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능선은 꽃밭이었다"
"백두산 능선은 꽃밭이었다"
  • 김정남 고문
  • 승인 2010.08.26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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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 본지고문의 '백두산 서파 종주기'

몇 년 전부터 혼자 중국에 건너가 ‘백두산생수’ 개발에 몰두하고 있는「상선(上善)워터스」김병순 회장의 초청으로 10여 년 만에 연변과 백두산 기행에 나섰다. 중국사람들은 막무가내라는데, 한국인이 하는 생수 사업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내심으로는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시제품도 나왔고, 이제는 숨돌릴 만 하게 되었으니 한번 다녀가라고 해서 못이기는체 다녀왔다.

 
사실 생수사업의 성공은 일반 제조업의 성공과는 다르다. 같은 물을 먹는다는 것은 한동네(洞)가 된다는 얘기요, 생명을 같이하는 식구가 되었다는 얘기다. 실제로 여행기간 동안 우리는「백산성수白山聖水」라는 시제품의 물을 줄곧 입에 달고 다녔고, 머지 않아「화산옥수火山玉水」라는 이름으로 백두산 화산수가 중국에 시판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머지않아 한국에서도 그 물을 먹게 될 것이다. 우리는 공장과 취수원도 견학할 수 있었다. 그동안 현지 조선족들의 협력에 크게 힘입었다는 얘기를 거기서 들었다. 박수치고 싶을 만큼 장한 일이다. 그의 고생과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에 오직 감사할 뿐이다.

일행은 미산(美山)신남휴 선생과 함께 온 세 분과 프레시안의 이근성, 한겨레신문의 김효순, 중앙일보의 서지원, 그리고 나, 이렇게 8명이었다. 미산은 인제의 숲간학교로 익숙한데다 산이 아름답기만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들에게 큰 산으로 있는 사람이다. 매사에 치밀한 이근성은 우리 일행의 대장격이었다. 최근 그는 백두산에 여러 번 올라 등정길이 훤했다. 김효순은 김병순 회장의 친동생으로 최근「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라는 책을 내 분단과 냉전에 짓밟힌 우리네 사람들의 잊혀진 이야기를 되살려냈다. 산행도 산행이지만, 이들과의 여행은 우선 즐겁고 배우는 것이 많았다.

나에게 이번 백두산은 초행길이 아니었다. 옛날 옛적 포장이 안된 길에 널판자를 얹어 길을 건너게 해놓고는 돈을 달라고 하던, 그런 때부터 시작해서 서너 차례 다녀온 적이 있다. 내가 복이 있었던지 갈 때마다 천지를 볼 수 있었다. 활짝 갠 날 천지에 올랐을 때는 천상의 평화를, 비바람 끝에 천지가 나타났을 때는 세상이 열리는 것 같은 신비를 체험했다. 그러나 찝차를 타고 천문봉 쪽으로 올라가 잠깐 천지를 내려다 보고 이내 되돌아 차 타고 내려오는 것은 늘 어딘가 허전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백두산을 서쪽에서 북쪽으로 종주하는 그야말로 산행이었다. 내 나이에 무리가 아닐까 싶었지만, 이것이 어쩌면 마지막 백두산 산행이 될지도 모른다고 마음 다잡고 따라나섰다. 10여년 만에 온 백두산 관광길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기왕의 북파길만이 아니라, 서쪽, 남쪽으로도 길을 내 놓고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연간 관광객이 1백 7십만명에 이르고, 그 중 한국인이 10만명이라고 한다. 하루 평균 2백 7십여명의 한국인이 백두산을 찾는 셈이다.

우리는 연길에서 안도현 이도백하를 거쳐 서파(西坡)로 갔다. 1인당 3만 3천원 정도의 입장료를 내면 서파 안의 관광지를 돌아보는 셔틀버스를 탈 수 있다. 그 날은 고산화원, 금강대협곡 등을 둘러봤다. 우리는 본격 산행을 하기에 앞서 1천 4백 미터의 산중턱에 새로 마련된 야영장에서 1박을 했다. 한여름인데도 천지 주변의 곳곳에는 잔설이 남아있었지만, 4인 1실의 대형 텐트에는 전기장판과 이불이 비치돼 있어 밤에도 한기(寒氣)를 느낄 수 없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셔틀버스를 타고, 2천 2백 미터 정도의 고지까지 갔고, 거기서 1천 2백 36개의 계단을 오르면 5호 경계비가 있는 천지에 오른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여기서 천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내려가기 마련이지만, 종주산행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여기가 산행의 기점(起点)이다. 종주산행에는 20만원 정도의 입산료를 다시 내고 입산허가를 받아야 한다. 종주산행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한국인이라고 한다. 그것이 의무규정인지는 모르겠으나, 한족(漢族) 산악 안내인이 동행하는 것도 여기서부터였다.

