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기] 최익현 의병장과 덕혜옹주
[방문기] 최익현 의병장과 덕혜옹주
  • 최토출 (사)푸른한국 이사장
  • 승인 2011.12.20 13: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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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23일 삼수회 박종열회장과 나의 사랑하는 동생 유대원군, 이현배군과 대마도로 가기로 했다. 아침 5시 30분 KTX를 타고 즐겁게 대화하면서 부산역에 도착하여 곧장 부두에 도착했다.

아뿔사! 내가 여권을 가지고 오지 않았던 것이다. 참으로 어이없고 황당한 일이었다. 장가 갈 때 불알 떼놓고 가는 것과 똑같았다. 후회한들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뜻하지 않은 이별을 고하고 다시 서울역 KTX에 몸을 실었다.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지만 곧장 체념하기로 했다.

내가 몇 년 전 방콕에 갔을 때 택시를 탔는데 10분 갈 거리인데 무려 1시간 30분이나 소요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운전기사가 크락션 한번 누르지 않고 편안한 마음과 평상심의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ㅅ팔ㅈ팔 하면서 난리가 났을 텐데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그래서 물었더니 모든 것이 부처님 뜻이라는 것이다. 절에 가서 108번뇌를 되새기면서 3천배를 하면 무엇 하겠는가? 이 사람들은 벌써 부처님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방콕의 교통지옥은 세계적으로 악명 높다. 퇴근하는 길이 막히면 7시간 정도 걸린다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런데도 방콕 시내 어디를 돌아다녀도 크락션 소리는 거의 들을 수가 없다. 체념 이야기가 나와 글이 삼천포로 빠졌는데 아무튼 체념과 망각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참으로 편리한 것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2010년 11월 25일 다시 대마도로 가기로 했다. 주위에서 별로 볼 것이 없다고 말렸다. 내가 관광이나 하러다니는 한가한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하늘을 찌를듯한 기개의 소유자이며 조선의 대표적인 선비 최익현 선생을 참배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울러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비극적 삶도 현장에서 살펴보고 싶었다.

대마도로 가는 배안에서 여권을 소지하고 있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면서 이즈하라 항에 도착했다. 이즈하라는 대마도의 중심도시인데 첫인상은 거리가 너무 깨끗하다는 것이다. 얼마나 깨끗한지 도로 바닥은 마치 거울과 같았다. 대마도에 며칠 있으면서 길거리에 휴지 한장 볼수가 없을 정도로 청결했다. 일본인 특유의 청결미가 빛나는 곳이었다.

대마도의 크기는 제주도의 40%이며 거제도의 1.7배이며 울릉도의 10배에 해당한다. 땅은 거칠고 바람이 세차게 불며 경작 면적은 전체 면적중 3%에 불과하다. 인구는 2만 8천명 정도이며 공장 같은 것이 전혀 없으며 온 섬이 산림에 덮여 있으니까 공기가 푸르고 푸르렀다. 요즈음 일본 본토에서도 공기가 너무 좋아 관광객이 늘어난다고 한다.

온 섬을 모두 돌아보았는데 가장 인상적인 곳은 쯔쯔지방 산정에 있는 산책로와 이이유모도시에 있는 계곡이었다. 쯔쯔지방은 우리나라 해남 땅끝마을에 해당되는 곳인데 대마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곳이다. 사방 바다를 내려다보며 산책할 수 있는 산정의 산책로는 정말 환상적이었고 너무 아름다웠다.

평생 여기에 살면서 매일 아침 산책을 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이이유모도시 계곡은 원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결코 빠지지 않은, 원시림으로 울창한 태고의 신비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최익현 선생의 순국기념비가 있는 ‘수선사’ 절에 가서 정중히 참배했다. 수선사는 이즈하라항에서 10분 거리에 있으며 백제시대 비구니 승려인 법명스님이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최익현 선생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한마디로 기개가 하늘을 찌를듯했으며 의인(義人)의 사표이며 대쪽같은 행동하는 양심이다. 나라가 풍전등화일 때 온몸과 온마음으로 조국에 충성한 민족의 별같은 지도자이며 대마도에서 왜놈의 음식을 거부하다 굶어죽은 우리 민족의 가슴에 영원히 남아 있는 위대한 참 어르신이다.

