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이민기록문학상 수상작-3] 서정순(중국)
[제1회 이민기록문학상 수상작-3] 서정순(중국)
  • 월드코리안
  • 승인 2012.11.08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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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이민기록부문)/사람들은 나를 “살아있는 소리의 전설”이라고 한다.

본지는 7월15일부터 9월20일까지 2012 제1회 월드코리안신문 이민기록문학상을 공모, 응모된 46명의 작품들을 대상으로 10월18일 심사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응모전에는 이민기록부문의 대상을 수상한 ‘정요한 옹의 인생역전’(캐나다 송광호), 이민문학부문의 대상을 수상한 ‘어머니가 그리운 날’(파라과이 고용철)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우수한 작품들이 출품, 본지는 이들 작품들을 연재할 계획이다.<편집자 주>

- 제1회 이민기록문학상 이민기록부문 우수상
- 구술 신옥화 정리 서정순

나는 1919년 음력 7월 4일 한국 전라북도 전주군 구인면 흑석골에서 아버지 신 대원 씨와 어머니 이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우로는 다섯 살 이상인 오빠가 있었고 아래로는 두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었다. 아버지는 갓 태어난 나를 보고 “야, 우리 신가네 집에 이쁜 딸 하나 놔났구나. 참 이쁘다”면서 내 이름을 이쁜이라고 지어주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 마을의 소작농이었던 것 같다. 마을에 대나무 밭을 끼고 사는 큰 부자가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 집 논을 부쳐서 바칠 것 바치고 남는 것은 우리 집 식량으로 하였다. 그 외에 모자라는 식량 부분은 나무를 해다 팔아서 해결하군 하였다. 그런데 내가 다섯 살 나는 해 아버지는 도시락 밥을 싸가지고 다니며 일하다 체증에 걸렸는데 약 한 첩 쓰지 못하다 보니 그것이 쌓이고 쌓여 큰 병이 되었다. 그때로부터 아버지는 집에 들어앉게 되었다.

그래서 엄마가 잘사는 집의 삯일을 해주고 하면서 그럭저럭 살았던 것 같다. 엄마가 잘사는 집의 녹 그릇을 닦던 모습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그 사이에 한번은 마을에서 죽은 돼지를 잡은 적이 있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앓는다고 마을 분들이 삶은 돼지고기를 풀잎에 싸서 보내왔다. 그날 밤 그것을 먹고 나의 세 살 난 여동생이 배가 아프다고 데굴데굴 굴다가 그 길로 죽어버렸다. 그 여동생이 죽은 후에 말썽을 부리려고 그랬던지 막내 남동생이 또 태어났다. 그때 내 나이가 아홉 살이었다.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니 엄마의 누웠던 자리가 허전했다. 병들어 꼼짝 못하고 방안에 앉아있는 아버지와 자식 셋을 남겨두고 엄마는 젖먹이 막내 남동생만 업고 어디론가 나가버렸다. “엄마야” 부르며 밖으로 뛰어나가니 아버지가 문을 털썩 열더니만 “이쁜아, 내가 조금 있으면 엄마 찾아 줄 테니 가만 있거라. 어디로 가지 마라. 들어오너라. 들어와”하고 말하는데 얼핏 뒤를 돌아보니 참으로 무서웠다. 날마다 자리에 누워있다 보니 상투 꽂은 머리가 길게 내려 온데다 얼굴마저 피접하여 무서운 생각밖에 없었다.

아직 날이 채 밝지 않았다. 엄마가 갈만한 마을 집들을 찾아다니며 우리 엄마를 봤냐고 물어보니까 “너 엄마 날도 밝지 않았는데 뭘 하러 왔겠니?”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길로 나는 “엄마야” 부르면서 논둑 터진 길로 달려갔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른다. 논길 따라 걸으려니까 해가 떠올라 아주 따가웠다. 벼가 한창 익는 시기였다. 가다가 도랑물이 졸졸 흐르는 곳이 있어서 거기로 가서 손을 씻고 세수를 하고 마침 그 옆에 있는 바위에 누워 잠이 들어버렸다.

