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이민기록문학상 수상작-4] 이채영(미국)
[제1회 이민기록문학상 수상작-4] 이채영(미국)
  • 월드코리안
  • 승인 2012.11.08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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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이민기록부문)/환경과 운명을 탓하지 말아라, 내 인생은 내가 꿈꾸는 대로 그려진다

본지는 7월15일부터 9월20일까지 2012 제1회 월드코리안신문 이민기록문학상을 공모, 응모된 46명의 작품들을 대상으로 10월18일 심사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응모전에는 이민기록부문의 대상을 수상한 ‘정요한 옹의 인생역전’(캐나다 송광호), 이민문학부문의 대상을 수상한 ‘어머니가 그리운 날’(파라과이 고용철)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우수한 작품들이 출품, 본지는 이들 작품들을 연재할 계획이다.<편집자 주>

- 제1회 이민기록문학상 이민기록부문 우수상
- [인터뷰] 신호범 워싱턴 주 상원부의장

‘환경과 운명을 탓하지 말아라, 내 인생은 내가 꿈꾸는 대로 그려진다.’

한 슬픈 꼬마가 있었다. 네 살짜리 꼬마는 매일 밤하늘을 쳐다보며 별을 셌다.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려 별을 세었고, 먼저 하늘나라로 간 엄마가 그리워 별을 셌다. 외로움에 지쳐 별을 세었으며, 희망이 없어서 별을 셌다.

꼬마의 엄마는 꼬마가 태어나자마자 병으로 앓아누운 후, 꼬마가 네 살 때 하늘나라로 떠났다. 산 넘어 어느 이름 모를 땅에 엄마가 묻혔다는 외할머니의 말씀을 듣고는, 엄마를 삽으로 파오겠다고 떼를 썼다. 꼬마의 아버지는 얼마 후 집을 나가버렸고, 꼬마는 가난한 외갓집에 맡겨졌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외갓집 형편에, 꼬마는 눈칫밥을 얻어 먹는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어느 날 사촌들끼리 방망이로 엿을 두드려 깨서 나누어 먹고 있는 것 을 보던 꼬마는 “나도 먹고 싶다”고 애원했지만 남은 것이 없었다. 너무 먹고 싶은 급한 마음에 사촌 동생의 손에 들린 엿을 뺏어 들자 동생은 울음을 터뜨렸고, 화가 난 외숙모는 엿을 쪼개던 방망이로 꼬마를 사정 없이 두들겨 팼다. 몸과 머리에서 흐르는 피를 닦으며, 꼬마는 울며 집을 뛰쳐나왔다. 어두워질 때까지 강둑에 숨어 있다가, 모두 잠들었을 즈음 집에 몰래 들어가서 외할머니를 기다렸지만 그날따라 할머니는 밤이 깊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할머니를 기다리다 지친 꼬마는 그 밤, 집을 나오고 말았다.

시골 기차역 한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밤을 지새우며 꼬마는 생각 했다.  ‘나중에 크면 2 꼭 엿장수가 되어 동네 친구들과 사이좋게 나누어 먹어야지.’ 어린 마음에, 그러기 위해선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날 새벽 서울로 가는 도둑기차를 탔다. 두 시간 만에 기차가 서울역에 도착하자, 고작 여섯 살짜리 꼬마는 오롯이 혼자 남겨졌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채 막막한 마음으로, 내리는 기차에서 바삐 흩어지는 사람들만 멍하게 쳐다봤다. 배가 고프면 허기를 채우려고 쓰레기통을 뒤졌고, 비가 오는 날이면 천막 끝에 쪼 그리고 앉아서 비를 피했다. 시장 쪽으로 걸어가며 구경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각종 음식들은 꼬마에게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때는 일제강점기 시대인 1941년. 너도나도 살기 힘들던, 말 그대로 입에 풀칠조차 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꼬마는 순대장수 앞에 섰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순대. 꼬마에게는 감히 넘볼 수도 없는, 반지르르 기름기가 흐르는 그 순대를 연신 사가는 사람들. 여섯 살짜리 어린 꼬마는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그 부러운 광경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순대장수 아주머니는 한참 동안 그렇게 물끄러미 서 있는 꼬마에게 순대 꼭지를 잘라주었다. 꼬마는 순대가 어서어서 팔려 새 꼭지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어떤 날은 너무 배가 고파서 기어 다니는 뱀과 쥐를 잡아먹기도 하고, 거지라고 매번 내쫓기는 통에 잘 곳이 없어서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이름 모를 무덤가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다. 혼자 서울역 근처와 남대문 시장 쪽을 정처 없이 헤메며 거지생활을 하다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을 발견했다. 그중 재원이와는 단짝이 되었다.

일본순사의 몽둥이를 피해 함께 도망 다니며, 낮에는 동냥을 다니고 밤에는 서로의 몸을 난로 삼아 꼭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재원이는 꿈도 희망도 없던 시절, 꼬마의 유일한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오늘의 배고픔은 어떻게 참아야 할까’의 걱정과 함께 시작하는 하루 중, 유일한 기쁨이었던 재원이. 그런 재원이는 어느 날, “나는 더 이상 이렇게는 못 살겠어” 한마디를 남기고는 달리는 기차로 몸을 던졌다.

재원이의 작은 몸은 달려오는 기차에 무참하게 산산조각이 났고, 비참하게 부서진 재원이의 작은 몸뚱이를 비통하게 끌어안고 꼬마는 흐느껴 울었다. “너는 나의 하나밖에 없는 친군데...... 왜 죽었어...... 재원아...... 너 없이 난 이제 어떻게 살란 말야.......” 일본순사는 비참하게 뭉그러진 재원이의 몸을 수레에 툭 던져 올리고는 저 멀리 사라져갔다.

“재원아, 너는 죽었어...... 비겁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죽지 않을 거야. 지켜봐, 재원아. 내가 너의 몫까지 대신 살아줄게.......” 수십 년 후, 이 꼬마가 자라서 미국 최초 동양인 출신 주 상원의원이 된다면. 과연 누구 하나 믿을 수 있었을까? 동화에나 나올 법한 신화의 주인공은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현재 워싱턴주 선 상원의원과 상원부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신호범 씨이다.

