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광개토대왕 비문(碑文) 내용을 아는가?
[시론] 광개토대왕 비문(碑文) 내용을 아는가?
  • 전대열<大記者>
  • 승인 2012.08.0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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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이라고 하면 누구나 다 안다. 고구려의 왕으로 만주벌판을 누비며 오랑캐를 무찌르고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정복자다. 그가 왕으로 재위하고 있을 때 고구려의 영토가 가장 넓었고 주위의 강국들이 모두 숨을 죽였다.

광개토대왕이 가는 곳에는 제대로 대항할만한 나라가 사실상 없다고 할 만큼 그의 기세는 상대국을 압도했다. 그가 3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것은 고구려를 위해서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장수왕 역시 아버지 못지않은 강자였다. 광개토대왕이 개척해 놓은 광활한 영토를 잘 수습하고 외적이 넘보지 못하게 만들어 태평연월을 노래하게 하였으니 고구려 역사상 최고의 국위를 자랑했다.

지금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무덤은 중국 길림성 집안시(集安市)에 있다. 집안시는 고구려 수도 국내성의 중국 이름이다. 고구려의 역사는 한민족의 일원으로 우리 역사의 백미(白眉)를 이루고 있지만 중국은 근래에 들어 동북공정이라는 미명 하에 고구려를 중국 변방국의 하나로 흡수하는 망발을 서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병존의 역사 속에서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거대하다. 고구려는 삼국 중에서 가장 강성한 나라였으며 한반도 남쪽에 치우친 백제 신라와 달리 만주벌판에 자리 잡고 수나라, 당나라 등 주로 이민족(異民族)인 중국과 맞싸워야 했다.

수나라 대군을 몰살시킨 을지문덕과 당나라를 크게 이긴 연개소문의 활약은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크게 높이고 있다.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무너뜨리고 삼국통일을 이룩한 것은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의 약소화를 자초한 일이었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광개토대왕 등 고구려에서 확보하고 있던 광활한 영토를 모두 당나라에 넘겨주고 겨우 평양 이남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그 뒤 고려가 육진개척을 통해서 함경도 등 녹둔도 일대까지 관할하게 되었고 봉금(封禁)지역을 남긴 채 대체적으로 오늘날의 경계선을 획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북한과 중국의 경계는 압록강과 두만강 그리고 백두산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다. 두만강의 어떤 곳은 아주 가까워 일과보(一跨步)라는 이름이 붙어 있을 정도로 바로 코앞이다. 굶어죽지 않으려고, 정치적 자유를 찾아서, 수많은 북한주민들이 죽음의 탈출을 감행하는 곳도 이 지역이다. 탈북행렬은 김정일 체제하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졌으며 그 숫자는 무려 50만을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들에 대한 끊임없는 인권탄압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모두 만주일대의 고구려 영토가 중국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중국과의 관계모색에 매달려 있는 처지다. 백두산 관광, 고구려 유적답사, 독립군 전적지 탐방 등 중국을 거쳐야만 가능하다. 그 중에서도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 유적답사의 필수코스다.

광개토대왕비는 65톤의 거대한 자연석에 4면을 채운 비문이 보는 이를 숙연하게 한다. 저 수많은 글자를 어떻게 쓰고 각인했을까. 고구려인들의 끈기와 문화적 양식을 존경하게 만든다. 문제는 비문의 내용이다. 비를 맨 처음 발견했던 일본군이 일부 내용을 바꿨다는 얘기가 오랫동안 역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 중의 하나가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桓因)으로 바꿨다는 얘기다. 국(國)을 인(因)으로 바꿔 “예전에 환국이 있었다.”가 환인이 있었다로 바꾼 것이다. 이는 우리 선조의 나라가 있었다는 것을 환인이라는 선조가 있었다는 것으로 탈바꿈하여 나라가 아닌 사람으로 격하시킨 것이라는 얘기다.

역사가가 아닌 범인(凡人)들의 입장에서 자세한 내용은 이해하기도 힘들다. 다만 전체 내용을 조금이라도 알고 관람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대충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비문의 첫머리는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건립할 때 그의 부모의 내력(來歷)을 자세히 기록했다.

북부여 천제의 아들인 부친은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온 하백여랑을 아내로 삼았다. 비류곡 홀본지방 산 위에 성을 쌓아 도읍을 삼았다는 대목은 현재 오녀산성으로 불리는 고구려 첫 수도인 졸본성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비류곡은 비류수를 뜻한다. 추모왕을 이은 유류왕(유리왕) 때 나라를 잘 다스렸다.

19대 왕으로 광개토대왕이 즉위했다. 나이 18세로 22년간 국위를 떨쳤다. 영락태왕이라고도 부른다. 재위 중 비려와 거란을 복속시켰으며 백제와 신라는 조공을 바쳐왔다. 백제는 한 때 강력히 대항했으나 아리수를 건너 대왕의 군대가 다가오자 항복했다.

그 뒤 백제는 왜나라와 손을 잡고 조공을 거부했다. 신라의 호소를 들은 대왕이 대병을 파견하여 왜군과 백제를 무너뜨렸다. 왜국은 항복과 배신을 거듭했다. 대왕은 친히 이들을 정복했다. 특히 조상과 선왕(先王)의 묘소를 지키는데 만전을 기하도록 하고 전매를 못하게 규정하여 비록 부유한 사람이라도 마음대로 살 수가 없다. 이 명령을 어기면 형을 받는다.

비문의 마지막이 수묘(守墓)문제를 부각시킨 것은 그가 고국천왕의 뒤를 이은 왕으로서의 도리를 다한 모범적인 태도를 견지했음을 알게 한다. 비문 전체를 개략적으로 살폈지만 오랜 세월 풍설에 씻겨나간 글자도 많아 선인들의 발자취를 주마간산으로 더듬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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