그런데 동네 집 머슴아이가 지게를 지고 오다가 나를 보고 “이쁜아”하고 나를 불렀다. 그 소리에 벌떡 일어난 나는 “너 우리 엄마 봤니?”하고 다짜고짜로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 머슴아이가 “저 다리 밑에, 시내물이 흘러가는 다리 밑에서 네 동생 젖을 먹이더라”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이구야. “어떻게 하면 그 다리 밑을 가니?”하고 물으니 “나오너라. 이 길로 끝없이 가거라. 가며는 소 팔고 하는 소장이 있는데 가시쇠줄을 쳐놨다. 그 쇠줄을 지나서 내려가서 걸으면 큰 다리가 있고 시내물이 흘러가는데 거기서 내 동생 젖을 먹이고 있더라.” 그 길로 나는 죽어라 하고 뛰어갔다. 신발도 없는 맨발로.

큰 다리에 도착해보니 벌써 캄캄한 밤이 되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전기 불을 보았다. 이상해서 전봇대를 안고 뱅뱅 돌다가 다리 밑을 들여다보며 “엄마야, 엄마야”하고 불렀다. 아무리 다리를 오르고 내리며 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때 어디선가 콘크리트 땅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르렁 드르렁 무엇을 끄는 소리가 나더니 수염이 허옇게 난 거지 할아버지 한분이 지팡이를 짚고 나타났다.

아마도 내가 다리를 오르내리며 우는 것을 보고 오신 것 같았다. “어떤 부인이 장보러 왔다가 아이를 잊어 버리고 갔구나, 아가 내가 내일 너 엄마를 찾아 주꾸마. 날 따라가자.” 그래서 나는 그 할아버지를 따라갔다. 할아버지를 따라 다리를 건너가니 강둑 옆에 굴을 파고 그 안에 마른 풀을 푹신하게 해놓았다. 종일 엄마 찾아 맨발로 돌아다녔으니 몰골이 오죽했을 가. 그대로 풀 속에 들어가 누웠으나 눈앞에 엄마가 별처럼 아른거려 좀처럼 잠들 수가 없었다. 자식은 그렇게 엄마가 그리웠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혼자서 문이라고 만들어놓은 거적을 열고 나와 흐르는 도랑물에 얼굴을 씻는데 할아버지가 돌아왔다. 오는데 보니까 하얀 떡 하나, 쑥을 넣어서 만든 푸른 떡 하나를 들고 와 “아가, 이거 먹어라”하고 주는데 배가 주렸던 지라 넙적 받아 단숨에 다 먹어버렸다. 그것을 보고 할아버지가 고무새총을 척 꺼내들더니 나무에 앉은 참새를 한 마리 쏘아 잡았다.

인차 껍질을 벗기더니 검불을 모아놓고 불을 지펴 그 참새를 구워주었다. 내가 인차 다 먹어버리자 할아버지는 나를 장거리로 데리고 가더니 파죽을 한 그릇 사주었다. 그런 후 나의 손을 잡고 한나절이나 장거리를 돌아다녔으나 날 찾는 사람이 없자 “아이 잃어버린 아주머니가 어째서 아이를 안 찾아 나왔는지? 도무지 아이 찾는 사람이 없다”하면서 나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가는 것이었다. 엄마를 찾아주는가 싶어 나는 또 따라갔다. 그러면서도 나는 입 한번 뻥긋하지 않았다. 엄마가 도망가서 찾아 나왔다는.

할아버지는 시내를 벗어나 시골로 들어서더니 벼들이 익고 있는 논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거기에는 논밭의 새를 쫓는 어떤 할머니가 있었다. 한 오십 되어 보이는 여인인데 그 여인보다 훨씬 늙은 할아버지가 그 여인한테 다가가더니 구십도 경례를 하면서 “마님, 이 어린 것을 제가 주었습니다.

장 보러 온 아주머니가 아이를 잃었겠지 하고 하루 종일 장거리에 데리고 댕겨도 아이 찾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 데려왔는데 여식아이니까 새나 보게 하고 집에 두시면 어떻겠습니까?” 하는 것이었다. 그 여인네가 둬두고 가라고 하자 거지할아버지는 고맙다고 절을 연신 하면서 나를 돌아보며 “아가, 이 마님을 따라가 잘 살아라”하고는 떠나는 것이었다. 그 할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아마 난 지금껏 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저녁 무렵이 되자 그 여인은 동네로 날 데리고 들어갔다. 그 집에는 아주 귀한 외동딸 하나만 있었다. 뜰 안에 우물이 있고 앵두나무가 있는데 거기로 날 데리고 가더니 물을 떠서 씻어주었다. 머리로 뒤로 땋아주고 자기 딸이 입었던 옷인지 깨끗한 옷을 꺼내 날 입혀주었다.

