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이민기록문학상 수상작-5] 김명환, 김춘희(중국)
[제1회 이민기록문학상 수상작-5] 김명환, 김춘희(중국)
  • 월드코리안
  • 승인 2012.11.08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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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이민기록부문)/‘양주 하반에 살아있는 전설’

본지는 7월15일부터 9월20일까지 2012 제1회 월드코리안신문 이민기록문학상을 공모, 응모된 46명의 작품들을 대상으로 10월18일 심사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응모전에는 이민기록부문의 대상을 수상한 ‘정요한 옹의 인생역전’(캐나다 송광호), 이민문학부문의 대상을 수상한 ‘어머니가 그리운 날’(파라과이 고용철)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우수한 작품들이 출품, 본지는 이들 작품들을 연재할 계획이다.<편집자 주>

- 제1회 이민기록문학상 이민기록부문 우수상

<양주하반에 살아 있는 ‘전설’>
일제치하의 지난 30년대, 중국 흑룡강성 연수현 중화농장(中和农场), 가신농장(加信农场) 개척의 선구자인 고 김영창씨 사적을 더듬어 △고향 떠나 살길 찾아 온 이주민 거느리고 무연한 쑥밭을 옥답으로 만들고 △민족의 후대를 눈뜬 소경으로 만들 수 없다며 선후 학교를 네 개나 세워 △일제패망 후 비적들의 노략질에 견딜 수 없어 동포를 지키려고 퇴각일본군과 ‘무기담판’하다 군도에 찔려 37세 청춘을 바쳤다

비운이 짙은 지난 세기 20~30년대, 일제의 탄압으로 남부여대 정든 고향을 떠난 겨레들이 만주의 허허 벌에서 삶의 터전을 개척하던 역사는 어느덧 먼 이야기로 되었지만 오늘날에도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는 단편들이 전해지고 있다. 당년 흑룡강성 연수현 가신벌 개간의 주인공-김영창이 바로 그 역사의 페이지에 자리를 할만한 ‘선구자’ 중의 일원으로 각인되어 세대를 이어가며 회자되고 있다.

- ‘얼음 보’ 구축 -
흑룡강성 연수현소재지서 동쪽으로 80여리 되는 곳에 앞이 확 트인 넓은 벌이 있다. 여기에 당시 원근에 이름났던 가신(加信) 농장이 있었다. 이 농장개척사를 화제에 올리면 오늘도 80대 노인들은 ‘김영창이란 사람의 공로가 정말 대단하오’하며 치하를 아끼지 않는다.

김영창의 본명은 김장옥, 1908년 조선 경상북도 경산군 지량면 태생이다. 부친 김인수는 열렬한 애국자로서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했던 3.1운동에도 참가했었다. 일제의 피비린 탄압으로 운동이 무참히 진압되자 김영창이 여덟 살 나던 해 망명길에 올랐다. 압록강을 건너 중국 요녕성 흥경현에 와 살다가 후에 연수현 리가점(李家店)북쪽의 대위자란 곳으로 이주해왔다.

1931년, 일제가 조작한 9.18사변이 터지면서 국민당패잔병에 마적들까지 들이닥쳐 그들은 다시금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당시 하얼빈의 어느 수용소에 가서 겨울을 나고 이듬해 봄 주하(지금의 상지-尚志)의 하동농장(河东农场)에 분배받았다. 어려서부터 일로 잔뼈를 굳힌 김영창은 이대로 앉아있다간 살아나가기 어렵다 여기고 1934년경(26세), 10여명 난민을 거느리고 일굴만한 땅이 없겠는 가며 사처를 찾아다녔다.

산을 넘고 갈밭을 헤치며 몇 달간 사방 수백 리를 전전하던 끝에 야부리(亚布力)경내 장광재령(张广才岭)에서 발원하여 연수, 방정을 거쳐 송화강으로 흘러드는 양주하(亮珠河)상류의 중화벌을 찾아내게 되었다. 적설이 두터운 한겨울이지만 이곳이 벼농사에 제격이라고 판단한 김영창은 논풀이를 작심, 강줄기에 보막이공사를 벌리기로 했다.

눈보라가 윙-윙 소리 지르며 날리는 모진 추위를 무릅쓰고 무딘 도끼와 녹슨 톱 몇 자루로 부근 산에 가 나무를 베여다 언 땅에 막을 치고 북데기며 마른풀을 깔고 자면서 일군들은 빙판에 한층 한 층의 버들 단을 펴놓고 그 위에 풀뿌리 엉킨 흙모래를 쌓아 올려 ‘보’를 만든 것이다.