 
5호 경계비에서 보면 서파 자동차길을 오른쪽으로 끼고, 노호배(老虎背)라는, 늙은 호랑이의 등허리처럼 위엄있는 능선이 넓직하게 뻗어있고, 저 멀리로는 남파 능선길이 길고 완만하게 이어져 있는데, 언젠가 한번은 저 능선길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일었다. 우리는 여기서 오른쪽으로 청석봉을 향해 올랐다. 가파르다기 보다는 산행길이 육중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청석봉에 이어 백운봉으로 돌아오르는 길은 상당히 힘들었다. 천지 바로 곁까지 다 내려갔다가 높은 봉우리까지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날씨는 천변만화했다. 날씨에 따라 천지가 보이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했다. 그에 덩달아 우리도 신선이 되기도 했다가 속세로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비바람이 칠 때는 손이 얼음만큼 찼다가, 햇살이 비출 때는 또 얼마나 따사롭고 평화롭던지, 그럴 수 없이 행복해지는 것이었다. 날씨에 따라 우비를 꺼내거나, 두꺼운 옷을 입고 벗기를 여러 번 했다. 그러나 백두산의 봄은 7월이라더니 백두산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천상화원이었다. 1980년에 이미 세계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특정지역에만 야생화가 자생하는 것이 아니라, 백두산 전역, 전 능선이 화원이었던 것이다.

백운봉을 내려오면서부터 펼쳐지는 오른쪽의 천지는 날씨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몸을 드러내 보여주다 감추다를 거듭했다. 그 모습이 드러날 때, 그 신비스런 장관이란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고, 왼쪽으로 펼쳐진 만주벌판은 끝간데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거기서는 정말 목청껏 소리쳐 보고 싶었다. 내 비록 선구자는 못될지라도, 저 비산비야의 평원을 마음껏 말달려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천지 건너편 북한땅 장군봉은 안개와 구름에 가려 보일락 말락, 우리를 안타깝게 하더니 비록 잠깐이지만 그 선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제 녹명봉(지반봉), 용문봉(차일봉)을 눈앞에 두고 왼쪽으로 긴 능선을 타고 내려오면, 소천지(小天池)에 닿는다. 우리 앞에 가는 산행팀이 「대~한민국」을 소리치는데, 그 말이 왜 그렇게 촌스럽고 역겹게 느껴지던지…. 이미 백두산은 한민족의 땅이라는 정서를 뛰어넘을 만큼 크고 깊고 성스러워 보였다.

중간에 천지달문으로 건너가는 길이 있다지만 위험하다고 한다. 장백폭포를 오른쪽으로 끼고 내려오다가, 온천지대로 내려가는 길이 새로 생겨 우리는 소천지로 가는 길을 버리고 그리로 내려왔다. 아침부터 우리는 11시간쯤 걸은 셈인데, 이근성 대장은 비교적 좋은 성적이라고 우리를 위로했다. 우리는 우리가 걸어온 장정(長征)에 대해 모두 스스로 대견해 했다. 백두산을 종주했다는 뿌듯함, 우리 몸도 이만하면 괜찮다는 자족감으로 산행 뒤의 피로를 씻을 수 있었다.

백두산을 직접 밟고 걷는 맛은 찝차를 타고 오르는 맛과는 천양의 차이가 있다. 운수좋게 잠깐 천지를 보는 느낌과 천변만화하는 천지를 보는 느낌 또한 하늘과 땅 차이다. 날씨의 변화에 따라 백두산의 얼굴 역시 천번 변한다. 하늘이 이렇게 열리는구나 싶은 모습도 보았고, 조용히 하늘나라가 강림하는 것 같은 때도 있었다. 하늘이 노해 세상을 닫아버리고 말 것 같은 무서운 모습을 할 때도 있었다. 주제넘지만 백두산을 내 발로 걸어보지 않고는 백두산을 말하지 말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장백산이라고 부르는데 천지만큼은 그들 지도에도 백두산천지로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 역사학자 안병욱에 의하면 1962년 10월,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중국의 주은래 총리가 변계조약을 체결하면서 그 제1조에 “백두산천지 사이의 변계선은…로 한다”고 한 표현 때문에, 중국과 북한에서 모두 ‘백두산천지’가 공식명칭이 되었다는 것이다.