그리고는 정지로 데리고 가 식모더러 밥을 먹이게 한 후 나를 데리고 안채로 들어가 자게 했다. 자기들을 엄마, 아버지라 부르라며 함께 자자고 했다. 방이 있고 툇마루가 있고 뜰 안이 있는데 언제 내가 그런 집에 살아봤어야지. 조그만 오두막 흙방에서 온 집식구가 비비고 살았는데. 내가 복이 있으면 그 집에서 살았을 텐데. 밤중에 오줌이 마려워 나오다가 그만 툇마루에 걸려 넘어져 오른 팔이 부러졌다. 내 우는 소리에 온 집안이 소란스러워졌다.

마침 그 집의 외동딸이 시집가려고 대장함을 받아놓고 삯군을 들여서 바느질을 하던 모양이었다. 그러던 중 그 딸이 병이 들어 헛소리를 하며 들어온 사람보고는 나갔다고 하고 나간 사람을 보고는 들어왔다고 하며 야단을 치니까 그 집에서 무당을 청해 굿을 보았다. 그 무당 하는 말이 저 아이가 들어와서 그런다고. 자기 딸이 죽는다는데 날 어떻게 놔두겠나.

그 이튿날 아침에 그 집에서는 밥을 해서 깨끗한 보자기에 싸고 식모와 함께 장에 갔다 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야 어리니까 몰랐지. 날 버리려고 하는 것인 줄. 아마도 장거리가 동네하고는 멀었던 것 같다. 식모는 장거리에 나를 데리고 가더니 “야, 이제 나는 돌아서서 가면 저 해하고 같이 집에 들어갈지 말지다. 그러니 넌 여기서 주인을 만나 가거라”하면서 그 밥싼 보자기를 바구니에서 내어주는데 난 그 길로 그만 땅에 풀썩 주저앉아 “엄마야”하고 울었다.

식모는 그 밥보자기를 내 옆에 놔두고 “야야, 난 가야 한다”면서 떠나 가버렸다. 거기가 아마 장거리 어구인 모양이었다. 내 우는 소리에 사람들이 까맣게 모여들었다. “엄마 어디 갔나? 엄마야”하며 한참을 울고 있으려니 “비키시오, 비키시오”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둘레 머리를 한 어떤 여인이 사람들을 비집고 나타나는 것이었다. 전에 아버지한테 들으니까 머리를 얹은 사람들은 쌍놈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없이 살았지만 아버진 전에 양반이었던 모양이었다.

그 여인이 사람들을 헤집고 들어오더니 “아가, 울지 말고 일어서거라. 나 따라가자”하며 막 나를 일으켜 세우며 궁둥이를 털어주고는 그 밥보자기를 자기가 갖고 온 물고기가 세 마리 들어있는 바구니에 넣고 날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얼마를 걸어서 오니 한 동네가 있었다. 그 집에는 나 같은 여자애가 이미 셋이나 있었다. 그 집에서 한 열흘을 보냈는데 어느 날 한 노친이 찾아와 나를 좀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자기가 나들이를 가야 되겠는데 집에 딸만 홀로 두고 갈수 없으니까 이 애를 좀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자기 딸을 좀 동무해주라고. 그래서 그 집에 갔는데 그 딸이 밤에 나를 자지 못하게 했다. 자기는 이부자리를 펴고 자면서 나보고는 한쪽 구석에 앉아 자기를 지키라고 했다. 한밤에 어떻게 잠이 오지 않겠는가. 졸음이 와서 졸면 그 딸은 날 때려줬다. 그래서 밤이면 내 울음소리가 그 집에서 흘러나오 군 했다. 고요한 시골 한밤에 울어대는 어린애 울음소리에 동네에 말썽이 일어났고 급기야는 그 소문이 날 데려왔던 집에까지 전해졌던 모양이다.

그때가 김장할 때인 것 같다. 땅이 좀 얼어 서걱서걱 하는데 날 데려왔던 그 어머니가 날 데리러 왔다. “동무하라고 보낸 애를 왜 두들겨 패서 동네를 시끄럽게 하느냐”하며 날더러 가자고 하는데 난 불이 번쩍 나게 뛰어나와 그 어머니 등에 업혀 돌아왔다. 그 집에서는 아무도 날 욕하지 않고 때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엄마 생각이 나 부지깽이로 불을 밀어 넣다가도 울고 화장실 가다가도 울고 하였다.

