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 및 불국사·석굴암(24)
[과학문화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 및 불국사·석굴암(24)
  • 이종호<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
  • 승인 2014.06.11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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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남산지구(서남산(1))

천관사를 지나 남산 남서쪽 비탈에서 만나는 첫 답사지는 박혁거세가 알로 태어난 곳인 나정이 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전한 지절원년(기원전 69) 신라 건국의 주역인 6촌의 촌장들이 모여, 군주를 선출하고 도읍을 정하자고 결정한 뒤 일행이 높은 곳에 올랐다. 그런데 양산(陽山) 아래 나정이라는 우물 근처에 이상한 기운이 돌며 백마 1마리가 무릎을 꿇고 있어, 가보니 백마는 하늘로 올라갔고 붉은색의 커다란 알만 남았는데, 이 알을 쪼개자 어린 사내아이가 나왔다.

이상히 여겨 동천(東川)에서 목욕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났고 새 ·짐승들이 춤추듯 노니니, 천지가 진동하며 해·달이 청명해졌다. 사람들은 이 아이가 세상을 밝게 한다 하여 혁거세라 이름하고, 알이 박같이 생겼다 하여 성을 박(朴)이라 하였다. 이날 사량리 알영정 곁에 계룡(鷄龍)이 나타나 왼쪽 겨드랑이에서 여자아이를 낳았다.

모습과 얼굴은 유달리 고왔는데 입술은 닭의 부리와 같았다. 월성 북천에 그 아이를 데리고 가 목욕시키자 부리가 떨어졌다. 그 때문에 그 개울을 발천(撥川)이라 부른다. 여자 아이는 그가 나온 우물 이름으로 이름을 지었다. 두 성인이 나이 13세가 되자 오봉 원년 갑자년인 기원전 57년에 남자는 왕이 되었고 그 여자로 왕후를 삼았다.’

이 건국설화는 경주 일원에 선주민 즉 여섯촌이 정착해 있던 상황에서 새로운 이주민 집단이 들어와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것으로 신라의 건국신화는 천신족과 지신족의 결합되어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알영족은 선주한 토착민으로 신족 관념을 포용하고 있다. 알영이 우물가에서 계룡(鷄龍)의 몸을 빌어 태어나고 있음이 이를 알려준다. 대체로 지신족 계통의 신인(神人)들은 강변·해변·우물·동굴 곁에서 탄생한다.

반면 박씨족은 유이민으로서 천신족 관념을 포용하고 있다. 하늘로부터 나정 곁에 이상한 기운이 내려와 혁거세를 탄생시켰고 그 징후로써 말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 현장이 나정으로 신라는 여기서부터 천 년, 정확히 말하자면 기원전 57년부터 서기 935년까지 993년간 존속했다.

이곳에는 박혁거세를 기리는 유허비를 비롯하여 신궁터로 추정되는 팔각건물지, 우물지, 담장지, 부속건물지, 배수로 등이 잘 남아 있지만 현재는 공터이다. 특히 팔각 건물지는 한 변의 길이가 8m나 되고 네모난 담장을 두른 것으로 보아 신라의 신궁터로 추정되어 학자들은 이곳 나정이 박혁거세를 제사지내는 신전으로 보기도 한다. 대궐은 나정 남쪽 언덕 위 현재의 창림사터에 세웠다.

나정 인근에 혁거세 이전에 서라벌 땅을 다스렸던 6부 촌장들을 제사 지내는 양산재가 있다. 신라가 박혁거세로부터 건립되기 전 진한 땅은 알천양산촌, 돌산고허촌, 취산진지촌, 무상대수촌, 금산라리촌, 명활산고야촌의 여섯촌이 나누어 다스렸는데 이들이 박혁거세를 신라의 첫 왕으로 추대했다.

이후 신라 제3대 유리왕이 6부촌장들의 신라건국 공로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6부의 이름을 고치고 각기 성을 내렸는데 양산촌은 이씨, 고허촌은 최씨, 대수촌은 손씨, 진지촌은 정씨, 가리촌은 배씨, 고야촌은 설씨로 이들이 각기 시조 성씨가 되었다.

인근에 남간사지 석정(지방문화재자료 제13호), 일성왕릉(사적 제173호), 남간사지 당간지주(보물 제1188호), 경주 배리윤을곡마애불좌상(拜里潤乙谷磨崖佛坐像, 지방유형문화재 제195호)이 있으므로 이들을 연계하여 방문한다.

