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유산] 우리 유산, 재발견(10)
[과학문화유산] 우리 유산, 재발견(10)
  • 이종호<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
  • 승인 2014.03.01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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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사유적지구(1) : 경주유산 입문(3)

불상의 나라, 신라

불교가 석가모니에 의해 탄생된 이후 거의 5백 년 간 무불상 시대로 있다가 간다라에서 불상이 처음으로 태어났다. 무불상 시대가 500년이나 이어진 것은 석가모니가 자신을 개인적으로 숭배하는 것을 금했기 때문이다.

간다라 지역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왕(Ashoka the Great, 기원전 304~기원전 232)때이다. 그는 호불왕이라고 불릴 만큼 불교의 포교에 전념했는데 그 일환으로 수많은 불탑을 세웠다.

그런데 간다라 지역에 알렉산더 대왕 때 이주했던 그리스인들이 계속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문화의 도입을 받아드리고 있었다. 불교가 대중적으로 보급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리스와 그레코로만 식의 건축이나 조각을 견지한 것이다.

이른바 ‘불교화된 간다라 예술’로 불교사원에서 코린트식 기둥머리 등이 등장하는 것은 물론 그리스인이 모델이 된 불상도 만들었다. 이때의 불상은 그리스 조각과 다를 바 없었다. 여하튼 일단 불상이 만들어지자 불교도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았는데 간다라에서 불교 예술이 다른 지역과는 달리 꽃피운 이유를 일본인 나가사와 가즈도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불상이 태어난 동기는 원천적으로 간다라에서 터전을 잡은 그리스인들의 생활 풍습 때문이다.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건설하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 그리스인들은 간다라 지방에 들어와서 불교와 접촉하자 신전과 조각이 없는 종교에 한없는 불만을 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인 조각가들은 새로운 종교를 위해 불상을 만들고 사원을 만드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최초의 불상은 완전한 의미의 붓다가 아니라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보리수 밑에 있는 것으로 보아 깨달음 직전에 있는) 보살을 나타낸 것이라고 설명된다. 불교에서 불상이 없던 시대 뒤에 곧바로 불상의 조성에 이르지 못하고 보살상의 조성이라는 과도적 단계를 거쳤으리라는 점을 시사한다.

초기의 조각가들은 붓다를 나타내는 상을 창안하는 것보다는 세속의 세계와 인연을 맺고 있는 보살을 상으로 표현하는 것이 여러 면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부담이 적었다는 설명으로 이해될 수 있다.

불상이라는 개념이 태어나자 통례적인 불상으로 변화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대체로 기원후 1세기 중엽에는 이미 통례적인 불상의 형식이 태어났다. 간다라에서 창안된 완전한 의미의 불상은 커다란 천을 몸에 감싸 두르고 아무런 장신구도 걸치지 않은 차림이다.

당시 간다라를 포함한 인도에서 유행하던 불교 승려의 복장에 기초한 것으로 커다란 천은 승려들이 입는 세 가지 옷(三衣) 가운데 가장 격식을 갖추어 입는 대의(大衣)를 나타낸 것이다. 반면에 머리는 승려들처럼 삭발하지 않고 긴 머리카락을 위로 올려서 상투를 틀었다.

이를 우슈나샤라고도 부르는데 붓다의 머리 모양이 이처럼 불교의 출가 수행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형상을 갖게 된 것은 인도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대인상(大人相, 뛰어난 인간의 신체적 특징)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불상으로 들어간다.

한국 초기불상이란 포괄적인 면에서 본다면 고구려불상에 대한 연구로 볼 수 있다. 고구려가 삼국의 어느 국가보다도 빨리 중국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지리적인 위치에 있었고 실제로 불교도 제일 먼저 도입했기 때문인데 이곳에서는 신라의 불상을 주로 설명한다.

 
불상이 중국에 전해진 것은 1세기경인데 중국 불상은 처음 인도 양식으로 조성되다가 점차 중국인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운강·용문·돈황 석굴의 초기 불상이 변화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신라에서 처음에는 중국 불상과 비슷한 모습으로 조성되어 얼굴이 갸름하고 몸이 날씬한 중국 남북조시대 불상의 모습으로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체형과 얼굴, 복식 등이 변화하고 불상도 다양하게 조성되는데 재료와 방법도 여러 가지를 사용했다.

삼국시대 불상은 대체로 동, 청동으로 만든 불상에 금을 입힌 금동불(金銅佛)로 부처의 광명을 상징하는 광배에 부처와 보살을 함께 모신 ‘일광삼존(一光三尊)’의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초창기의 불상은 좁은 공간에 모실 불⋅보살을 함께 조성했기 때문으로 남북조 시대의 불상을 차용했다.

 
그러나 이들 불상은 한국 지역에 맞는 불상으로 바뀌기 시작하는데 6세기 중반 신라보다 먼저 불교를 받아드린 백제 불상 양식이 신라에 전파되면서 점차 풍만한 모습으로 바뀐다. 불상의 머리의 모습은 꼬불꼬불한 머리카락(나발)보다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상투 모양(육계)이 훨씬 커지고 눈꺼풀이 두툼해지며 볼에 살이 붙으면서 입술 주변이 들어가 미소를 짓는 모습을 띤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면 육계가 작아지고 눈썹과 코를 잇는 선이 뚜렷해지며 입가에 미소가 점차 사라진다. 불상의 얼굴 또한 깊은 사색에 빠진 근엄한 얼굴로 변하는데 이는 신라 불교의 철학과 사상이 심오하게 발전해 가는 시대상의 반영이라 볼 수 있다.