자신의 주어진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했던 그의 이야기는 세월과 시대를 넘어 듣는 이를 고개 숙이게 하고 감동을 안겨 준다. 내가 만난 신호범 씨는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가득한 옆집 할아버지 같은 푸근한 인상의 백발 노인이었다. 역경과 고난으로 얼룩진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마치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해주는 옛날이야기처럼 한 고리 한 고리 담담하게 풀어갔다.

“재원이는 아무리 힘든 순간에도, 인생의 낭떠러지에서 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늘 나에게 살아갈 힘을 주었습니다. 나는 재원이의 몫까지 살아야 했으니까요.” 이집저집 머슴살이와 길거리의 거지생활을 반복하던 중 전쟁이 터졌다. 인천에 상륙한 미군들의 트럭이 지나다니는 길에 다른 아이들과 모여 앉아 코 큰 서양 군인들을 구경하며 외쳐댔다.

“기브 미 껌! 기브 미 쪼꼬레트!’’ 어느 날도 구걸하고 있는데 한 미군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먹을 것을 주나보다’ 하고 기쁜 마음에 손을 벌렸더니, 군인은 손을 잡고는 그의 몸을 트럭으로 번쩍 들어올렸다. 새까만 얼굴에 더러운 옷차림을 한 그는 누가 봐도 돌보는 사람 하나 없는 버려진 아이였다. 트럭에 올려진 후 얻어먹은 껌 하나에 감격하고 있는데, 한 미군이 그에게서 나는 역겨운 냄새가 참기 힘들었는지 무언가를 연신 그의 몸에 뿌려댔다.

미군부대에 도착한 후 미군장교들의 시중을 드는 하우스보이로서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따뜻한 물에 목욕도 하고 깔끔하게 이발도 했으며, 거기에 군복을 입고 장화까지 신으니 거지가 왕자로 둔갑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그를 미군 장교들은 ‘벅숏총알’이라고 불러주며 귀여워해주었다. 평생 처음으로 잘 곳과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꿈같은 인생이 시작되었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은 엄마를 향한 그리움과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의 그림자로 어둡게 얼룩져 있었다. 또한 부유한 미국사람들을 보며, 굶주리는 조국에 대한 원망도 그의 슬픔에 한몫 더했다.

어느 날 밤, 언덕에 앉아서 슬픔과 설움에 복받쳐 울고 있는데, 치과 의사인 군의관 폴 대위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벅숏, 왜 울고 있니?” “저리 가세요!” “왜 울고 있지? 말해보렴.” "저리가라 니까요!” "나도 미국에 아들이 셋이 있단다. 너를 보면 그 아이들이 생각난다. 아이들이 울면 가슴이 너무 아파. 왜 우는지 알고 싶구나.” 흐느껴 우는 그를 폴 대위는 꼭 안아주었다. 거친 행동에 저급한 말을 하고, 시간만 나면 술과 담배, 카드놀이에 열중하는 다른 군인들과는 달리 폴 대위는 항상 조용한 모습으로 책과 성경을 보며 한결같이 친절하고 상냥했다. 남들은 다 쉬는 시간에 피난민 수용소에서 환자들을 진료하고, 틈이 날 때마다 기도하는 그의 모습은 어린 신호범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네가 다시는 울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마.”

처음으로 하나님에 대해 들은 그는, ‘하나님’은 미국에 있는 어떤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폴 대위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깊어져갔고,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은 열망을 느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폴 대위에게 시원한 물을 주고 싶어서 그는 이틀 동안 땅을 파서 양철 판을 두르고 두레박에 물병을 담가두기도 했다. “이때부터 나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거예요.”

그를 진심으로 아끼던 폴 대위는 그의 양아버지가 되었고, 2년간의 쉽지 않은 이민 수속기간을 거친 후, 열여덟 살에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났다. “배고팠던 나라, 추웠던 나라, 외로웠던 나라, 차별받았던 나라, 나는 너를 버리고 간다. 무지개를 찾아, 새로운 인생을 찾아, 나는 떠난다. 결코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하지만 꿈만 같을 것이라고 상상한 미국생활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입양을 반대했던 양어머니와 세 동생들의 냉대는 따뜻한 새 가족을 그 리던 그의 꿈에 찬물을 끼얹었다.

하지만 귀여운 아기도 아닌 자신을 입양해준 사랑하는 아버지의 아내와 그 자녀들을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봉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영어 이름 폴 신(Paull hin)은 양아버지의 성을 따서 지었다. “양아버지가 무엇을 제일 하고 싶은지 물어보셨어요. 당연히 공부가 하고 싶다고 했죠. 공부하는 것은 꿈에도 소원이었으니까요.”

어린 시절 그는 공부 도둑이었다. 거지생활을 할 때에는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부러워서 밖에서 몰래 초등학교 교실 안을 들여다보며 수업 내용을 종이에 따라 쓰곤 했었다. 하지만 거지 차림의 그가 무언가를 훔쳤다고 의심한 순경은 죽을 힘을 다해 뛰어 도망가는 그를 붙잡아 따귀를 올려붙이기도 했다. “상상 속에나 가능했던 학교를 갈 수 있어서 너무나 기뻤지만, 학교라고는 창밖에서만 구경했던 게 전부인 나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차례로 다 거절을 당했어요. 그래서 검정고시 준비를 시작해야 했어요. 하지만 하우스보이가 무슨 영어를 알았겠어요? 고작해야 오케이, 헬로 정도였죠. A, B, C부터 배우기 시작했어요. 하루 세 시간도 못 자고 매일 공부해서 1년 6개월 만에 검정고시에 합격 할 수 있었습니다.” 기적 같았던 검정고시 합격 이야기에 잠시 미소 짓던 그의 얼굴이 갑작스레 어두워진다 싶더니, 이내 빠알갛게 눈시울이 붉어진다.
 