최익현 선생은 1833년(순조33년) 경기도 포천의 가재리에서 태어났다. 최익현 선생은 14세 때 양평에 거주하고 있던 이항로를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이항로는 위정척사 사상을 고수하는 재야학자로서 지방유림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최익현 선생은 이항로로부터 면암이라는 호도 부여받았으며 성리학적 사회체제를 수호하려 했던 위정척사 사상을 몸에 익혔다. 위정척사 사상은 개혁개방에 배치되는 배타적인 측면의 약점도 있었지만 자기문화 보존논리로서 제 몫을 한 측면도 있다. 최익현 선생은 이항로 문하에서 ‘임금 사랑을 아비 사랑과 같이 하고 나라 걱정을 내 집 걱정과 같이 하라’는 호국정신을 몸에 익혔다.

호국정신으로 무장한 최익현 선생은 조선말기 풍전등화 앞에 놓인 조국의 운명에 절망하기도 하고 사회적 모순에 분노하기도 했다. 1876년 2월 일본의 강요에 의해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 선생은 도끼를 들고 대한문 앞에 나타났다. 수호통상조약을 강요한 일본 사신 구로다 교타카의 목을 베라고 고종 임금 앞에 상소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목을 베라는 것이다.

뜻은 이루지 못했지만 이 사건은 우리 민족사에 유명한 사건이 되었으며 최익현 선생의 기개가 하늘을 찌를듯하다는 것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최익현 선생의 상소는 내용과 형식의 과격성 때문에 그를 처벌하라는 권력층의 상소가 줄을 이었다. 그래서 3년간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1905년 11월 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최익현 선생은 전북 태인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때 벌써 나이 74세였다. 최익현 선생은 노구에도 굴하지 않고 전국 마을에 다음과 같은 격문을 보냈다.

"임금이 망하고 신하가 어찌 홀로 살 수 있으며, 나라가 패망하고 백성이 어찌 홀로 보전되겠는가? 불타는 대청 위의 참새와 가마솥에 든 생선은 함께 망할 뿐이니 어찌 한바탕 싸우지 않겠는가? ·······우리의 모든 종실, 대신, 공경, 문무, 사농공상, 서리, 하인이 무기를 가다듬고 마음과 힘을 한군데로 모아서 반역의 무리를 죽이고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을 깔고 자며, 원수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 씨를 없애고 그 소굴을 두들겨 부수자!"

최익현 의병장이 싸우기에는 일본의 힘이 너무 막강했다. 최익현 의병부대는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전라도 관찰사 한진창 관군과 맞서 싸우다 참패를 당했다. 현장에서 체포된 그는 직계 사령관 임병찬과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구금되었다가 일본 대마도 이즈하라 경비대에 이감되었다. 최익현 의병장은 감옥에 갇히자마자 임병찬 사령관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며 장엄한 죽음을 준비한다.

"내가 30년 동안 왜놈들과 싸웠으니 나를 해치려 하는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네. 나라가 위태하고 임금이 욕을 당하는데도 죽지 못한 죄는 이미 죽어 마땅한 거였지. 그래도 지금까지 살아 있었던 것은 헛되이 죽기보다 옳은 뜻을 천하에 외치려는 생각 때문이었네. 지금 이 지경에 이르러 왜놈이 주는 음식을 먹으면서 왜놈 명령을 듣지 않으면 저놈들 말대로 그것도 잘못된 일이야. 그래서 지금부터는 왜놈 음식을 아예 먹지 않으려네. 내가 죽거든 자네가 뼈를 거두어 우리 아이에게 보내 주게나."

최익현 의병장은 단식에 단식을 거듭하는데 ‘풍증’이 덮쳐 1907년 1월 1일 영면하셨다. 최익현 의병장의 유해는 1월 4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부두에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은 혈육을 잃은 것처럼 슬피울었다. 곡성이 바다를 뒤흔들 정도였다고 한다.
한일병탄조약이 체결되자 나라 잃음에 슬퍼하다 장렬히 자결한 매천 황현의 시 ‘곡 면암 최익현 선생’을 여기에 소개한다.

