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3] 오스트리아의 한인동포 - 의술에 실어 보내는 사랑, 정창식·서혜숙 부부
[연재-3] 오스트리아의 한인동포 - 의술에 실어 보내는 사랑, 정창식·서혜숙 부부
  • 월드코리안
  • 승인 2012.11.05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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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한인사회를 구성한 사람들

이글은 오스트라아한인연합회가 최근 발행한 ‘오스트리아 속의 한국인’(출판사 리더스가이드)에 담긴 내용이다. ‘오스트리아...’에는 1930년대 오스트리아에서 유학한 한국인의 모습, 한인 2세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한국 음악계의 대부인 정진우, 신수정 교수, 안병영 전 교육부 장관, 김현욱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등 오스트리아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인 다양한 인물들도 소개돼 있다.<편집자주>

정창식은 평소 친분이 있던 오스트리아 신부님을 통해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에서 장학 프로그램으로 유학생을 모집한다는 정보를 들었다. 정창식은 선발된 후 이를 일생일대의 기회라 여기고 독일어를 공부하는 등 유학 준비를 하여 4·19혁명이 일어나기 전날 오스트리아로 떠났다. 옷상자를 들고 고무신을 신은 채 오른 유럽행 이태리 화물선에 몸을 실은 후 3개월이 걸렸다.

▲ 정창식 교수
“배를 타고 오는데 고생했던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뱃멀미도 뱃멀미였지만 3개월 동안 매일 이태리식 스파게티와 라쟈니아(Lasagne: 이탈리아 전통 음식으로 고기, 채소가 든 밀가루 반죽을 치즈로 덮은 음식)를 주는데 한국 음식이 생각나 견디기 힘들었죠. 어머니께서 챙겨주신 삶은 오징어를 넣은 고추장과 된장을 먹으려는데 냄새가 고약하기도 했고 배에서는 외부음식 반입이 금지됐습니다. 하는 수 없이 갑판에서 몰래 된장을 끓여 먹으려 했는데 요리사가 어디에선가 냄새를 맡고 금방 쫓아왔습니다. 순간 당황했지만 상황을 넘겨보려고 배 멀미가 심해 멀미약을 먹는다는 핑계를 대며, ‘한국에선 된장이 멀미약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요리사는 ‘나는 그 냄새를 맡으니 골치가 아픈데 너는 병이 낫는다니 신기하구나’라고 기겁을 하며 빨리 먹고 치우라고 하더군요.”우여곡절 끝에 빈에 입성한 정창식은 그때의 기억을 이렇게 회상한다. “오스트리아의 첫인상은 상상했듯이 천국과도 같았습니다. 당시 한국의 모습과 비교하면 모든 것이 화려했고 아름다웠습니다.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의 도움으로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잘 이뤄졌습니다.”

정창식은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오스트리아행을 결심했지만, 의학을 전공했다. “막상 오스트리아에 와보니 조국에 있는 한국사람들을 도우려면 철학보다는 의학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박애정신이었고, 철학은 의학 공부를 끝낸 후에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의학을 공부 하려 하자 주변 사람들이 반대하였다. 스물여섯 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도 나이지만 외국인에게 의학은 쉽지 않은 학문이기 때문이었다. 정창식은 빈 의대 학과장의 특별조치로 1961년 의대에 입학하였다. “주변 사람들의 만류를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람이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그것이 무엇이든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확신을 갖고 성실히, 그리고 열심히 학교를 다녔죠. 옷장도 없는 창고 같은좁은 방에선 잠만 자고 대부분의 시간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며 보냈습니다. 그러지 않고선 학업을 따라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해 공부를 했던 정창식은 1967~1968년 겨울학기에 빈 의대를 졸업하였다. 서양에서 동양인이 산부인과 의사로서 활동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정창식이 산부인과를 선택한 이유는 자신이 그때까지 받은 도움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이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제가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올 수 있었죠. 특히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의 후원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저를 도와주었던 분들에게 보답을 해야겠다는 고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산부인과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일종의 의무감도 있었습니다.”

정창식은 의대 졸업 후 니더외스터라이히 Niderösterreich 주 미스텔바흐 Mistellbach에 위치한 바인피어텔 지방종합병원 Landesklinikum Weinviertel에서 산부인과 전문의 과정을 밟았다. “환자들에게 가족이 없느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 누구보다 야간근무를 많이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몸은 고단했지만 환자를 치료하는 보람 때문에 늘 즐거웠습니다.”

▲ 1968년 오스트리아 한인들과 함께(정 박사는 앞줄 맨 왼쪽)

병원은 완벽한 수술로 환자들의 후유증이 적었기 때문에 적혈구 사냥꾼 Erythrozytenjäger이라는 별명을 지어주고 산부인과 과장으로 추천했지만 과도한 업무량 때문에 그만두고 미스텔바흐에서 개인병원을 개업하였다. 개인병원은 성공적이었다. 종합병원에서의 인기가 이어져 하루 100명이 넘는 환자들이 병원에 줄을 서곤 하였다. 40여 년 간 환자를 돌본 그는 2004년 의사생활을 마무리하고 정년퇴임하였다.

1995년 10월 어느 날, 그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프란츠 푹스 Franz Fuchs가 보낸 폭탄편지였다. 이미 폭탄편지 테러 때문에 빈 시장 헬무트 질크 Helmut Zilk도 왼손을 잃은 상태였다. 푹스는 난민들에게 무료의술을 펼친 정창식 부부 등 난민과 관련된 사람에게 폭탄편지를 붙였다. 영문을 모른 채 편지를 열었다면, 안타깝게도 다른 사람들처럼 손을 다쳤을 것이다.

“그날 테러소식을 접한 경찰병원 의사 친구가 저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수상한 편지가 왔을 경우 조심하라고 하더군요. 바로 경찰에 신고했고, 그 편지는 푹스가 보낸 폭탄편지로 밝혀졌습니다.” 터지지 않은 그의 편지는 푹스를 잡는데 중요한 증거물 역할을 하였다. 정창식은 1973년 서혜숙과 결혼하였다.

서혜숙은 인천 박문여고를 졸업하고 독일 본Bonn의 간호학교에서 3년 동안 공부했는데, 다시 의학 공부를하고 싶어 빈으로 왔다. 그녀는 원래 소아과를 전공하려고 했지만, 워낙 밤일이 많아서 가정의를 택하였다.

4대를 이어서 본 환자들도 있었고, 미스텔 바흐의 시 의사 중의 한 명이어서 학교와 군대까지 가서 진찰을 하기도 하였다. 1980년에 한글학교를 열어 활동했는데, 한국에서 온 부모와 오스트리아에서 자란 자식들 간의 의사소통을 위해서였다. 현재 정창식, 서혜숙 부부는 은퇴하여 오스트리아 한인들의 최고 원로로서 한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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