“어려울 때마다 재원이를 생각하면 힘이 생겼어요. 절대 죽지 않고, 재원이의 몫까지 대신 살아주겠다고 했던 결심을 잊을 수 없었으니까요.” 그의 양아버지의 사랑과 격려 또한 그에게 어려운 고비를 넘을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아버지는 사랑이 많은 분이셨어요. 항상 웃으며 저에게 말씀하셨죠. ‘나의 아들아, 나는 너를 믿는다’ 아버지의 이 말 한마디가 나에게는 정말 큰 용기가 되었어요.” 태어나서 처음 받은 인정과 믿음. 이에 힘을 얻어 그는 검정고시 통과 후,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내가 학교를 못 다녔기 때문에 학교 선생님이 되는 게 나의 꿈이었어 요. 그래서 석사 공부도 하고 박사 공부도 했죠. 그런데 미래에 대한 목 표가 달라지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선교사 활동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군입대 영장이 나왔다. 텍사스에서 훈련을 받는 도중, 어느 주말에 다른 훈련병인 백인 친구들과 함께 텍사스 시내의 고급 식당에 식사를 하러 가기로 했는데 들어서는 순간 ‘The Whites Only’ (백인만 입장 가능) 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때는 1958년,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무척 심하던 시절이었다. 그가 “나는 못 들어가겠다”고 하자 친구들은 “너는 우리와 같은 미국 군인이고 동지니 저 문구는 너에게는 해당이 안 된다”며 그를 잡아끌었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어요. 눈치를 살피면서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는데, 식당 지배인이 나를 보자마자 단번에 뛰어와서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당신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야!’ 가슴이 철렁했어요.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는 나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리고는 모두가 다 쳐다보는 가운데 나를 질질 끌고 문밖의 콘크리트 바닥으로 사정없이 내던져버렸죠. 온몸이 너무 아팠어요. 하지만 가슴은 그보다 훨씬 더 아팠습니다.”

그날 저녁, 훈련소로 돌아간 그는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 당신이 계시다면 대답을 해주세요. 왜 나는 평생 차별만 받고 살아야 하는 건 가요? 내가 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요?” “미국에 인종차별이 있다면, 한국에는 인간차별이 있어요. 가족이 없고, 교육을 못 받고, 돈이 없으면, 인간 취급을 못 받지요. 내가 그랬으니까요. 사람들은 나를 거지라고 때리고 돌을 던졌어요. 그래서 이런 차별받던 나라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떠났는데, 미국에 오니 또 다시 차별을 받더군요.”

이때 그는 결심했다. 나중에 정치인이 되어서 이런 나쁜 법들을 다 없애 버려야겠다고. “저는 이상하게도 어떤 결심을 한번 하면 절대로 잊어버리지를 않아요.” 이때의 경험을 통해, 후에 그가 워싱턴 주 상원의원이 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동양계를 비하하는 ‘오리엔탈’이란 차별적 용어를 ‘아시안’으로 변경시키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1963년 마틴루터 킹 목사는 부사당 앞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나에게 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나의 어린 네 아이들이, 그들의 피부색이 아니라 그들의 인격에 의해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그리고 1965년 흑인들을 비하하는 단어인 ‘Negro’를 ‘African American’으로 바꾸는 인권법이 통과되면서 흑인들의 인종차별이 법으로 금지되었습니다.

우리 아시안의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법안도 만들고 싶었습니다.” ‘오리엔탈’을 ‘아시안’으로 변경시키는 법안은 1999년에 워싱턴 주에서 만장일치로 통과한 후 2002년 미국연방국회에서도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그날 저녁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셋째 아들은 신호범 씨에게 전화 를 해서 킹 목사의 생일에 열리는 흑인목회자대회에 그를 연설자로 초대했다.

공항에 마중 나온 킹 목사의 아들은 신호범 씨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제일 먼저 감사하다고 말했을 거예요.” “내가 아시안을 비하하는 차별적 용어를 변경하는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의 아버지, 킹 목사에게서 배웠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을 은유해서 용광로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함께 녹아서 같은 색깔이 된다는 뜻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미국은 ‘beautiful piece of tapestry’ (아름다운 색실로 짠 주단, 태피스티리) 입니다. 한 가닥의 실은 미약하지만, 하얀색, 검은색, 갈색, 노란색의 실들이 서로 아름답게 엮여져 짜여진 주단은 아름답고도 강합니다.” 그의 연설을 듣고 있던 300명의 흑인 목회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 순간을 함께 축하해주었다고 한다. 열여덟 살의 나이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결심을 하고 한국을 떠났지만, 미국에서도 인종차별을 받으면서 신호범 씨는 자신의 뿌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거지라고 천대받고, 미국에서는 야만인이라는 뜻인 ‘gook’이라고 멸시받으면서, 대체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혼란스러웠어요.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려면 한국말을 배워야겠다고.” 그는 다른 명문 대학들에게서도 장학금과 함께 박사학위 입학 허가를 받았지만,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워싱턴 주립대를 선택했다.

“이곳에서 나의 은사이신 서두수 교수님을 만났어요. 한국말이라고는 길거리 소년으로 살 때 쓰던 험하고 상스러운 용어들밖에 몰랐었죠. 한국어를 가르쳐달라고 무작정 교수님께 찾아갔어요. 그랬더니 그 다음 날부터 3년 동안 일주일에 세 번, 월, 수, 금 세시부터 다섯시까지 가르쳐주셨어요. 첫 년은 국어 문법, 2년째는 한문, 3년째는 『춘향전 』 등 한국의 문학을 배웠습니다. 교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저는 아마 교수님 자제분들보다 더 많이 울었을 거예요. 서 교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죽었을지도 몰라요. 맺힌 한 때문에.......”

아버지에게 배반 당한 슬픔, 가족이 없는 서러움, 한국에 대한 그리움과 뿌리를 찾고 싶은 갈망에 견디기 힘들었지만, 그는 한국어를 배우면서 차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갔고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갖게 되었다고 했다. 한 나라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한 소통을 지나서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의 모국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더더욱 의미가 깊다.

미국에서 살면서, 나는 좋은 학벌과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선망의 직업을 가지고도 한국어를 못하는 것 때문에 부끄러워하고 따라서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스러워하는 한인 교포 친구들을 많이 보았다. 겉으로 보이는 사회적인 성공이나 소위 말하는 훌륭한 ‘스펙’들도 ‘내가 누구인가’ 하는 기본적인 질문에 대답할 수 없는 혼란과 좌절감, 또한 뿌리를 찾고 싶은 갈망과 공허함을 대신 채워줄 수는 없는 것이다.

