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19] 노동군의 아픔을 딛고
[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19] 노동군의 아픔을 딛고
  • 월드코리안뉴스
  • 승인 2014.05.10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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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완전히 조국이 되어버린 소련에 대한 한인들의 시민으로서의 의무감과 충성심은 대단했다. 한인들은 이미 1918년~22년 내전시기에 반볼쉐비키파인 백위파에 대항한 한인 빨치산투쟁에서 그 진가를 보여준바 있다.

뿐만 아니라 비록 스탈린의 탄압으로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져 갔지만, 해군군관을 지냈던 최선학(파벨 페트로비치), 한인국제주의군 지휘관과 레닌그라드 국제주의 군관학교 한인학부장을 지냈던 오하묵, 제36호 자바이칼 보병사단 벨로레츠크 연대 보병사단을 지냈던 신홍균 등, 많은 수의 한인 젊은이들이 1937년 강제이주 이전까지 소비에트 붉은군대 중급 및 고급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그리고 2차세계대전 중에는 현역군인으로 참전하여 다시 한 번 한인 젊은이들의 군작전 및 군사지식에 있어서의 능력을 발휘했다. 소련영웅인 민 알렉산드르, 연해주 부제노프지구 가이다마크 출신으로 포병부대 지휘관이 되어 베를린까지 진격했던 황동욱, 연해주남부 포시에트지구의 지신허 마을출신으로 준위계급장을 달고 서남부 전선전투에 참가했던 한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우크라이나 해방전투에 참가했던 한인여성 이 발렌티나 니콜라예브나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한인들이 전투병으로 전선에 참가한 사례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전쟁에 참가한 한인 젊은이들의 대다수는 무기가 없는 노동군대(노동군)로 징집됐다.

노동군대에 동원된 한인들의 다수는 우즈벡공화국 파르하트 수력발전소, 타쉬켄트주 베고바트 금속공장, 기타 산업체 등지에서 노동을 했다. 반대로 중앙아시아의 한인들이 타지역에 일종의 노동군으로 동원되기도 했는데, 우즈벡공화국 카라칼팍스탄의 한인들이 그 한 예이다.

1942년 2월 13일자 소련방 최고회의 간부회는 생산 및 건설 노동을 위해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전시 기간동안 동원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이에 따라 카라칼팍스탄 한인들도 레닌그라드주와 페름주, 코미 자치주, 하타길 지역에 노동군으로 동원됐다.

노동군들은 교정노동수용소의 수형자와 다를 바 없었으며, 시민 및 노동법규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자유롭게 거주지와 일자리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박탈된 상태에 있었다.

소련방 법무 인민위원부(르이츠코프)와 소련방 검찰(브이츠코프), 소련방 인민위원회의(СНК) 산하(몰로토프) 노동력 등록 및 배정 위원회의는 동원된 노동군들에 대해서 철저히 감시할 것을 지시했으며, 이탈자들에 대해서는 강제노동에 쳐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사실상 동원된 노동군들의 이동의 자유는 전혀 불가능했다.

노동군 생활도 2차세계대전의 전쟁터 못지않게 참혹했다. 전선에 군수품을 공급해주기 위한 헌신적인 노동과는 동떨어졌고, 강제노동군대와 다름없는 그야말로 강제이주의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연해주 포스베토보 지구(Посветовский р.)의 크라스노예 셀로(Красное Село) 마을출신으로 강제이주의 희생자인 홍 발레리 니콜라예비치(Хон Валерий Николаевич, 1926년생, 현재 카라칼팍스탄 누쿠스시 거주) 또한 끔찍한 노동군 경험자이다. “노동군의 삶은 수형자의 삶과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가 근무하고 있는 주변에 범죄노동수형자들의 막사가 있었는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으며, 오히려 그들은 우리 노동군들을 불쌍한 시선으로 보았다. 노동군들의 삶은 최악이었다. 빈대투성이의 막사에서 살았으며, 밤에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온 몸이 빈대에 물린 상처투성이였다.