물고기나 용도 오열하고 귀신도 슬퍼하는데
펄럭이는 붉은 명정 바다 위에 두둥실
골목마다 통곡소리 삼백 고을에 이어졌으니
나라의 정화가 배 한 척에 가득찼네

끓는 충의의 정신 지하에서라도 왜 사라지랴
충신의 넋은 땅속에도 변할리 없네
제 지내느라 술 떨어지니 겨울 해가 저무는데
통곡하는 이 몸도 백발 성성하답니다.

최익현 선생의 일생을 세밀히 살펴보면서 대쪽같은 삶에 감탄과 끝없는 존경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힘센 자에게 아부하면서, 권력에 아양떨면서 살아온 비열한 내 삶과 내 인생이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하기 짝이 없다. 푸른 하늘을 쳐다보기도 힘들 것 같다.

민족운동에 약간의 관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최익현 선생의 도끼상소상건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이것과 연관해서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친구 가운데 별명이 ‘정도끼’ 라는 사람이 있다. 본명은 정수일이고 아버지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는데 거기서 태어났기 때문에 만길이라고도 한다. 나의 가슴속에 있는 가장 친한 친구인데 우리친구들에게는 어머니 같은 존재다.

1970년대 초 박정희 독재가 발악을 할 때 나는 감옥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잠시 감옥에서 풀려나와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어느 날 어떤 잡지를 보는데 정수일의 도끼사건이 구석에 작게 보도되어 있었다. 경기도 고양에 일본인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서울시에서 그때 돈으로 2천만원을 들여 ‘일본인무명합사대’ 를 건립했는데 정수일 청년이 도끼로 때려부셨다는 내용이었다.

순간 민족 영혼이 살아있는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수소문을 하여 만났다. 첫인상이 링컨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매우 순박해보였다. 그 자리에서 바로 의기투합했다. 그 후 민족문제와 사회적 모순에 대해 밤새워 토론하며 불타는 청춘을 보냈다.

지금은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 변함없는 우정을 나누고 있다. 나는 정수일 친구를 나에게 보내준 단군할아버지께 정말 감사드린다. 처음 만난 그날 이후 정수일의 별명은 자연스럽게 ‘정도끼’ 가 되었고 요즘은 ‘정도끼’ 라고 하면 주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최익현 도끼’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정도끼’ 이야기가 나와서 몇자 적어보았다.

최도끼여! 정도끼여! 백의 민족이여! 영원하라!

이제 이야기를 바꾸어 비극적인 삶을 살다 간 덕혜옹주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 한다. 이즈하라 한복판에 하치만구 신사가 자리잡고 있다. 최익현 선생을 참배하고 바로 그곳으로 갔다. 거기에는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의 결혼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기념비 앞에서 묵념하면서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 모진 삶을 살다간 덕혜옹주의 영혼의 평안함을 빌었다.

덕혜옹주는 1912년 고종과 후궁인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종이 회갑을 맞아 낳은 고명딸이기 때문에 황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정식 왕비가 낳은 딸이 아니고 후궁으로부터 얻은 딸이기 때문에 공주가 아니고 옹주라고 불린다. 덕혜옹주는 일본의 압력 때문에 ‘히노데 소학교’라는 일본인 학교에 다녔지만 곱고 예쁘게 자랐다. 그러나 일제는 ‘왕족은 일본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1925년 4월 일본으로 끌고 갔다. 옹주의 나이 13살 때였다.

덕혜옹주는 아오야마에 있는 여자학습원 본과에 편입하여 본격적인 일본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학교생활은 너무나 외로웠다. 학우와도 거의 말하지 않고 묵묵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1929년 30일 덕혜옹주가 17살 되던 해 어머니가 타계했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접한다.

짧은 기간 한국에 다녀온 덕혜옹주는 어머니를 잃은 슬픔과 충격으로 거의 말문을 닫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지냈다고 한다. 이방자 여사의 저서 ‘흘러가는 대로’에 더욱 말없는 소녀가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덕혜옹주는 민족적 갈등과 정치적 압력, 그리고 여러 차례에 걸친 환경적 변화에 괴로워했는데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마저 닥치니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정신분열증을 일으켰다.