복식의 변화도 옷의 두께와 주름에서 나타난다. 삼국시대 불상은 양 어깨에 가사를 걸치고(통견) 있어 옷 속의 신체를 표현하지 못했는데 통일신라 불상은 왼쪽 어깨에만 옷을 걸쳐 오른쪽 어깨가 드러나면서(우견편단), 젖가슴과 어깨의 윤곽이 선명하게 표현되었다.

우견편단의 표현은 이후 불상의 일반적 복식 양식으로 자리 잡는다. 옷 주름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므로 좌우대칭의 형태가 사라지며 옷 길이도 짧아져 연꽃무늬의 대좌에 놓인 발이 그대로 드러난다. 복식의 양식으로 옷 속의 신체까지 표현한 것은 인간적 부처의 모습을 그리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적인 부처를 표현하기 시작하자 불상의 유형도 다양해지므로 사찰 안의 건물이나 야외에 조각된 수많은 불상을 보면 혼동되기 십상이다. 수많은 불상이 모두 같은 모습처럼 보이는데다 구별하는 것이 어려우므로 불상만 보기만 해도 질린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이들 불상들은 나름대로 각기 교리적 배경을 갖고 있으며 이것을 불격(佛格) 또는 덕이라고 한다.

불상은 깨달은 사람 즉, 각자(覺者)로서의 격을 갖추고 있는 부처를 형상화시킨 것인데 한국의 대승 불교에서는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고, 또 어느 때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이므로 과거, 현재, 미래를 막론하고 수많은 부처가 존재한다. 따라서 석가모니불을 비롯하여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불, 미륵불 등과 53불 1천불상이 만들어진다. 

① 석가여래

석가불만 유일하게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다. 삼국시대는 대체로 석가불이 조성되었고 석가가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주는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 오른 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이면서 손가락을 위로 펴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보이는 손가짐)이 주류를 이룬다.

앉아 있는 좌상(坐像)인 경우에는 선정인(禪定印, 왼손 위에 오른손을 놓고 엄지를 맞대는 모양)의 수인을 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통일신라시대 이후에는 대부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오른 손을 무릎 아래 쪽으로 향하게 하는 모양) 자세를 취한다.

 
대웅전에 주불(主佛)로 봉안되며, 응진전, 나한전, 영산전, 팔상전 등에도 주불로 봉안되는 경우가 많다. 협시보살상은 문수(文殊) 보살상과 보현(普賢) 보살상이 좌우에 배치되거나 관음보살상과 허공장보살상, 또는 관음이나 미륵 보살상도 배치된다. 

대승 불교시대(1세기경 이후)에 다양한 부처가 예배되지만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불이 가장 숭앙 받았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석가모니 불상이 가장 많이 만들어졌다.

② 아미타불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는 석가불 외에 아미타불⋅비로자나불 등이 조성되는데 아미타불은 상상 속의 붓다로 우리가 죽은 뒤에 가는 극락(천당)을 관장한다. 불신자가 아니더라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란 말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아미타불과 관음보살이 한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보살이라 볼 수 있는데 아미타(阿彌陀, Amitabha)불은 영원한 수명(無量壽, Amitayus)과 무한한 광명(無量光, Amitabha)을 보장해 주는, 즉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영원한 부처라는 뜻으로 서방극락을 주재하면서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푼다.

말하자면, 어떤 중생이라도 착한 일을 하고 아미타불을 지극 정성으로 부르면 서방극락의 아름다운 정토로 가게 만드는 부처다. 아미타불은 신분의 고하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보다 평안한 삶과 안락한 정토세계를 보장해주는 부처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특히 하층민들에게는 구세주로 절대시되었다.

삼국통일시대부터 화엄종, 법상종 등의 인기 절정의 부처가 되었으므로 가장 많이 조형화되었다. 고려시대부터 이 불상이 봉안되는 불전을 무량수전, 극락전, 아미타전 등으로 불렀다.

아미타불의 형식적 특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수인이다. 보통 아미타정인과 9품인을 짓는 것이 원칙이며, 이러한 수인은 통일신라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해서 8세기중엽부터는 완전히 정착하게 된다.

좌우 협시보살은 관음, 세지보살이 가장 보편적이며 관음과 지장 또는 8대보살도 고려시대부터 나타나며 8대보살을 봉안하여 군상을 이루고 있는 예도 많이 등장한다. 8대보살은 관음, 세지(또는 허공장), 문수, 보현, 금강장, 제장애, 미륵과 지장보살 등이다.

황복사탑 순금아미타불상, 감산사 아미타석불, 굴불사 석주아미타불상, 불국사 금동아미타불상, 백률사의 소조 아미타불상과 중생사의 소조아미타불상 등이 현재 남아 있는 대표적인 걸작들이다. 일반적으로 아미타불은 석가모니불과 여러 면에서 형태가 유사하므로 구분하기 힘들지만 삼존일 경우에는 관음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로 하므로 구별이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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