어느 날 부르다코프(С.Н.Бурдаков) 장군이 우리를 방문했는데, 우리들의 상처투성이 몸을 보고서는 경악을 금지 못했다. 부르다코프 장군은 책임자인 나사코프를 질책한 뒤에 막사 내에 소독할 것을 지시했다. 노동군들은 짐승처럼 모욕적인 생활을 당하고 살았으며, 가족들과 떨어져서 12시간씩 노동을 했으며, 겨울에는 숲을 개간하고 여름에는 부송시켰고, 우흐틴-페초라 수용소에 석탄을 수송하기도 했다.

‘멀건 야채스프’를 식사로 제공받았으며, 신 양배추 스프와 깻묵으로 구운 빵을 식사로 제공받았다.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겪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굶주린 채 누더기를 입고 다녔으며, 겨울에는 털신 대신에 삼으로 만든 짚신을 신고 살았다. 우리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노동군 생활은 강제이주보다도 더 끔찍했다. 1937년 당시 우리는 11살이었지만, 적어도 바로 옆에는 우리의 부모님들이 계시지 않았던가”라고 고통스런 시절을 회상해 내었다.

노동군 생활은 감옥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울타리 속에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감시 하에 있는 부대와 막사 내에서 살았다. 옷도 음식도 휴식도 없었다. 고향 식구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다. 봉급도 없었으며, 이따금씩 400그램의 빵을 배급받았다.

늘 배고픔에 몸서리쳐야 했으며, 특히 영하 40-50도의 겨울에는 극한의 어려움을 참아내야 했다. 모든 것이 최악이었다. 강제이주에 이은 중앙아시아 한인들의 두 번째의 고통스러웠던 경험인 노동군 생활은 이제 과거 속에 묻혀 버렸으며, 중앙아시아 한인들의 또 하나의 역사가 되어 버렸다.

2차대전 시기에 한인들의 강제적인 노동군대 복무에 관한 역사는 오랜 시간 묻혀져 왔다. 1942년 10월 14일 소련국가방위위원회(ГКО)는 ‘우즈벡공화국, 카자흐공화국, 키르기즈공화국, 투르크메니스탄공화국에서의 군복무의무자들의 산업체, 철도건설 및 기타산업체에서의 근무동원결의안’을 채택했다.

1943년 3월 7,765명의 한인젊은이들이 노동부대로 동원되어 특히 석탄산업지대로 보내졌고, 이중 5,135명이 모스크바 인근 툴라주 내의 탄전에서 노동을 했다. 또한 2,622명의 한인들이 카자흐공화국 내의 카라간다 탄광갱도에서 노동을 했다. 노동군으로 강제동원된 것은 한인들만이 아니었다. 우즈벡공화국과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공화국, 추바쉬, 모르도비아인들, 탄압받은 소비에트 독일인들과 폴란드인들, 서부 우크라이나인들, 백러시아인들, 발트해 연안국가 주민들을 대량으로 강제동원 됐다.

당시 툴라주의 탄전과 산업지대에는 한인들, 독일인, 핀란드인, 크르임 타타르인 등의 민족들이 노동군으로 동원되어 있었고, 이들의 근무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1945년 3월 중순경에 툴라 탄전지대에는 700명(쉐킨탄광-175명, 스쿠라토프탄광-406명, 예피판탄광-15명, 스트로이칸토르탄광-116명)의 한인들이 남아있었고, 이후 노동군인들의 가족들의 결합이 허락된 후에는 수가 증가되어 1945년 4월 경 툴라주에는 844명, 같은 해 중순경에는 1,027명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툴라탄전지대 외에 코미자치공화국 내에도 한인들이 노동군으로 근무를 했다. 코미자치공화국 노동교화수용소에 1,564명의 불가리아인 및 한인 노동군들이 있었고, 우흐틴스크 수용소의 노동대대에도 1500명의 한인 노동군들이 동원되어 있었다. 많은 한인 젊은이들이 탄광, 방위시설 건설장, 전략적인 군수물자를 생산해 내는 군수산업체 등지에서 허리가 휘도록 중노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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