문득, 하버드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취업 인터뷰를 다녀온 한인 2세가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우리 회사가 한국사람을 뽑을 때는 당연히 한국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뽑은 것입니다. 한국말을 못하는 한국사람은 필요 없습니다.” 한국말을 못한다는 그에게 유태인 사장이 했다는 말이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성실한 모범생이었기에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만 들어왔던 그는 모멸감을 이기지 못하고 한국인으로 낳아놓고서도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은 부모를 원망하는 유서를 한 장 남기고는 자살했다고 한다.

요새 부모들은 많이 달라졌기를 바라지만, 내가 자랄 때만 해도 미국에서 초, 중, 고등학생 자녀를 키우는 많은 한인 1세 부모들은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버려야만 ‘미국인’이 될 수 있고, 따라서 미국 주류사회에 진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부모들은 영어가 익숙하지 않아도 집에서 한국말을 쓰지 못하게 금지하고, 한국적인 것들을 버리고 미국사람이 되라고 강요했다.

이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왔다. 자라 난 2세들이 한국말과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따라서 자신의 부모들과도 깊은 대화가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짧은 영어로 간단한 대화만 몇 마디 가능한 1세 한인 부모들과 한국말을 하지 못하는 2세 자녀들 간의 문화와 세대 차이는 점점 깊어져갔으며, 부모와 자식이 말이 안 통하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했다. 나는 미국에서 태어난 후, 어릴 때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에 돌아왔을 때는 영어를 배우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학교 공부를 따라가기도 너무나 벅찬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나의 부모님은 한국어와 한국의 문화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한국책과 신문을 계속 읽게 하셨다. 또한 자주 한국을 방문하게 해서 모국의 뿌리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셨다.
 
“영어 공부할 시간도 모자란데, 언제 한국 책과 신문까지 봐요?” 답답한 내가 물으면 “똑똑한 사람은 이중 언어와 문화를 다 소화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잘 못한다” 하시면서 나는 충분히 두 가지를 잘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셨다. 솔직히 당시에는 무리한 요구가 짜증스럽고 벅차다고 느낀 적이 많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큰 축복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에서 모든 교육을 마치고, 현재 미국사회에서 일하며 살고 있지만, 한 번 도 내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에 대한 의문이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생긴 적이 없다.

나아가 두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은, 한국과 미국을 떠나 또 다른 나라의 문화를 쉽게 받아들이고, 어떤 변화에도 유연하게 대처하며 어려움 없이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우게 해주었다. 신호범 씨는 언어장벽에서 오는 비소통과 이민사회 환경에서 비롯된 한인사회 1세와 2세의 갈등과 격차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냈다.

“미국에서 사는 1세와 2세 사이에는 많은 문화적인 격차가 있어요. 1세는 한국사람으로서 미국사회에서 살고 있고 2세들은 미국사람으로서 한국사회 혹은 가정에서 살고 있습니다. 1세들과 2세의 문화가 많이 다르지요. 1세들은 공통적인, 가족적인 문화를 중요시하는 반면, 2세들은 개인적인 마인드가 강합니다. 이렇게 두 세대 간의 문화가 많이 다르지만 세들은 살기가 바빠서 미국문화를 배우고 자식들과 대화할 시간이 없어요. 안타까운 현실이에요. 2세들이 3세들을 키울 때는 많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세대차이로 인해 부모 자식 간의 많은 갈등이 빚어지고, 이는 한인 세들이 가정에서도 마음을 붙일 수 없고 또 미국사회에서도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좋지 않은 길로 빠지고 또 범죄를 저지르는 안타까운 현실을 빚어내고 있다.

한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던 버지니아텍 총기사건은 이러한 예의 하나라고 신호범 씨는 설명한다. 이러한 세대차이 갈등은 미국 한인사회뿐만 아니라 한국에 살고 있는 부모 자식간에도 존재하는 사회적인 문제이지 않을까? 언어는 같아도 다른 시대와 세상을 살아가는 부모와 자식 간에는 분명한 고립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도 세대차이에서 오는 부모 자식 간의 갈등이 심각하다고 봅니다. 특히 한국 부모는 아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려서부터 아이를 비싼 사교육의 현장으로 내몰고, 어떻게 보면 아이를 자신의 인형처럼 생각해 한풀이 대상으로까지 보는 것 같은 경향이 있습니다. 부모의 못다 이룬 꿈을 자식들에게 투영시켜 강요하면서, 자식의 미래를 결정지으려 하죠.” 그러면서 미국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 포인트에 입학한 한인 학생이 자살한 사건에 대해서 들려주었다.

“나는 군인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라고 적힌 그의 유서는 학생의 죽음이 대령 출신 아버지가 이루지 못했던 장성의 꿈을 아들에게 무조건적으로 강요해서 일어난 비극임을 알려주었다.

“한국 부모들은 자식의 성향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안정적인 전문직을 선택하라고 강요합니다. 하지만, ‘변호사가 되어라, 의사가 되어라’ 며 ‘강요’해야 하는 시기는 이제 지났다고 생각해요. ‘사랑하는 딸아, 아들아, 앞으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니?’라고 물어보고, 자식들의 재능과 취미를 고려해서 하고 싶은 일을 찾도록 도와주고, 격려해주는 것이 바람직한 교육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또 무조건 다 해주는 한국 부모의 가정교육이 자식들의 독립심과 창의성을 결여시키며 오히려 자식에게 해가 된다고 지적했다.

“너는 공부만 하고 나머지는 부모가 다 해주겠다”는 한국 학부모들의 지나친 교육열 때문에 나이가 들어서도 부모에게 의지하고 독립하지 못하는 ‘어른 아이’들이 많은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한국에서 바라볼 때는 억압 적인 한국 고등교육에 비해 미국 고등학생들은 파티도 많이 하고, 자유롭고, 비교적 어렵지 않은 학창 시절을 보낸다고 생각하기 쉽다.

