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1] 오스트리아의 한인동포 - 정진우 전 서울대 음대학장
[연재-1] 오스트리아의 한인동포 - 정진우 전 서울대 음대학장
  • 월드코리안
  • 승인 2012.10.30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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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유학

이글은 오스트라아한인연합회가 최근 발행한 ‘오스트리아 속의 한국인’(출판사 리더스가이드)에 담긴 내용이다. ‘오스트리아...’에는 1930년대 오스트리아에서 유학한 한국인의 모습, 한인 2세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한국 음악계의 대부인 정진우, 신수정 교수, 안병영 전 교육부 장관, 김현욱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등 오스트리아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인 다양한 인물들도 소개돼 있다.<편집자주>

▲ 당시 비엔나 동회 모습(고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셋째줄 맨 왼쪽 정진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정식으로 처음 유학 온 사람은 정진우(피아노, 전 서울대 음대학장)였다. 그는 1957년 3월 미군이 쓰던 활주로를 개조한 여의도 비행장을 통해 일본, 홍콩, 싱가폴, 이스탄불, 로마, 뮌헨을 거쳐 빈에 도착하였다. 정진우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로 활동하면서도 음대에서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었다.

1956년 유럽에 들렀던 임원식 KBS 교향악단 초대 상임지휘자가 돌아가는 길에 빈 국립음대(Universität für Musik und darstellende Kunst Wien) 입학원서를 가져다준 것이 계기가 되어 빈으로 오게 되었다. 정진우는 원래 빈 국립음대에 입학했으나 새로운 현대음악을 배우기 위해서 빈 콘서바토리움(Konservatorium der Stadt Wien, Privatuniversität은 2005년부터 명칭으로 붙음)으로 옮겼다. 어렵게 유학 왔는데 대부분 익숙한 고전음악만 배우고 가느니 현대음악을 배워 가는 것이 낫겠다는 주변의 충고에 따른 결정이었다.

두 번째 유학생은 한양대학교 음대에서 피아노를 오랫동안 가르쳤던 권기택이다. 원래 독일의 프라이부르크를 목적지로 정하였지만, 관광을 위해 빈에 들렀다가 정진우의 권유로 머물렀다. 세 번째 유학생은 광주대학교에서 오래 봉직한 서양사 전공의 이태영이었다. 그 밖에 조상현(전 한양대 음대학장), 김달성(전 단국대 음대교수), 그리고 물리학, 화학, 원자력 공학 등의 자연과학 전공 유학생들이 다수 합류하여 1958년 학기가 시작할 때쯤에는 10여 명의 한인 유학생이 빈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들은 한인 유학생회 이름을 ‘비엔나 동회洞會’로 명명했는데, 초대 회장으로는 정진우가 추대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유학생은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권기택은 정진우의 도움으로 그의 집 근처에 방을 구하였다. 김달성, 조상현 등은 방값이 싼 국립 오페라 Staatsoper극장 부근에서 살았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휴일에 서로의 하숙집을 방문하여 회포를 풀곤 했는데, 때때로 고국에서 사진이 오거나 슬픈 사연이라도 전해오면 서로 붙잡고 울었다.

당시 파리 유네스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유럽을 여행하던 현제명(서울대 음대학장)이 정진우를 만나기 위해 빈으로 왔다. 화창한 봄 날씨에 학생축제가 열리던 시즌이라 마침 정진우의 연주회 프로그램도 있었다. 정진우가 연주를 마치고 무대를 내려오자 뒤에서 그를 기다렸던 현제명은 눈물을 흘리고 “정 군을 보니 불원천리하고 달려온 보람이 느껴진다”며 격하게 부둥켜안고 감격스러워 하였다. 현제명은 일제 말기 연희전문학교에서 오래 봉직하다가 미국 시카고 음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해방 후에는 경성음악학교를 설립하여 음대학장으로 우리나라 초창기 음악교육을 주도하고 있었다.

현제명은 정진우에게 국내로 올 것을 제안하였다. “이보게 정 군! 우리가 할 일은 우선 교육이네! 토양이 있고, 나무가 길러져야 이 빈의 숲 같은 음악 사회도 만들어질 것 아닌가?”정진우는 1959년 4월 한국으로 귀국, 이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부임해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며 한국 피아노 음악의 명실상부한 대부가 되었다.(참조: 정진우, 음연, 2008)

정진우가 귀국한 해에 파리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한 양해엽 전 서울대 음대교수가 빈 국립음대(Universität für Musik und darstellende Kunst Wien)로 옮겨 빈에 체류하였다. 오랫동안 서울대에서 바이올린을 가르쳤는데, 그의 두 아들(양성식, 양성원)은 바이올린과 첼로의 세계적인 연주가들이 되었다. 1959년 이후 다양한 분야의 유학생들이 빈으로 오게 되는데, 그것은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가 한국의 가난한 유학생을 모집하였기 때문이다.

1959년에 대구 출신인 김병옥(철학), 김봉양(철학), 김진균(음악학, 역사학)이 처음으로 왔고, 1960년부터는 인원이 늘어났다. 김혜자(피아노), 이우영(행정학), 박명(생물학), 박일희(약학), 서정희(독문학), 손재준(독문학), 이경인(교육학), 이광규(인류학), 이종희(물리학), 이혜정(약학), 정창식(의학), 전봉덕(수학)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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