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5] 창립 60주년 흔들리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연재-5] 창립 60주년 흔들리는 연변조선족자치주
  • 이종환 기자
  • 승인 2012.11.17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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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60주년이자 한중수교 20주년의 해다. 하지만 연변은 위기를 맞고 있다. 조선족 인구가 급속히 줄어간다. 인재들이 빠져나가고 있으며, 조선족이 빠진 자리에는 한족들이 들어오고 있다. 연변의 주도인 연길시에서는 매년 1천800쌍의 부부가 이혼하고 있다. 조선족 자녀의 탈선도 적지 않다. 자치주 해제 우려가 제기될 정도다. 월간중앙의 요청으로 9월 초 중국 연변 조선족 사회를 취재했다.<편집자주>

연변대 뒷동산에 어떻게 해서 그의 문학비 덩그마니 서있을까? <고향떠나 50년>이란 그의 자서전에는 도대체 어떤 내용들이 들어있을까? 이런 궁금함에 연변대 도서관의 문을 두드렸다. 조선문 서고는 따로 7층에 있었다. 서고에 들어 책을 찾는다고 하자, 조선족 동포인 주임선생이 친절하게 안내했다.

정판룡 선생의 자서전은 여러 판본으로 십여권이 비치돼 있었다. 480여페이지에 이르는 자서전에는 고향인 담양을 방문하는 1991년까지의 삶이 깨알 같은 글씨로 담겨있었다.

정판룡 박사는 1932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났다. 1937년 부모를 따라 중국 흑룡강성 상지현에 정착한 그는 1949년 제1기 입학생으로 연변대학에 입학한다.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를 졸업한 그는 1955년 모스크바대학으로 유학해 부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1960년부터 줄곧 연변대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연변대 부총장까지 지냈다.

▲ 연변대학 뒷동산의 정판룡문학비

그가 1기로 연변대학에 입학할 당시 교원은 모두 46명이고, 간부가 11명, 입학 학생수는 451명이라고 한다. 학생들한테 학비도 받지 않았다. 생활비만 스스로 부담하면 됐다. 학교 선생님들의 생활도 어려웠다. 경비부족으로 몇 달은 봉급도 주지 못했다고 한다. 정판룡은 졸업후 소련 유학생으로 선발되는 행운을 얻었다. 그리고 돌아오면서 선택의 기로에 선다.

“과학원 연구소로 가느냐 아니면 연변대학으로 다시 돌아가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과학원에 있는 나의 친구들은 자기가 배운 전공을 살리고 학술연구에서 큰 성과를 거두자면 산골대학으로 갈 것이 아니라 북경의 연구기관에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연변대학에서는 소련문학을 연구할 아무론 기초도 없다는 것이었다. 나의 안해 역시 로어를 전공한 사람이지만 연변대학에서는 그의 재능을 발휘할만한 학과조차 없었다. 사실 친구들의 이런 권고는 완전히 옳았다.”

그 뒤를 잇는 글이 바로 연변대학 뒷동산의 정판룡문학비에 나온 구절이었다. 그는 “북경에서 수천리 떨어진 초라하고 설비 없는 학교이기는 하지만 중국에 하나밖에 없는 우리 민족의 대학이 아닌가. 잘생겼던 못생겼던 우리 민족의 정성과 희망이 담겨진 학교, 우리말 우리글로 중국에 있는 우리 민족인재를 양성하는 유일한 대학 아닌가. 이렇게 생각한 나는 연변으로 떠났다”고 자서전에 적었다.

연변대학을 둘러보면서 조성일 선생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그는 “연변대학이 없으면, 연변이 없다”고 말했다. “연변은 조선족 문화의 저수지”라고도 했다. 민족 인재를 만들어내는 연변대학이 있고, 동포들이 모여사는 연변자치주가 있어서 중국내의 우리 조선족 동포들이 비록 몸은 도시로 나가 흩어져 있어도 전통문화를 알고, 지속적으로 수혈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민족인재 양성의 뜻을 가진 지사들의 땀과 의지가 배인 연변대학은 중국 현대사의 우여곡절과 궤적을 같이 해왔어요.1950년대 후반 민족정풍운동이 덮치면서 조선학생만 모집하고, 조선말로 강의하는 것이 폐지됐습니다. 한족을 중국사람이라고 부르던 관습도 바뀌어야 했습니다. 조국은 중국이고, 조선족 한족으로 나눠진 것입니다. 스스로도 조선사람이 아니라 조선족으로 불렀습니다. 이어진 문화대혁명도 민족자치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지요.”

