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다산(茶山)의 길을 더듬으며
[시론] 다산(茶山)의 길을 더듬으며
  • 전대열<大記者>
  • 승인 2012.04.03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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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조선왕조 정조시대 사람이다. 정조의 지극한 존경과 사랑을 받았으나 붕당싸움의 여파에 휩쓸려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된 후 무려 18년 동안 돌아오지 못하고 오직 저술에만 열중하여 6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목민심서(牧民心書)와 경세유표(經世遺表)는 그의 대표작이다.

컴퓨터도 없던 시절 붓으로만 써서 600여 권의 저술을 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의 형제 세 사람은 모두 천재로 알려져 있는데 큰형 정약종은 천주교 교리를 책으로 펴냈다가 사형되었고, 둘째형 정약전은 정약용과 함께 귀양을 갔다. 그는 흑산도에서 19년간 귀양을 살며 물고기를 관찰하여 ‘자산어보’를 펴냈다.

자산어보는 흑산도 일대의 물고기에 대한 집중적 연구의 대저서다. 일일이 그림을 그려 그 형태를 확인하고 생태에 대한 깊은 고찰을 통해 지금까지도 한국 수산업계와 학계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이런 형제 틈에서 자란 다산은 1762년에 태어나 1836년에 졸(卒)했으니 당시로서는 대단히 장수한 셈이다.

오랜 세월 귀양을 살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잃지 않고 욕심을 버린 채 나라를 걱정하는 저술에만 심혈을 쏟은 것이 오히려 건강에 도움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저술의 집중력이 정신을 맑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다산이 유배 중 10년을 머물며 저술에만 열중한 시기는 1808년부터 1818년 사이다. 다산초당(茶山草堂)이 그 곳이다. 다산초당은 세 칸으로 지어진 조그마한 집이지만 만덕산 기슭에 자리 잡아 조금만 휘돌아 올라가면 드넓은 강진만이 펼쳐진다.

그는 강진만을 조망할 수 있는 이 언덕에서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맞으며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는 형 정약전을 마음속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리운 형을 만날 수 없는 귀양살이의 설움을 흠뻑 쏟았을 이 자리에는 지금 천일각(天一閣)이 지어져 있다.

어떤 안내문에 보면 천일각을 예전 다산이 있을 때부터의 정자로 표현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강진군에서 1975년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다산은 원래 있던 연못을 넓혀 초당 옆에 앙증맞은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을 조성했다. 연못 한 가운데 바닷가에서 주어온 돌을 쌓아 봉우리를 지었다. 연못에는 팔뚝만한 잉어들이 뛰놀았을 것이다. 그는 초당 옆 구석방에 관어재(觀漁齋)라 현판을 걸고 대롱을 타고 내려오는 자연수가 연못에 떨어지는 물소리에 스스로 취했다. 다산은 잉어의 움직임을 보고 날씨를 알아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다산초당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 담론했지만 2천여권의 책을 갖춰 놓고 집필에 몰두한 곳은 동암(東庵)이다. 송풍암이라고도 하며 일명 송풍루(松風樓)라 부른다. 초당에서 3~40보 떨어져 있다. 동암의 현판은 보정산방(寶丁山房)이라 했는데 추사(秋史)의 친필을 모각(模刻)했다.

그 옆에 다산동암(茶山東庵)이라는 현판은 다산이 쓴 글씨를 여러군데서 집자(集字)한 것이다. 광화문을 복원하면서 세종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나 비슷한 발상이다. 다산은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방법 등에 대한 관심이 가장 많았다. 당시 관료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는 병역과 세금을 무기로 착취행위가 굳어져 이로 인한 피해는 원성으로 뒤 덮여졌다.

가장 올바른 정치를 했다는 정조시대가 그 정도였으니 다른 시대에는 이보다 훨씬 자심했다. 다산을 찾아오는 백성들과 선비들은 그의 해박한 식견을 듣고 철학에 심취했다. 그가 다산초당을 중심으로 저술에 전념하면서 그의 철학에 영향을 끼쳤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 혜장법사라고 할 수 있다.

혜장법사는 만덕산에 있는 백련사에 주석하고 있었다. 속세의 나이로 치면 다산보다 네 살 아래였다. 혜장은 비록 불문(佛門)에 들었지만 성리학에도 달통하고 유학적 식견이 밝아 처음에는 다산을 낮춰봤으나 일단 담론을 튼 다음에는 가장 존경하는 선배로 모셨다.

다산 역시 혜장을 ‘숙유(宿儒)’라고 부르며 그의 식견을 저술에 많이 인용했다. 1804년 다산이 시로 쓴 사회비평 ‘독소(獨笑)’는 250년 전에 쓴 것이지만 오늘 날에도 교훈으로 와 닿는다. 사람의 행태에 대한 비평시지만 그 뜻은 무한히 깊다.

유율무인식(有栗無人食) 양식이 많은 집은 자식이 귀하고
다남필환기(多男必患飢) 아들이 많은 집엔 굶주림이 있으며
달관필준우(達官必蠢愚) 높은 벼슬아치는 꼭 멍청하고
재자무소시(才者無所施) 재주있는 인재는 재주 펼 길이 없네
가보소완복(家寶少完福) 완전한 복을 갖춘 집 드물고
지도상능지(至道常陵遲) 지극한 도는 늘상 쇠퇴하기 마련이며
옹색자매탕(翁嗇子每蕩) 아비가 절약하면 아들은 방탕하고
부혜랑필치(婦慧郞必癡) 아내가 지혜로우면 남편은 바보이다
월만빈치운(月滿頻値雲) 보름달 뜨면 구름 자주 끼고
화개풍오지(花開風誤之) 꽃이 활짝 피면 바람이 불어대지
물물진여차(物物盡如此) 세상일이란 모두 이런거야
독소무인지(獨笑無人知) 나 홀로 웃는 까닭 아는 이 없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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