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형 오페라 첫 진출 재일동포 성악가 이천혜씨
일본 대형 오페라 첫 진출 재일동포 성악가 이천혜씨
  • 이기백 특파원
  • 승인 2010.08.13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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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저녁 일본 도쿄 신주쿠 신국립국장 오페라시티 콘서트홀.

일본 최대 음악 축제 퍼시픽 뮤직 페스티벌(PMF)의 올해 마지막 공연이 있는 날이었다. 지휘는 이탈리아 출신 파비오 루이지. 베르디의 '시칠리 섬의 저녁기도 서곡' 오케스트라 연주가 끝나자 빨간 드레스에 올림 머리를 한 소프라노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지난 3월 재일동포로는 처음으로 PMF 오페라 주역을 따낸 이천혜씨(30).

세계적인 지휘자 번스타인이 주도해 지난 1990년 일본 삿포로를 주무대로 출발한 PMF는 역량있는 신진 음악가를 발굴,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일본 유명 클래식 페스티벌이다. 올해로 21년째인 이 페스티벌은 세계적으로 저명한 교수진이 포진돼 있다. 이 무대를 거쳐간 연주자들은 상당수가 세계 굴지의 오케스트라로 진입한다. 연주자들에게 PMF 경력은 일종의 보증서다.

오케스트라 위주였던 이 축제는 올해 14년 만에 오페라 성악 오디션을 했고, 최종 발탁된 소프라노가 이천혜씨였다. 지난 7월 8일부터 지난 4일까지 한달 가까이 삿포로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PMF 무대서 그는 푸치니 오페라 '라보엠'의 미미역으로 전막 공연을 선보였다. 5일 도쿄 무대는 삿포르 공연의 하이라이트로 꾸며졌다.

그는 깊고 맑은 목소리로 '라보엠'의 대표 아리아 '내이름은 미미'를 가슴 저리게 불렀다. '라보엠'은 파리 뒷골목을 배경으로 보헤미안 네 사람의 방랑과 우정, 그리고 폐결핵을 앓는 가난한 처녀 미미에 대한 이야기다. 남자 주인공 로돌포역을 맡은 일본인 테너 카즈키 오가사와라의 성량도 뛰어났다. 1만7000석 대극장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탁 트인 목소리가 객석을 휘어잡았다.

무대에서 내려온 그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재일동포로 도쿄 대형 콘서트홀에서 오페라 주인공으로 무대에 선 이는 그 말고는 없다. 재일동포 성악가의 일본 대형 무대 진출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얘기다. 어찌보면 뒤늦은 쾌거지만 반가운 건 엄연한 사실. 이번 무대는 대형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맞춰 아리아를 선보이는 식이었지만 그는 미미에 몰입돼 풍부한 표정연기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객석 정중앙 앞에서 네번째 줄에 앉아 그의 노래에 눈시울을 붉힌 이는 아버지 이유사(유지 사다야마)씨다. 도토리현에서 리사이클링 업체 대성상사 대표로 있는 그는 성공한 재일동포 기업인에 속한다. "무대 위에선 아무도 안 보여요. 아버지가 거기 계셨는지도 몰랐어요. 무대에 오르면 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거든요. 겁이 없어져요. 이상하죠. 무대에만 서면 하늘을 나는 듯해요. 그런데 이런 자신감도 아버지가 늘 뒤에 계셨기 때문일 거예요."

그의 표정은 맑다. 성악가로 이제 큰걸음을 했다는 뿌듯함에 목소리는 설렌다. 그는 아버지가 터를 잡은 도토리현에서 나고 자랐다. 2001년 도쿄시내의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2∼3년 무대 경험을 한 뒤 2004년부터 이탈리아 밀라노 국제음악원에서 오페라를 본격 공부했다. "말이 가장 어려웠어요. 처음엔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게 전부였죠. 공부가 힘들 때도 있었지만 노래로 성공하겠다는 다짐이 절 버티게 했어요. 기술로 지지 않으면 인정받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고요."

사실 배타적인 걸로 유명한 일본 클래식계의 높은 벽을 그 혼자서 뚫었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일본 언론도 PMF 오페라 주역으로 그가 발탁되자 수차례 이를 '뉴스'로 다뤘다. 그는 재일동포로 차별을 크게 느끼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일각에선 오페라 오디션 최종 결정권자가 파비오 루이지가 아닌 일본인 출신 지휘자였다면 그의 캐스팅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한국사람이라는 걸 항상 의식하며 산다고 말한다. "제 국적은 한국이에요. 요즘 재일동포 중에는 국적을 일본으로 바꾸는 이가 늘고 있지만 전 앞으로도 끝까지 한국 사람일 겁니다. 제 핏줄이 그런 걸요. 전 엄마가 해주는 김치찌개를 세상에서 가장 좋아해요."

일본 대형 무대는 물론 유럽·미국 등 세계 무대의 주역 자리를 노리면서도 그는 한국을 찾을 기회가 많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4∼5년 전 두어차례 한국 무대에 오르긴 했지만 정식 오페라 공연은 아니었어요. 한국은 저에게 아련한 기억의 나라예요. 그리고 제 고국이고요. 고국 무대서 한국 관객을 자주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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