아마도 미국 영화나 드라마가 그려낸 이미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미국 고등학생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한국에서처럼 미국에서도 좋은 대학에 진학하려면 상위권 학생들은 엄청나게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야 한다. 공부만 잘하면 되는 한국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공부 이외에 운동, 음악, 학생회 등 다양한 활동과 사회봉사, 리더십 경험도 대입 사정에 매우 중요한 요소들로 작용하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완벽해야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
 
때문에 어쩌면 미국 고등학생들은 한국에 있는 고등 학생들보다 더욱 더 시간에 쫓기는 바쁜 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 또한 고등학교 시절, 잠을 잘 시간이 모자라 공부를 하다 하다 지쳐 책을 끌어안고 쓰려져 잠이 들곤 했었다. 이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가족들과 동네 패밀리 레스토랑에 저녁식사를 하러 갔는데, 같은 수업을 듣는 미국 친구가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내일 중요한 영어 시험이 있는데?” 나는 식사하면서 공부하려고 가져온 노트를 슬쩍 바라보면서, 그 친구가 내심 걱정이 되면서도 용돈까지 벌어가며 똑같은 학교생활을 해내야 하는 미국 친구 앞에서, 그저 내 공부와 내 할 일만 하면서도 버거운 내 모습이 갑작스레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공부만 잘하면 부모가 나머지는 다 알아서 해주는 한국학생들과는 달리, 자신의 용돈과 학비도 벌어야 하는 많은 미국학생들은 일찍부터 독립심과 책임감을 배운다.
 
그때는 한두 시간 공부를 덜 했을지라도 이러한 경험들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더없이 훌륭한 재산과 교훈이 되는 것이다. 미국 부모들은 자식들이 대학에 입학할 때 학교에 데려다주는 일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로 생각하는데, 이는 그때부터 자식들이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진정한 성인이 되는 순간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대학생 때부터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부모에게서 독립된 삶을 살아간다.

미국의 두 번째 거부인 워런 버핏의 손녀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할아버지의 검소한 생활 덕분에 열일곱 살까지 할아버지가 부자인지 전혀 몰랐다는 그녀는 대학생 시절 기숙사에서 나오면서 할아버지에게 침대 대신 잘 수 있는 자그마한 ‘후통’ (작은 간이 침대)을 사달라고 부탁했지만 단호하게 거절당했다고 한다. “나는 내 자식들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만큼은 주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만큼은 주지 않을 것입니다.” 워런 버핏의 자식교육 철학이다. 평생 지극히 검소한 생활을 몸소 실천하는 그는 기사도 없이 직접 자신의 낡은 차를 운전하며, 1958년도에 구입한 담도 울타리도 없는 집에서 아직까지 살고 있다. 사후에 자신의 재산 99% 이상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약속한 워런 버핏은 자식과 가족 들에게 돈을 주지 않기로 특히 유명하다. 그가 지원하는 것은 딱 한 가지, 학비이다. 워런 버핏의 손녀는 그래도 학비대출금을 갚느라고 힘이 드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 자신은 할아버지가 지원한 교육비 덕분에 갚아야 할 학자금은 없다는 게 행운이라고 했다.

학창 시절은 물론, 사회에 나와서도 생활비와 결혼자금까지 부모에게 의지하는 한국의 자식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신호범 씨는 또 유교적인 사상에서 흘러내려온, 어른을 공경하고 따라서 교수님의 말을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친 한국 부모들이 자식의 교육을 그르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내가 대학교수로 있을 때, 한국학생들을 보면 질문을 안 해요. 자유로운 토론을 권장하는 수업이기 때문에 미국학생들은 질문을 참 많이 하거든요. 그런데 한국학생들은 그저 듣고 있다가 필기만 합니다. 시험 볼 때는 그 필기한 것을 그대로 써서 제출하지요. 한국 가정에서 선생님의 말은 무조건 듣고 순종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이죠. 이것은 교육이 아니에요. 선생이 하는 말을 그대로 베끼는 것만 반복한다면 창의적인 사고를 키울 수 없습니다. 교육은 이노베이션을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드는 방법, 즉 창의력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정보를 소화시켜서 나의 재산으로 만드는 것이 진정한 참된 배움이라고 할 수 있죠. 한국학생 들은 이 부분이 많이 부족합니다.”

그러면서 워싱턴 주 출신이며 그와 가끔 만나는 친구인 빌 게이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빌 게이츠는 네 살 때부터 항상 두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Why (왜)?’, ‘How (어떻게)?’ 예를 들어 ‘이 종이는 왜 하얀색일까?’ ‘어떻게 만들었을 까?” 등,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죠. 그는 워싱턴 주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진학했습니다. 대학 진학 후 교수에게 ‘왜’, ‘어떻게’를 계속 물었지만 대답이 신통치 않다고 느꼈답니다. 결국 2학년 학기말 고사 시험지에 ‘교수님, 교수님의 질문은 정말 바보 같군요. 저라면 이렇게 물어보고 이렇게 답을 했을 것입니다’라고 적어 내고는 학교를 자퇴했죠. 그리고는 혼자 공부해서 21세에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했습니다.” 내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의 기억이 났다.

초등학교를 한국에서 졸업 하고 미국에서 중학교를 다니게 되었을 때 가장 놀라웠던 것은 한국과 미국의 교육 방법이 너무나 달랐다는 것이다. 전과와 수련장을 달달 외우면 좋은 성적이 보장되었던 한국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이러한 참고서를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미국 학교의 수업은 자유로운 토론과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말로 또 글로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둔다.

영어 수업의 경우에는 많은 작문 수업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나의 의견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잘 표현했느냐에 따라 점수가 결정된다. 처음 미국 학교 입학 후 가장 놀라웠던 사실은, 설사 나의 의견이 선생님과 일치하지 않는다 해도 내가 나의 의견을 조리 있게 피력할 수 있다면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암기가 바탕이 된 주입식 교육에 익숙했던 나에게는 답이 없는 시험을 본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물론 미국의 교육도 많은 문제점이 있겠지만, 창의적인 사고를 키우는 부분에서는 한국 교육보다 훨씬 앞서 있는 게 확실하다. 문득 신호범 씨가 선생님의 꿈을 버리고 유색인종으로서 가장 어려울 수 있는 정치인이 된 이유가 궁금했다. 얼굴색보다는 능력 위주로 평가 되며, 유색인종이라는 사실이 장애물이 덜 될 수 있는 다른 직업도 많았을 텐데.......

