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장준하죽음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시론] 장준하죽음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 전대열<大記者>
  • 승인 2012.08.21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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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8월17일. 금년 여름이 지긋지긋하게 더웠지만 37년 전 당일 기온도 36도를 기록했다. 당시 장준하는 유신헌법개정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다가 긴급조치 1호가 발동하면서 투옥되었다. 그러나 옥중에서 20대 때의 병력(病歷)인 심장병이 재발되어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있는 처지였다.

그는 10월 유신이 발표되자 이에 반대의 기치를 높이든 양일동(梁一東), 김홍일(金弘壹), 정화암(鄭華岩) 등 항일독립운동의 거목들과 함께 민주통일당을 창당하고 최고위원에 취임한다. 양일동은 전북 옥구 출신으로 중동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에 적극 가담했다는 이유로 퇴학처분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흑색동맹에서 지하신문을 발행하는 등 사회주의 활동을 한 사람이다. 일본경찰에 적발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3년6월의 징역살이까지 했다.

석방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임시정부에서 정화암의 지도로 조국광복운동에 전념한다. 해방 후에는 여운형이 주도하는 건준(建準) 옥구군지부장을 역임하며 정치에 뛰어들어 3대 국회의원으로 의정단상에 진출한다.

양일동은 원래 사회주의에 심취하여 진보적 이념을 내세웠으나 4대선거 때는 야당인 민주당을 선택하여 압도적으로 재선의 고비를 넘기며 단박에 거물 정치인 반열에 오른다. 출중한 리더십으로 많은 이들을 포용했다. 자유당 정권의 막바지였던 4.19혁명 직전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던 마산에서 김주열학생이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날 데모에서만 학생 7명이 경찰의 발포로 희생되었다. 민주당에서는 투쟁 이미지가 강한 양일동을 진상조사위원장으로 임명하고 즉각 진상조사에 들어갔다. 이 때 국회를 대표한 양일동의 활약은 자유당 경찰의 불법발포와 평화적 시위를 탄압한 사실 등이 극적으로 전국에 전파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장준하는 월간 사상계를 통하여 이승만정권의 부정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해왔으며 모든 대학생들의 정신무장에 큰 공헌을 했다. 자유 정의 평화로 상징되는 4.19혁명은 전국 학생의 궐기로 완성되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언론과 야당의 강인한 투쟁력도 높이 평가해야 할 대목이다.

그런 의미에서 양일동과 장준하는 사석(私席)에서는 언제나 ‘형님 동생’으로 통했고 독립운동을 했던 개인경력도 두 분의 우정을 더욱 두텁게 했다. 그들이 유신반대에 앞장선 민주통일당을 창당하고 반독재투쟁을 전개한 것은 자연스런 흐름이었다. 장준하는 개헌운동을 펼치면서 행여 당에 누를 끼칠까싶어 탈당계를 제출했으나 양일동은 그 자리에서 찢어버리고 전국 당원으로 하여금 서명운동을 더욱 강화할 것을 지시한다.

장준하가 구속되자 석방위원회를 구성하고 최고위원으로서 변론 등 옥중 뒷바라지에도 차질이 없었다. 뜻 아니 한 사고로 장준하 사망이 확인되자 양일동은 즉각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 필자로 하여금 실무책임자로 진상을 조사도록 만반의 조치를 취했다.

장준하의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졌으며 돈이 없던 유족들은 파주 광탄 나사렛 천주교묘지에 큰 맘 먹고 30평의 음택(陰宅)을 마련했다. 그러나 한 시대를 누빈 장준하의 음택으로는 너무 초라해 보였다. 양일동은 장례 다음날 장준하의 장남 장호권과 필자를 불러 당시로서는 거금을 주며 묘지 50평을 추가하여 확장할 것을 지시했다.

나사렛묘지는 종로3가 성당 소속이어서 백일성 주임신부와 상의하여 3일만에 확장을 완료했다. 5년 뒤 양일동이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동생 장준하 곁으로 떠날 때까지 나사렛묘지는 양일동의 손으로 가꿔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마에 허물어지면 축대를 다시 쌓았고, 시든 떼를 살리기 위해서 객토도 여러 번 했다. 독립운동과 반독재투쟁으로 뭉쳤던 두 분의 우정은 아마 지금도 하늘에서 계속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번에 37년간 묻혀있던 장준하 유골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에 추모공원을 조성하고 지난 8월1일 이장했다.

유족들은 서울의대 법의학교수를 초빙하여 유골감식에 나섰다. 사망 당시 심국진, 조철구, 조광현 등 의사 세 사람이 각기 촉진과 육안으로만 검시했던 보고서는 남아있지만 ‘부검’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사인을 밝히는 데는 부족함이 있었다. 유골상태로 보면 사망에 이른 치명적 상처는 직경 6cm 정도의 커다란 두개골 함몰로 밝혀졌다.

이 상처가 과연 추락 당시 부딪쳐 난 것인지, 아니면 해머 등으로 뒤에서 가격한 것인지 단정할 근거는 없다. 필자는 37주기 추도식을 마치고 J TBC 심수미기자 등 중앙일보 팀과 추락 현장으로 알려진 포천군 이동면 도평3리 약사봉 계곡을 답사했다. 인터뷰도 했다.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추락사가 아니라는 심증에는 변함이 없다. 16m 50cm 5층 높이에서 73kg의 사람이 추락하면 내장파열로 입으로 피가 나와야 하며 팔과 다리 등에 골절상이 있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장준하의 시신은 반듯하게 누워있었고 긁힌 자국도 없이 말짱했다. 오직 머리 뒷부분에 함몰상태만 발견되었을 뿐이다.

유일한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은 아직도 진실을 토로하지 않는다. 백범 김구를 쐈던 안두희가 죽을 때까지 ‘배후’에 대해서 함구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장준하기념사업회는 어떤 단정도 거부하고“추락사는 아니다” “국가기관에서 진상을 밝히라”고만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장준하 죽음의 진실은 오해의 전제 없이 객관적으로 밝혀지는 게 순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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