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이민기록문학상 수상작-6] 신순희(미국)
[제1회 이민기록문학상 수상작-6] 신순희(미국)
  • 월드코리안
  • 승인 2012.11.08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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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이민생활기 형식의 수필부문)/‘열세 번째 봄’

본지는 7월15일부터 9월20일까지 2012 제1회 월드코리안신문 이민기록문학상을 공모, 응모된 46명의 작품들을 대상으로 10월18일 심사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응모전에는 이민기록부문의 대상을 수상한 ‘정요한 옹의 인생역전’(캐나다 송광호), 이민문학부문의 대상을 수상한 ‘어머니가 그리운 날’(파라과이 고용철)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우수한 작품들이 출품, 본지는 이들 작품들을 연재할 계획이다.<편집자 주>

- 제1회 이민기록문학상 이민생활기 형식의 수필부문 우수상

<열세 번째 봄>
어느덧 딸아이의 찬란한 이십대가 지나가고 있다. 피어보지도 못하고 누려보지도 못하고 봄이 오고갔다. 13년간. 딸아, 너는 어찌 그 세월을 버티었니? 눈으로 호소하는 그 마음을 어미인 나라고 다 알 수 있을까. 여전히 천진난만한 눈동자가 호수 같다. 열세 살에 한국을 떠났으니 미국에서 산 세월이 한국에서 산 시간과 맞먹는다. 이젠 편안하다. 딸아이의 학교과정이 모두 끝난 후, 나는 더 이상 교육으로 어찌해 보겠다는 스트레스가 사라졌다.
스물한 살에 고등학교 특수학급을 졸업했다. 일반고교과정보다 2년 더 다닐 수 있는 것은 직업훈련과정이 포함되어서다. 그러나 직업을 갖는다는 건 꿈일 뿐, 졸업한 것만도 대견하다. 졸업식은 교실에서 학부모가 모인 가운데 조촐하게 치러졌다. 담임교사와 보조교사, 자원봉사 학생, 특수학급 재학생들이 축하해 주었다. 딸아이는 학교에서 빌려 준 하얀색 가운과 사각모를 썼다. 모자가 커서 자꾸 벗겨져 애먹었다. 단체로 기념사진을 찍고 졸업장도 받았다. 일반학급 졸업생들이 커다란 체육관을 빌려서 성대하게 졸업식을 가진데 비하면 서운한 마음도 조금 들었지만 그 자리에 선 딸이 자랑스럽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디가 문제인지, 어디가 아픈지. 그냥 울었다. 내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딸이 세 살 때였다. 점점 자라면서 자폐와 정신지체 증세가 나타나면서 몇 마디 하던 말을 멈추고 눈으로 말하기 시작하더니 세상에 무심해졌다. 혼자 놀기를 좋아하던 딸아이는 5학년 때 다리를 다쳐 걷는게 부자유스러워졌다. 특수학교 반친구 사내애가 체육관 무대에서 밀어 떨어뜨려 다리가 부러졌다. 그 애가 좋아한다는 표현을 그렇게 했다는데 무슨 말을 하랴.

지난 8년간 딸은 미국에서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낯선 얼굴, 낯선 언어에 혼란이 있었을텐데 생각보다 잘 적응했다. 좋아하는 친구도 생겼다. 그중에도 처음 유진에 있는 학교에 다니다 만난 헤일리를 잊을 수 없다. 지역 내 여러학교 장애아들이 함께하는 여름학교 프로그램에서 만났다. 마냥 푸르던 어느 날, 헤일리는 우리 가족을 집으로 초대했다.