집에 돌아와 설을 쇠고 날씨가 따뜻해지자 김영창은 다시 이주민들을 이끌고 와서 두께가 한 미터쯤 되는 ‘버들 보’의 앞 뒤 얼음을 까냈다. 그리고는 날마다 기슭을 오르내리며 기다리던 어느 날, 그 무거운 ‘얼음 보’가 면바로 강심에 내려앉았다. 대성공이었다. 이렇게 김영창의 주선으로 중화농장개척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다.

- 피난 동포에 구원의 손길 -
농사지을 곳이 생겼다는 소문을 듣고 모여든 이주민들을 이끌어 김영창은 다시 도랑을 파고 강물을 끌어다 중화벌에 종래로 없었던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어데 가나 황량하기만 했던 벌판은 이들이 흘린 땀으로 한 뙈기 한 뙈기 옥답으로 변해 갔다. 하지만 소문을 들은 일제는 인차 ‘심술이 동해’ 선후 저들의 ‘개척단’을 끌어들인 다음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관동군 한개 중대를 중화농장에 주둔시켜 갖은 방법으로 ‘사단’을 조작하였다. 김영창을 비롯한 우리 동포는 이들의 등쌀에 배겨내지 못하여 하는 수없이 새로운 살길을 찾아 헤매다가 벌이 넓고 토질이 비옥한 가신벌을 발견했다.

하지만 주먹치기로 덤벼서는 안 되겠다고 여긴 김영창은 1938년, 조선에 가서 측량기술과 수리에 능한 송석배, 김팔원씨를 모셔와 벌판을 면밀히 측량한 후 이주민을 거느리고 종전의 방식대로 양주하 하류에다 튼튼한 ‘버들보’를 구축했다. 이들은 한족지주들에게서 여러 해 묵은 뜬 좁쌀을 꿔다 먹으며 밤낮을 모르고 일하여 키 넘는 쑥밭을 갈아엎고 수백 헥타르 논을 개간했다.

적수공권으로 물결 세찬 양주하를 두 번 다스리고 쌀알이라곤 구경할 수 없던 중화벌, 가신벌이 가을마다 황금일색으로 변해가자 사처에서 이주민들이 모여들었다. 김영창은 그들을 일일이 맞아 부근 한족마을을 다니며 임시거처를 마련해 주기도 하고 막을 치거나 집 짓는 일을 거드는 외 집집이 부칠 논까지 맡아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버스가 없어 가신에서 연수로 오가는 교통도구가 전부 마차였는데 한때 마부노릇까지 하며 한어를 익히고 또 천성적으로 행동력이 두드러진데다 귀신같이 사람을 휘여 잡는 수완이 있어 김영창이라면 당시 위만경찰도 섣불리 건드리지 못했다 한다. 그러다 보니 고향을 떠나 남부여대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며 고생하다 그의 이름 석 자를 대고 찾아오는 동포는 점점 늘어만 갔다.

김영창이 동포를 거느리고 신풀이면적을 해마다 크게 늘여갔지만 모든 일이 결코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으며 왜놈의 민족이간술책으로 위기가 닥치기도 일쑤였다. 그자들은 한족들이 찾아가 조선족이 봇둑을 내느라 자기네 밭을 못 쓰게 만드니 해결해달라고 도움을 청하면 ‘파지 못하게 하라’고 추기고는 조선족에겐 ‘모르는 척하고 계속 파라’고 시키며 ‘불씨’만들기를 일삼았던 것이다.

하여 조선족들이 논을 풀어 물줄기를 끌어들이고자 낮에 봇도랑을 빼면 한족들이 밤에 나와 봇도랑을 메우다보니 수십 명이 서로 쟁기를 휘둘러 대는 혈투가 벌어지기도 한두 번 아니었다.

어느 해인가 태화툰과 팔가툰 사이의 봇둑을 팔 때었다. 한족남녀 수십명이 도끼며 몽둥이 등을 들고 벌떼처럼 들이닥쳤다. 소문을 들은 김영창이 부랴부랴 말을 타고 달려왔다. 사람을 헤집고 들어선 김영창은 겁기라곤 조금도 없이 능숙한 한어로 밭을 논으로 풀면 좋다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엮어댔다. 이 때 일행 중 좌상인 듯한 늙은이가 나서며 자기네는 이곳에서 4대째 살았는데 그간 큰물이 여러 번 났어도 종래로 밭에 물이 들어온 적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영창이 나서며 ‘그래 이곳에 물이 들어오면 어쩌겠는가’ 따지자 한족노인은 ‘그러면 논을 풀게 한다’고 했다. 이날 분쟁은 여기서 일단 끝났다. 이튿날 그들은 이미 파놓은 봇둑에 물을 에우기 시작했다. 다음날 새벽 마을에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보물이 둔덕을 넘어 마을에까지 흘러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소지주, 대지주들이 엇갈아 김영창을 찾아 자기들의 토지를 사거나 세 맡아 다루라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농장을 개척해 몇 해가 지나자 그 넓은 가신벌이 죄다 논으로 변하여 상지, 목단강, 연길, 오상(五常),길림 등지서 이주민이 끊임없이 모여들어 이 고장은 천여세대 규모의 동포집거지로 탈바꿈하였다. 해마다 벼이삭이 거의 영글어 가는 추석 무렵이면 원근의 남녀노소가 당시 학생이 제일 많았던 가신학교마당에 모여 운동회를 열었다. 마을마다 소, 돼지를 잡고 팀을 내와 축구, 그네, 널뛰기, 씨름 등 경기를 성세 있게 벌림으로써 그토록 험악한 세월에도 동포들에게 삶의 의욕을 키워주고 응집력 구축해나갔다.