남간사지 석정은 신라시대 우물로 길이 80cm, 너비 40cm이다. 화강석으로 틀을 짜고 그 위에 한 변의 길이 1.47m 되는 정사각형의 판석을 얹어 놓았으며 깊이는 약 1.4미터이다. 천연석재로 우물의 외벽을 짜 올리고 위쪽은 남북으로 합쳐지는 2매의 다음은 돌로 원형 틀을 덮어 마감했다, 우물틀의 지름은 88센티미터로 둘레에 상하 이중테를 둘렀다.

윗단은 직각이고 아랫단은 곡석으로 조각하여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맵시가 보인다. 이 우물은 분황사 석정, 재매정과 함께 신라 우물의 원래 모습을 잘 보여주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남간사지 석정은 일성왕릉으로 들어가는 좌측 마을에 있는데 잘 알려지지 않아 찾아가는 것이 만만치 않으므로 마을 사람들에게 문의하여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바란다.

석정에서 얼마 안 되는 논 안에 남간사지 당간지주(보물 909호)가 보인다. 남간사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는데 9세기 초에 이차돈을 추모하는 모임을 만든 일념이라는 스님이 머물던 곳이다. 남산 지역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당간지주로, 높이는 약 3.6미터이며 동서로 70센티미터의 간격을 두고 마주보고 있다.
당(幢)은 부처의 위엄을 표시하고, 중생을 지휘하며, 마군(魔軍)을 굴복시키기 위해 법당 앞에 세우는 장엄한 깃발 형태의 불구(佛具)를 말한다. 간(竿)은 깃대이다. 그러므로 당간지주라면 깃대를 붙들어 매는 기둥을 뜻한다.

사찰에서 큰 행사가 있으면 당간 위에 깃발을 달아 불자들이 절을 찾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일종의 이정표인데 대부분 지주만 볼 수 있는 것은 당간이 철로 만든 것이라 녹슬어 없어졌기 때문이다.

남간사지 당간지주는 아래 위에 둥근 구멍을 뚫었는데 남간사터 당간지주가 보물 지정을 받은 것은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 꼭대기에 파놓은 십자형의 고랑(竿溝) 때문으로 알려진다. 신라통일기아 고려시대, 조선조 초기 이후로는 쇠잔해져서 조선 중기 이후의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한편 법당 앞에 비슷한 것으로 규모가 작은 돌기둥이 있는데 이는 쾌불을 내걸어 모실 때 나무 장대를 세우던 석주로 성격이 전혀 다르다.

남간사터 당간지주를 지나면 장창골 골짜기를 만난다. 장창골에는 사적 173호인 일성왕릉이 있다. 일성왕은 신라 7대 왕인데 『삼국사기』에는 3대 유리왕의 맏아들, 『삼국유사』에는 유리왕의 조카 혹은 제6대 지마왕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왕은 농사짓는 땅을 늘리고 제방을 수리하여 농업을 권장하였으며 백성들이 금은주옥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왕릉의 봉분은 지름 15미터, 높이 5미터로 둘레의 돌이나 주위 환경으로 보아 내부 구조는 석실로 추정된다. 이 능은 조선 영조 이후에 알려졌는데 일부 학자들은 『삼국사기』에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을 근거로 경애왕릉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일성왕릉을 보고 내려오면서 비지정문화재인 높이 6.5m의 창림사터 삼층석탑과 주초석들을 만나게 된다. 창림사는 『삼국유사』에 신라6부의 대표자들이 혁거세와 그의 배우자인 알영을 데려다 기른 궁궐이 있던 곳으로 남산에 있는 백여 사찰터 중 이름이 밝혀진 몇 안 되는 절터 중 하나이다.

삼층석탑은 1824년 사리장엄구를 도굴하려던 자에 의해 파손되었는데 이때 조탑 사실이 기록된 창림사무구정탑원기가 나와 이 탑이 신라 문성왕 17년(855)에 만들어진 작품임이 밝혀졌다.

현재의 석탑은 오랜 세월 파손된 채로 흩어져 있다가 1976년 복원된 것이다. 불법을 수호하는 용 등 팔부신중이 매우 아름답게 새겨진 기단이 있고 남산 일대에 있는 60여 개의 탑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데도 불구하고 보물이나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했는데 이는 국보와 보물 등이 산재한 신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이곳에 신라 명필 김생이 쓴 사비(寺碑)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쌍두귀부만 남아있다. 거북 한 마리의 크기는 높이 38.5센티미터, 길이 142.5, 너비 86.3센티미터로 두 마리 모두 머리가 떨어졌는데 한 개는 경주국립박물관에 소장되었다.

