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이민기록문학상 수상작-7] 진경자(독일)
[제1회 이민기록문학상 수상작-7] 진경자(독일)
  • 월드코리안
  • 승인 2012.11.08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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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수필부문)/‘아버지의 제삿날’

본지는 7월15일부터 9월20일까지 2012 제1회 월드코리안신문 이민기록문학상을 공모, 응모된 46명의 작품들을 대상으로 10월18일 심사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응모전에는 이민기록부문의 대상을 수상한 ‘정요한 옹의 인생역전’(캐나다 송광호), 이민문학부문의 대상을 수상한 ‘어머니가 그리운 날’(파라과이 고용철)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우수한 작품들이 출품, 본지는 이들 작품들을 연재할 계획이다.<편집자 주>

- 제1회 이민기록문학상 이민문학 수필부문 우수상

<아버지의 제삿날>
“다들 모였으면 시작할까, 지금부터 제 8주기 아버지의 추도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멀리 독일에 살고 있는 둘 째 동생 경자까지 참석하게 되어 아버지 어머니께서 기뻐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창밖에 어둠이 짙게 내린 늦은 밤, 성경책을 펴 들고 제사상 앞에 정장차림으로 무릎을 꿇고 앉은 오빠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방안에 나직이 흐르기 시작했다.

제사상 뒤로는 사군자가 그려져 있는 흑백의 8폭 병풍이 둘러쳐져 있었다. 제사상 머리에는 지방(紙榜) 대신에 오빠 집 안방 벽에 걸려 있던 부모님 사진이 나와 있었다. 어머니 회갑 때 찍은 사진이라고 하니 삼 십 년이 넘은 사진이었다. 반듯한 가르마 머리에 아이보리 색 한복을 입으시고 금테 안경을 쓰신 어머니와 줄무늬 넥타이에 짙은 회색 정장을 하고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얼굴에 주름도 별로 보이지 않았고 눈빛도 맑고 정정해 보였다.

병풍 앞에 나란히 세워져 있는 사진 속의 어머니 아버지가 목기 위에 수북하게 차려져 있는 음식 너머로 우리들을 건너다보고 계셨다. 제사상은 곶감 밤 대추를 비롯하여 삼색 실과는 물론이고 각종 나물과 전(煎), 나무 꼬치에 고기와 파 버섯 당근 등을 색색으로 꿰어 지져낸 산적과 떡이며 생선포로 구색을 갖춘 제사상이었다. 커다란 교자상이 비좁을 만큼 푸짐하게 차려진 제사음식들은 경동시장과 동대문 중부시장은 물론 고향 강경까지 두루 찾아다니며 발품으로 장만한 올케언니의 정성이 가득 담긴 제사상이었다.

독일 땅에 살고 있는 내가 아버지의 제사에 참석하기는 장례식에 다녀간 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동안 한국에 다녀갈 기회가 있었지만 내 볼일과 날짜가 맞지 않아 기회가 닿지 않았었다. 부모님 제사가 돌아와도 기껏해야 제삿날 밤에 오빠한테 전화 한 통화를 하거나 거실 탁상 위에 초 한 자루를 밝혀 놓는 것이 고작이었다.

부모님 제사에 참석할 수 없는 애통한 마음을 작은 촛불 하나를 켜놓고 앨범을 꺼내 사진을 바라보며 부모님 생각 고향생각을 하면서 제삿날을 쓸쓸히 혼자 지냈다. 부모님 살아생전에도 변변히 효도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이제는 돌아가신 후 제사도 모시지 못하는 불효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무겁고 착잡했다. 그러던 내가 이렇게 고국에 와서 가족들과 함께 오늘 아버지 제사를 모시게 되어 감회가 깊었다.