“왜 하필이면 제일 어려운 정치를 선택하셨나요? 인종차별이 특히 심하던 그 시절에 상원의원에 출마한다는 것은, 마치 여자인 데다가 동양인인 제가 지금 미국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 아닌가요?”

나의 질문에 그는 활짝 웃으며 예상치 못한 대답을 한다. “셀리나 씨가 미국 대통령이 되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게요!” 나는 별을 따는 것과 같은 불가능한 도전이라는 뜻에 사용한 표현이었는데, 그의 얼굴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표정이다. 그는 한미 정치 교육 장학재단을 만들어 더 많은 2세 정치인들을 배출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가 남은 인생에 꼭 이루고 싶은 중요한 목표이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 모르지만 남은 인생을 더 많은 한인 2세 들이 정치에 입문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습니다. 987년에 미국 레이건 대통령과 물로니 캐나다 수상이 미국과 캐나다 경계선에 서서 악수를 나누며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수십 년 전 우리의 조상들이 유럽에서 이민 왔을 때, 먼 훗날 우리가 두 나라의 대통령과 수상이 된다고 했다면 아무도 믿지 않았겠죠.’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21세기 안에 반드시 미국에서 한인 대통령이 나오고, 캐나다에서 한인 수상이 나와서 두 나라의 경계선에서 악수하면서 아리랑을 부를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실 1998년도 워싱턴 주에 상원의원에 출마한 것은 별을 따는 것과도 같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그는 보수적이고 상류사회를 대변하는 공화당보다는 진보적이고 소수민족의 인권을 옹호하며 저소득층의 입장에서는 민주당 후보로 선거에 출마했다.

하지만 그가 출마한 곳은 공화당 지지율이 95%인 데다가, 거주자의 96%가 백인인 지역이었다. “지역 조건은 나에게 최대로 불리했고 돈은 없고...... 그래서 이노베이션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했는데, 어느 날 꿈에 나타나셔서 ‘멀쩡한 두 다리가 있지 않느냐?’ 하셨어요. 그래서 그 다음 날 부터 걸어서 집집마다 찾아다니기 시작했어요. 11개월 동안 28,000가구 의 문을 두드렸지요. ‘안녕하세요, 저는 폴 신입니다. 한국에서 이민 온 사람입니다.

이 나라에서 은혜를 많이 받아서 이제는 갚을 때가 되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이렇게요.” 처음에 사람들은 동양사람이 집까지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니 황당한 표정이었고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의 정성과 의지는 서서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걸어왔다구요? 믿음직스럽네요. 찍어줄게요.” 에 언덕까지 땀 흘리고 올라왔으니 꼭 찍어드리겠습니다.”

정치인이 찾아오기는 처음입니다.” 당이지만 비를 맞고 여기까지 왔으니 꼭 찍어드릴게요.” 물었으니 꼭 투표하겠습니다.” 어느 날 한 집의 문을 두드렸는데 60대의 백인 남자가 문을 열었다. 그를 보자마자 백인 남자는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이 오리엔탈! 너희들은 여기에 너무나 많아! 너희 나라로 가!” “울컥 화가 치밀어서 주먹이 여기까지 올라왔어요. 하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여기가 제 집인데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저는 미국에 온 지 벌써 3년 되었습니다. 이 나라를 위해 년 동안 군대에도 다녀왔고 지금 대학교 교수로 당신의 자녀들을 27년이나 가르쳤습니다. 40년 이상 미국에 세금을 냈고 아내와 아이들도 다 미국 시민입니다. 또 이 지역의 사회를 위해 수십 년간 봉사활동도 했습니다. 여기가 나의 집인데 어디로 가라는 말입니까?” 처음에는 비아냥거리며 듣고 있던 백인 남자의 얼굴색이 불그스레해졌다.
 
“이 나라는 이민으로 이루어진 나라가 아닙니까? 당신의 선조가 먼저 왔으니, 당신이 먼저 돌아간다면 나도 가겠소!” 그는 보잉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다 퇴직한 67세의 웰츠라는 이름의 백인이었다. 웰츠는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친구, 내가 당신을 돕겠소.” 그 다음 날부터 웰츠는 그와 함께 3개월 이상 매일 집집마다 방문을 같이 하며 선거활동을 도와 신호범 씨가 상원의원에 당선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선거활동 중 어느 날 한 신문기자가 연락을 해왔다. “많이 걷는다고 들었는데 지금까지 몇 가구나 걸어서 방문했습니까?” 가구를 방문했습니다.” 이렇게 걸을 수 있지요?”

같이 걸어보고 싶다고 한 기자는 그 다음 날 사진사를 데리고 왔다. 두 시간도 채 못 걷고는 그에게 물었다. “나는 두 시간도 못 걷겠는데 어떻게 하루에 열한 시간 열두 시간을 걸을 수 있죠?” 신호범 씨는 빙그레 웃으면서 자신의 다리를 가리켰다. “This is made in Korea. 이것은 한국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신문 일면에 큰 사진과 함께 기사가 실렸다. “폴 신. 한국에서 이민 온 사람, 이 나라에서 은혜를 많이 받아서 봉사하고 싶어서 출마했습니다. 집집마다 두드리면서 유권자들의 의견을 묻습니다. 미국 정치인들은 상상도 못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침 9시에 나간 후 저녁 8시 반에 돌아오면, 저리는 발을 담가주려고 아내가 집에서 소금 물을 준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정치인들이 미국에 필요합니다.” 인종과 당의 선호도를 떠나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 그것이 불가 능을 가능하게 한 힘이었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이 가능케 했어요. 그래서 백인 동네에서 이렇게 생긴 사람이 처음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거예요. 공화당 지역에서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는 것, 또 백인 동네에서 동양인이 정치인이 된다는 것은 특히 그 시절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요. 하지만 당을 떠나, 인종을 떠나 나를 믿어준 거예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인종, 지역, 나라, 정치 성향 등을 이용해 사람들은 서로에게 선을 긋고 배척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진심과, 열정, 그리고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또 하늘을 감동 시킨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순간이었다. 1996년도에 당시 대통령이었던 클린턴 대통령은 신호범 씨를 미국 대사 후보 중 한 명으로 지목했다. 국무부, 국방부, 백악관 등 미국 정부 주요 부서에서 나온 아홉 명의 간부들이 한자리에 모여 청문회가 열렸다.
 