▲ 연변조선족전통음식협회 회원들

김순옥 연변조선족전통음식협회 회장의 얘기다. 그는 부친이 연변대 1기생으로, 당시에 대한 많은 얘기를 들었다고 소개했다. 연변대에 따르면 연변대학은 지금 21개 단과대학에 71개과에 본과생 1만7천명, 석박사생 3500명, 해외에서 유학온 학생 600명이다. 졸업생은 10만명이다.1949년 개교와 동시에 문을 연 조문학부는 한중 수교와 더불어 조선-한국학학원으로 바뀌어, 연변대학에서 조망이 자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연변이 새로운 발전의 비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해외에서 돌아왔어요. 해외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을 돕고, 돌아오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창업정보도 제공합니다.” 연길시 외곽 발전촌의 연길귀국자협회창업협회에서 만난 김홍권 회장의 말이다. 그는 일본 동경에서 있다가 귀국했다.

이 협회 사무실 인근에도 일본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개업한 맥주 바가 있다. 동경에서 3년을 지냈다는 김현정씨가 일본 생활이 십여년인 또 다른 친구와 함께 개업해 공동경영하고 있다. 이들은 “수입으로는 일본생활보다 못하지만,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은 훨씬 크다”고 입을 모았다.

연변이 돈벌이 무대가 되는 것은 이들뿐만 아니다. 연변역 앞에 있는 대형극장 ‘환락궁’에서는 자치주 성립 60주년을 맞아 북한의 피바다가극단이 ‘천지의 노래’를 공연하고 있다. 연길두만강투자박람회에 참석한 인사들의 대거 관람한 이 공연은 입장료가 1인당 418위안. 우리 돈으로 7만 원 가량이다.

▲ 피바다가극단의 공연(천지의 노래 피날레)

이 공연을 유치한 환락궁극장의 전영익 총경리는 “피바다가극단에서 54명이 와서 8월28일 시공연을 했다”면서 “앞으로 몇 개월간 계속 공연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반부는 연변을 내용으로 하고, 후반부에는 북한 내용으로 바뀌더군요. 북한에서 대규모 공연단을 보내 중조친선을 노래하며 자치주 60년을 축하한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으로서는 돈 벌이도 되겠지요.”

이광석 북경 갤럭시호텔 사장의 말이다. 연변출신인 그는 환락궁의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김철 전 연길시예술단장도 소개하며, ‘연변이 돈을 벌 수 있는 곳으로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고 덧붙였다.

“연변 조선족 동포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오고 있어요. 연변이 발전합니다. 우리는 나가서 돈을 번 경험이 있습니다. 눈을 떴지요. 연변에 기회가 다시 옵니다. 성공률은 10배, 20배가 될 것입니다”

칭다오에서 온 남용해 회장은 피바다가극단의 ‘천지의 노래’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이렇게 말했다. 그는 “연변사람은 함북출신이 많다”면서 “한국 사람과는 악수를 하지만 북한사람과는 포옹을 한다”고 말했다. 그만큼 북한 사람들과 정서가 통한다는 것이다.

“연변 조선족 동포들이 남과 북이 할 수 없는 중간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북한이 열릴 때 남한을 대신해서 일을 해줄 수 있어요. 남한도 돕고 북한도 돕는 일이 됩니다. 앞으로 그런 기회가 많아질 것입니다.” 그는 “길림성의 대문이 동해로 열리면서, 북한의 문도 열리고, 연변동포들과 한국에 또 다른 기회의 문이 열리고 있다”고 역설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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