내 생의 반 이상을 독일에서 살고 있는 나는 인천공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이방인 아닌 이방인이 된다. 한국에 올 때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고국의 모습에 정신을 차릴 수 없어 어리벙벙하다. 전에 가 봤지만 이번에도 오빠 집에 가는 길이 새삼 알쏭달쏭하여 큰언니와 막내 동생과 전철역에서 만나 같이 가기로 하였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는 오빠 올케언니와 시간을 넉넉히 갖지 위하여 제사를 모실 시간보다 해가 지기 전에 오빠 집에 일찍 도착하였다. 오빠 네가 살고 있는 신림동 P아파트는 들어가는 입구부터 깔끔해 보였다. 승강기를 타고 오빠 네가 사시는 6층에서 내리자 전 부치는 냄새가 아파트 복도에까지 고소하게 번지고 있었다.

복도까지 나와서 우리를 반겨주는 언니 오빠 뒤를 따라 들어선 아파트 거실 바닥에는 밀가루 반죽이며 포를 뜬 생선살과 실파, 두부, 미나리, 고사리, 고구마, 기름병 등 각종 전을 부치는 재료가 푸짐하게 널려 있었고 전기 프라이팬 위에서는 마침 파전이 노릇노릇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자랄 때 어머니는 큰일을 치를 때마다 시골 집 마당에 까만 무쇠 솥 뚜껑을 거꾸로 엎어 걸어놓고 싹둑 자른 호박 꼭지로 들기름을 반들반들 발라가며 부침개를 부치셨던 모습이 순간 아련하게 머리속을 스쳐갔다.
“제사 음식에 갈비는 오르지 않는데…..” 아파트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주방먼저 둘러보고 온 큰 언니가 냄비에 재어놓은 갈비를 보았는지 내 귀에다 대고 들릴락 말락하게 말했다.

“언니도 참, 가만히 있어, 아버지도 갈비 좋아하셨잖아, 우리도 좋아하고” 나는 아무도 눈치체지 못하게 큰 언니 옆구리를 쿡 찌르며 살짝 말했다.

종가 집안의 맏딸로 어머니 아버지 밑에서 평소 예절을 제대로 보고 배워 결혼한 큰 언니는 제사 음식을 많이 장만해 봤을 것이고 집안 대소사를 자주 치를 기회가 많았을 것이다. 유교 식 전통을 훤히 알고 있는 언니는 경조사에 여전히 옛날 형식을 중요시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일찍이 집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외국에서 살고 있는 나는 사정이 달랐다.

독일에서 내가 모셔야 할 제사가 돌아와도 제사상을 차릴 때 첫 줄에 밥은 서쪽, 국은 동쪽, 둘째 줄에는 어동육서(魚東肉西)의 원칙에 따라 적과 전을 놓는다던가 과일도 홍동백서(紅東白西)의 원칙을 따져 순서대로 놓지 못하고 어렸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 대충대충 흉내만 낼 뿐이었다. 또한 외국에서는 제사에 필요한 제물들을 구색을 갖춰 준비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삼십 여 년을 외국 땅에서 지내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제사를 모실 때에도 형식보다는 고인이 즐겨 드셨던 음식을 장만해 놓고 실질적이며 편리한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추도식을 시작하기 전에 조카 성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성경책 한 권씩과 추도사와 찬송가 가사까지 꼼꼼하게 인쇄된 Dina 4용지 두 장씩을 참석한 가족 앞에 나누어 주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윽고 가족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성경책을 펴든 오빠가 성경봉독으로 추도식을 시작했다. 다음은 “찬송가 460장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우리는 앞에 놓인 찬송가 책을 펴 들었다. 느리고 나직하게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자 조금 전까지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푸느라고 웃음꽃을 피우며 화기애애하던 흥분이 찬물을 끼얹은 듯 순식간에 가라앉고 엄숙한 분위기로 싹 바퀴면서 방안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져 침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이어서 조카 성수의 “네 부모를 공경하라” 라는 성경 봉독이 이어졌다. 가족들은 성경 봉독이 다 끝날 때까지 숨을 죽인 채 모두들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생전의 부모님의 사랑을 되새기면서 부모님께 잘해드리지 못한 지난 날들을 아쉬워하는 오빠의 절절한 추도사가 있은 후 오빠의 선창으로 부모님의 은혜를 따라 부를 때는 모두들 목이 메어 노래를 끝까지 부르지 못하고 눈시울 적시고 말았다.