무열왕릉 거북은 목을 길게 뽑아 들고 먼 앞을 내다보는 힘찬 기상인데 이 거북들은 얼굴을 높이 들어 뒤로 젖히고 입은 크게 벌려 둥근 구슬을 물고 있어 거북이 용의 모습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신라말기나 고려시대의 거북들은 모두 용의 얼굴로 나타난다.

거북들의 목에 뱀처럼 복린(腹鱗)이 새겨져 있는 것도 변해가는 모습이다. 원나라의 학자 조자앙이 창림사비의 글씨를 평한 글의 일부가 『신중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 글은 신라의 스님 김생이 쓴 창림사비인데 자획이 깊고 법도가 있어 비록 당나라의 이름 난 조각가라도 그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 옛말에 ‘어느 곳엔들 재주 있는 사람이 나지 않으랴’ 했는데 진실로 그렇다.’

창림사지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면 곧바로 경주포석정지(사적 제1호), 지마왕릉(사적 제221호), 배리삼존석불입상(보물 제63호), 사적 제222호인 경애왕릉(景哀王陵)이 연이어 등장한다. 경주 유산을 답사한다고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등산차비를 한 후 일일이 유적을 찾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면에서 접근이 쉽고 평상복으로도 볼 수 있는 곳이 추천되는데 이들 유적은 도로변에 포진해 있으므로 등산을 하지 않고도 답사하는데 적격이다. 설명의 편의를 위해 경애왕릉부터 설명한다.

경애왕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 바로 앞의 왕이다. 경애왕(景哀王)은 이름에 ‘애(哀)’가 들어 있을 정도로 소위 ‘슬픈’ 왕이다. 왕위에 앉아 있었던 시간은 불과 3년 밖에 되지 않는데도 좋지 못한 이름만은 역사에 유구하게 남겼다. 바로 포석정에서 견훤에게 사로잡힌 후 자결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인데 이 부분은 포석정에서 설명한다.

배리삼릉은 경애왕릉에서 북쪽을 응시하면 소나무 사이로 보인다. 삼릉은 8대 아달라왕(재위 154∼184년), 52대 신덕왕(912∼917), 53대 경명왕(917∼924)이 그 주인공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박씨다. 또한 삼릉과 포석정 사이의 6대 지마왕, 장창골에 있는 일성왕도 박씨다. 시조인 박혁거세도 이곳 나정에서 출생했다.

선도산 일대가 김춘추 일가의 산소였듯이 남산 서쪽 일원은 박씨들의 터전으로 볼 수 있다. 삼릉에 묻힌 아달라왕은 154년부터 184년까지 30년을 재위했는데 안내판은 아달라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아달라왕은 백제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자 친히 군사를 출동하여 전장에 나아갔다. 그러나 백제가 화친을 요청하자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왜에서는 사신을 보내왔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8m, 높이 5.4m, 지름 18m이다.’

아달라왕의 업적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계립령(鷄立嶺)과 죽령(竹嶺)을 개통했다는 점이다. 당대에 험준한 산맥을 뚫고 고갯길을 열었다는 것은 그만큼 나라의 경제적 군사적 힘이 막강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불국사, 석굴암, 다보탑, 석가탑, 안압지 등등 많이 대부분의 유명 경주 문화재들이 통일신라시대 작품이이지만 보물 63호인 ‘배리삼존석불 입상’은 7세기 전반의 ‘고신라’의 작품으로 경주에서도 희귀한 유산이다. 원래 높이 2.75미터의 본존여래입상과 오른쪽 협시보살입상은 같은 장소에, 왼쪽 협시보살입상은 조금 떨어진 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23년 현재와 같이 경주 남산 배리, 일명 선방골(禪房谷)에 수습·복원하여 놓은 것이다.

본존 여래상은 아미타여래로 추정하는데 여래의 둥글고 오동통하게 살찐 양 볼, 묵직한 코, 툭 불거져 올라온 눈, 입술 양끝을 쏙 들어가게 하여 만든 미소 등 전형적인 신라 불상의 얼굴인데 머리는 올록볼록한 나발(螺髮)과 민머리인 소발(素髮)이 중복되어 있는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어 이 부분을 사족(蛇足)이라 한다.