오빠 영친왕의 정성어린 치료와 주위의 배려로 병세가 어느 정도 호전되었다. 그때 바로 일본 황실에서 소 다케유키와 결혼하라는 명령 아닌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면 소 다케유키는 누구인가? 소 다케유키는 큰아버지가 대마도의 번주인데 양자로 들어가서 그 가계를 잇게 되었다. 그는 대마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제대 영문과에 입학한 수재였다. 문학에도 재능이 있어 시인으로 등단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고 화가로서도 활동했고 그의 그림이 아직도 대마도에 전시되어있다. 레이타쿠대학 교수로서 강의도 했다고 한다.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 백작의 결혼은 황실의 명령이기 때문에 누구도 거역할 수 없었다. 결혼 후 대마도에 다니러 갔을 때 섬 사람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그럭저럭 잘 보냈다고 한다. 정신분열증이 심해질 때 소 다케유키는 정성스럽게 보살폈다고 한다.

두 사람 사이에 마사에(한국 이름은 정혜)도 태어났다. 그럭저럭 잘 자라준 딸은 결혼 후 얼마지나지 않아 유서를 남겨두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많은 기록들이 자살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덕혜옹주에게 비극은 끝이 없이 밀려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마츠자와 병원에 장기 입원하였고 그 후 우여곡절 끝에 이혼하게되었다.

고종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인 김을한은 연합군 종군기자의 신분으로 덕혜옹주가 입원해있던 마츠자와 병원을 방문했다. 그는 ‘인간 영친왕’이라는 책에서 덕혜옹주 방문기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신경과 병원으로는 일본에서 제일 오래되었다는 마쓰자와 병원에 가보니, 무슨 감옥과도 같이 음산한 공기가 떠돌고, 중환자가 있는 병실은 마치 감방 모양 쇠창살로 들창을 막고 있었다. 안내해 주는 간호부의 뒤를 따라갔는데, 한 병실 앞에 이르자 간호부의 발이 딱 멈추었다. 그 안을 들여다보니, 40여 세의 한 중년부인이 앉아 있는데, 창백한 얼굴에 커다란 눈을 뜨고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 부인이 바로 덕혜옹주의 뒷모습이었다. 아무도 없는 독방에서 여러 해(그때 벌써)동안을 우두커니 앉아 있는 옹주가 어찌나 가엽고 불쌍하던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렸다. 만일 고종황제가 이 광경을 보신다면 얼마나 슬퍼할까? 어느 나라이고 왕가의 종말에는 허다한 비극이 깃들이는 법이지만 고종황제의 고명따님 덕혜옹주의 말로가 이다지도 비참하게 될 줄이야 어찌 뉘라고 상상인들 하였으랴?"

이러한 보도가 나간 후 한국 언론에서는 소 다케유키에 대해 갖은 악평을 쏟아냈다. 덕혜옹주를 정신병원에 유폐한 비정한 인간으로, 나아가 불쌍한 부인을 끝까지 감싸지 못한 비열한 인간으로 언론에 마구 그려냈다. 과연 소 다케유키가 그렇게도 나쁜 사람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단호히 주장하고 싶다.

모든 자료를 모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상당한 양식을 가진 인성이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소 다케유키도 정략결혼의 피해자라는 것을 명확히 밝히고 싶다. 결혼하기 전에 벌써 덕혜옹주는 정신분열증 환자가 아니었던가. 25년간 정신병 간호를 하면서 살아온 고통과 고충이 어떠했겠는가
여기 소 다케유키의 시집 <해향>에서 ‘사미시라 환상속의 아내를 그리워하는 노래’라는 제목의 시 한편을 소개할까 한다.

미쳤다해도 성스러운 신의 딸이므로
그 안쓰러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혼을 잃어버린 사람의 병구완으로
잠시 잠깐에 불과한 내 삶도 이제 끝나가려한다.