그로 사흘쯤 지나자 그 어머니가 나를 부르더니 “우리 집에는 너와 같은 언니가 셋이나 있잖니? 그러니 언니들도 없고 할머니 혼자 살고 있는 집에 가서 살 거라. 거기서 이제 널 데리러 올 테니까 낼 아침에 떠나거라”라고 하였다. 이튿날 날 깨끗이 씻어주고 옷을 갈아입히더니 자전거를 타고 온 웬 남자를 따라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머리를 양쪽으로 가리마를 하고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었다. 아침을 해먹고 자전거를 타고 떠났는데 신작로를 따라 얼마나 왔는지 모른다. 신작로 옆 산 밑에 웬 초가집이 있는데 바로 그 집이 내가 살 집이었다. 자전거에서 내릴 때 보니까 나를 데려온 남자는 절뚝절뚝 다리를 저는 남자였다. 방안에는 정말로 늙은 할머니가 한분 있었다.

난 그때까지 그렇게 늙은 할머니는 처음 보았다. 언제나 엄마 또래의 동네 아줌마들을 보아오다 보니. 방안에는 석유등잔불을 켜놓았는데 할머니는 긴 곰방대에 담배를 담아 피우고 있었다. 근데 할머니는 어디서 더러운 솜을 한줌 내놓으면서 이것을 구름장같이 잘 펴라고 하는 것이었다. 난 솜도 난생처음 본다. 언제 그런 일을 해보았나, 잘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곰방대로 내 어깨를 사정없이 때렸다.

일을 하다 졸면 존다고 곰방대로 때리고 일을 못하면 못한다고 때리고 밤새 매만 맞았다. 그곳에 초가집에 하나 밖에 없으니 울어도 소용이 없었다. 아이구, 그 할머니한테 나 참 매 많이도 맞았어. 때려만 주고 머리는 빗겨주지 않고 아홉 살 난 내가 그 집에 와서 커기는 커녕 오히려 졸아들었다. 나물을 캐오라 하여 캐오면 티가 있게 캐왔다고 때리고. 그렇게 그 집에서 아홉 살을 넘기고 열 살을 보냈다. 열한 살 되는 초봄 할머니는 또 나더러 산에 가 쑥을 캐오라고 하였다.

동산에 올라 나물을 캐다가 내려다보니 신작로 옆에 집이 보이는데 아, 오늘도 집에 돌아가면 얼마나 매를 맞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불쑥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하루도 맞지 않고 산적이 없었기에. 할머니한테 붙잡힐 가봐 나는 산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동산을 지나서 큰 산으로 들어갔다. 도망가다 보니 어느새 거뭇거뭇 날이 어두워졌다. 산 속에서 뱀이 나올 가, 호랑이가 나올 가 무서워 죽겠는데 아침을 먹고 나온 배는 허기져 말이 아니었다.

산 속에 그냥 있으면 무서워 죽을 것 같았다. 대밭이 있으면 사람 사는 동네가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원래 내가 살던 고향도 대밭이 있는 곳에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래서 산꼭대기에 올라 앉아 내려다보니 대밭이 있는 동네가 훤히 보였다. 그래서 그 동네를 향해 냅다 뛰어 내려갔다. 대밭은 찾아 내려왔는데 대밭에 소나무로 울바자를 해놔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뱅뱅 돌며 살펴보니 개가 드나드는 구멍 같은 것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 머리를 들이밀었더니 몸이 들어갔다. 대밭에 들어가면 무섭지는 않잖아. 날이 어둑해지니 으쓱해났다. 몸을 옹송거리고 팔짱을 끼고 앉아 밖을 보니 담을 높게 쌓고 지은 기와집이 보였다. 한참 후 배가 불룩 나온 여자가(지금 생각하니 임신한 여자였지) 나와 대밭을 기웃거리더니 도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 여자가 곰방대를 문 노친을 데리고 나왔다. 배 뚱뚱한 여자가 나를 가리키며 “어머니, 저게 뭐예요? 저기 앉았잖아요”하자 그 나이든 노친이 대밭을 기웃기웃 들여다보더니 “사람이면 인기척을 하고 귀신이면 물러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팔짱을 낀 채 나오니까 그 노친이 달려들어 내 팔을 쑥 빼더니 “병신은 아니구나. 멀쩡한 애가 어디서 왔노?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면서 날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대청마루에 앉히더니만 어디서 왔냐? 이름이 뭐냐? 하고 물어보지만 나는 입을 꼭 봉한 채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노친이 “참 딱하구나, 말 안하는 사람도 다 있구나, 벙어리냐?”면서 “사월이”라고 부르면 대답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때가 4월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그 집에서 살게 되었다. 그 집에는 세 아들이 있는데 내가 대밭에서 본 배 불룩한 여자는 그 집의 큰며느리이고 나는 그 집의 셋째-막내 도령님의 시중을 들어주는 몸종을 시켰다.

