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4.19희생자 김태년, 서현무의 영혼결혼
[시론] 4.19희생자 김태년, 서현무의 영혼결혼
  • 전대열<大記者>
  • 승인 2012.08.2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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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결혼이란 봉건주의 시대에도 있었던 제도다. 이승에서 맺지 못한 한 쌍의 남녀를 죽은 후에 형식이나마 부부의 연을 갖게 하는 것으로 안타깝고 눈물겨운 행사의 하나다.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양가 부모의 반대로 연을 맺을 수 없었던 애인끼리 동반자살을 했을 때 뒤늦게 후회한 부모들끼리 서둘러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성대한 영혼결혼식을 올리는 수도 있다.

그런가하면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은 살아났을 때에도 산 자가 죽은 자와 영혼결혼식을 하는 예도 없지 않다. 아무튼 영혼결혼식이란 눈물과 슬픔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애틋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4.19혁명이라는 역사의 변환기 중심에 있던 대학생 두 사람이 영혼이나마 부부로 연을 맺고 합장하여 한 곳에서 영원히 살게 된 것은 참으로 가슴 떨리는 슬픔과 희망을 함께 준다.

그들의 이름은 김태년(金泰年) 서현무(徐鉉戊).

김태년은 중앙대 약대 3학년이었고, 서현무는 법대 2학년이었다. 김태년은 4.19 당일 중앙대생을 이끌고 한강 다리를 넘어 을지로2가에 있는 내무부 앞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앞장섰다.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수많은 학생들이 죽고 다쳤다. 김태년은 김정일, 김병일, 박대선 등 3학년 학우들의 가슴에 안겨 “부정선거는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고 외마디 절규를 하며 숨을 거뒀다.

서현무는 여학생들을 이끌고 맨 앞에서 플래카드를 움켜쥔 채 이승만 정권을 향한 저항의 구호를 외치며 끝가지 버텼다. 발포에 놀란 학생들이 뿔뿔이 살 길을 찾고 있을 때 가녀린 그는 경찰에 체포되어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학생들의 데모에 극도로 흥분한 경찰관들은 붙잡힌 학생들에게 분풀이 고문을 자행했다. 서현무는 몽둥이와 구둣발에 짓이겨지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을 만큼 두들겨 맞았다. 4.19혁명의 성공으로 경찰에서 풀려나긴 했으나 시름시름 앓으며 학교에 나갔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제대로 병원치료를 받지도 못하고 시계를 팔아 그나마 진통제를 사먹었다. 그리고 석 달도 못 되어 한 많은 세상을 떴다. 1960년 7월 3일자 동아일보는 4.19혁명의 위대한 희생자 서현무의 죽음을 ‘쓸쓸히 진 혁명의 꽃’이라는 제하에 사진과 함께 무려 8단 기사로 크게 보도했다.

‘2일 첫새벽, 정확한 시각으론 상오 3시 30분, 서울시내 혜화동에 있는 수도의과대학 부속병원 공동실 58호 병실에서 23세의 한 여성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이름은 서현무-중앙대학교 법과 2년생, 넓은 방 한 옆에 놓여 진 그의 침대 끝에는 홀어머니 박어련(55)씨와 먼 친척 두 사람과 고교시절부터의 친구 한 사람만이 서 있는 쓸쓸한 임종이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중부서에 끌려가 고문당했던 실상을 자세히 썼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억울하게 숨진 서현무의 안타까운 사정을 ’태(兌)‘ 기자의 손으로 낱낱이 보도한 것이다. 서현무는 병상에 누워서도 4.19를 증언하는 일기체의 유고를 남겼다. 이 일기는 그가 재학한 중대신문(中大新聞)에 게재되었으나 이 신문은 중대신문사에서도 보관하지 못하여 실체를 찾지 못했다. 그 뒤 이영재 교수가 철해두었던 신문철에서 이를 찾아내 여성신문에서 연재하는 다행을 얻었다.

이들과 함께 4.19를 이끌었던 법과 3학년 김정일(金正一)은 전북 정읍 출신으로 졸업 후 체신부 공무원이 된다. 누구보다도 정의감이 강했던 김정일은 중앙대 뒷 정원에 서있는 의혈탑(義血塔)을 바라보며 두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4.19혁명의 의의를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공무원의 신분이어서 군사정권의 눈치를 살피며 4.19학생혁명의 정신선양에 관심을 쏟았다. 특히 학우였던 김태년과 서현무가 살아생전에는 인연이 없었으나 사후 양가부모들이 서둘러 1960년 12월 13일 조계사에서 영혼결혼식을 올린 후에도 두 부부의 묘소는 수유리 묘지에 따로따로 묻혀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김정일은 민주화 이후 두 사람의 합장을 적극 추진했다.

서현무의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마저 사망한 후여서 김정일은 사실상 서현무의 가족대행 역할을 수행했으며 합장을 위해서 언론과 관계부처에 그 실상을 알리고 진정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심지어 ‘왜 쓸데없는 일에 앞장서느냐.’는 핀잔까지 들어야했다 그러나 김정일의 생각은 달랐다.

비록 영혼끼리 맺은 인연이라고 할지라도 자유, 평화, 정의를 위해서 함께 싸우다가 희생당한 두 사람의 유골이나마 한 자리에서 해로하는 것은 영혼을 위로할뿐더러 후인들에게도 영원히 아로새겨질 귀감이 되는 일이라고 확신했다. 국가보훈처에서도 뒤늦게 그 뜻을 깨닫고 합장을 허락했다. 1995년 11월 19일 김태년, 서현무 부부는 영원히 함께할 진정한 부부로 4.19혁명 민주묘지에서 합장식을 거행했다. 김정일의 끈질긴 집념과 4.19 영혼들의 간절한 바람이 뜻을 맺는 순간이었다.

김태년, 서현무. 영원히 살아라! 삼가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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