“만약 당신이 미국 대사가 되었는데 한국과 미국 사이에 전쟁이 터진다면 어느 쪽 편을 들겠습니까?” 전혀 예측하지 못한 예상 밖의 질문이었다. “제가 지금 드리고자 하는 대답은 미리 준비하지도, 연습하지도 않은, 나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가장 솔직한 대답입니다. 미국은 나에게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이곳에서 나의 집을 찾았고, 가족을 찾았고,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찾은 곳은 미국입니다.

하지만 한국은 나의 어머니의 나라입니다. 한국은 나를 태어나게 해주었고 나에게 전통과 문화와, 바꿀 수 없는 이 얼굴색을 주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지금 물어보는 것은, 만약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싸운다면 내가 누구 편을 들겠냐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라면 어느 쪽 편을 드시겠습니까?” 빨개진 질문자의 얼굴을 보며 신호범 씨는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행복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입니다.”

내가 신호범 씨를 처음 만난 곳은 신호범 씨가 강연을 하고 나는 개회식 진행자로 참가했던 한 한미학술대회에서였다. 개회식 진행 도중 각 연설자를 소개한 후 강연이 시작되면, 나는 무대 밑에 오랫동안 서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VIP 손님좌석에 앉아있던 신호범 씨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강연장의 맨 뒤로 가서 의자를 번쩍 들어다가 나에게 가져다주었다.

이때 신호범 씨와 나는 개인적으로 만나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는 내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다른 VIP석에 앉아 있던 중요한 손님들은 모두 위엄 있고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데, 이 학술대회의 강연자이며, 가장 중요한 VIP 게스트 중의 한 명이었던 신호범 씨가 전혀 모르는 내게 베풀었던 친절은 나를 감동시켰다. 솔직히 성공했다고, 유명하다고, 모두 존경받을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성공한 사람이라고 인터뷰하려고 만났다가 그 사람의 인격에 실망하여 책에 실으려던 계획을 중단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 사람의 표면적인 성공과 유명세가 책의 인기를 높여준다고 해도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겉으로 보이는 성공을 떠나서 내가 존경하는 사람, 또 다른 사람이 존경할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책을 만들고 싶었다. 나는 이 책을 쓰면서, 토크쇼를 진행하면서, 또 나의 사회생활 도중 다양한 업계에서 성공하고 유명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들 중 가장 존경하게 된 사람들은 성공하고 유명하면서도 겸손한 사람들이었다.

우리 모두 나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돈과 명예가 생기면 자기 자신의 성공에 도취되기 쉽다. 많은 성공과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7세의 나이임에도 항상 겸손한 모습으로 남에게 베푸는 신호범 씨의 모습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진정한 성공이란 내가 가진 그 무엇을 이용하여 이웃과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일하여,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오직 자기 자신만의 성취를 위하여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성공했다 하여도 어찌 존경받을 자격이 있을까? 한인 2세들의 정치 입문을 도와주는 일과 더불어 신호범 씨가 앞으로 남은 인생에 이루고 싶은 일은 자신과 같은 입양아의 선교사가 되는 일이다. “성공이란 자기 내면의 진정한 꿈과 소망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부자가 되었다고, 많은 교육을 받았다고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내가 박사학위를 받고, 상원의원이 되었다고 성공했다고 하지만 그건 아니죠. 이제는 내가 받은 것을 돌려줘야 하는 시간이에요.”

그는 후원단체를 설립해 전 세계 7만 명의 한인 입양아들을 위해 일 하고 있다. 그의 아들과 딸은 모두 어릴 때 한국에서 입양한 혼혈아들이다. 아내가 백인이기 때문에 일부러 혼열아를 입양했다.  “입양아들의 문화가 또 다르고 그들만 이해할 수 있는 한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입양아들이 원하는 것은 ‘인정’입니다.”

그의 양아버지가 했던 “My Son, I believe in you”라는 이야기는, 그에게 불행했던 유년 시절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었으며, 큰 꿈을 꿀 수 있는 희망을 갖게 해주었다. “나는 한국에서 만들어졌지만 미국에서 재활용 되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성공했음에도 항상 한국인임을 잊지 않고, 그에게 모질었던 조국에 대한 사랑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일 중 하나는 2006년도 워싱턴 주에서 1월 13일을 ‘Korean American Day’로 만드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1월 13일은 1903년도 에 첫 한인이 하와이로 이민을 온 날로 미주 한인사회가 최초로 시작되 었던 날이다. 이로써 워싱턴 주는 미국 50개 주 가운데 미주한인들을 기념하는 날을 처음으로 지정한 주가 되었다. 그 다음 해, 미국연방의회는 월 3일을 ‘Korean merican ay’로 만드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Chinese American Day’ ‘Japanese American Day’ 등 중국인이나 일본인을 기념하는 날은 없는데, 한인을 기념하는 날이 미국연방의 회에서 통과되었다는 것은 역사적이며, 아주 뜻깊은 일입니다.”