평범한 가정인줄 알았는데, 그 집에는 해외 입양아와 부모가 양육권을 포기한 아이들 여럿이 모여살고 있었다. 앞을 못 보는 헤일리도 마찬가지다. 헤일리 엄마의 안내를 받고 집안을 둘러보다 어떤 방 벽에 걸려있는 색동저고리를 보았다. 한국에서 입양한 소아마비 소녀의 것이었다. 그 소녀를 보고 애틋하고 반가운 마음에 말을 시키니 자꾸 도망갔다. 그러다 거실 바닥에 쭈그린 자세로 아무것도 덮지 않고 잠만 자고 있는 어린애를 보았다. 한국에서 입양했다는 일곱 살짜리 소년. 헤일리 엄마는 그 애가 경기발작을 자주하고 아프다고 했다.

그렇다면 침대에 눕히지 않고 왜 여기에서 자는 건가. 마음이 착잡하고 무거웠다. 며칠후 우연히 신문 ‘오레고니언’에 실린 헤일리 엄마가 쓴 기고문을 읽었다. 정성껏 돌봐 주었던 바로 그 아이가 하늘나라로 갔다고. 내 머리 속에는 맨바닥에 새우같이 웅크리고 죽은 것같이 누워있던 그 어린아이 모습이 남아있다. 미국으로 입양만 되면 잘되는 줄 알지만 알려지지 않은 비극이 얼마나 많은지.

딸이 중학교를 졸업할 때는 유난히 마음이 쓸쓸했다. 타국에서 처음 맞는 졸업식에 나 혼자 참석해서였을까. 졸업식장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졸업식이 열리는 체육관 스탠드에 이미 학부형들이 앉아 있었다. 교사들의 인도에 따라 식장으로 맨 처음 휠체어를 탄 아이들이 입장하고, 이어서 특수학급 아이들이 들어갔다. 그리고 일반학급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늦게 도착한 학부형들이 식장 뒤를 메꾸었다.

졸업생들은 저마다 멋을 내고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뒤에 서서 키 큰 사람들 틈으로 앞쪽을 바라보니, 모처럼 예쁜 원피스를 입은 딸의 모습이 겨우 보였다. 담임교사가 딸아이를 붙잡고 교장 앞에 서 있다. 교장이 졸업장을 읽는 동안 딸은 여전히 딴청을 부리며 시선을 엉뚱한 곳에 두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 백인들 틈에 홀로 서 있어 외로워 보였다. 그것은 나의 외로움이었을까. 순간 가슴이 아려 나는 화장실로 급히 가서 소리도 못 내고 잠깐 울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식장으로 되돌아왔다. 졸업식이 끝나갈 즈음에야 남편이 카메라를 가지고 나타났다. 남편은 언제나 시무룩한 분위기를 밝게 하는 재주가 있다. 딸의 장애를 개성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다.

고등학교는 시애틀에서 다녔다. 남편의 일 때문에 이사한 것이다. 미리 오레곤에서 딸에 관한 정보가 담긴 학교서류를 시애틀에 있는 학교에 보냈고, 특수학급 측으로부터 입학허가도 받아 두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제 와서 장애 상태가 양호한 아이들만 다닌다는 게 이유였다. 말하지 못하는 딸아이를 흘낏 쳐다본 교직원은 난색을 표했다. 현재는 학생 수가 넘쳐 자리가 없다고 하면서. 기운이 쭈욱 빠지며 피로가 몰려왔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장애아에 등급을 매기는 건 똑같구나. 입학을 거절당한 채 다시 특수학교로 배정되었다.

특수학교는 일대 일로 아이들을 돌봐주는 일종의 보호소였다. 점심시간에 학교에 가면, 덩그러니 커다란 식탁 하나에 학생 하나 보조교사 하나 그렇게 띄엄띄엄 점심을 먹고 있었다. 서로 모여서 먹는다면 밥맛도 더 날 것 같은데 먹는 모습이 초라해 보였다. 아이들과 어울리는게 가장 중요한데, 이 학교는 적당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은 ‘장애자의 천국’이라는 말에 현혹되었나보다. 교과과정에 언어치료, 작업치료에 자전거 타기, 볼링치기 등 프로그램이 많고 수영장 시설도 좋기는 하다. 그런데도 어딘가 아쉬운 건 아마도 교사들이 기계적이지 않았을까. 때론 인간미 넘치는 한국의 선생님들이 그립다. 사람 사는 세상 어디나 똑같은 것을. 한 가지 한국과 다르다면 미국인들은 호기심의 시선을 직접적으로 보내지 않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위로가 된다.