서파에 가던 날, 우리는 일정 때문에 서파공원 안에 있는 왕지(王池)라는 연못을 구경하지 못했다. 이튿날 새벽 나는, 이번에 보지 못하면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아서, 일어나는 길로 왕지를 찾아나섰다. 그 날은 마침 백두산 종주산행을 하는 날인데, 그날 나는 남보다 왕복 12km이상을 더 걸은 셈이다. 어제 올라올 때 셔틀버스의 안내방송은 왕지에는 청나라 태조의 어릴적 전설이 담겨있다고 했다. 과연 왕지는 백두산 자락 아주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만주 동부의 숙신족, 서부의 동호족을 좌우의 날개로 삼으며 지금의 길림성과 요동지방을 오르내렸던 예맥족, 그 모두에게 백두산은 신비의 땅이요, 나름대로의 성지일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백두산은 육당 최남선이 그의 「백두산 참관기」에서 말한 것처럼 “백두산은 동방문화의 최요(最要)의 핵심이요, 동방의식의 최고의 연원”이라 할 것이다.

고구려의 천도와 발해의 멸망으로 한민족의 발자취는 만주로부터 한반도 안으로 움츠려들었다. 1천년이 흐른 뒤인 19세기에 다시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기 시작하여 중국에서는 조선족, 러시아에서는 고려인이 되었다. 우리는 만주에서 철수한 것을 안타까워하지만, 요∙금∙청 처럼 만주에서 일어나 중원의 패권을 장악하고도 거꾸로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흔적조차, 그 언어까지도 잃어버린 민족도 있다. 만약 우리의 만주에서의 강성이 계속되었더라면 어쩌면 고려와 조선은 없었을지도 모르는 것이 역사다. 그런 점에서 백두산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연변을 비롯한 중국의 동북지방은 무서운 속도로 변하고 있었다. 갈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내가 처음 보았을 때는 연변은 한국인 관광객이 몰려들고, 잘사는 한국으로 달려가는 한국 특수로 다른 지역보다 훨씬 활력이 넘쳐 보였다. 그러다가 심천과 상해 등 중국의 동남해안이 경제특구로 개발되면서 연변은 내륙 깊숙한 오지(奧地)로 다시 전락했다. 그러나 지금 또다시 새로운 활력으로 넘치고 있었다. 고층건물이 들어서고, 교통∙숙박 등 편의시설도 몰라보게 달라지고 있었다. 여기저기가 새롭게 개발되고 있었다.

연길에 도착한 첫 날, 우리는 도문에서 유람선을 타고 조∙중(朝中)국경의 강을 오르내렸다. 북한땅 갈대밭에서, 왜소하고 여윈 북한병사 하나가 부러운 눈초리로 우리를 향해 담배있느냐고 묻는 시늉을 하는 것을 보았다. 여행기간 내내 그 눈빛과 표정이 지워지지 않았다. 중국도, 러시아도 하루가 다르게 천지개벽을 하는데, 북한 만이 변하지 못하고 있다. 백두산 등정길은 그래서 북한, 북한에 있는 우리 민족, 우리 형제들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백두산은 홍익인간의 정신이 계시된 땅이요, 그것이 실현될 땅이어야 한다. 백두산은 두루 인간을 이롭게 하는 홍익문명의 발원지로 새롭게 일으켜 세워야 할 성지다. 여러 민족이 더불어 함께 손에 손잡고, 하늘로 대륙으로 해양으로 소통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야 할 개천(開天)의 땅이다. 북한, 중국, 러시아가 마주치는 두만강변의 방천(防川)에는 “이 곳에는 꽃향기 3국에 넘치고, 웃음소리 3국에 전해지는 곳”이라는 안내판이 있다고 한다. 과연 백두산에서부터 세상의 평화가 시작된다면 그것이 바로 홍익문명의 출발점이 되지 않을까.

 

 

「추기」
연길에서 용정(龍井)까지는 차로 30분 거리다. 이도백하를 거쳐 백두산으로 가고 오면서 용정을 지날 때, 여기 어디쯤이 위공(爲公) 정수일 선생의 고향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모아산(517m)에서 일송정이 있는 비암산 사이까지 장장 17km에 걸친 사과배 과수원이 있다. 과수나무가 15만 그루에 달하고 해마다 봄이면 사과배 꽃이 하얗게 피어 마치 흰 눈이 내린 것 같다고 한다.
이번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일송정은 원래 정자가 아니라 비암산 북쪽 벼랑 꼭대기에 소나무 한그루가 푸르름을 자랑하며 우뚝 솟아있던 것이 정자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일송정에 대한 조선인들의 찬송이 높아지자 일제는 일송정 원 가지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안에 후추씨를 밀어넣고는 대못을 박아 봉해버렸다. 이때부터 일송정은 시들기 시작하더니 1938년에 말라죽었다. 세월은 흘러 50년, 다시 소나무 한 그루가 옮겨 심어졌고, 정자도 새로 세워졌다. 언젠가 정수일 선생과 함께 가볍고 허허로운 마음으로, 백두산에 함께 오르고, 그리고 그의 고향 용정에도 한번 같이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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