비록 자기는 공부를 못했어도 민족의 후대를 눈뜬 소경으로 만들 수 없다고 주장한 김영창은 농장을 개척한 이듬해부터 갖은 방법을 대여 학교를 세우기에 고심했다. 당지에 교사가 부족하자 조선에 가서 이동식, 송영권, 이천우 등 교사를 모셔오기도 했다. 농장의 골간들과 함께 뛰어다니며 선후 중화, 가신, 유민, 팔단 등 네 개 소학교를 일떠세웠다.

그리고 자기가 솔선하여 집집이 다니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라고 설득했으며 살림이 특별히 구차한 집 애들은 월사금을 면제해주기도 했다. 바로 여기서 글을 읽은 일대들이 후에 하얼빈 등지 학교에 진학하여 배움의 길을 넓힌 이도 있고 일제패망 후에는 수백 명이 잇달아 의용군에 가입하여 연수일대 토비숙청과 당시 임시로 연수에 옮겨졌던 송강성위 수위(守卫)임무를 성과적으로 수행했다. 또 후에 적지 않게는 최전선으로 달려가 장춘, 사평해방전역을 치르고 승승장구 남하하여 국민당저항세력을 섬멸하는 해남도전역에까지 참가했으며, 건국 후엔 여러 분야에서 업적을 쌓아간 사람도 많았다.

이런 김영창을 두고 ‘그분은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중화농장과 가신농장개척 그리고 당시 웬만한 곳에선 엄두도 못내는 학교를 네 개나 세웠다는 것은 우리민족 역사에 남을만한 공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노인이 한두 사람 아니었다.

김영창은 이렇듯 명성이 뜨르르했지만 개인토지라곤 없었고 유일한 재산이란 아이들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키운 젖소 한 마리, 거기에 경상북도 고향에서 살길을 찾아온 몇몇을 일군으로 두었던 것이다.

- 동포들 삶터 지키려다 불의지변 당해 -
1945년 8월15일, 일제가 패망한 이 날은 망국의 설움을 36년간이나 삼키며 살아왔던 우리에게 커다란 기쁨을 가져다주었으나 연수일대선 그 희열이 오래 가지 못했다. 당시 이곳은 무정부 상태였고 토비들이 살판 치는 현장이었다. 가신농장과 이웃한 방정의 남천문, 보흥, 희발 등지에서 돈푼이나 있다고 알려진 우리 동포가정은 적지 않게 토비들에게 털리고 목숨을 잃은 사람도 수십 명에 달했다. 그들의 노략질에 견디다 못해 적지 않게 피난길에 올랐으나 도중 물건을 모조리 빼앗겨 알거지가 되거나 얻어맞아 죽은 사람도 많았다.

그 무렵 국민당계통의 지방보안대가 있었지만 백성의 질고를 개의치 않다 보니 무슨 변이 닥쳐도 그들을 찾아가 도움을 바랄 수 없었다.

당시의 ‘어수선한 시국’을 누구보다 잘 파악한 김영창은 가정을 이끌고 얼마든지 ‘은신처’를 찾아갈 수 있었지만 농장개척에 땀 흘리며 고락을 함께 해온 동포를 버리고 떠날 수 없어 만나는 사람마다 피난 말고 함께 ‘고향’을 지키자고 호소했다.

하지만 정작 남아 살자니 토비들의 ‘성화’가 날로 심해져 백성들은 하루하루 불안에 떨어야 했다. 어떻게 하면 무기를 얻어 이를 대처할까 궁리하던 김영창에게 ‘절호의 기회’가 차례졌다. 9월 7일 저녁, 가신툰과 강 하나를 사이 둔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초가집이 두 채 있는데 거기에 일본군중대부가 머물렀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당시 대부대를 떨어져 산길을 더듬으며 삼삼오오 퇴각하는 일본군에게 밥을 주고 옷을 바꿔 입힌 대가로 무기를 얻는 경우도 있었다.(그들을 농장에 데려다 잠자리를 마련하고 먹여 주며 일본군 후퇴부대와 피난민으로 막힌 철도가 트일 때까지 안전을 담보하는 조건으로 무기를 얻어내자. 그래야 우리 동포가 살아난다.)