또다시 이사했다. 미리 알아 본 고등학교 특수학급 담임교사와 상담교사는 따뜻하고 친절했다. 학급에는 유난히 여자애들이 많이 있는데 얼마나 다정하고 예쁜지. 그 애들을 보면 다 내 자식 같고 애틋하다. 딸아이는 학교 가는 것을 즐거워했다. 먹기 힘들어하던 햄버거도 먹기 시작했다. 담임교사는 ‘영 레이디’라고 불러 주었다. 여름방학에 학급 아이들을 자신의 집에서 캠프하며 하룻밤을 지내게 하기도 하는 열린 마음을 가진 담임교사를 만난건 행운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학교버스가 문제였다. 딸아이는 중년 남자가 운전하는 작은 학교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그런데 그는 아침부터 입에서 술 냄새를 풍기는 것이었다. 어쩌다가 아니라 자주 그랬다. 이걸 어떡해야하나 고민하다 담임교사에게 얘기하고 학교장 앞으로 편지를 쓰고 사인을 했다.

그 편지는 학교버스 회사로 전달됐다. 학교버스 회사는 처음에는 미안해하며 조사해 보겠다고 하더니 나중에 태도를 바꿔 뻣뻣하게 나왔다. 증거가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 그 후로는 술 냄새를 안 풍겼다. 그러나 학부모 하나가 내 말을 듣고 ‘아, 그 남자, 사케 먹는 사람이야’라고 했다. 나는 안전이 걱정되어 딸의 등하교를 졸업할 때까지 직접 시켰다. 그 운전수는 여전히 학교에서 얼굴을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우리 집을 아는 그가 해코지를 할까 봐 은근히 겁이 났다. 그럴수록 나는 더 당당하게 그 남자 앞을 지나갔다.

5년간 함께한 선생님과 친구들, 익숙한 교정과 노상 다니던 길에 편안해진 딸은 건강해졌다. 그리고 졸업과 더불어 어느덧 여리고 가냘픈 소녀에서 처녀가 되었다. 딸은 이제 집에서 나와 함께 지낸다. 남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힘들어도 내가 돌봐야 맘이 편하다. 이것이 바로 내게 남은 숙제다. 그렇다고 어느 기관에 맡긴다는 게 아니다. 저도 나이 들어가고 나도 늙어가니 헤어지는 연습이 필요하다. 남편은 아직도 딸아이가 말하는 걸 꿈꾸지만 나는 나의 딸 채리가 엄마 없이도 홀로 세상을 살아 나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것 역시 꿈이라면 내가 마지막까지 돌봐줄 수 있기를.

염려하지 않는다. 살면서 예기치 않은 일은 늘 온다. 누구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남편은 여태껏 살면서 ‘채리때문에’라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런 말은 내가 했다. 나는 아직도 딸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산다. 딸아이는 이해하리라 믿는다. 그래서 내 마음은 편하다.

오늘같이 쨍하고 해가 비치면 마음이 설렌다. 어제 내린 우박에 막 솟아나던 튤립 이파리가 몸살을 앓았어도 다시 팔팔해지듯, 봄은 씩씩하고 파릇하게 오고 있다. 차가운 바람을 뒤로 하고 햇살 깊숙이 들어오는 거실에서, 뒤뜰에 돋아나는 잡초에서, 그리고 평화롭게 낮잠 자는 딸의 얼굴에서 봄을 만나고 있다. 뒤뜰에 오래된 채리 나무에 제법 큰 새집을 걸어 두었더니, 며칠 전부터 작은 새 한 쌍이 들락날락한다. 알을 까고 있는 게 틀림없다. 새로운 생명이 또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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