고,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재외 국민 참정권에 대해서는 동포들이 해당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살며 그 나라의 정치에 기여하는 게 보다 중요하다며 완곡한 반대 의사를 밝혔다. 또 외국시민권자라 하더라도 재외동포는 모국의 크나큰 자산이기 때문에 이중국적은 허용 하는 게 양자 모두에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지금 재미 한인공동체가 기로에 서 있다고 말했다. 즉, 주류 사회로 흡수된 재미 일본공동체의 전철을 밟은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중국인, 유대인으로 남은 재미 화교나 유대인공동체로 발전할 것인가이다.

이에 그는 한인동포들은 성장하면서 한인의 정체성을 느끼고, 또 역사적으로 한국이 서구에 무조건 동화되기보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가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일본보다는 화교나 유대인들의 행로를 밟을 것으로 분석했다.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이 있다. 60에 정치라는 새로운 영역에 과감히 뛰어든 그에게 꼭 맞은 표현이다. 내년 시의원 선거에 도전해 다시 한번 시장을 노리는 그는 이후 여건이 되면 2012년 주 하원의원선거 출마도 고려하고 있다.

주류사회에 던진 그의 도전이 밑거름이 돼 한인 출신의 제2의 연방하원의원, 아니 상원의원, 주지사가 나올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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