이런 방법으로 조각할 때 육계 밑에 붉은 색깔의 보석을 박는 예도 있지만 신라 불상으로서 사족을 나타낸 예는 극히 드문 예이다. 오른손은 다섯 손가락을 모두 펴 위로 향해 치켜든 시무외인(施無畏印), 왼손은 팔을 아래로 내려뜨리고 손바닥을 정면으로 향하도록 편 시여원인(施輿源印)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옷 무늬는 아래로 내려올수록 크게 조각되었는데 발은 그대로 드러나 있으며 광배는 불상과 한 돌로 세워져 있다. 기본적으로 중국에서 6세기 후반에 유행한 북제(北齊)·북주(北周)의 불상 양식을 닮았다.

왼쪽 협시보살은 2.3미터 높이로 이중의 연화대좌 위에 서 있는데 삼존 가운데 가장 조각이 섬세하다. 턱은 애기처럼 작아서 오른쪽 보살상과 대조를 이룬다. 머리는 삼면두식으로 장엄되었는데 정면에 큰 연꽃이 새겨져 있다.

목에서 다리까지 드리운 구슬목걸이와 꽃송이로 장식된 굵은 목걸이를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있는데 이런 장식은 6세기말 내지 7세기 초 중국 수나라 시대 보살상에서 유행되던 장식이다.

얼굴 모습은 본존과 마찬가지로 부드럽고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으며 왼손은 어깨까지 쳐들고 정병을 쥐고 있는데 대세지보살로 추정한다. 광배에는 작은 부처 다섯을 새겨 놓았는데 그 부처들도 또한 작은 광배를 가지고 있어 특이하다.

오른쪽 보살상도 왼쪽 보살과 마찬가지로 2.3미터로 삼존불 가운데 가장 수법이 떨어지는데 관음보살로 추정한다. 연화대석은 사라졌고 대신 네모난 바위 위에 서있다. 보름달 같은 둥근 얼굴에 눈, 코, 상현달 같은 입도 모두 자그마하게 나타나 있다. 목에는 세 개의 영락이 달린 목걸이를 걸었고 가슴에는 승기지(僧祇支)가 비스듬히 가려져 있다. 오른손은 손가락을 구부려 가슴에 얹고 왼손은 허리 부분에 대고 있다.

배리 삼존석불은 당시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만들어진 대형 석불로는 가장 시대가 빠른 것으로 이후 경주에서 크게 유행한 석불의 첫 장을 열었다는데 커다란 의미가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들 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각을 설치하여 조도가 떨어지면서 불상의 원래 조형미가 상당히 사라졌는데 본래의 아름다움을 찾는 다른 방법은 없는지 궁금하다.

삼릉 옆으로는 남산 남쪽으로 오르는 대표적 삼릉골 등산로가 나 있는데 이곳에서 상선암, 바둑바위, 금오산을 거쳐 각지로 방향을 잡을 수 있고 이 역으로도 가능하다. 사시사철 시원한 계곡물과 바람이 끊이지 않는다 하여 냉골이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 골짜기에 ‘삼릉계 석불좌상(보물 666호)’을 비롯, 수많은 불상들이 포진해 있어 남산 필수 답사지로 각광받고 있지만 등산을 해야 볼 수 있다. 필자는 여러 번 삼릉계곡을 통해 오르거나 내려오는 답사로를 택했는데 이곳에서는 용장골에서 올라 삼릉골로 내려오는 길을 기본 일정을 잡으므로 ‘서남산(2)’을 설명할 때 함께 다룬다.

배리삼존석불입상을 지나면 곧바로 포석정과 사적 제221호인 6대 지마왕릉(112∼134)이 있다. 지마왕릉은 밑둘레 38m, 높이 3.4m의 아담한 모습이다. 무덤은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일단 높은 곳에 만들고, 외부 모습은 흙으로 덮은 원형봉토분으로 겉으로는 아무 표식물이 없는 단순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능 앞에 놓여 있는 잘 다듬은 돌은 최근에 설치한 것으로 영혼이 나와 놀게 하기 위하여 설치한다는 혼유석(魂遊石, 석상)이다. 이 무덤은 남산 서북쪽에 분포하는 무덤 가운데 가장 특징이 없고,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경주 평지에 있는 고분과는 다른 입지조건이다.

안내판은 지마왕이 ‘파사왕의 아들로 태어나 23년간 재위하면서 가야, 왜구, 말갈의 침입을 막아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말은 지마왕 시대가 전쟁의 세월이었음을 알려주지만 2세기경에 속하는 무덤으로는 볼 수 없어 지마왕릉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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