그 집에는 미나리를 심은 논이 있었다. 미나리를 논에 심어놨는데 날마다 가서 미나리를 비어다가 미나리김치도 해먹고 볶아도 먹고 하였다. 원래는 식모가 미나리 비러 다녔는데 내가 오자 나보고 가서 미나리를 베여오라고 하였다. 논에다 심은 미나리이기에 미나리 밭에는 거머리가 많았다. 동네와 좀 떨어진 곳에 바위를 돌아가면 있었다.

미나리를 비러 가서는 언덕에 앉아 한참 방향을 보군하였다. 어디로 들어가면 미나리를 빨리, 많이 베겠는가 해서. 그날도 주저앉아 있다가 미나리 밭에 들어서려고 일어나는데 뒤에서 누가 잡아당겼다. 뒤돌아보니 바로 내가 세숫물 떠다주고 밥 떠다주고 하는 주인집의 막내 도령님이었다. 그는 “거머리가 무섭지?”하고 물었다. “무서워요”하고 대답하니 “내가 베여 줄 테니 너는 들어가지 말거라”하면서 이후부터는 서방님이라 부르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내가 공부를 마치면 너를 데리고 부산 가서 살란다. 부산 가서 큰 상점 차리고 살란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어려서 눈이 크고 복슬복슬한 게 예뻤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난 후 그 못된 할머니 집에서 수소문 끝에 나를 찾아왔다. 그 할머니의 딸이 면장의 처이고 내가 지금 몸담고 있는 이 집 역시 그 지역에서는 유지인지라 서로 어떻게 알았던 모양이다. 그 면장의 처는 내가 그 못된 할머니 집에서 여러 번 봤었다.

자기 어머니가 나를 때리는 것을 보고는 “엄마 그렇게 때리려면 뭣 하러 데리고 왔소? 곱게 키워야지.”하며 자기 어머니를 나무라군 했다. 그 면장 처가 지금 “참봉 댁 있소?”하면서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부엌에서 불을 때다가 뒷문으로 나가 숨었다. 면장 처는 뒷문을 열고 나오더니 “우리 엄마가 너무 때려서 그랬지?”하면서 나의 손목을 잡고 나왔다. 면장 처는 자기 혼자만 온 것이 아니었다.

자기 조카라고 하는 여자를 데리고 왔다. 헌데 조카라고 데리고 온 여자는 말이 조카지 그 면장 처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보였다. 둘이 나를 데리고 가면서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보니 아마도 그 집에서는 나를 키워 며느리로 삼을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바로 나를 자전거에 싣고 갔던 그 절름발이 남자한테. 면장 처가 이 애를 집으로 데리고 가면 우리 어머니한테 맞아 죽을 테니 조카네 집에 데리고 가서 키우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조카 집을 가자면 우리 어머니 집을 지나야 하는데 지금 우리 어머니가 이 애 오면 죽이겠다고 벼르고 앉아 있을 테니까 내가 우리 어머니를 붙잡고 있으면 조카는 빨리 이 애를 데리고 지나가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아닐세라 노친은 쇠로 된 마사진 우산 몽둥이를 들고 집 앞에 앉아있었다. 나를 보자 때리겠다고 야단치는 것을 그 면장 처가 붙잡고 놓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그 면장의 조카를 따라가게 되었다. 그때가 내 나이 열한 살이었다.

그 양어머니(면장 조카) 집에는 식구가 넷이었다. 양부모님과 딸과 사위가 있었다. 그 집에서는 욕하는 법도 없고 때리는 법도 없었다. 양아버지는 내가 한 보리밥이라도 잡숫고는 마루에 척 나서서 “고놈 계집애 어쩌면 솜씨가, 밥을 달걀처럼 그렇게 맛있게 잘 한다.”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집의 남자들은 집안일에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물 긷고 방아 찧고 밥 하고 그러고도 동삼에 쓸 땔나무를 양어머니와 내가 다 하군 하였다. 나는 그 집의 상일 군이었다. 나무하다 떨어져 다친 상처가 아직도 복사뼈 자리에 남아있다. 하지만 그 할머니 집에서 고생을 썩어지게 해서 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그 집에서 2년 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어른들이 명창구경을 간다며 수군대더니 어디론가 가는 것이었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몰래 양어머니 뒤를 따라갔다. 신작로 옆에 있는 동네 집이었다. 조그마한 마루 앞에 남포등이 켜있고 어른들은 마당에 벼 짚단들을 깔고 앉아있었다. 나는 양어머니한테 들킬 가봐 동산 땔나무를 쌓아놓은 울타리 밖에서 몰래 구경을 했다. 이윽고 남자들은 허리띠를 매고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여자들은 한복을 곱게 입고 마루에 나와 소리를 하는데 나는 그만 그 소리에 홀딱 반하고 말았다.