끝으로 오빠의 가슴적시는 마지막 기도가 있은 후 추도식이 끝났지만 모두들 숙연한 분위기에서 바로 헤어나지 못하고 방안은 한동안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오빠 집에서 모시는 아버지의 추도식은 음식준비며 제사상을 차리는 과정부터 끝마칠 때까지 어느 한 곳도 소홀함이 없이 정중하고 지성스러웠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가족이 음식상에 삥 둘러 앉아 몇 마디 추도예배와 찬송가 한 두 곡절을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오빠는 그 날 행해질 추도식 프로그램을 미리 작성하고 인쇄하여 참석한 가족 모두에게 일일이 나누어주었고 생전에 부모님의 은덕을 기리면서 추도식을 엄숙하게 거행하였다.

지난 날 우리 집에서 유교 식으로 지냈던 제사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날 밤 제사가 드신 분의, 누구 신위(神位)라고 지방(紙榜)을 써 붙이는 대신에 사진을 모셔놓았고 영전에 잔을 올리지 않고 절만 안 했다 뿐이었다. 그렇게 지성으로 제사를 모시건만 추도식을 마친 후에도 왠지 모르게 나는 가슴 한 켠에 자꾸 섭섭한 생각이 파고들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살아생전에 교회에 다니신 분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오빠 언니가 교회에 다니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으셨다. 우리 집은 종가 집이라 4대조 증조할아버지부터 아들이 없으셨던 외증조모님 제사까지 모시느라 일년 내내 제사가 들지 않은 달이 별로 없었다.

제사가 돌아오면 어머니는 하루 전부터 광 속에 들어 있던 놋그릇 제기를 꺼내놓고 짚수세미에 기왓장 가루를 묻혀가며 노란 빛이 반짝거릴 때까지 광이 나게 닦았다. 할아버지께서는 선반에서 갓과 망건을 내려 먼지를 턴 다음 의관을 갖추셨고 작은 아버지와 아버지는 정성껏 다듬질 하여 새로 지은 흰 두루마기를 입으셨다. 제사상 머리에는 * * 현고학생 신위라고 쓴 지방을 붙인 후 자정이 되면 방문을 활짝 열어 놓고 한지에 먹을 갈아 아버지께서 직접 쓰신 축문을 읽으심으로써 제사가 시작되었다. 제사상 제일 앞줄에는 세가지 재료로 장만한 탕(湯)과 흰쌀로 지은 메(밥)가 놋 식기에 수북이 담겨 올랐으며 맑고 은은한 향이 나는 수복백화 정종으로 잔을 올리고 재배(再拜)를 하면서 제사를 모셨다. 한학을 하셨고 유교사상 속에 평생을 보내신 분이시니 그 시대의 당연한 모습이었다.

생각해 보면 유교 식 전통을 지켜온 아버지의 세대와 기독교를 믿는 오빠의 세대가 다를 뿐이지 어느 쪽이 더 좋고 어느 쪽이 나쁘고 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떤 방식으로 제사를 모시든 조상을 위하고 어버이를 기리는 마음은 다 같을 것인데 오늘 밤 아버지 제사를 모시면서 뭔가 빠진 듯한 허전한 심정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음식을 나누기 전에 나는 서운함을 참지 못하고 기어코 한마디 하였다.

“아버지는 생전에 술을 무척 좋아하셨는데 술 한 잔 올리면 안 될까요?" 나는 올케언니와 오빠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대단한 애주가셨지만 없는 살림에 우리 오 남매를 가르치시느라고 당신께서 좋아하셨던 그 술을 단 한 번도 마음 놓고 드시지를 못하셨다.