이튿날 오전, 그는 간단한 담판요지를 작성하여 일본어에 능숙한 강대학, 김영욱을 통역으로 데리고 30대의 한족농민을 앞세워 일본군 중대장이 거처한다는 강 건너 마을로 ‘담판’하러 갔다.(당시 함께 떠나기로 했던 농장 골간중의 한 사람은 ‘죽을 곳을 왜 찾아 가는가’ 하며 가정에서 한사코 말리는 바람에 눌러앉았다.)

패전 도주하는 일본군이 여차하면 ‘최후발악’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비장한 결심을 내린 김영창은 동행자를 거느리고 사전 약속에 따라 초가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얼마 안 되여 김영창은 일본군 중대장이 갑자기 내미는 군도에 복부를 찔려 당장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한다. 이 때 강대학, 김영욱이는 뒷창문을 박차고 내뛰다가 보초군의 줄 사격을 받았다. 왜놈들은 두 시체를 집안에 끌어다 놓고 불을 지른 다음 부랴부랴 자리를 떠났다.(주인집 할머니가 물을 끓여 나르다 이들 셋의 피살과정을 목격)

당시 주변 마을은 공포에 눌려 후사처리에 감히 나서지 못하다가 사흘만에야 각 툰의 대표들이 모였다. ‘이제 김영창이 죽었으니 우리는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향후생존방책을 토의하며 저마다 비통을 가까스로 누르고 피살현장으로 갔다. 시체는 이미 타서 ‘불성모양’이였으나 다행히 김영창은 금니를 해 넣은 표적이 있어 시체를 분별할 수 있었다. 촌민들은 뒷마당에 장작불을 피우고 눈물을 뿌리며 세 구의 시체를 그 위에 올려놓았다...

당시 김영창일행의 피살에 관해 이런 이야기도 있다. 가신경찰서의 ‘한퇀장’이란 별명을 가진 한서장이 김영창네가 무기를 얻으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 원래부터 당지에서 조선족의 ‘두령’으로 지목되던 그의 세력이 커질까봐 두렵기도 했고 한편 자기도 한몫 볼 타산으로 몰래 경찰을 일군의 주둔지와 멀지 않은 곳에 매복시켰다. 이것이 겹겹이 늘여진 일군의 보초병에 발견, 소식이 즉각 일군중대장에게 전달되자 김영창네와 매복자를 한 통속으로 알고 이들이 담판명목으로 무기를 얻은 다음 일거에 손을 쓰려 음모를 꾸몄다고 판단하여 일군이 먼저 손을 썼다는 것이다.

이렇게 김영창은 동포의 안전한 삶을 위해 나섰다가 37세의 청춘을 바치게 되었다. 그와 동행자의 장례식은 당지에서 전례 없던 규모로 3일간 장중하게 치러졌다. 조선족, 한족남녀로소 수백 명이 영구를 뒤따르고 광목천으로 만든 만사가 가신에서 유민촌 서남쪽에 위치한 묘지에 이르는 6리 길에 널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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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창은 사망 후 당시 좌 적인 사조(인물)의 영향으로 누명(중화, 가신농장이 일제의 조종하에 있었다는 이유)을 쓰게 되고 가족과 친지들도 적지 않은 박해를 받았으며 아내 최씨는 이들의 ‘성화’(불로 팔을 지지고 입에다 똥을 퍼 넣는 등)에 견디다 못해 목매어 자살했다. 피난살이 동포에 악한 짓이란 모르고 그들을 이끌어 무연한 쑥밭을 옥답으로 풀었으며 또 동포들 삶의 터전을 지키는 일에 앞장섰다가 소중한 생명을 바친 김영창, 일제치하 우리민족 수난사에 무수한 ‘선각자’중 일원이었지만 역사의 ‘오판’으로 그의 유골은 엉성한 풀밭에 가린 채 장장 60년 세월 아무런 명분을 찾지 못했다.하지만 역사의 진실을 밝히려 노력한 우리민족 간부와 유지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2008년 북경민족출판사에서 출판한 ‘연수현 조선족역사’란 책에는 “중화농장, 가신농장개척의 선구자”로서 김영창의 기여와 공로가 두드러지게 부각되어 양주하반 우리민족 후세들의 마음속에 하나의 거룩한 ‘기념비’를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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