“아리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아리리로구나. 문경새자에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치로 다 나아간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로구나. 홍두깨 방망치 팔자가 좋아 큰 애기 손 기슭이 다다슨다” 진도아리랑 하는 소리를 듣고 난 집에 와서 그대로 따라했다. 명창이름마저 다 기억했다. 그날 온 사람은 모두 아홉 사람인데 남자가 다섯이고 여자가 넷이었다. 남자는 이 동백 씨, 송만갑 씨, 임방울 씨, 오태색 씨, 정 정율 씨, 이렇게 다섯, 여자는 이하중선이, 박초리, 중선이, 그담에 저 임소양이.

그날 저녁 나는 자리에 누워 양어머니한테 “엄마 나도 명창할래”라고 했더니 양어머니가 “에이, 쌍년, 자거라.”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튿날 양아버지한테 밥상을 올리고 “아버지요 나 명창할래요.”했더니 양아버지 역시 “에이끼년 명창이 다 뭐꼬? 그 쏸 쌍년들이 하는 거다. 쌍년이로구나.”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하도 명창을 하겠다고 보채니 양어머니가 “그것도 돈 들여 배워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돈 들여야 한다는 말에 더 말을 못했다. 그래도 내 절로 명창을 한다고 동네에 엿장수가 들어오면 그 엿장수 뒤를 따라다니며 엿 타령을 배웠고 장타령쟁이가 오면 그 뒤를 따라다니며 그 장타령을 배웠다. 동네의 머슴이 아리랑타령을 부르며 나무하러 가는 것을 보면 물 길러 가다가도 물동이를 우물가에 둔 채 그 뒤를 따라가며 배웠다. 오고 가며 명창한다며 소리를 불러댔다.

그때 동네에서는 나를 “아리랑계집애”라고 불렀다. 동네 분들이 어머니를 권했다. “여보, 그 애가 당신 자식도 아니고 남의 자식인데 그 애가 명창하려구 그렇게 미쳐나는데 그러다가 그냥 아무데나 시집을 가게 한다면 그게 제대로 되겠소. 제가 하고픈 일을 못하고 죽으면 그 죽은 원귀가 당신네 집 다 말아먹소. 당신네 못살아. 그러니까 어디루 보내오. 명창할 대로 보내오.” 그래서 양어머니는 나를 인천에 있는 먼 삼촌네 집으로 보냈다. 열네 살이 채 되지 않을 때였다.

그 인천 삼촌은 인천에서 방직공장에 출근하고 딸은 양말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집에는 숙모만 있었다. 날마다 집에 있으려니 갑갑해났다. 불을 때면서 “나 명창하려고 왔는데 소리는 안 배워주고 뭘 하나?”라고 중얼거렸다. 그 말을 숙모가 인천 삼촌한테 했는지 이튿날 인천 삼촌이 날 데리고 사람소개소로 갔다.

누구든지 이 애를 데려다가 소리를 배워주고 그 가르친 대가는 받고 후에 이 애를 자유로 놔주라는 조건이었다. 얼마 지나자 어떤 여자가 들어와 나를 보더니 “복스럽게 생겼구나.”하면서 각서를 쓰고 나를 데리고 갔다. 그 집이 바로 내 소리공부를 배워준 양부모님 집이다.

그 집에는 식구가 나까지 스물세 명이었다. 양아버지는 목수하는 사람인데 마누라가 셋이나 되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에 세 부인과 자식들. 한 끼 밥상만 해도 넉 상이나 차려야 했다. 하루에 물만 해도 몇 십 통이나 길어야 했다. 재치고 불 때고 나무 들여오고 마당 쓸고 마루 닦고 언제 한번 자리에 앉아 밥 먹어본 적 없고 자리에 누워 자본적 없다. 작은댁들의 애기 업어주느라 내 등은 언제나 젖어있었다. 그 집에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소리 배우는 시간뿐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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