“작은아씨, 그렇게 하세요.” 혹시라도 나로 인해 오빠와 올케언니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는 않을까, 속으로 걱정을 했는데 내 염려와는 달리 올케언니는 하나도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고 선선하게 내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아버지께 올릴 마땅한 술이 없는데 어쩌나….” 갑작스러운 내 제안에 미리 술을 준비하지 못한 오빠는 난처한 표정으로 당황스러워했다.

“오빠, 그건 걱정 마세요, 아버지가 독일에 오셨을 때 매일 반주로 한잔씩 즐겨 마셨던 술을 제가 가지고 왔거든요.” 나는 분위기를 봐서 꺼내 놓을 생각으로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온 독일 술 아스팍(Asbach Uralt)을 가방에서 꺼냈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 사진 앞에 잔을 올리고 머리가 방바닥에 닿도록 깊숙이 숙이고 손을 모아 두 번 절을 하였다. 이어서 큰언니를 비롯하여 막내 동생 내외와 손녀와 손녀사위도 잔을 올리고 절을 하였다. 부모님 영전에 잔을 올리고 절을 하고 나니 그 때서야 꼭 해야 할 일을 마친 것처럼 가슴 속이 후련했다.

서울 올림픽이 열리기 이태 전에 아버지 어머니를 독일로 모실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남편과 사별하기 전 일이었다. 남편은 아버지가 술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고 독일에서 유명하다는 술은 골고루 구해놓고 아버지가 식사 하실 때마다 이 술 저 술을 따라서 권했다. 그 중에서 아버지가 즐겨 드시던 술이 아스팍 이라는 독일 술이었다. 생산량이 적어 외국으로 수출이 안 되는 이 술은 38도나 되는 와인 브랜드지만 마시고 난 후 뒤끝이 깔끔하여 독일에서 애주가들이 선호하는 술이다.

나는 이번 귀국 길에 면세점에서 아스팍 한 병을 샀다. 술을 살 때 생각으로는 아버지 제사상에 독일에서 즐겨 드셨던 그 술을 한 잔 올리려고 하였으나 기독교 식으로 추도식을 거행하기에 선뜻 술병을 꺼내 놓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 옛날 아버지께서는 제사를 모시고 난 후에는 퇴주한 술을 가족들과 나누며 음복을 하셨던 생각이 나서 오빠를 바라보았다.

“오빠! 우리 오늘 밤 아버지 어머니 생각하면서 아버지가 즐겨 드셨던 이 술 한 잔씩 하면 안될까요?” 나는 또 한 번 용기를 내서 말했다. 사실은 오빠보다 교회 권사님이신 올케언니가 신경이 쓰여 눈치를 살피면서 말을 꺼냈다.

“작은 아씨, 그렇게 하세요. 예수님도 열 두 제자와 포도주 만찬을 하셨다는 기록이 있잖아요. 여보, 당신도 모처럼만에 만난 형제들과 같이 술 한 잔씩 나누세요.” 오빠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올케언니의 시원시원한 반응에 우리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 날 밤 우리 형제들은 권커니 잦거니 하며 1리터짜리 아스팍 한 병을 거뜬하게 비웠다. 그리고 취기가 얼큰하게 오른 나는 그 옛날 강경 친정 집에서 제사를 모시면서 아버지께서 읽으셨던 축문을 기억나는 대로 읊조려보았다.

“유---세차 (維-歲次)--- * 년 * 일….. 효자(孝子) 택수 감소고우(敢昭告于) 현고학생부군(.顯考學生府君)…. 상향(尙響)” 80을 바라보는 오빠를 비롯하여 어느덧 형제들 머리 위에 흰 서리가 내렸고 막내 동생이 환갑을 눈 앞에 둘 만큼 덧없는 세월이 많이 흘러갔어도 그 옛날 칠흑 같은 자정의 정적을 가르며 경건하게 축문을 읽으셨던, 정종 빛깔처럼 맑았던 아버지의 음성이 어제 있었던 일인 양 귓전에 맴돈다. 아버지 8주기 제삿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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