빛바랠줄 모르는 검은 눈동자
언제나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것은 환상속의 그림자
현실속의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네
물어도 대답없는 사람이여.

덕혜옹주는 1946년 이래 15년 동안 마츠자와 병원에서 지냈다. 덕혜옹주의 나이 벌써 46세가 되던 1962년 26일 드디어 귀국할 수 있었고 인질로 잡혀 간지 38년만이었다. 덕혜옹주는 이미 실어증에 걸린지 오래되었으며 김포공항에 마중 나온 소학교 동창들을 만나도 아무런 표정이 없었으며 유모 변씨도 알아보지 못해 주위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하여 7년간 요양을 하였으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퇴원하여 낙선재에서 줄곧 생활하다가 1989년 4월 21일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였다.

윤동주 시인의 삶을 한-일 합작 다큐로 만들어서 유명해진 다고 기치로 작가는 (NHK PD 출신임) 최근 덕혜옹주의 소학교 시절 자작시 4편을 발굴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비극의 공주가 남긴 혼의 외침’(부제 : 알려지지 않은 천재 동시 작가 덕혜옹주)이라는 제목으로 발굴한 시 4편을 <문학사상> 8월호에 발표했다.

다고 기치로 작가는 인터뷰에서 “단지 마지막 황녀가 직접 지어서가 아닙니다. 이 시들은 한국의 민족적 보물이라 할만합니다. 너무도 어려웠던 식민지 상황에서 고통과 신음하는 민족의 마음을 멋진 시어로 표현한 영혼의 기록입니다.” 라고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덕혜옹주가 지은 시 4편(벌, 쥐, 비 전단) 중에 여기에서는 <비>를 소개할까 한다.

모락모락 모락모락
검은 연기가
하늘 궁전에 올라가면
하늘의 하나님 연기가 매워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어

이제 이 글을 마치면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니라 민족적 유산이나 기록을 발굴하는데 우리는 무관심하거나 게으르기 짝이 없고, 왜 일본인 지식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인지 알다가다도 모를 일이다.

이 여행기를 쓰기 위해 덕혜옹주에 대한 기록을 광범위하게 수집했으나 우리가 남긴 기록은 권비영 작가의 소설 <덕혜옹주>뿐이었다. 베스트셀러가 되기는 했지만 한때 표절시비로 곤욕을 치뤘다. 기록다운 기록은 혼마 야스코 작가의 <덕혜희>이다. 작가는 광범위한 자료수집과, 세밀한 현지 답사로 소중한 기록을 남겼다고 생각된다. 한국인의 한사람으로서 혼마 야스코씨에게 감사한 마음과 존경을 보낸다.

다고 기치로 작가도 ‘이토록 귀중한 자료와 민족적 재산이 남아 있음에도······’ 하고 아쉬움을 토로한다. 다고 기치로는 한국 작가도 아니고 일본작가가 아닌가?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다.

70년대 초 나는 박정희 독재자의 칼에 걸려 형무소 생활을 하다 출소했다. 워낙 엄혹한 시절이라 취직도 되지 않고 빈둥거리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내 머릿속에 좋은 아이디어가 번쩍 지나갔다.

이렇게 빈둥거리며 허송세월을 하지 말고 여자정신대와 강제 징용자의 수기를 수집하자는 것이었다. 도서관을 샅샅이 뒤졌으나 수기를 모아놓은 책은 한권도 없었다. 어쩔수 없어 해방 후의 신문과 잡지를 샅샅이 뒤적이며 한편 두편 모으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깜짝 놀랐다. 일본 어느 르포작가가 엮어놓은 정신대 수기가 있지 않은가.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피해자인 우리가 우리의 기록을 찾아서 정리해야하는데 아무런 자료도 수집하지 않고 손놓고 있고 가해자인 일본 작가가 우리의 아픔과 수치를 대신 기록을 해두었다니! 나는 할말을 잃었다. 나아가 일본인들의 파고드는 연구노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 정부차원의 대폭적인 지원 하에 우리의 민족적 수난의 기록을 총 정리해야 한다. 과거의 아픈 기록을 정리하여 반성의 거울로 삼지 않고 무턱대고 미래로 나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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