여든이 가까워오는 나이에도 그는 20대 못지않은 에너지로, 여느 젊은이들에게도 벅찬, 빠듯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잦은 강연과 출장 으로 1년의 3분의 2 이상은 집 밖에서 생활한다고 한다. 가끔 집에 오면, 아내가 “당신 누구세요?”라고 한다며 멋쩍게 웃는 인상 좋은 백발의 신호범 씨. “아내 다나는 나와 49년을 같이 살았습니다. 결혼 당시 국제결혼은 미국 대부분의 주에서 불법이었기 때문에 국제결혼을 인정했던 캘리포니아 주에 가서 결혼식을 올려야 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이룬 것들은 아내의 희생과 헌신으로 가능했지요. 아내 덕분에 한을 다 풀었어요. 나를 버린 아버지에 대한 생각 때문에 많이 울고 항상 힘들어했는데, 어느 날 아내가 그러는 거예요. ‘어머니는 돌아가셨기 때문에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지만, 아버지는 찾으면 되지 않나요?’ 처음에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했지만 아내의 격려에 용기를 얻어 아버지를 찾고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처음 아버지를 만났을 때, 아버지는 재혼해서 새어머니와의 사이에 이복동생이 다섯이나 있더군요. 가슴이 아팠어요. 나를 버리고 새로운 가정을 이룬 아버지가 못 견디게 원망스러웠지요.

가져간 선물을 몽땅 다 던져버리고, 울며 뛰쳐나왔습니다. 그걸 본 아내가 그랬어요. ‘같은 핏줄의 동생들인데 그 아이들이 잘못한 게 뭐가 있나요?’ 생각해보니 아내가 옳더군요. 아버지가 가난해서 동생들이 공부를 못했다는 걸 알자, 아내는 동생들을 다 미국으로 데려와서 교육을 시키자고 했어요. 교수가 무슨 돈이 있어서 다섯이나 공부시키냐고 했더니 아내가 자신이 취직을 해서 돕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모두 데려와서 다 공부를 시켰고, 지금은 다들 잘 살고 있습니다.”

동생들이 다 미국으로 온 후 홀로 남은 아버지를 찾아갔다. 그리고 평생 가슴에 담아 두었던 질문을 꺼냈다. “아버지, 동생들은 미국에 다 잘 있습니다. 이번엔 아버지를 미국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제 나이 네 살에 엄마가 돌아가신 후, 저는 아버지가 너무나 필요했는데 그 때 아버지는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셨나요? 이 말을 하면서 눈물이 막 쏟아지더군요.......”

아버지는 대답 대신 벌떡 일어나서 나가셨고, 밤새 돌아오지 않으셨다. 새벽 다섯시가 다 되어서야 술에 잔뜩 취해 돌아오신 아버지가 드디어 말문을 여셨다. “어떻게 인간으로서 자기 핏줄을 버릴 수 있었겠느냐? 네 어미가 죽었을 때, 나는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에 너를 먹여 살릴 수가 없어서 다른 동네에 머슴으로 팔려갔었다. 그리고는 일본에 징병되었단다. 그래서 너를 데리고 갈수가 없었다....... 호범아 나를 용서해라.......”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는 신호범 씨의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가난은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전 아무것도 모르고 평생 아버지를 원망했습니다....... 곧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미국으로 모시고 왔어요. 그리고 아버지는 저희 집에서 년을 같이 살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보름 전쯤에 제 손을 잡고 말씀하셨어요. ‘나는 이제 간다. 아주 행복하게 가. 네 덕분에 식구들이 이렇게 모여서 살고, 다 잘 되었구나. 너무나 고맙다. 네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고맙다고 전해다오.’ ” “어떻게 보면 아버지가 두 분이어서 좋으시겠어요” 하는 내 장난스런 이야기에 빙그레 웃으시며, 오른손 네 번째 손가락에 낀 반지를 내 보인다.

“내가 자랑 한번 할까요? 1975년도에 박사학위를 받는 졸업식 날, 양 아버지가 나의 손을 잡으시고는 ‘아들아, 내가 너의 손을 처음 잡았을 때 너는 열여섯 살이었다. 조그만 손이 씻지도 못해서 새까맣고 또 추위와 고생으로 쩍쩍 갈라져 있었는데....... 이 손에 박사학위 졸업장을 쥘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단다. 나는 네가 너무나 자랑스럽다.’ 그리고는 이 반지를 제게 끼워주셨어요. 이 반지는 양아버지의 어머니 귀걸이에 있던 다이아몬드와 양어머니의 반지에 있던 옥으로 만들어진 거예요. 아버지가 제게 주시려고 맞춤 주문하셨어요. 32년 동안 이 반지를 매일 끼고 다니고 있습니다. 내가 죽을 때는 아들에게 줄 거예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9년이 되었는데도, 지금도 여전히 너무나 보고 싶습니다.......”

신호범 씨와 보낸 시간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와 지금 나와 같은 젊은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너무나 다르다. 나를 비롯한 지금의 젊은이들은 전쟁과 배고픔 등의 생존적인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내가 무얼 하며 살고 싶은지 등 인생 전반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지만, 또한 나태해지기도 쉽다.

전쟁과 배고픔이 없는 나라에 태어났다는 것은 시대적 복권에 당첨된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너무나 많은 곳에서 전쟁과 기아에 허덕이고, 또 인간의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매일매일 힘겹게 생존 투쟁을 해야 하는 수십만,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 그들에게는 나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아야겠다는 고민 등은 꿈같은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혹시 아직도 “나는 부모를 잘못 만나서, ‘빽’이 없어서, 학벌이 나빠서 성공할 수 없어”라고 신세한탄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비관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신호범 씨의 이야기가 따뜻한 위로와 격려, 그리고 따끔한 채찍질이 되었기를 바란다. ‘그때 시절은 원래 그랬어’라며 일축 해버리기 쉽지만, 그 당시 신호범 씨가 미국에 입양되어 가던 배 안에는 “어느 대학 나왔어요? 어디로 유학가나요?” 등 신호범 씨에게 곤란한 질문만 하던 엘리트 집안의 자녀들도 있었고, 또 신호범 씨와는 달리 부모의 사랑과 보호를 받고 자란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아무리 시대가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이 겪는 설움과 고통은 결코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입양된 것도 운만은 아니었다.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고, 사람에게 진심으로 또 정성으로 최선을 다했던 모습이 한 미군을 감동시켰던 것이다. 최악의 환경을 가지고 태어났음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 들이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창조하고 새로운 인생을 개척했던 그의 용기는, 나에게 ‘시련은 곧 기회다’라는 말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세요. Impossible(불가능)과 I’m ossible(나는 가능하다)은 작은따옴표 하나 차이입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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